십시일반
이재영
“므앙아, 왜 그렇게 시무룩해 있니?”
놀이터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므앙이에게 왕구가 다가오며 물었어요.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므앙이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날이 별로 없어요.
“말 시키지 마. 나 지금 고민 중이야.”
“고민? 무슨 일인데? 내가 해결해 줄게. 내가 긍정 대왕이잖아!”
“정말이야? 그러면 꼭 해결해 줘야 해!”
“그래, 알았어. 자세히 말해 봐.”
왕구가 다정한 목소리로 므앙이를 안심시켰어요.
“내 친구 할아버지가 넘어져서 입원하셨대. 집에 놀러 가면 귀엽다고 내 머리도 쓰다듬어 주신 분이야.”
“그랬니? 그렇다고 네가 어른스럽게 남의 할아버지 병문안을 가려고?”
“그게 아니야. 내 친구가 얼마나 슬프고, 걱정되겠어? 그래서 내가 함께 병원에 가 주려는 거지.”
“아, 네 친구를 위로하러 함께 문병 간다고? 친구 마음도 헤아려주고, 므앙이 너 정말 기특하구나. 그런데, 뭘 가져갈까, 고민하니?”
“아니. 마실 비타민 음료수 사 가려는데, 작은 것도 한 박스에 1만 원이야. 나한테 3천 원밖에 없는데.”
“그래서 고민 중이구나. 그럼, 모자라는 7천 원은 부모님께 달라고 하면 안 될까?”
“설령 엄마가 준대도, 다음에 줄 내 용돈에서 제하자고 할 게 분명해. 그럼 난 용돈도 없이 어떻게 지내?”
므앙이가 울상을 지었어요.
“그러네. 조금씩 제해도 몇 달은 가겠는데. 어쩌면 좋지? 음, 너희 동네에 네 또래가 전부 몇 명이나 되는데?”
“음... 나까지 여덟 명이야. 왜?”
므앙이가 손가락을 꼽아보고 대답했어요.
“그럼 그 친구 빼고 일곱 명. 한 명이 1천5백 원씩 내면, 1만 원 하고도 5백 원 남네! 그게 십시일반이야. 밥 열 숟가락 모으면 밥 한 그릇 된다는 말이지. 친구들한테 돈 나눠 모아서 함께 병문안 가자고 말해봐.”
“아, 애들하고 함께? 그런데, 전부 찬성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좋아라 하던 므앙이가 금세 도리질했어요.
자기는 친하지만, 다른 애들이 그 친구와 전부 다 친하지는 않아서예요.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므앙이 너, 품앗이라고 들어봤니?”
“품앗이? 그게 뭔데?”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고 하는 거야.”
“품? 품이 뭔데?”
“품은 어떤 일에 드는 힘이나 수고야. 너, 모내기는 알지?”
“응. 논에서 벼 새싹인 모를 심는 거 말이지?”
“맞아. 봄에 못자리에 볍씨를 뿌려서 새싹을 틔우고, 자라면 너른 논으로 옮겨 심는 게 모내기야.”
“그런데, 갑자기 모내기는 왜?”
“응. 논에 모를 심을 때, 양쪽 논두렁에 말뚝을 박고 긴 못줄을 쳐. 그리고 모를 한 움큼 쥐고, 맨발로 물이 고인 논에 들어가. 손으로 모를 두세 포기씩 뜯어서, 질퍽한 논바닥에 꽂아 심는 거야.”
왕구가 모내기를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설명했어요.
“그냥 심지, 귀찮게 못줄은 왜 쳐?”
“못줄에 새긴 눈금에 맞춰 심으면 모 간격이 일정하고 줄도 똑바르니까. 그래야 나중에 벼 사이로 다니면서 농약치고, 낫으로 베기도 편하지 않겠니?”
“못줄 말뚝 잡고, 들어가 모 심어야 하고, 사람이 아주 많아야겠네?”
“그렇지. 넓은 논에 모내기하려면, 가족 두어 명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지금은 모를 기계로 심지 않아? 두어 명으로도 되지 않나?”
므앙이가 티브이에서 본 모내기 장면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지금은 그렇지만, 예전에는 논바닥을 가는 것도 기계 대신, 소 등에 멍에를 씌워 쟁기를 매고, 사람이 직접 소를 몰아 갈았어. 그러니, 일손이 무척 많이 들었겠지?”
아는 것 많은 왕구가 옛날의 논바닥 고르는 방법도 설명했어요.
“그래서 힘든 모내기를 여럿이 모여서 함께 했다는 말이지?”
“그래 맞아. 금세 알아듣네. 므앙이 너 똑똑하구나. 하하.”
왕구가 귀여워서 므앙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어요.
“함부로 건들지 마!”
므앙이가 몸을 뒤로 빼며 입이 뾰로통해졌어요.
