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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주제 : 하느님의 선언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이고 신학입니다. 물론 정말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가 영혼과 육신인지 그것을 보았거나 경험으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신앙의 내용을 세상에 사는 사람이 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인지 그에 대한 분명한 해석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내용은 신앙의 내용이고, 세상의 일은 세상의 일로 따로 돌아가는 듯하여,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기도 합니다만, 세상의 목숨이 좋은 것으로 결실이 생기기 위해서는 신앙의 해석도 무시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논리에서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정신이 육체를 떠나지 않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은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정신은 사람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대상이기에, 정말로 정신이 육체를 떠났는지 확인하는 표현의 대신으로 숨을 쉰다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설명하는 일을 신앙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나뉘지 않고 하나로 살아가는 현상으로 말합니다. 육체의 모습이 멀쩡하게 보여도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죽은 존재라고 말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원론을 말하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영혼이나 정신이 육체와 올바른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표현이 됩니다.
정신과 육체, 영혼과 육신이 하나로 사는 것을 길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결국 이 내용을 반대로 이야기하면 둘 사이의 관계가 분리되거나 떨어진다면 사람의 주장으로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해도 그 대상은 죽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 영혼이 육신과 한 몸에 머문다는 표현과 함께,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지 올바로 살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배라는 상황에 있던 히브리민족을 향하여 에제키엘예언자를 통해서 다시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들의 삶에 다시 찾아오고, 그 하느님의 영이 그들을 떠나지 않는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은 언제 우리의 삶에 다시 찾아오겠습니까?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현실의 우리도 죽은 존재로 살 수도 있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다고 말하는 자가 죽은 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겠습니다만, 하느님의 영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 중요한 일도 될 수 있지만 내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여서 올바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 첫 번째 가져야 할 삶의 초점입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다시 살게 된 라자로가 언제 다시 죽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얘기의 초점을 라자로가 언제 다시 죽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오고 가는 이야기로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올바른 신앙의 내용을 이야기합니다만, 그녀가 말 한 내용에 나오는 이론적인 이야기보다는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의 뜻에 일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삶이 바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존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그 쉽지 않은 일을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길게 설명하셨고, 라자로가 그들 앞에 다시 산 존재로 나타날 수 있도록 당신의 힘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면서 우리에게는 그러한 일이 언제 일어날 거라고 알아듣겠습니까?
하느님의 영이 내 안에, 하느님의 영이 나와 함께 살도록 내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일만큼, 그 일이 나에게 이루어졌을 때 내가 그 은총을 올바르게 보전하는 삶의 자세도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힘은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순간에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만, 그 일이 나를 찾아올 때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올바른 삶의 은총을 주시도록 청할 시간입니다.
사순 제4주일
주제 : 보는 일의 의미
사람이 눈으로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의 삶이 반드시 보는 일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는 일은 세상의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보는 일에 관해 조금 더 강조하면, 사람이 사는 일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수 있습니다. 물론 한 가지 표현만이 모든 일의 최종적인 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몸에 '간(laver)'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광고의 표현을 이용하면, 보는 일은 사람의 삶에서 큰 중요성이 있다고 할 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보는 일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소경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님의 힘으로 다시 보게 되는 과정을 전하고, 첫째 독서로 들은 사무엘서에서는 다윗이 임금으로 선택될 때 예언자의 눈으로 보는 하느님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임금을 원했고,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시켜서 사울을 임금으로 선택한 다음이었지만, 사울이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택하게 되자, 하느님은 다음 임금으로 다윗을 선택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무엘은 눈으로 보는 것을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하지 말 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만, 현실에 사는 우리는 여전히 눈으로 보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수를 반복하며 삽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을 딱하게 여기면, 실제로 우리의 삶에는 어떤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눈으로 볼 수 없게 태어난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없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대하지 못했던 소경으로 살았던 사람의 부모님이나, 그 소경이었던 그 사람은 세상을 대하는 일에 자신감이 있는 사람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삶에서 만난 놀라운 일에 관해서, 다른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고 결국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해준 사람을 삶의 곤경으로 밀어 넣습니다. 우리가 오늘 소경이나 소경이었던 사람을 자녀로 둔 부모를 욕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우리는 현실의 삶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눈으로 보는 일은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남깁니다. 나의 삶에 좋은 영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내가 하는 행동으로서 다른 사람에게도 남기는 영향은 매우 큽니다. 그나마도 그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나은 길을 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삶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줄 아는 사람, 볼 줄 안다고 여기는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드러낼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무엘예언자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미혹돼서, 사람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여 본질을 보지 못하던 행동이 옳지는 않을 일입니다. 삶에 일어나는 일들의 관계를 알지 못해서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살던 소경이었던 사람의 가족이 드러내는 자세도 옳은 일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옳은 것을 옳게 보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그 일에는 자신감도 있어야 하고 곤경이 있어도 내가 뒤로 숨지 않겠다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일은 한두 순간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선물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눈을 감고 사는 현실에서 그 눈을 뜨고,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의 모습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한 은총을 청할 시간입니다.
