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두려움이 만든 신god과 종교!
"삶은 분명 언제든 부서지기 쉽고 죽음의 그늘에 덮여 있다"
우리의 직계 조상, 호모사피엔스부터 우리 인간은 시간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되었다. 시간 인식 능력은 자연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해주었고, 그로써 사냥의 시기를 계획하고, 곡물의 재배에 눈을 떠서, 농업 경제를 시작하여, 마침내 인류 역사 상 처음으로 우리 인간은 생산량의 획기적 증가와 잉여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의 인식 능력의 치명적 단점은 인간에게 죽음을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죽음의 공포는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실재가 되었다.
아래 내용은 앞서 소개한 '신의 역사' 중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신화를 만들고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자연 현상을 사실에 충실하게 설명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상징적 이야기나 동굴 벽화나 조각품은 그들이 경험한 경이를 표현하고 이 압도적인 신비를 자신들의 삶과 연결하려는 노력이었다.
고대인들은 이런 신성한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자신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승의 삶은 분명 언제든 부서지기 쉽고 죽음의 그늘에 덮여 있지만, 신들의 행위를 모방한다면 어느 정도 그들의 위대한 힘과 유능함을 나누어 가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신들의 성스러운 세계는 단지 사람들이 동경하는 이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원형이었다. 그것은 여기 지상에서의 삶이 모범으로 삼는 본형 또는 원형이었다. 신을 모방하는 것(이미타티오 데이)는 여전히 중요한 종교적 개념이다.
한편,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한 까닭은 우리가 그것을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에서 분리된 삶을 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사이의 간격이 바로 두려움이다.
우리는 삶은 항상 현재 속에 있고, 죽음은 먼 시간 저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일 사는 우리의 삶의 싸움이 삶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윤회를 믿고 싶어하고, 영혼의 살아남음에 대한 증거를 구한다.
우리는 고통과 절망이 있는 삶을 수락했고 그것에 익숙해졌으며, 죽음은 조심스럽게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 없이 살 수 없다. 하루하루 마치 그것이 새로운 아름다움인양 완벽하게 살기 위해서 어제의 모든 것은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고 기계적인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또는 자유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며, 따라서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삶을 두려워하는 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불완전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전이 없다는 것을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안전이 없으면 끝없는 움직임이 있으며 그래서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구경회 2024.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