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자유연애 바람에 희생양이 된 세 여성문인
그것은 질풍노도였다. 젊은이의 마음을 들뜨게 한 거센 바람이었고, 젊은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거센 파도였다. 그것이 바로 1920년대 전후로 불어 닥친 이른바 자유연애의 바람이요 파도였다. 신식 공부를 한 신여성들에겐 자유의 이상이었고 꿈이었다.
이런 바람, 이런 파도가 개화기 때만 해도 실바람처럼 솔솔 잔잔하게 일기 시작했다.그러다가 20년대에 들어와선 신여성 즉 모던 걸(Modern girl)들이 머리채를 과감히 짜르고 다녔기에 모단걸(毛斷걸)이라 불려졌던 여성들이 거리를 여봐란듯이 활보한 시절에는 가히 광풍을 만난듯 했다.연애는 젊은이의 특권이요 자유의 구가였다. 그런 관심은 곧 시인 노자영이 1923년도에 남녀 연애서간을 모아 펴낸 <사랑의 불꽃>이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청춘남녀들이 주고 받는 서간문집이 일시에 수천부가 팔려나간 것이다.
결국 이런 바람의 유입은 남의 나라로부터 였다. 입센의 <인형의 집>을 통해서는 남편과 자식을 과감히 버리고 집을 뛰쳐나간 노라의 여성해방 선언을 보았다. 여기에다 스웨덴의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여사(1849~1926)가 낸 <연애와 결혼>이란 책을 통해서는 영육일치의 연애론과 일치가 없다면 이혼도 가능하다는 자유이혼론도 알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는 두 사람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 여성해방운동의 여성 선구자로 통했던 히라츠카 라이쵸(平塚雷鳥,1886~1971)가 1911년에 창간한 <세이토(靑踏)>란 일본 최초 여성지를 통해서는 여성해방이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했고 또 다이쇼 시대의 영문학자요 문학평론가인 구리야가와 하쿠손(廚川白村,1880~1923)이 펴낸 <근대의 연애관>(1922)이란 책을 통해서는 연애 없는 결혼은 무의미하다는 연애지상주의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색깔은 조금 차이가 나지만 러시아 출신의 사회주의 여성 정치가요 여성운동가인 알렉산더 콜론타이(1872~1952)의 소설 <붉은 연애>를 통해서는 남녀가 서로 마음이 맞으면 연애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헤어질 수 있다는 동지애적 연애관도 소개되었다.여기에다 이광수의 <무정>이 신문 연재가 끝난 그 다음 해인 1918년에 단행본으로 나와 청춘남녀의 심금을 울리면서 자유연애의 숭고성을 한껏 세뇌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기라도 하듯 세 여성문인이 우리 문단에 얼굴을 내민다.화가요 소설가이며 수필가인 정월 나혜석(1896~1948),시인이요 수필가인 일엽 김원주(1896~1971),시인이요 소설가인 탄실 김명순(1896~1951)이다. 여성문인이 밥에 뉘처럼 귀한 시절에 이들이 나타났으니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운명인 것처럼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나이가 꼭 같으며 동경유학파요 또 불행했거나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나혜석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두 사람은 불행한 결혼이거나 불행한 출신 성분이었다.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들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자유연애 바람이었다.올바른 자유연애가 아니라 가히 고삐 풀린 자유연애였다.바람직한 자유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것을 무시하다 보니 탈선이었다.