사순 제3주일
주제 : 물은 사람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물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입니다.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을 살피면서 생명체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때도 사람은 물이나 물의 흔적을 먼저 말합니다. 사람이 목숨을 유지하는 일에도, 사람이 지구를 떠나 다른 별로 옮겨가서 살 것을 생각하는 첫째로 중요한 것은 물이라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며칠 전(3/08)에, 독일의 어느 대학교에서 우주에서 지구에 떨어진 운석을 분석했더니, 135억 년 전의 현상을 간직하는 물을 만드는 원소가 운석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사실을 찾아내는 사람도 신기한 존재이지만, 생명체에게는 물이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공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사람들처럼 삶의 환경에서 사막이라는 조건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의 처지에서는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저도 한강의 폭이 1km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거의 같은 시각에 우리나라인, 대한민국을 가리켜서 물이 부족한 국가로 규정했던 UN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졌던 일이 있습니다. UN이 생각이 틀렸고, 잘못됐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제 생각이 지나쳤다는 것도 압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 모세의 인도였습니다만, 광야에 들어섰던 히브리백성은 목숨의 유지를 위하여 물을 간절히 청합니다. 땅에서 자연적인 상태에서 물을 얻을 기회가 없었던 그들은 하느님께 조르고 또 조른 아우성으로 물을 얻었습니다만, 그 일은 그 민족과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며 참여했던 그들에게 또 다른 결과를 만드는 사건이 됩니다.
물은 인간이 목숨을 유지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이고, 그다음에 물 때문에 겪게 되는 다른 현상까지 생각한다면, 우리가 삶에서 드러내는 자세는 잘 판단해야 합니다. 물을 먹으면, 당장 육신의 목숨은 구합니다만, 그 일의 결과가 사람에게 멸망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 옳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사람은 이론과 달리 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일의 앞과 뒤를 한꺼번에 볼 줄 아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현실적으로 없습니다.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물을 드시러 우물가에 오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얻는 과정에 오고 간 이야기의 내용은 우리가 복음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실제로 물을 먹지 않아도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궁금하게 여겨서 하는 질문이지만, 성경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현실에서 목마른데 물을 먹지 않고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덮어두고 신앙의 설명만으로 그 곤경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한 것만 걱정하고 고민하면 세상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까요? 신앙의 설명으로 현실의 문제도 해결되면 참 좋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막연하게 바라는 이론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은 제대로 먼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올바른 해결책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삶에는 희망이 큰 역할을 합니다. 때로는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희망고문<=걱정하지마, 잘 될거야>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삶에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에 올 이 희망을 어떻게 친구로 받아들이고 친구로 만드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기회가 얼마나 많을지는 몰라도 내가 받았고 느낀 사랑을 진정한 삶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갖는 희망이 나의 삶도 좋은 것으로 바꿀 것입니다.
사순 제2주일
주제 : 나를 찾아올 영광
우리는 삶에서 여러 가지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게 들리는 소리의 내용을 구별한다면, 듣는 내용이 내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내용도 있고, 듣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내용도 있다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듣기도 좋고 발걸음도 가볍게 해주는 것이라면 누구나 바란다고 할 일입니다. 거기에 그 소리가 내 삶에 좋은 결과를 맺게 하는 것이라면 더 좋다고 하겠지만, 우리의 바람이 늘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일도 안타깝고 서글픈 일의 한 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하는 소리입니다만, 삶이 힘겨운 이유는 무엇이라고 진단하겠습니까? 사람이 드러내는 삶의 자세에 따라서 결과나 모양은 당연히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내가 드러내는 삶에 내 모습을 담았느냐 혹은 담지 않았느냐에 따라 진단을 다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단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지만,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릴 진단에 관한 한 가지 표현은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욕심을 조절하는 자세와 태도에 따라 내 삶을 힘들게 하는 일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당신이 예비하신 축복을 주시겠다는 이야기, 축복을 주시겠다는 초대 이야기라서 우리가 여러 번 들어서 매우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런 일처럼 잘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나에게 언제 돌려올 것이며 그 하느님의 소리를 따르기만 한다면 정말로 나에게 놀라운 축복이 오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하느님의 뜻이 오게 되면 놀라울까요? 그 이전에 우리는 한 가지 대답을 해야 합니다. 나는 과연 하느님의 뜻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따르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신'이니까 인간이 드러내는 자세보다 훨씬 더 너그러워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정말로 그렇게 하실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거룩한 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묵주기도에서 ‘빛의 신비 4단’으로 묵상하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떻게 특별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세 명의 사도들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모습의 장소에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사람이 예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순간에 갑작스레 다가옵니다. 그런 일처럼 우리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항상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를 찾아올 미래를 안다면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있겠지만,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일어날 미래를 안다는 것은 내 삶의 자세와는 다르게 정해진 모양대로 일어난다는 뜻이니, 세상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람의 자세를 왜곡시키는 이론입니다. 이러한 이론(=예정설)은 하느님을 속이 좁은 신으로 만드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신앙인의 삶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의 주재와 섭리를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삶이기도 합니다.
