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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함 (레 11장)
- 설교 : 김강산 목사
이제 정결법에 대한 규례가 11장부터 16장까지 기록이 되어 있다. 그 첫 번째로 11장에는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함에 대한 규례를 말씀한다.
여기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이르라 그리고 육지 모든 짐승중 먹을 만한 것은 이렇게 쭉 하고 그리고 제일 뒤에를 보면 44절에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립히지 말라 나는 나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땅에 기는 것은 다 부정하다는 것에서 왜 이러이러한 것은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지 하는 문제를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이런 것은 먹고 이런 것은 먹지 말아라. 그러면서 어떤 것이 부정한 것이고 정결한 것인지 그런 것을 가르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 제일 끝에 46-47절에서는 그것을 문학 형식상 총 결론해서 내가 이러 이러한 것을 가르쳤다 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주보를 읽겠다. 여호와께서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와 성소에서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아론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이르셨다.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함에 규례는 여호와께서 백성의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여 그들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시키시는 규례이다. 처음과 끝을 요약해서 11장에 대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다른데서 모세에게 말씀했고 또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말씀하시고 주로 그런 구조인데 레위기 몇 군데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기를 그들 둘에게 직접 말씀하신 방식으로 되어 있다. 출애굽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도 항상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그 다음에 아론을 부르시고 그런데 하나님이 언약을 체결하신 그런 장면에서는 모세와 아론 너는 가까이 오고 그리고 칠십인 대표자는 저 만큼 멀리 서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둘 이를 부르면 항상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그 말이 아니라 그 문맥을 봐서 왜 이런 경우에는 둘에게 직접 말씀하셨는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 다음 아론에게 말씀하시고 그래도 이런 해석을 한다면 아무런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모세는 언약의 중보자고 아론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자이기 때문에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 다음 아론에게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백성에게 말씀하셔도 이와 같은 해석을 하는데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실은 그런데 단지 레위기11장이 정하고 부정한 것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그 규례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해석을 한 것이다. 어떻든 레위기를 보면 모세와 아론 둘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그 들을 통해서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하는 그런 구절들이 몇 군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한 규례는 왜 주셨냐? 제일 끝에 결론 부분을 봤죠? 백성의 몸을 거룩하게 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해라. 나는 너희 중에 함께 있으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너희 하나님이 아니냐?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해라. 즉 이스라엘 백성의 몸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다.
그러면 왜 음식물을 먹는 것이 몸을 거룩하게 하는 것인가? 여기서 몸 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으로 몸 정신 그런 구분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몸 했을 때는 그들 자체를 두고 표현하는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먹는 것은 곧 생명이거든요. 너희를 왜 내가 거룩하게 구별하는가? 너희 중에서 하나님이 될려고 너희를 구별했으니까 너희 생명을 거룩하게 해라. 하는 그런 말이다. 왜 그러냐면 만일에 우리가 말하는데로 육체를 깨끗게 한다 그런 식으로 하면 부정하면 육체를 씻으면 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옷을 빨고 그렇게 한다. 우리같으면 더러우면 몸을 씻어야 할것인데 옷을 빨고 그런다. 그런 것을 봤을 때도 단순한 몸 개념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의 생명을 거룩하게 할려고 나는 너희와 함께 거하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냇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이것은 어떤 죽음과도 접촉하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를 말아라. 그것은 가증하다. 너희들은 정결한 것을 먹고 죽음은 손대지를 말아라 내가 하나님이니까 그렇해서 하나님이 그들 중에 생명으로 계신 관계를 그들이 먹고 마시는 식물로 복을 주신 것이다.
1-8절에는 육지 짐승중 먹을 만한 것이 있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냐? 아까 말한 것처럼 처음에는 제일 끝에 보니까 나는 너희 중에 거할려고 너희를 건져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해라. 너희 몸을 거룩하게 해라. 어떻게 이러 이러한 먹을 것을 조심하면 너희는 거룩하다 했는데 그 사이에는 무엇이 거룩하고 부정한지 여러 예증을 들어서 강화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1-8절을 한참 들여다보고 다 알고 난 뒤로 9-10절을 보고 그러면 모른다. 이 전체의 흐름에 맞도록 알아야 되기 때문에 이것을 빠른 속도록 읽어보고 그 종목들을 비교해 보면 먹는 것이 이런 것은 부정하고 이런 것은 정결하구나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해석하는 것은 제일 뒤로 돌려버리고 여기서는 성경에 있는 것만 알기 좋도록 요약을 해 놓은 것이다. 여러분은 요약된 것을 가지고 본문 자체를 읽어보면 그 표현법에다가 강조 점을 담아 두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요약해서 읽어 가지고는 본문 자체를 읽은 효과만큼 못하다. 단지 본문 자체의 강조 점을 발견하도록 하려고 요약을 해 놓은 것이니까 읽고 본문 자체를 보면 강조점이 많다.
