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반대말
마 25:35~40 황등교회 한승진 목사
1. 서론 - 무관심한 세상의 모습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어떻습니까? 옆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죽어서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 시체의 썩은 냄새가 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옆집의 사는 이웃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지금은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몇 년 전 미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남자가 부둣가에서 그만 실수로 깊은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며 허우적거렸습니다. 멀리서 이 사람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바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 청년이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수영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죽은 익사자의 가족들은 그 청년을 고소했습니다. 재판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놀랍게도 그 재판의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어야 한다는 법적인 책임은 없기 때문에 무죄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점점 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처지와 환경에 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도 나 몰라라 하며 태연히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2.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나 증오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바로……. 무관심입니다. 관심은 사랑의 대표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본문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 주위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베푼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4. 지극히 작은 자
“너희 형제 중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 우리는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이가 어린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매우 부족한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런 사람을 넘어서 사람들이 싫어하고,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바로 그런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제대로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같이 말을 하고 식사를 할 수 있는가?’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였고, 결국 보기 싫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입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으로 인해, 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왕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되고 해소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왕따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 학교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도 누구를 왕따시켰을까요? 다른 친구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왕따당하는 친구와 어울리지 않았을까요? 대답은 너무나 쉽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누구보다도 왕따당하는 친구를 사랑하고 그에게 관심을 쏟았을 것입니다.
6. 헬렌켈러 이야기
여러분은 모두 헬렌켈러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 들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세 가지 장애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셜리반 선생님도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는 셜리반 선생님이 헬렌켈러에게 물었습니다. ‘헬렌켈러야! 사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이 질문에 헬렌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 저희 집에 오신 날 절 꼭 안아주신 것이요’ 우리가 사랑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그저 꼭 안아주는 것입니다. - 그렇다고, 이성 간에 서로 안아주는 포옹을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 사랑은 다른 사람을 감싸주는 것, 그들을 품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에 애타고,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을 품어주는 것입니다.
7. 지존파
1994년 우리나라를 완전히 발칵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존파”입니다. 당시 그들을 보도한 TV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사회를 저주하고, 돈 많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지 못한 게 한이라던 그들의 말에 세상은 경악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세상에 따돌림 받고, 사랑에 굶주리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살아왔습니다. 결국 세상의 무관심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1995년 11월에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형당하기 전, 서울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님이란 분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는 참회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재명 집사님은 면회가 금지된 지존파 일당에게 밤새워 편지를 쓰고, 그들에게 돈을 보내주는 등 끈질긴 설득작업을 벌여 이들로부터 비로소 참회편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쓴 편지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조차 면회 한번오지 않았는데 이름도 모르는 분으로부터 도움을 받고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중략) 제가 저지른 사건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잘못되었음을 선생님 앞에 처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들의 가슴속에 꽉 차있던 미움과 증오도 이 집사님의 끈질긴 사랑과 관심으로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나의 작은 관심이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중등부를 돌아봅시다. 여러분은 우리 중등부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중등부 학생들이 보통 30여 명 정도 출석을 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는 한 반이 56명이었으니까? 그 당시의 한 반도 안 되는 학생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아직 서로의 꿈이 무엇인지, 고민이 무엇인지 모르는 친구들도 여럿 있을 것입니다. 또 얼마 안 되는 같은 학년 가운데서도 또 그 가운데 여학생은 여학생 안에서도, 남학생은 남학생 안에서도 서로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는 어느 누구와도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우리 중등부 안에도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럴진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에게 더욱 관심을 갖는 중등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친구들 가운데서, 학교에서도 지극히 작은 사람과 같은 친구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