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 2주일 강론(나해)
1971년 10월 5일을 기억하라!
1971년 10월 5일, 원주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1천여 명이 원주 원동성당에서 부정부패 규탄시위를 벌였다. 원주교구가 5.16 장학회와 더불어 설립한 원주 문화방송의 부정이 드러났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원주문화방송은 원주교구가 5.16 장학회와 공동 투자하여 1970년에 개국했는데, 1971년 3월 운영 실태를 감사해 본 결과 설립과정에서부터 운영 전반에 걸쳐 숱한 부정이 있음이 드러났다.
원주교구는 5.16 장학회와 원주문화방송사장에게 여러 차례 시정을 요구했으나 묵살되었고 검찰에 정식으로 고발했으나 검찰 역시 사건 처리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천주교 성직자들과 평신도 대표가 연석회의를 열고 권력만 믿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제도적 불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키로 하고 대대적인 규탄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 당시 지학순 주교님은 가톨릭 교회에서 시사지로 발간하던 <창조>지에 ‘부패의 실상과 사회정의’라는 기고문을 통하여 “교회가 억울한 민중을 대변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김승훈 신부,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88 면)
가톨릭 주교로서 처음 시위에 나선 지학순 주교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정의를 외치는 한국교회의 인권의 기수가 되었고 급기야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의 부당성에 맞서 옥고까지 치르게 된 것이다. 인권주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오늘의 말씀은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는 마르코복음의 내용처럼 진실한 회개로써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길을 마련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의 편안함과 기쁨을 위한 것이다. 잘 닦여진 길, 훤하고 탁 트인 길을 보면 가슴이 후련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른다. 길은 곧 모든 것을 소통하게 하는 것 삶을 이루어주고 문화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의 문화가 전달되고 문명의 교환이 이루어졌던 것을 통해 인간의 삶은 자기만의 우물에서 벗어나 이웃과 삶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길이 주는 무한한 의미를 우리는 대림절의 성서 말씀과 관련하여 묵상해야 할 것이다. “너희의 하느님이 여기 계시다.”(이사 40,9)라고 하는 기쁜 소식을 높은 산에 올라가 외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서의 내용은 바빌론의 유배에서 고향 유다로 돌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씀이었다.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는 기쁨의 메시지는 온갖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된다는 위로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고 있다. 이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완성되기 위해 그들의 눈물어린 회개가 뒤따라야 했던 것이다.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와 온갖 죄악에 떨어져 멋대로 살았던 지난날의 더럽고 부끄러웠던 삶에서 돌아서야 하는 결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결단을 통해서 그들은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와 하느님 안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마르코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회개와 세례 그리고 이를 통한 죄의 용서도 .구약의 역사적 배경 앞에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길을 닦는 것, 이것이 곧 회개하는 모습이고 주님을 영접하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란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자신의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고요함과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스님의 말씀처럼 수류화개(水流花開)즉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마음, 그 안에는 평화로움이 늘 깃들고 있다. 이 마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관계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념과 사상, 언어, 종족의 차이 때문에 서로를 동물 취급하며 무참히 학살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오늘의 세태 앞에서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외침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예레 7,4-6) 산다면 영원히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되고 변화하는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가 할 바를 최선을 다해 이루는 데에 있다. 이것은 곧 땀 흘려 일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것이다. 이 정의 안에서 우리는 새 새 땅을 바라보게 된다. 이 정의는 각자가 주어진 여건 안에서 최상의 삶을 사는 것이요, 이로써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물을 받고 살아가는 셈이다. 즉 서로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하며 각자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삶인 것이다. 이 삶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