먹을 만한 것은 쪽발이 되고 새김질을 하는 것은 먹는다. 그런데 먹지 못할 것 이러면 좋겠는데 부정한 것 표현이 그렇게 되어 있다. 먹을 만한 것에 상응되는 표현되는 것은 먹지 못할 것 그래야 맞겠는데 부정한 것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표현법을 조심해서 읽으라는 말이 그런 말이다. 부정한 것은 위의 사항을 동시에 충족시키지 못한 것인데 이 본문은 이 사실을 계속 반복해서 설명하겠지요?
쪽발을 지되 돼 새김을 하지 못한 것을 먹지 말고 이렇게 반복법으로 교훈하고 있지 나같이 위의 두 사항을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한 것 이렇게는 말을 하지 않는다. 표현법을 조심해서 읽어보라 그런 말이다. 표현법이 강조 점이니까. 그리고 나서 그 부정한 것에 대해서 강조를 한다. 먹을 것에 대해서는 별 강조를 하지 않고 부정한 것은 고기도 먹지 막고 죽엄도 마지지 말라 이는 백성에게 부정한 것이니라 이 말을 계속 부록처럼 달아났다.
그런데 여기서는 실은 먹을 만한 것이 강조 점이 아니라 먹지 못하는 것에다 한참 강조점이 두어졌다. 설명이 그렇게 붙어 있으니까. 가령 부모가 어디 가면서 이것은 너 맘대로 먹어라. 저 것은 먹지 않는데 그것을 한참 설명을 하면 먹지 못한 것을 아주 조심하라 그 말이지요? 표현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먹지 못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부정한 것인데 어떤 것이 부정하냐? 쪽발은 졌는데 새김질하지 못하면 부정하고 새김질은 하되 쪽발이 안됐으면 부정하고 이런 부정한 것은 고기를 먹지 말고 죽엄도 만지지 말아라. 이는 백성에게 부정한 것이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강조가 한참 되어 있다.
그전에는 되새김질은 말씀을 되새김질 한 것이다. 그래서 해가 뜰 때는 소처럼 말씀을 정신없이 뜯어버리고 그리고 해가 지고 환란 때 이제 풀을 뜯지 못할 때는 밤새껏 씹으면 그것이 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설교를 들을 때는 듣는 듯 하고 눈이 동그란데 나갈 때는 제목도 잊어버린다. 되새김질을 못해버린다. 적용을 못해버리고 이것은 신자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고 또 쪽발은 또 염소를 키워 봤는지 염소가 쪽발이 되어서 산 꼭대기도 잘다닌다고 그런다. 그리고 굽이 있는 것은 그런데는 못다닌다. 한굽으로된 것은 그런데 굽이 갈라진 것은 아주 높은데도 잘 다닌다. 그러니까 굽이 갈라져야 한다. 좌로 우로 갈라져야 한다. 좌익 우익하면 한 참 가버리고. 아니 우리 보수파는 그 쪽보면 열나버렸다. 굽만 갈라져도 좌익 우익 나와 버리고 배 오른 쪽 왼쪽 그물을 던져도 좌익 우익 갈라져 버리고 그런다. 그래가지고 진리 비진리를 구분해야 한다. 두리 뭉실해가지고 아무데나 밟아 버리면 쓰겠다. 좌와 우가 분명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 보수파한테는 딱 맞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주로 가르쳤다. 그러니까 소 발만 봐도 진리가 보이고 다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나중에 종합해서 해석을 하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쪽만 열심히 들여다봐도 모른다. 그 말이다. 왜냐하면 이 사이에 반복법은 왜 너희 몸을 거룩하게 하는가? 그 몸을 거룩하게 하는 법을 여러 먹을 것을 나열함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한꺼번에 해석을 해야 알지 부분 해석을 해 가지고는 모른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틀을 잡아야 되니까 그렇게 읽어라 그 말이다.
그 다음 9-12절을 보면 물에 생물중 먹을 만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먹을 만한 것은 무엇이냐면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고 또 가증한 것 부정한 것도 아니라 가증한 것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지를 말아라. 그리고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죽엄을 가증히 여겨라. 그런데 이는 백성에게 부정한 것이니라 그런 말은 여기서는 없다.
그러니까 처음 언급 한데서 이는 너희들에게 부정한 것이니라 강조 점이 나와 있고 뒤에는 그렇게 안나와 있다. 이것은 나중에 가면서 강조될 것이다.
