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라고?
보통 불교에서는 우리가 이미 깨달아 있는 존래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미 바라밀다를 마치고 저 깨달음의 언덕에 도착해 있는 존재인데, 다만 내 스스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마음 속의 허망한 번뇌망상과 둘로 나누는 분별심 때문에 스스로를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허망한 상이라는 틀 속에 가둬놓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내가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허망한 무대 위에서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헛된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괴롭다고 여기는 이 괴로운 세계의 실체는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합니다. 의식이 빚어 낸 꿈일 뿐 것이지요. 우리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가 중생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거의 없습니다. 깨닫기 위한 방법 같은 것은 사실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이미 정상에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상에 오르기 위한 다른 방법은 있을 수가 없지요. 다만 이미 도착해 있지만 스스로 도착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망상이 있기 때문에 그 분별망상을 깨주기 위해 수행이라는 방편을 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파사현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바른 진리를 드러내려면 삿된 것을 파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새롭게 없는 깨달음을 만들어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없는 진리를 만들거나, 저 쪽 진리의 언덕에 가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쪽 언덕에서 저 쪽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바라밀다는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쪽 저쪽이 아닌 하나의 진실된 언덕 위에 언제나 발 딛고 서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입처개진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파사’ 즉, 삿된 것을 파하기만 하면 됩니다. 무엇이 삿된 것일까요? 분별심, 번뇌망상, 생각으로 조작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단 하나, 바로 분별망상을 타파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사념처라는 것도 ‘분별 없이 지켜보는’ 알아차림을 통해 번뇌망상에 끄달려 가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입니다. 간화선도 화두를 통해 그 어떤 분별망상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생각이나 개념적 이해가 오도 가도 못하도록 탁 쳐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참된 수행이란 수행을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되고, 방법도 없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게 되어 도무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콱 막혀서 생각이 갈 길을 잃게 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공부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나 논리적인 이해를 통해 진리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물론 교학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머리로 사량하는 그 모든 분별을 내려놓고, 곧장 지금 이 자리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진실 이 자체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언제나 깨달은 존재임을, 도착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서 있는 당연한 자리, 당처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없는 깨달음을 새롭게 얻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했다는 헛된 망상의 꿈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는 것만이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꿈에서 깰 수 있을까요?
마음만 일으키면, 우리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은 가능해집니다. 이 공부를 마음공부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마음을 내지 않아 그렇지, 이 진리를 확인하고 말겠다는 간절한 발심의 마음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저절로 명백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중에서
첫댓글 불교방송 다시듣기가 16.17일 동일한것이 올라왔네요.
그래서 원래대로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16일자 내용을 수정한거지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발심의 마음 내봅니다.....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다시한번 더공부하니 좋은일이네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발심
분별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