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과 만난 도보성지순례!!!
홍 성 호 (돈보스코)
군산둔율동천주교회
지난 6월 19일 저희 공동체에서는 본당설립 80주년을 기념하는 “전신자 도보성지순례”가 있었습니다.
도보성지순례는 총 4개의 코스로 제1코스는 둔율동 성당에서 둔율동 성당의 모본당인 나바위성당까지 약 40키로미터, 제2코스는 여산성당에서 여산 숲정이 성지를 경유하여 나바위성당까지 약 15키로미터, 제3코스는 여산 숲정이 성지부터 천호성지까지 약 10키로미터, 제4코스는 전주호남제일문에서 초남이성지까지 약 7키로미터를 신자 각개인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여 시행하기로 하고 오후3시까지 나바위성지로 집결하여 주일미사를 봉헌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증조부모, 조부모님께서 부활미사를 첨례하기 위하여 나바위 성당까지 걸으셨다던 1코스(본당에서 나바위성당까지 약 40키로미터)를 선택하였습니다.
제가 어린시절 10남매 중 9째인 할아버지께 들은 얘기로는 “군산에 공소가 생기기 전부터 증조부, 증조모와 할아버지 10남매분들과 형수분들, 매형분들, 조카분들과 같이 4대축일 전날 함께 모여 공소예절과 기도를 하고, 저녁을 든든히 먹고, 해가 질 무렵 군산을 출발하여 성가를 부르고, 묵주기도를 하고 성경 특히 모세오경이야기를 듣고, 교리문답을 서로 주고받으며 밤새도록 나바위 성당까지 걸었다”하셨습니다.
또한 “나바위성당에 도착할 쯤 이면 날이 밝았고, 나바위 성당 신자들이 대축일미사를 첨례하기 위해 여러지역에서 온 신자들에게 국밥을 주었다”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저의 선조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였고, 얼마나 주님께 대한 믿음이 깊었으면 부활하신 주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40여 키로미터나 되는 그 먼 길을 가셨을까?’ 그 옛날모습을 상상하고 그리며 걷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들과 같은 길을 걸으며 조금이나마 선조들의 신앙과 기쁨을 함께하고, 증조부모, 조부모께서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고 믿었던 주님을 저도 같은 길에서 한번 만나고 싶었고 또한 깊이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군산에 공소가 생긴 이후에는 신자들이 늘고 특히 어린아이들이 늘어나면서 걷기가 힘들어지자 신자들이 돈을 모아 군산에서 배(어선)를 대절하여 째보선창을 출발하여 나바위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미사첨례를 위하여 산 넘고 물 건너 그 먼 길을 기도하며 걸었을까?...’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선조들이 그 지독하고 피비린내 나는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 했으리라......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곰개나루터에 도착하자 새벽4시에 성당을 출발한 1코스 완주팀을 만났습니다.
완주팀이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본당신부님을 필두로 김영철 전 사목회장님 등과 같이 9시쯤 곰개나루터를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예날 선조들이 성가를 부르며 묵주기도를 하면서 걷던 모습 그대로 성가를 부르고, 묵주기도를 하면서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기도를 하시면서 걸으시다가도 잠시 시간이 나시면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중에도 30리를 걸어서 매일미사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헌하셨다는 웅포면 맹산공소 3총사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맹산공소 3총사의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은 함열성당 모든 교우들이 알고 있었고 그러한 믿음은 지금도 주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행복한 가정생활과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는 정말 기뻤고 제자신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함을 다시한번 깊이 느꼈습니다.
출발하고 약 3시간정도 지났을 무렵 배고프고 힘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김영철 회장님은 가방에서 사모님이 챙겨주셨다며 초코렛을 나눠주셔서 지친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만나가 이런 맛이었을까를 생각하며 맛있게 먹는데 사모님이 싸주신 오이는 빼놓고 왔다는 말씀을 듣고는 가져오시지 하며 안타까워하시는 본당신부님의 모습이 너무 인간적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하기위하여 용안성당 석동공소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본당신부님께서는 석동공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예전에는 이 공소에도 신부님이 상주했다는 이야기, 황인규(마태오)신부님이 바로 이 공소 출신이라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특별히 마태오신부님께서 이 공소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마태오신부님께서 저의 혼배를 부활날 주례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오신부님은 부활날 혼배성사를 주시기전 저를 조용히 부르시고는 “사제서품이후 부활날 혼배성사 주례는 처음이고 아마 마지막일 것” 이라며 웃으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석동공소를 떠나가에 앞서 우리모두는 파이팅을 외치며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공소건물 이곳저곳을 살펴보면서 그 예날 신부님이 계셨을 당시의 활발했던 모습을 생각하니 텅 빈 성당안의 십자가상 예수님이 외롭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오래되고 신앙적 가치가 있는 곳은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석동공소를 출발하여 약4키로 지점 금강뚝방길 오른편에 김대건신부님이 타고오신 미카엘호의 항로에 대한 안내표지판이 보였습니다.