그런데 토끼 같은 것은 되새김질 합니까? 안 합니까? 입을 보니까 돼새김질 한다. 오물오물 하고 있거든. 그런데 그 때는 토끼를 안잡아 먹어봐서 모른 것이 아니라 다 잡아 먹어 봤겠지만 토끼는 돼새김질은 안한다. 그런데 토끼는 돼새김질은 하되 굽이 쪽발이 안됐으니 먹지 말아라 하면 아 틀린 말이구나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상식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식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토끼가 오물오물하고 있으니까 돼새김질 한 것이다. 그렇게 읽어라 그 말이다. 또 보니까 미꾸라지 비늘이 있어요? 없어요? 말라보면 조그만 비늘이 다 있다. 물 묻었을 때는 안 보이는데 비늘이 아주 가득차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미꾸라지는 비늘이 없는 것으로 언급한다. 그것도 지느러미도 있다. 지느러미 없이 다니는 고기는 없다. 다 있다. 그런데 그렇게 언급이 되어 있다. 미꾸라지 지느러미도 지느러미일까? 적어도 붕어 지느러미 정도는 돼야지. 그러니까 이런 것은 상식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지 생물학적인 언어를 쓰고 있는 줄 알고 아 그 때는 무식했다고 옛날 이야기니까 필요 없다고 읽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여전히 해는 동쪽에서 뜬다. 우리 상식 개념이다. 그런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먹을 만한 것이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이다. 머리도 좋다. 갈리리 바다에서 사해 쪽으로 물이 흘러내리거든요. 비늘이 있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 잉어 그런 것은 수로가 있으면 전부 올라간다. 그전에 보면 미꾸라지도 마당까지 올라오던데. 그러니까 무슨 박사 인줄은 모르겠는데 해석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비늘이 있는 것은 갑옷이다. 그래서 방어하고 지느러미가 있어서 위로 올라가니까 세속을 거슬러 올라가지 그렇지 않고 물 흐르는 데로 가면 사해로 빠져 죽어 버리기 쉽다. 그러니까 세속을 올라가야 갈릴리 생명의 바다로 올라가 산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런 신자가 되어라. 이렇게 하니까 감동이 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고 미꾸라지 같은 신자가 되면 안된다고 그랬지요? 이 구멍 저 구멍 그것도 땅 밑으로만 다니면서 구정물 다 일으키고 부흥사가 잡으려고 해도 쪽 빠져 나가 버리고 말이 걸리지를 않으니까 이런 신자가 되면 안된다 해 가지고 공격하면 다 걸릴 듯 한다. 그런데 그것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다.
이런 해석 방법이 왜 나왔냐면 이 본래 유대인에게서 이런 해석이 출발이 됐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소에서 이 예식을 지켜야 되는데 이방 땅에 흩어져 있는 즉 헬라 문화 영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일년에 세번 예루살렘에 올라가도 이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그들의 도덕 생활에 영해를 해 놨다.
그것을 우리 교회가 그대로 답습을 해 가지고 도덕법은 항구 불변한데 의식법과 시민법은 바꿔지지 않냐 바꿔지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석을 하려면 항구 불변해야 되거든요? 어떻게 하면 항구 불변하냐? 도덕법화 시켜야 항구 불변한 법이 된다. 그리고 도덕법도 이랬다 저랬다 하면 항구 불변한 법이 안된다. 영원법이 되어야 항구 불변한 법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이니까 항구 불변하고 두 존재로 대립을 시켜서 그대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전부 이방 철학에서 가져온 해석 방법들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것하고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해석은 다음에 하겠다.
그 다음에 내가 머리가 좋아서 다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나쁜 것은 다 기억에 남지요? 저도 다 들어서 안 설교다. 그리고 우리도 몇 번했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는 재주껏 안했는가 몰라도 했을 것이다. 왜 배운 대로했으니까. 그러니까 참 나쁜 것이다. 그런데 그 나쁜 것이 오래 가도 안 변하고 계속하니까 문제다.
그리고 13절부터 19은 새 중에 가증하여 먹지 못할 것이 있는데 새 중에서는 먹을 만한 것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먹지 못할 것만 나열해 났다. 그러면 새 중에 먹을 만한 것은 비둘기밖에 없지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그것은 번제로 드리니까... 번제로 드리니까 먹지도 못하겠구나! 다 태워 드리니까. 화목제도 아니고 그러면 새 중에 먹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한 마디로 하자면. 그런데 하나님의 단에 드린 것보니까 거룩한 것인데 하여튼 새중에서는 먹을 만한 것 그런 이야기는 없고 가증히 여길것만 있다. 가증한 것은 먹지 말라. 여기서는 이러이러헌 것은 못먹을 것이다 해놓고 뒤에다가 가증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한수 더 떠서 가증하다는 말을 전면에 내놓고 그 다음에 이제 종류를 뒤에다 나열해 났다. 나열한 것을 보니까 인수분해 해서 될것도 아니지요?
지느러미 있냐 없냐 할 것도 아니다. 먹지 못할 것만 여러 가지 말하고 있으니까 아 이것은 하나도 먹지 못하겠구나 감이 잡힐만큼 되어 있다. 여러분도 논쟁할 때 그럴수 있다. 나쁜것만 쭉 나열하면 한나도 좋은 것은 없구나 그런 감이 잡히잖아요? 그런 구조로 가증히 여기라는 말을 앞에다 올려놓고 그 다음에 종류를 한참 세는데 무슨 새인가 모르겠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만한 새만 적어났다. 이젠 주석을 봐도 이런 저런 말이 나오는데 읽어봐도 모른 이야기다. 봐야 알지요?