“야, 내가 네 고민 해결해 준다는데. 싫어?”
무안해진 왕구가 입을 실룩였어요.
“아니야, 네 손이 깨끗한지 모르니까 그러지.”
“음, 그래. 음, 흠. 그런데,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왕구가 눈을 끔벅거렸어요.
“힘든 모내기를 여럿이 모여서 함께 했다며?”
“아, 그렇지. 어떤 사람 논에서 여럿이 거들어 함께 모내기하고, 다음날은 다른 사람 논에 가서 하는 거지. 그렇게 돌아가며 모내기하는 게 바로 품앗이야.”
“알았어! 근데, 우리 친구들은 모내기할 논이 없는데?”
므앙이가 혀를 삐죽 내밀며 생긋 웃었어요.
“이런, 녀석! 모내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품앗이하듯이 서로 도우며 살면 된다는 말이야.”
“아, 이번에 함께 돈 내는 친구 중에 혹시 나중에 가족이 입원하면, 또 모아서 병문안 가면 된다는 말이구나!”
“그래, 바로 그런 뜻이야. 남에게 도움을 주며 베풀다 보면, 언젠가 나도 어려울 때,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 하하.”
제 말뜻을 므앙이가 제대로 알아듣자, 왕구가 기분 좋아서 함빡 웃었어요.
“그런데, 왕구야. 돈을 모아서 도와주는 건, 힘써 몸으로 때우는 품앗이와 다르지 않아?”
므앙이가 똘똘한 눈망울을 깜박거렸어요.
“그렇지. 결혼식이나 장례식 치르려면 힘보다 돈이 더 필요하지. 그런 때를 대비해서 예전부터 잘 아는 사람들끼리 조금씩 돈을 모았어. 그걸 ‘계’라고 하는데, 혹시 들어 봤니?”
“응. 전에 엄마가 외삼촌한테 무슨 곗돈 보낸다고 했던 것 같아.”
“그렇지. 친척끼리 오랫동안 곗돈 모아서 목돈이 마련되면, 어디 좋은데 함께 여행도 가고, 무슨 잔치를 벌이기도 하지.”
“응, 맞아. 외할머니 팔순 잔치 준비한다는 것 같았어.”
므앙이가 기억나는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랬구나. 외할머니가 이제 여든 살 되시는구나! 그러면, 이제부터 다른 준비도 해야 하는데?”
“다른 준비? 무슨?”
“음... 노인이 되면, 그 할아버지처럼 낙상도 하지만, 치매는 거의 다 걸린다고 보는 게 옳거든. 그래서 치매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는 게 팔순 잔치보다 더 중요해.”
왕구가 뭔가 어려운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아요.
“우리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릴 거라고? 치매 걸리면, 내가 누군지도 몰라보는 거 맞지?”
므앙이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어요.
“그렇지. 최근에 있었던 일부터 점점 기억 못 하게 된대.”
“그러면, 외삼촌과 외숙모는 직장에 나가는데, 누가 할머니 돌봐줘?”
“응. 그리되면 네 외삼촌이 자기 어머니를 더는 집에 모실 수가 없겠지.”
왕구가 머리를 가로저었어요.
“아들인 외삼촌이 할머니 못 모시면, 어떡해? 딸인 우리 엄마가 모셔와서 돌보라고?”
너무 놀란 므앙이 눈이 동그랗게 변했어요.
“네 엄마가 직장엔 안 다녀도, 너 키우고 집안일 하기도 벅찬데, 병든 할머니를 돌볼 수는 없지 않겠니?”
“그러니까! 어쩌면 좋으냐고?”
므앙이가 대어들 듯이 따졌어요.
“그리되면, 할머니를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에 모셔야 하는 거야.”
“요양시설? 그런데 들어가면 돈이 많이 들지 않아? 내 친구들 용돈 모아서는 어림도 없을 건데?”
므앙이가 애가 타서 어쩔 줄 몰라 해요.
“그럼. 어림 반 푼도 없지! 세 끼 식사에 잠재워주고, 아픈지 진찰하고 치료도 해주는데, 한 달에 하숙비보다는 더 많이 받지 않겠니?”
“그럼 어떡해? 우리 아빠도 돈 많이 없는데. 복권이라도 사야 해?”
“복권 당첨이 쉬운 줄 아냐? 1등 될 확률은 814만분의 1이야.”
“그러면, 뭐 어쩌라고?”
므앙이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어요.
“그래서 보험이라는 게 있는 거야. 계랑 비슷하지만, 대상이 달라. 보험회사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신청한 사람으로부터 매달 일정한 보험료를 받아서 비축하는 거지. 그랬다가, 그 가입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목돈인 보험금을 지급해주는 거야. 상해보험, 화재보험은 들어봤지?”