김대건신부님은 1845년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주교에게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5개국어를 자유자제로 구사하셨으며,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서양의 정규교육을 받으신 분이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입국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국의 어린양들을 돌보고자 자신이 제물포에서 상해로 갈 때 타고 갔던 길이 25자(약 13미터)의 무동력 목선인 조그마한 라파엘호에 올랐습니다.
당시 라파엘호에는 신부님을 포함하여 페레올주교님, 다블뤼신부님, 조선인 선원11명 등 14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1845년 8월 31일 상해를 출발하였으나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배고픔과 탈진, 배 멀미 등으로 사경을 해매면서도 승선원 모두가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 되어 마침내 1845년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에 표착하여 감사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배를 수리하고 음식을 준비하고는 1945년 10월 1일 제주도 용수리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 나바위 화진포에 도착하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조국의 품에 안겨 어린양들을 돌보게 되시는 김대건 신부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망망대해에서 폭풍우에 휘말려 타고 있던 배도 부서지고 음식은 물론 식수까지도 떨어졌으며, 20여일간의 표류에 심신이 황폐해지고 엄청난 공포가 엄습해 왔어도, 오직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기도하고 성모님께 전구하며 역경을 이겨낸 김대건신부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김대건신부님의 역경은 제자신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 삶이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주님께로만 향하는 삶인가라는 반성과 고해의 시간이 힘들었지만, 멀리보이는 나바위 성당 종탑위의 십자가가 희망으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안내표지판에는 라파엘호가 나바위 화진포로 들어올 때 금강의 큰포구로 신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입항하지 못하고, 금강 지류의 작은포구인 화진포를 이용하였고 어둠이 깔린 밤 8시경 인 저녁시간대를 활용하여 관군의 눈을 피하여 들어오셨습니다.
천주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주교님과 신부님들께서는 어린양들의 목자로 음지에서 조용히 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신앙 환경은 신앙생활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오늘날의 후손들에 대한 배려였고 축복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뼈와 살이 타는 희생과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음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이렇게 어렵게 들어온 땅에서 불과 1년여의 목회활동 후 순교하였음은 너무 황망하였습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금강의 강바람을 맞으며 멀리보이는 나바위 성당을 향하여 걸어 약 2시 30분경 나바위 성당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른 코스로 도보성지순례를 하신 신자들을 만나니 해어진 가족이 다시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다들 각자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여서인지는 몰라도 땀을 흘리고 계시면서도 환한 웃음과 행복 그리고 인간적 성취감이 어우러져 ‘내가 당신을 이만큼 사랑합니다!’라는 주님께 대한 자신감이 묻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바위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약400명의 저희공동체가 같이 미사를 봉헌하기에는 비좁았으나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여 행복하게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모두 순례를 마차고 주님의 은총을 받아서인지 눈빛들이 살아있고 얼굴들은 환하게 밝았습니다. 성가를 부를 때는 얼마나 성가소리가 큰지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저는 조상들이 밤이 새도록 걸어 미사첨례를 하였듯이, 저도 그분들이 걸었던 같은 길을 걸어와서 미사참례를 함으로서 그분들과 하나가 되어 미사를 참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미사봉헌이었습니다.
또한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저희공동체가 주님을 향하여 하나로 일치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조상님들이 한밤중 차가운 금강의 밤바람을 맞으면서도 성가를 부르고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성경이야기와 교리문답을 하면서 밤새도록 걸어가셨던 그 길을 전 뜨거운 태양아래 아스팔트길을 걸었습니다.
또한 차가운 밤바람이 아닌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걸었음에도 조상들의 신앙에 대한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저는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분들의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조금은 닮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그마한 열망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그 열망은 희망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보성지순례를 마치고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도 도보성지순례에 대한 여운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묵주기도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묵주기도 후 묵상을 하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중학생인 아들 마르코와 집에서부터 나바위 성당까지 도보성지순례를 비밀리에 계획하여 봤습니다.
마르코와 밤이 새도록 걸어가면서 모세오경을 들려주고 교리문답을 하고 우리조상님들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열정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마르코가 자아를 발견하고, 아빠와 엄마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상상을 해봅니다.
또한 병인박해때 어린 증조부를 안고 개성의 가산을 버려두고 똑딱선 배에 올라 안면도로 피난하신 고조모 등의 조상님들이 열렬히 믿고 의지하였던 주님, 아빠가 믿고 따르는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 마르코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얼마나 큰 은총을 주시고 계신지를 알려주는 상상도 해봅니다.
비밀리에 계획한 아들과의 도보성지순례를 통하여 제가 받은 신앙의 유산을 아들에게 상속할 준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도보성지순례의 여운은, 저에게 신앙이라는 너무나 좋은 유산을 물려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하여 다가왔습니다.
또한 주님을 믿고 의지하였던 조상님들의 모습이 현재의 제 모습에 투영되어 쉽고, 편하고, 자의적이고, 습관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제 신앙생활에 경종을 울리고 있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신앙인으로 성숙 되도록 도와주신 신부님들, 수녀님들, 주일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신앙의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렇게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을 자식들을 비롯한 저의 후손들과 신앙의 후배들에게 상속하여 줘야만 한다는 강한 책임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