그러니까 알 만한 새만 몇 개 적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독수리 솔개 매 까마귀 종류 타조 종류 부엉이 학 종류 박쥐 종류 이런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종류인지 유대인들은 읽으면 그냥 알 것이다. 아마 전부 이것이 전부 육식 새 일 것이다. 새가 채식하는 새가 있는가? 그런 새도 있는가? 식물성만 먹는 새가 있어요? 비둘기도 벌레 잘 잡아먹는다. 공원에 있는 새가 그것만 주니까 그것만 먹지 잘 잡아먹는다.
그런데도 이 새들은 우리 같으면 황새 같으면 좀 고상한 새인데 목도 길도 학자 같고 동양화에 잘 나오는 것인데 그래서 어떤 부흥사가 그러더라고 개구리가 그랬다던가 황새보고 우리 새끼들좀 지켜 주십시오 하니까 그럼새 해 놓고 눈을 지긋이 감고 다 쪼아서 먹어 버리고 한발 들고 눈을 딱 감고 있으니까 개구리가 보니까 새끼가 한 마리도 없거든. 그래서 왜 잡아먹었냐고 그러니까 그것이 자네 새끼였어? 하고는 눈을 지긋이 감고 서 있다고 그러니까 폼은 학자 같아도 잡아먹는다 그 말이다. 그런데 하여튼 이것은 모르면 넘겨야지 우리 식으로 지레 짐작해서 고약한 새들이구나 ! 그런데 황새나 학 같은 새는 별로 고약하지 않다.
또 박쥐는 밤에 날아다니면서 모기나 잡아먹지 별로 고약하지도 않다. 그러니까 잘 모르겠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관념이 있을 것이다. 모르면 모른데로 넘기자고요. 여러분 한자를 알면 몇 글자밖에 못 읽어도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알려고 하다가 헛곳으로 가지 말고 대충 읽어보면 이것은 반복법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니까 다른 곳을 해석하면 이것은 자동 해석이 되어 들어오겠지요? 그러고도 해석을 못하면 안해 버리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새 잡아먹는 것 배우지 않으니까! 해석을 안해도 되는 것이다. 자 곤충 중에 가증한 것과 먹을 것 이제 가증한 것이 앞으로 나와 버렸다. 이 앞에는 먹을 만한 것이 앞에 나오고는 가증한 것이 나오더니 이제는 가증한 것부터 앞에 말한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는 것은 가증하고 먹을 만한 것은 네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 땅에서 팔딱 팔딱 뛰는 것은 먹을수 있고 그런다.
일단 여기까지 보면 먹을 만한 것 먹지 못할 것 그런 문제들을 총괄적으로 아야기해주고 있다고 알 수 있다. 왜냐하면 24-28절까지는 인제 죽음으로 부정케 한 것 또 30-39절에는 사체로 인해서 부정케 된 것 그런 문제를 말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다가 땅에 기는 것중에 부정한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은 가증하다. 땅에 기는 것은 가증하다고 그 말을 반복해서 섞어 났다.
그러니까 이런 틀 어떤 틀로 엮어서 이것을 말하고 있는지 그런 틀에 맞추어서 문장을 반복해서 읽어야 그 강조 점을 잘안다. 표현법이라는 것은 그 주제에 맞게 쓰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읽어야 된다. 단지 나는 여러분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줄거리를 잡는 것이고 이 줄거리를 보고 반복해서 읽어보면 그 반복이 이 줄거리를 강조하는 반복이어서 아주 알기 좋게 되어있다. 이제 곤충중에서는 가증한 것을 앞에 두고 뒤에다가 먹을 만한 것을 부쳐서 이제 처음에 육지 짐승중에 먹을 만한것하고 좀 상응이 된다. 그래도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다.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 다음에 24-28절에는 죽엄으로 부정케 하는 종류 어떤 죽엄이 부정케 하는가? 죽엄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하고 옷을 빨아라. 쪽발이 아닌 것과 새김질 못하는 죽엄에 접하는 자는 부정하다.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부정하며 죽엄에 접하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다. 여기서는 죽엄으로 부정케 된 것이 강조된 것이기 때문에 쪽발이 아닌 것 새김질 하지 않는 것 이런 것은 가운데 넣어 놓고 앞에다가 죽엄을 만지면 부정하다. 옷을 빨아라. 그리고 죽엄에 접하는 자는 저녁 까지 부정하다 뒤에 강조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죽엄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데 저녁까지 부정하다 한 것이 강조점이고 그 다음 구체적으로 무엇이 부정케 하는가 하는 것은 사이에다 넣어 났다. 그러면 무엇이 부정하냐? 쪽 발이 아닌것과 새김질 못하는 것의 죽엄에 접촉되면 부정하면 부정하고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이 부정하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 보면 쪽발이 아닌 것 새김질 못하는 것 또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 여기 보니까 쪽발이 아닌것에 핵심은 강조점은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 그것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 했을 때 이 발이 쪽발이 져야 되겟다 한 것은 땅에 어느 정도 접촉하냐? 그런 문제다. 아예 굽도 없이 살로 다니는 것은 다 부정하다. 그 문제를 이 부정에서 말하고 있다. 인제 그런 것만 부정해서 먹지 말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죽엄에 접촉되면 다 부정하다 해서 부정에 의미를 죽엄에서 한 번 더 강조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죽음에 접하는 사람은 부정한데 저녁까지 부정하다 옷을 빨아라 그 말만 했고 옷을 빨면 거룩하다 하는 그 말은 아직은 없다. 정결케 하는 말은 아직 없고 부정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단순히 옷을 빨아라 하는데 소망은 두고 있지만 옷을 빨면 정결하다 그 정도 말은 하지 않고 있다.