그럼 나혜석부터 알아본다.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하교 유학시절에 같은 유학생인 이광수를 만나 연애를 한다.서로가 결혼을 원하긴 했지만 이광수의 친구이기도 한 오빠 나경석이 반대해 무산되고 만다. 고향에 이미 부인이 있는데다 뒤에 부인이 된 허영숙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었다.그 다음 게이오 의숙 학생인 최승구와 연애를 하고 약혼까지 한다.최승구는 일찍 결혼을 해 국내에 아내가 있는 몸인데 불행하게도 약혼한 그 해(1916)에 병사하고 만다. 그 다음 서울로 돌아온 지 2년후인 1920년에는 김우영과 결혼한다.오빠의 소개로 알게 된 김우영은 10살 위였고 3년전 아내와 사별한 독신이었다.3.1만세운동에 참가해서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가 변호를 맡아주어 더욱 가까워진 사연이 있다. 그 후 결혼 생활 6,7년간은 조용했으나 또 일이 생긴다.1927년도 파리에 머물고 있을 무렵에 외교관 최린을 만나 염문을 뿌린다. 결국 이 일로 이혼을 당한다. 그는 이제 고립무원이다. 최린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또 전 남편 김우영에게서 불행하게도 죽어갈 때까지 철저히 버림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다음 김일엽의 경우는 세 여성들 중 남성편력이 가장 화려하다.첫 출발이 어느 재산가 청년과의 파혼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결혼을 한다.1918년도다.미국 유학파로서 연희전문 교수로 있던 40세의 이노익과의 결혼이다. 외할머니에 얹혀 살다 보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서둘러 한 결혼이다 보니 행복할 리 없다.더욱이 다리가 하나 없는 불구자에다 이혼남인데다 나이차가 22살이나 나니 쉽게 짐작은 갈 것이다. 그러던 중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유학을 간다.거기서 때를 만난 듯 시인 노월 임장화를 만난다.둘다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는 몸이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이혼을 당한다.그리고 또 1921년에는 일본 청년 오오타 세이조를 만나 사귀던 중 임신하여 아희가 태어난다.귀국 후는 더욱 고삐 풀린 암말이었다. 일본에서 사귄 임장화와 동거를 다시 시작하다 본처와 자녀가 찾아와 난리를 피우는 통에 결별한다.방인근과 사귀어 스캔들을 일으켰고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국기열을 만나 동거하다 헤어진다. 곧 이광수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이광수가 아내가 있는 몸이라 지속적인 사랑을 거절한다.그 다음 1926년 경에 철학자이며 불교학자인 백성욱을 만나 동거하다 7~8개월 만에 헤어진다.그는 승려의 길을 택했다. 마지막이 1929년에는 이름난 강사로 평판이 있던 대처승 하윤실과의 결혼이었다. 드디어 그의 수필집 제목처럼 '청춘을 불사르고' 1933년에 업보를 속죄하기라도 하듯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가 되어 일체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수도 정진했다.
소설가 김명순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이다. 1917년에 평양의 부호 화백인 김우방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을 다닌 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소녀였던 그는 경성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1919년에는 역시 동거남의 도움으로 동경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사단이 벌어졌다. 여러 유학생들과 자유롭고 거침없는 연애를 한다.화가인 김찬영과 또 그와 결별한 후 그의 친구 임장화와 연애를 한다.국내에 돌아와서도 숱한 염문을 뿌렸다. 그의 무절제한 생활을 보다 못해 동료문인으로서 평론가 김기진이 1924년에 발표한 글 즉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이 바로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는 좋은 자료다.아니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두 작가의 소설 모델이 되었다. 김동인이 1940년도에 발표한 <김연실전>의 모델인데 동인은 그의 삶을 조롱조로 희화화시켰다. 그리고 전영택은 1955년에 <김탄실과 그 아들>이란 소설을 써기도 했다. 