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에서는 자아의 일관적 통일성을 위협하면서 출현하는 충동을 증상이라 한다. 증상은 결코 완전히 억압될 수 없으며, 억압된 증상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특히 표면의식을 장악한 윤리와 도덕에 의해 눌려진 무의식적 충동은 언제 어디서나 표면으로 튀어나올 틈새를 엿보고 있다. 욕계 중생의 리비도가 중생심의 저류를 형성하며 현실표면으로 스며 나온다. 리비도는 양가적兩價的이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술 취한 부랑자, 발정 난 돼지, 머물지 못하는 바람둥이, 끊임없이 말썽 일으키는 난봉꾼, 컬트cult를 이끄는 교주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생명력의 발동이며, 생명의 약동이며, 창조의 원천이다. 리비도는 광기와 열정이며 문화예술의 원동력이 된다.
불교에서는 리비도를 어떻게 보는가? 리비도를 칼에 비유한다면 칼을 잘 쓰면 생활에 유용하지만 칼을 잘못 쓰면 생명을 상하게 하고 죽이는 악행이 된다. 리비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쓰는 사람의 의도와 솜씨에 따라 유용무용, 유익무익, 선용악용으로 달라진다. 먼저 리비도를 각성하여 양명하게 발현되도록 심신을 조절해야 한다. 이런 분야를 다루었던 기법이 전통적으로 요가행과 선도수행이다. 계를 지키고, 프라나(生氣)를 원활하게 운용하는 아사나(자세조절), 프라나야마(호흡조절), 프라티하라(감각기관제어)와 삼매(일념집중)을 닦아 브라흐마차리아(금욕)과 아파리그라하(무집착)에 이른다. 이건 성명쌍수性命雙修의 길로서, 인도와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리비도를 승화시켜 인간완성에 이른다는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한편 대승불교, 특히 티베트 금강승에서는 리비도를 영성개발의 연료 fuel로 사용하는 특수한 기법을 전승해온다. 소위 나로6법에서는 신체내부의 영적인 열, 뜀모tummo를 개발하여 전신의 기맥을 엶으로써 에너지몸(보신)을 성취하여 즉신성불即身成佛의 길로 인도한다. 이것이 인간이 리비도를 사용하여 최상의 경지로 올라갈 수 있는 영적 개화의 극점에 이른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