만일에 부정하고 깨끗케 하는 방법이 없으면 끝이다. 그런데 옷을 빨아라 하는 말에서 정결법은 말해 주고 있어도 옷을 빨면 정결하다 하는 말은 아직 안하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그 표현법을 조심해서 보라 그 말이다. 이 옷을 빨면 정결하다는 말은 뒤에 가면 더 강조될 것이다. 이런 모든 부정으로부터 옮겨지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부정을 이기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만일에 그 이기는 방법이 없으면 구약은 완전히 저주다. 부정을 이기는 방법 때문에 구약이 여전히 저주가 반복되는데도 생명의 약속이 주어지고 부정을 정결케 하는 능력이 와 있고 그러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 죽엄으로 부정케 한다 해 놓고 29-38절에 보면 땅에 기는 것중에 부정한 것 우리 식으로 하자면 땅에 기는것중에 부정한 것은 24-28절 앞에다 옮겨야 되겠지요? 가령 무엇이 부족하냐? 항목을 쭉 나열하고 그 다음 그 먹는 것만 부정하고 그 다음 죽으면 부정하다 이렇게 놓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안해 놨다.
그래서 곤충 중에 가증한 것 해 놓고는 죽음을 만지면 부정하다 해 놓고 그 다음에 또 땅에 기는 것은 부정하다 해놓고 그 다음에 사체를 인한 부정 이렇게 돌려 났다. 뒤에 보니까 점점 부정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땅에 기는 것것은 왜 부정하냐? 땅에 기는 것중 부정한 것은 쪽제비와 비와 도마뱀 종류와 악어등이다. 이것은 징그럽고 말고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땅에 기는 특성이 더 있는 것이다. 쪽제비는 다리가 넷이여도 아마 거의 기는 모양이다. 딱 붙어서 다니는 모양이다. 그리고 쥐 도마뱀 악어도 땅에 기는 것이 특성이어서 부정하다. 이런 것에 죽엄에 접촉하는 모든 것은 부정하다. 물에 담거라 저녁 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다.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은 다 부정해 진다. 그 그릇이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리라. 샘물이나 방축물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죽엄에 접촉하는 것만 부정하며 심을 종자는 정하며 종자의 물을 더할 때 접촉하면 부정하다.
그 다음에 사체로 인한 부정 먹을 만한 짐승의 사체를 만지는 자는 부정하다. 그는 옷을 빨아라. 저녁까지 부정하다.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 보면 죽엄으로 부정케 된 것을 24절에 말하고 29절이하에서는 땅에 기는 것은 다 부정하다고 말하고 이제 여기서는 부정한것만이 아니라 부정에 옮겨지지 않는 것을 또 말하면서 그 다음에는 이제 먹지 못할 것의 시체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먹을만한것도 그것이 죽었을 때 만지면 부정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옷을 빠라는 이야기를 뒤에다가 여러번 하고 있다.
이제 정결법에 대해서 뒤에 한참 말하고 있다. 그러면 41절 이하를 읽으면 더 잘 알 수가 있다. 땅에 기는 모든 것은 가증한즉 먹지 말라 배로 다니는 것 네발로 다니는 것 여러발로 다니는 것은 먹지 말라 가증하다. 하여튼 배로 다니든지 네발로 걷든지 여러발로 다니든지 땅에 기는 것은 다 가증하다 그 말이이다. 기어 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를 가증하게 되지 말며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지 말라. 이것이 마지막 무엇이 부정한가 하는 강조다. 보니까 이것은 배로 다니든지 네발로 걷든지 여러발로 다니든지 하여튼 땅에 기어 다니는 것은 부정하다. 그 가장법을 땅에 기는 것으로 점점 강조하고 있다.