사실 조선 땅에서는 그를 반겨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안 그는 1939년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얼마 후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셋방에서 살았고, 종국에는 누군가가 행려병자로 신고해 도쿄 도의 아오야마 뇌병원에 수용되어 생활하던 중 1951년에 병사했다.그러고 보면 김동인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 나왔고, 전영택의 작품은 사후에 나온 셈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신문학 초창기 세 여성문인이 자유연애란 것을 잘못 받아드려 인생이 파탄 난 자초지종이다. 좋게 말해 아니 동정적으로 보아 그들은 신여성으로서 자유연애의 파고에 휘말려 좌초된 희생양이다.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에서 좀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면 결코 그들이 자초한 불행한 인생은 되지 않았으리라 본다. 자유연애를 구가했다고 해서 여성해방론자나 선각자라고 칭하고 있는 근년의 그들에 대한 평가가 극히 낯간지럽다.진정한 자유연애란 뜻 맞는 남녀가 서로 만나 사귀다 뜻이 맞으면 결혼하는 것이 궁극의 이상이 아닌가. 여왕벌처럼 이 남자 저 남자를 거느리고 산다든지 아니면 이 남자품에 저 남자품에 안기는 것이 자유연애의 본질은 아니다. 남자도 '바람돌이'가 있듯 이 세 여인들도 결국은 '바람순이'란 딱지는 지울 수 없으리라 본다.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라고 설파한 이광수의 책임도 조금은 있다.그는 한때 나혜석과 김일엽의 연인이었고,김명순의 후원자이기도 한데,특히 나혜석과 김일엽이 자유연애로 지탄을 받을 때 옹호해준 책임도 있다.그들에 비하면 나이도 4살 위에다 사회 지도층 인사로서 이성적 행동을 하도록 붙잡아 주는 역할을 했어야 마땅했다.아무튼 그들이 연출한 사랑은 이른바 '연애유희론'에 가깝다.죽을 줄도 모르고 불속에 날아드는 불나비요 불새였다.
나는 여기서 일본 여성해방운동의 상징인 히라츠카 라이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자신의 습작 소설을 높이 평가해준 25세의 유부남 모리타 쇼헤이와 사랑에 빠져 그의 권유로 마치 연극처럼 동반자살을 시도했는데 결국은 실패한 촌극으로 끝났다. 그후 약 10여년 후 5살 연하의 젊은 화가를 만나 1남1여를 두고 꾸준히 평생을 여성해방운동에 헌신한 그에 비하면, 우리 문단의 세 여성은 처음은 일본 유학시절에 신여성이나 여성해방운동을 롤 모델로 삼긴 했지만 너무 불행하다. 이성적 판단으로 남자를 선택하고 이성적 판단으로 결혼을 하여 평생을 글로써 강연으로서 여성해방운동을 펼쳤다면 명실상부한 선각자로 존경을 받고 있을 것이다. 다 팔자가 거센 팔자소관이 아닌가 싶다.
첫댓글 교수님 작품 속의 세 여류 문인의 애정 행각에 대해 같은 여성으로서 어떤 잣대를 댈 수는 없지만 비록 수십 년 전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자뭇 큽니다. 특히 성개방화가 만연된 요즘, 아직도 여성의 혼전 순결을 세딸들에게 강요하는 제가 참으로 고지식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여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찌보면 그게 올바른 사고였다는 생각도 없잖아 있군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원칙을 지키고 본연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인 우리들이 할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대한 자료와 교수님 특유의 훌륭한 필력이 돋보이는 한국문단 80년 사 다음 내용을 손꼽아 기대해 보렵니다.
하정 수필가님, 참 오랜 만이네요. 그곳 싸이트 회원들에게 문단 교양물로서 부담없이 한 편 한 편 소개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답니다. 요사이 본인은 네 곳에 연재를 맡아 원고를 쓰느라 제법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답니다. 세 곳이 테마수필이고 한곳은 우리 대표시에 대한 평설이랍니다. 우리 모두 힘이 있는한 열심히 노력해 보아야겠지요 ^*^
교수님의 자유연애에 대한 작품 잘 읽었습니다. 나혜석님과 김일엽님의 이야기를 어렴풋하게 들었는데 소설가 김명순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듣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인 문인들의 새로운 지식을 알게된 점 고맙습니다.
스승님! 변함없으신 문학에 대한 열정을 저역시 본받아야 겠습니다.
자주 오셔서 저희 하정 문학 카페를 빛내 주세요. 건강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