나의 삶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하느님의 영광이 나의 삶의 연결이 되려면,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주셔야 합니다. 그런 일이 내 삶에 실현되려면, 내가 하느님의 뜻에 눈에 드는 행동을 삶으로 들어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사는 일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일인지, 성경에서 그 조건을 찾아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 앞뒤의 과정을 올바로 준비하지 못했던, 3명의 제자, 그렇지만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받았던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초막을 마련하겠다’는 준비되지 않은 대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모습을 따라도 괜찮을까요?
'왕관'이라고 이름을 붙인 미생물에서 시작된 현실의 질병인 '코로나-19(=CcViD/ Corona Virus Disease-19)'를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이겨내는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결과가 사람의 삶에 좋은 열매가 맺게 우리가 개인으로서 현실에서 특별히 드러내야 할 삶의 태도와 행동은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결심과 함께 하느님의 자비도 청할 시간입니다.
사순 제1주일
주제 :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
세상의 삶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요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세균보다도 덜 발달된 미생물인 바이러스(=코로나19/ COVID-19) 때문에 우리나라와 온 세상이 혼란스러운 때 그런 생각을 더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의 첫째는 내 삶과 연결된 것은 쉬운 일이 없다고 할 만큼 모든 것이 다 어렵다고 말하기가 쉽고, 다른 사람은 삶에서 힘겹지 않고 편하게 산다고 판단하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바이러스가 국경도 없이 전 세계로 빨리 퍼졌습니다만, 미국에서 유행한 독감보다는 그 심각성이 약한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이러스에 관한 표현이나 생각에 관해 옳다거나 그르다는 판단이 어떠한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서 만나는 일에 자신감이 있으면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량도 매우 적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어렵다고 말하는 것도 개인의 삶에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어도 드러내는 자신감이 그 문제를 이기고도 남는다고 해야 할 일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내 삶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할 때는 같은 일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약해졌다거나 어떤 표현이든지 동원해서 나를 변호할 일을 찾으면서 다른 대상에게 책임을 물을 때 생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관하여 올바르게 행동할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은 올해 맞이한 사순절의 첫째 주일입니다. 전례에서 첫째나 둘째라는 표현을 써서, 특별한 일을 강조합니다만, 실제로 주일을 맞이하면서 오늘이 첫째 주일인지 혹은 둘째주일인지를 말하고 셈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행동입니다.
오늘 사순제1주일에 들은 창세기독서의 말씀은,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고 하느님을 떠나서 살게 된 원인이 된 죄가 우리의 삶에 함께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상상을 담은 이야기이거나 적절한 비유로 알아들어야 할 놀라운 얘기입니다. 오늘 들은 창세기말씀에서 여러분은 중요한 내용을 무엇으로 생각하겠습니까? 인간을 죄의 길로 이끈 ‘뱀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는데, 그 탓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뱀에게 있으니,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말할 내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내 삶에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 일의 원인을 다른 대상에게서 찾는 행동이 내 삶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이 하는 판단은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좋게 생각하거나 그 결과에 따라 좋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내가 아닌 상대방을 나쁘게 생각하거나 그 대상에게 해가 되도록 못된 일을 궁리하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내 삶에 다가올 결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독서말씀에는 뱀에게 원수를 갚는 얘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천재와 천치의 차이는 종잇장 한 장 차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세상의 일을 설명하는 이런 진리는 우리의 삶에 찾아온 구원과 멸망의 차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사도가 로마서독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 사람의 불순종은 인류에게 멸망과 죽음이라는 결과를 만들었지만, 예수님의 순종은 인류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글자의 차이와 뜻에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지만, 달리기의 출발점에 선 다음에 왼발을 먼저 내밀 것인지 아니면 오른발을 먼저 내밀 것인지의 작은 차이만 있음을 강조하는 얘기입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매주일 만나는 말씀에서 삶의 지침을 찾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 말씀에 깊은 뜻이 있어서 찾으려고만 한다면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 말씀에서 올바른 의미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우리가 들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신 뒤에 예수님의 앞에 나타난 유혹자는 인간으로서 느낄 배고픔과 눈을 감고 높은 데서 한번 뛰어내리는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명예를 얻는 일, 그리고 한 번만 절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는 놀라운 표현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악마의 이런 접근을 우리는 유혹(誘惑)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얻고 싶은 일에 이렇게 다가오는 유혹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극복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대하는 일에 사람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배워서 충실하게 따르는 자세가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사람이 드러내는 그 자세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이 가져야 하는 겸손한 자세는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자세와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사순절을 우리가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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