곤충도 네 발이 있어도 팔딱 팔닥 뛰는 것은 괜찮은데 네발로 기어다니면 가증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땅에 기는 것은 다 가증하다. 한마디로 땅은 부정하다는 말고 같다. 죽엄에 접촉한것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땅과 접촉한것도 부정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새는 땅에 내려오지도 않고 날아다니는데 무엇이냐? 새 중에서 먹을 만한 것을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새는 땅에 안다니까 훨씬 좋은데 날아다니는 새는 먹을 만한 것은 한 마리도 언급을 안하고 다 가증하다고 해 났으니 아마 하늘을 나니까 괜찮겠지 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것같다. 강조 점은 한마디로 땅은 부정하고 땅에 기는 것은 부정하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짐승도 굽이 갈라진 것은 아마 땅에 접촉하는 힘이 약하고 굽이 갈라지지 않는 것은 땅에 깊이 밟는 것이 될 것이다.
기차도 그렇다. 자갈을 많이 깔면 무게가 분산된다. 전체적인 내용은 땅에 깊이 접촉되는 것은 다 부정하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이제 해석이 가능하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되새김질로 만약에 풀을 직접 막 뜯어 먹어 버리고 다시 한 번 돼시김질 하면 되지만 먹는 그대로 있으면 부정하다. 그런 것이지 말씀을 돼새김질하고 하는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땅에 기는 것은 부정하다.
배로 다니든 발로 다니든 어떻든 땅에 기는 것은 부정하다. 한마디로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가증하다 한 것과 엇비슷하다. 단지 그 중에 굽이 갈라져 있던지 되새김질 하던지 그것은 정하고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으면 정하고 그래서 비늘과 지느러니가 있는 것은 땅에 기는 물고기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런 면으로 구별을 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땅에 있는 것을 다 가증하다. 땅과 접촉한 것은 다 가증하다. 제일로 땅에 기어서 저주 받도록 저주 받은 것은 뱀이다. 땅에 흙을 먹도록 저주 됐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회복하면 그것이 구원이다. 땅을 황무지가 되게 하면 저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땅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거처로 지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아담이 범죄 했어도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도록 하셨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다 부정한데 부정한 것과 접촉해도 부정이 안 옮기면 여기는 부정을 이기는 생명이 있지요? 만일에 이것까지 부정해버리면 부정을 이길 방법이 없지요? 그런데 어떤 것은 죽은 시체와 접촉하면 다 부정하고 못먹을 시체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먹을 만한 것도 죽어버리면 부정하고 그것에 접촉하면 부정하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땅과 죽음을 전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이 죽은시체가 접촉이 되어도 깨끗한 것이 있다. 그것은 샘물이나 방축물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죽엄에 접촉하는 것만 부정하다. 그 물자체는 절대로 부정해지지 않는다. 만일에 물에 둥둥 떠 다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부정하면 그것은 부정해도 물을 절대로 부정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종자도 부정하지 않다. 그것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땅으로 새로운 생명을 내는 것이 종자다. 그러니까 종자는 부정하지 않다. 그러나 종자에다가 물을 더할 때 접촉하면 부정하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종자에다가 물을 더하면 종자 자체에 밖으로부터 무엇이 들어가는 것이 되겠지요? 그 때는 말하자면 부정이 물과 함께 들어가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 물은 샘물이나 방축물 정결케 하는 물이 아니다. 요는 씨앗을 싹트게 해서 물이 들어가면 그런 이야기다. 샘물이나 방축물은 흐르는 물이다. 문둥병자도 흐르는 물위 질그릇 안에서 새를 잡으라고 그랬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부정에 접촉한 것이 질그릇이면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려라.
29절에 이런 것에 접촉하면 모든 것이 부정하다. 물에 담거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라. 질그릇에 떨어지면 부정하니까 깨뜨리지만 다른 모든 것 가죽이나 옷이든지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부정한데 물에 담그면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해가 지면 깨끗하게 된다. 그러나 질그릇을 담가서 된 것이 아니라 깨뜨려야 한다. 그 질그릇이 어떤 용도로 쓰든지 화덕에 놓고 굽든지 깨뜨려라 그 말이다. 왜냐하면 질그릇은 냄새가 한마디로 배기는 것이다. 그래서 깨뜨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깨뜨리지 말고 빨아라. 담가라 그러면 정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때 질그릇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급이 낮겠지요? 우리가 같으면 유기 질그릇이야 냄새가 배길 것이 없지요? 항아리는 된장 간장 냄새가 고약하게 배긴다. 물에 오래 담가 논다고 될 일이 아니다. 불에다 구으면 모를까. 그러니까 아마 그런 상황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 부정하다. 그러나 가죽옷이든지 옷이든지 또 유기 그릇이든지 그런 것은 부정하지 않다. 그러나 물에 담그면 해가 지면 정결케 된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부정하다는 것이 점점 강조된 것과 함께 제일 뒤에 보니까 그 부정을 이기는 문제들을 말하고 있다. 흐르는 물과 샘물을 정결하다. 그리고 부정하게 된 것도 그 물에 담그면 해가 지면 깨끗케 된다. 그것이 여기서 정하고 부정한 문제다. 그런데 이런 땅에 기는 것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먹을 만한 것도 죽어 버리면 그 시체는 만지면 똑 같이 부정하다. 그러니까 먹을 수 있는 것까지라도 아직도 죽음이 완전히 제거 된 것이 아니다. 땅에 기는 것은 다 부정하다.