“다른 가입자도 큰일이 많이 생기면 보험회사 돈이 모자라지 않을까?”
“사고가 일어날 확률을 따져서 보험료를 정하니까, 아무 염려 마.”
왕구가 계와는 전혀 다른, 보험에 대해서 친절히 설명했어요.
“그럼, 우리 할머니도 그런 보험에 가입하면 되는 거야?”
므앙이 얼굴이 금세 환해졌어요.
“물론이지.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인 요양원에 오래 입원할 경우를 대비해서 드는, 실손보험이라는 게 있어.”
“실손보험? 그거 들려면 어떻게 하면 돼?”
“요양병원에 입원할 때와 요양원에 입원하는 경우, 금액 차이가 크고 장단점도 서로 많이 달라.”
“그래?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고?”
므앙이가 도로 심각한 얼굴이 됐어요.
“그러니까, 네 엄마한테 말씀드려서 자세히 알아보시라고 해.”
“엄마한테 치매 입원 실손보험이라고 말하면 돼?”
“그래. 우리 므앙이가 기억력이 좋구나. 하하.”
“왕구 네가 설명을 잘해줘서 내가 쉽게 기억한 거잖아. 히히.”
“어쭈! 겸손하기까지 하네?”
“네가 나한테 도움 줘서 베풀었으니까, 혹시 다음에 왕구 너한테 힘든 일 생기면 내가 도와줄게.”
칭찬받은 므앙이가 기분이 좋아서 실실거려요.
“그래, 므앙아. 내가 너한테 보답받으려고 도운 건 아니지만, 네가 그리 생각해주니, 정말 고맙구나. 너는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래. 내가 좀 엉뚱한 데가 있긴 한데, 네가 잘 이해해주고 친구처럼 대해주니까, 나도 그 고마움 잊지 않고 오래오래 간직할게.”
감격한 므앙이가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므앙아, 내 손 깨끗한데, 네 머리 좀 만져봐도 되겠니?”
왕구가 주저주저하며 손을 올렸어요.
“그래, 좋아. 인심 한번 썼다. 만져봐!”
므앙이가 눈을 옆으로 살짝 흘기며 재롱을 부렸어요.
“너는 조금만 칭찬해주면 으스대고 까불지? 약으로 한 대 맞아야 해!”
왕구가 므앙이 이마에 알밤을 한 대 먹였어요.
“아야, 왜 때려! 전부 무효야! 나 너 안 도와줄 거야!”
“그래? 실손보험 관련한 요양병원과 요양원 차이점, 장단점은 내가 지금이라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데? 잘못 가입했다간 엄청난 손해를 볼지도 모르는데?”
“엄마가 잘 알아보고 하겠지, 뭐!”
“그러셔? 야, 요양병원은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만, 요양원은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적용돼! 그뿐인 줄 아니? 더 깊이 들어가면...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흥.”
“정말? 그럼 내 말 취소할게. 더 자세히 가르쳐 줘. 응?”
놀란 므앙이가 할 수 없이 머리를 왕구 앞에 들이밀었어요.
“어? 나도 치매 걸리나 봐,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왕구가 이마를 짚으며 므앙이 약을 올렸어요.
“뭐? 빨리 기억해봐! 빨리!”
“혹시, 비타민 음료수 한 병 마시면 기억이 돌아오려나?”
“뭐야? 이런 순 엉터리 긍정 대왕 같으니라고!”
므앙이가 주먹으로 왕구의 가슴팍을 자꾸자꾸 때렸어요.
그래도 아프지는 않은지, 왕구가 웃으며 므앙이 이마를 살며시 어루만졌었어요.
(2022년 9월, 모 창작동화 공모전에 낙선된 작품입니다. 역시 동화는 어렵네요.)
첫댓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
동화도 동시도 모두 어려운 장르죠.
네, 개동 발행인님. 맞는 말씀입니다.
세태에 닳은 노인네 감정으로 동화나 동시 쓰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십시일반, 품앗이, 계, 보험 등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진리를 차분하게 이끌고 있군요.
교훈적 동화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네, 현광 윤성식 회장님. 공감의 말씀 감사합니다.
다른 상금 2천만 원 "영어덜트 소설상" 소개하겠습니다.
@심삼일 앗! 감사합니다. 이런 공모가 있었군요.
문봄 전체 가족에게도 홍보할게요..
정보 감사합니다~^^
@玄光/윤성식 네,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0^
친구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므왕이가 기특하고
왕구가
너무 어른 같아요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네, 서림 유성자 님.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
공모전 내용을 보니 5ㅡ7세 대상이라고 되어있는데 ㆍ모내기 품 보험 등등 ㅡ소재가 좀 이상합니다ㆍ
네, 그렇군요. 역시 그래서 낙선됐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