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리 시인의 시집 『무릉별유천지 사람들』(푸른사상 시선 165).
시인이 나고 자란 동해에는 두 개의 에메랄드빛 호수가 장관인 무릉별유천지와 생사를 넘나들었던 광부들의 애환이 공존한다. 가족과 이웃이 모여 살던 별천지를 노래한 이 시집은 따뜻한 사람의 향기가 가득해서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에게 온기와 위로를 전해준다. 2022년 11월 11일 간행.
■ 시인 소개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나 가톨릭관동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강원작가』에 「북평장날」 외 9편, 2004년 『비평과전망』에 「불임의 묵호항」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하슬라역』 『동해 소금길』이 있다. 2019년 생애최초 및 2022년 강원문화재단 전문예술 창작기금을 받았다.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하슬라문학회 회원이며,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사범대학 교직과 강사로 일하고 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코로나19로 재택근무하는 시간이 길었다. 어머니가 지병으로 하늘 소풍 떠나고, 편찮은 아버지만 홀로 남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주말에는 텃밭과 꽃을 가꾸며 지낸다.
동해 무릉의 석회석 폐광지였던 산자락이 무릉별유천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이 시집의 주춧돌과 서까래를 올려준, 삼화 파수안(무릉별유천지) 고향 사람들 덕분에 시집을 묶게 되었다.
■ 작품 세계
시집 제목에 등장하는 ‘무릉별유천지’는 동해시의 대표 관광지라 할 수 있는 무릉계곡의 암각문에 새겨져 있는 글귀로, ‘하늘 아래 경치가 최고 좋은 곳으로 속세와 떨어져 있는 유토피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해시 삼화동에 위치한 이곳은 1968년에 문을 연 쌍용C&E가 석회석을 제공하던 곳으로, 40년 동안 채광 작업을 마친 후 다양한 체험 시설과 두 개의 에메랄드빛 호수를 만들어 이색적인 관광명소가 된 것이다.
동해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무릉계곡의 ‘별유천지’가 어떤 곳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곳은 유년시절의 추억이 담긴, 어른들의 세계와 다른, 순수의 공간이자 장소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무릉별유천지’는 무릉계곡의 별유천지와는 사실 거리가 먼 곳이다. 그곳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삶의 터전이자 광부들의 애환이 서린 공간이다. 시인은 지금의 아름다운 ‘무릉별유천지’가 생사를 넘나드는 광부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무릉별유천지’의 의미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그리고 새롭게 생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의 ‘별천지’의 확장된 의미까지도 엿볼 수 있다.
― 김현정(문학평론가, 세명대 교수) 작품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작가들은 근본적으로 그가 나고 자란 산천과 그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에게도 빚진 사람들이다. 이애리 시인이 나고 자란 동해는 이른바 별유천지 무릉과 석회석 광산 무릉이 공존하는 곳이다. 애환 상충의 그곳이 이애리 시의 출발점인 것이다. 별유천지는 동해 사람들에게나 그에게나 하나의 역설이다. 너나없이 “축구장 백오십 배 면적의”(「무릉별유천지 사람들 2」) 광산에서 석회석 밥을 먹었지만 굳이 시인은 “행여나 무릉별유천지의 과거를 묻지 마라”(「무릉별유천지 사람들 2」) 한다. 시인은 무릉의 석횟가루에 묻혔던 과거보다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아리고 살가운 이야기 속의 내일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산천에 대한 사랑이자 무릉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무릉, 그 별유천지에 대한 사랑으로 시인은 때로 서럽고 때로 아프다. 그러나 별유천지의 “삶이 고단하고 바윗돌같이 무겁다고 해도”(「왕피천골」) “굴참나무 같은 오빠, 밥 한번 먹자”(「굴뚝촌 대통밥」)고 청하듯 그곳 사람들의 삶이 그립고 애틋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의 고향 사랑은 두텁고 명랑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적 전통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이상국(시인)
무릉별유천지란 문패가 달린 예쁜 대문을 이애리 시인이 열어주기에 냉큼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기대했던 무릉도원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석회석 광산에서 끼니를 때우는 시인의 아버지와 숙부와 외삼촌, 그리고 장독대 항아리에 쌓인 돌가루를 닦는 어머니가 보인다. 돌무덤을 안고 저세상의 별이 된 장 씨 아저씨도 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두타산 계곡에 핀 쪽동백과 이기령을 넘는 잎새바람과 마늘밭에서 숨바꼭질하는 고양이가 보인다. 삼화시장의 떡방앗간에서는 깨 볶는 냄새가 고소하고, 월평경로당에서는 한글을 읽고 깨치는 어르신들이 즐겁다. 구름이네 농장에서 여물어가는 감자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나는 무릉별유천지의 출입문을 잊고 말았다.
― 맹문재(문학평론가, 안양대 교수)
■ 시집 속으로
무릉별유천지 사람들 2
이애리
두미르 팻말을 두루미로 잘못 읽었다는 걸 안내도를 보고 나서 무릉별유천지인 줄 안다. 무릉별 열차가 청옥호수 근처를 지날 때 아버지 안전모의 뿌연 시멘트 가루가 떠올랐다.
장독대 항아리를 수시로 닦던 어머니 손길에 켜켜이 쌓인 먹구름 가루의 정체를 지금껏 몰랐다. 무릉별유천지 루지 정류장이 설치된 산기슭, 석회석을 캤던 자리는 흡사 심장 수술로 파헤쳐진 아버지 가슴을 닮았다.
행여나 무릉별유천지의 과거를 묻지 마라. 누구든 그러그러한 과거 하나 없겠는가. 쌍용양회 동해공장 무릉3지구, 무릉별유천지는 석회석 폐광지였다.
승객을 나르던 객차는 세월 속에 사라졌고 삼화역에서 석회석 돌가루를 가득 싣고 동해항으로 운반하던 화물열차만 드문드문 북평선 철길 위로 다닌다.
새벽마다 가래 끓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쌍용에서 밀가루 한 포씩 나눠주면 아껴두었다가 명절에 꿩만두를 빚었다.
고단했던 퇴근길은 술 냄새로 저물었다. 석회석 광산에서 돌을 캐다가 석산이 무너져 동료는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아버지는 목숨을 건졌지만 허리와 팔이 부러져 척추 보조기에 몸을 지탱해 평생을 불편한 몸을 짊어지고 살았다.
무릉별유천지를 섣불리 상상하지도 마라. 축구장 백오십 배 면적의 석회석 광산지다. 아버지도 숙부도 외삼촌도 광부였다. 오십여 년 동안 석회석을 캐낸 산자락에 청옥호, 금곡호라는 두 개의 호수가 생겨나고 다시 삼화 사람들 곁으로 돌아온 무릉별유천지.
석회석 원석을 부수던 쇄석장은 광부들의 고된 노동과 피땀을 말해주는 곳. 청옥호수 곁 거인의 휴식 조각상만 모든 걸 아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