특별히 땅에 기는 것이 부정하다는 말을 41절 이하에서 많이 말을 하고 있다. 땅에 기는 모든 것은 가증한즉 먹지 말라. 배로 네발로 여러 발로 다니는 것은 가증하다. 기어다니는 것은 부정하다. 더렵히지 말아라. 이 말을 계속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것은 도덕적인 거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을 땅에 기는 부정한자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땅은 저주다. 땅에 기는 것이 다 가증한데 땅에 기는 것을 먹어서, 가증한 것을 먹어서 가증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를 말아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나는 너희중에 거룩한 하나님으로 계시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했으니 너희 몸을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것으로 부정케 하지를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먹는 것과 그들의 몸을 일치시키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굽지고 되새김질 한 것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 그리고 발로 뛰는 것 그런 것만 먹어야 된다.
그러니까 새는 높이 날아도 한마디로 이쪽으로 뭉쳐서 해석을 하면 된다 그 말이다. 이것은 거룩하다는 말 때문에 도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이 거룩은 몸의 거룩을 말하지 도덕적인 거룩하고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거룩하다 하면 윤리적인 거룩으로 바로 단어 해석을 한다. 이 문맥의 거룩은 먹는 것을 거룩하게 해서 너희 몸을 땅에 기는 부정한 것처럼 만들지 말아라. 뱀이 티끌을 햩으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를 말아라. 너희들이 땅에 살고 있어도 땅과는 구별된 방식으로 너희 몸을 거룩하게 해라. 그렇게 해서 저주된 생명으로 그들을 먹이지를 않는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부정에 옮기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죽음이 있고 땅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니 만일에 정결케 하는 방법이 없고 다 부정하게 되어 버리면 세상은 죽음으로 저주된 것이다. 그런데 샘물과 방축물은 부정하게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물로 씻어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물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물로 에덴 중앙에서 흘렀다. 그래서 물로 목욕하고 물로 씻는 것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물을 생명을 주는 성령의 표상으로 쓰는 이유들이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세상은 처음부터 물로 말미암아 지어졌다. 그렇게 해서 물을 정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생수 업자들이 가져다 쓰면 안된다. 목욕 탕 주인이 쓸것도 아니고 구약 언어 개념이다. 정수기 장사하는 교인이 있었는데 물에 대해서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성경에 물을 찾아 놓고 예수 이야기만 하니까 자기 장사하는데는 아무 도움이 안되지 판매원들은 멋있는 물에 대해서 나오면 써먹어야 할텐데 물 이야기 해 놓고 예수 이야기만 하니까 좀 그렇다. 제대로 받았으면 진짜 훌륭하게 되고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기독론적인 해석을 못하면 웃기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물을 처음부터 생명을 주는 정결함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땅은 부정케 되도 온 땅을 적시는 물은 생명 나무가 있는 에덴 중앙에서 흘러 넘쳤다. 그 물이 온 땅을 적셨을 것이다. 거기 있는 생명의 강이 온 땅에 생명을 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모세 언어는 항상 물은 정결하다고 말한다.
만약에 흐르는 물까지 부정하게 되어 버리면 씻을 방법이 없다. 그리고 제일 끝에 결론에다가 짐승 새 수중 생물 땅에 기는 것에 부정하고 정함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분별한 것을 말했다. 형식상으로 이 말을 해준 것이다. 모든 각 생물 중에 먹을 것 먹지 못할 것 정하고 부정한 것 정하면 먹고 부정하면 못 먹는다. 부정한 것을 먹으면 그 몸이 부정하다. 생명이 부정하다. 그것을 내가 가르쳤다. 그것이 결론의 말씀이다.
그러면 이제 해석을 하겠다. 먹는 것은 이스엘중에 생명의 하나님으로 거하신 여호와의 생명의 선물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먹을 만한 것을 제한해 주셨으며 땅에 기어다니면 배로 다니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모든 죽엄을 부정하다. 그러나 샘물과 방축물은 정하며 종자는 정하나 물을 더할 때는 부정한 것에 접하면 부정하다. 부정한 것은 가증한 것이며 거기에 접촉하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다. 옷을 빨아라 정하리라. 부정한것에 접촉한 질그릇을 깨뜨려 버리고 다른 것은 물에 담그라 저녁 까지 부정하다가 정하리라.
여기 까지는 전체에 대한 요약이다. 이스라엘에 주신 생명의 선물은 아직 죽음과 부정함에 갇힌 것이었다. 땅은 부정하나 물을 정하다. 부정함은 하루에 제한되며 물의 씻음으로 정결케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온전한 생명의 교제를 소망하는 가운데서 먹으며 자신의 몸을 헌신했다. 죽음가운데 갇혀서 먹었다. 이스라엘처럼 죽음과 저주 가운데서 먹은 백성이 없다.
그런데 그들의 부정은 소망이 있는 부정이다. 왜 해가 지면 정하다. 물로 씻으면 정하고 물에 씻는 것과 하루해가 지면 정하다는 약속이 있다. 이처럼 하루해가 지나고 새로운 날이 오면 새로운 시대를 소망하도록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에 부정이 내일까지 넘어가지를 않는다. 이 부정을 끝내는 새 날이 온다. 그렇게 해서 물의 씻음과 정하게 하는 새 날을 소망하도록 했다. 그래도 그들은 부정한 땅에 살고 먹는 것은 전부 죽음에 갇혀 있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죽으면 부정하니 완전히 죽음에 갇혀서 먹었다.
이 은혜의 선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하늘에 속한 정결함으로 온전케 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죽음은 정복되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시대가 왔으며 이제 땅과 만물을 정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참여하여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죽음에 그림자가 없다.
예수의 부활에서 새 시대가 왔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가 왔다. 땅은 하늘에 성소로 거룩하게 되고 이제는 친히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 주님 재림하시면 만물이 주님의 몸의 질서로 정결하게 될 것이다. 완전한 정결이 완성이다. 죄로부터 정결이 신약의 교회안에서 교회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교제로 먹지 죽음에 갇혀서 먹지를 않는다. 여전히 죽음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때문에 완성된 생명을 미리 맛보는 방식으로 먹는다.
그것이 교회가 먹고 마시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다. 주님의 몸의 지체로 거룩하게 드린다. 그러니까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한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한다. 이제 하늘에 새는 연구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아 ! 독수리는 징그럽습니다. 높이 날아 신앙이 좋다고 해도 눈이 고약하고 부리가 고약하고 발톱은 찢어 죽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남 비판이나 잘하고 찢기나 잘하면 이것도 못될 사람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말이다. 한마디로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부정하다. 그 말이다. 아마 하늘에 낳은 것은 정하다는 그런 사상을 가지지 못하도록 거기서는 부정한 것만 쭉 나열해 버린 것같다. 부정하다.
그러나 땅에 기어도 발로 뛰는 것은 정하다. 땅에 있어도 굽이 갈라져 있으면 정하다. 먹는 것도 한 번 먹고 끝나면 부정하고 되새김질을 하면 정하다. 그렇게 해서 부정한 세계중에 정결한 생명을 약속하셨는데도 이것도 죽으면 부정하다.그러니 완전히 죽음에 쌓여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하다는 생물이 몇가지 있고 그리고 그 중에 하나님에 드릴것도 있다. 또 이것이 부정해도 해가 지면 정하고 물로 씻으면 정하다. 씻는 물과 부정하지 않는 새로우 날이 온다. 이 소망가운데서 그들의 몸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몸으로 드리도록 했다. 이것이 구약 시대의 생명의 교제다.
죽음 가운데 갇혀 있는 교제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죽음에 그림자가 없고 다 먹어라. 내 살과 피를 먹는 방식으로 먹어라.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것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려고 예수의 살과 피로 구원하셨다. 주님의 몸의 거처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구원하셨다. 그렇게 먹고 마심을 성화 시켜야 된다. 그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동물학 박사 안되고 되고 여기 있는 문제만 해석하면 된다 그 말이다. 그러면 원숭이 같은 것은 땅에 내려오지 않고 주로 나무 위에서만 사는데 그러면 훨씬 거룩하겠지요? 그런데 거기서는 그 구조가 굽이 없이 땅에 다니는 것은 다 부정하다. 맨살로 다니면 그리고 발이 많아서 땅에 다니면 부정하다. 하여튼 땅과 접촉을 이야기하고 있다.
땅은 부정하며 가증하고 저주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이 저주되어 있고 죽음에 갇혀 있다. 먹을 만한 것도 죽음에 갇혀 있다. 소망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의 정결함과 새 시대를 약속하고 있고 그 죽음으로부터 먹을만한 식물을 주셧다. 죽음에 갇혀서 먹었다. 우리는 완전한 생명의 질서로 먹는다. 우리의 몸도 그 거룩한 몸의 질서로 드린다.
이 줄거리를 보고 본문을 읽어보면 그 말이 강조되게 설명을 해 노셨다. 그런데 구약 때는 아무리 부정해도 해가 지면 정결하고 굽이 있는 것을 먹고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약속을 보고 있지 더 이상은 없다. 그러니까 구약 문맥 자체만 읽어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책으로 못 읽는다. 그 소망은 여전히 갇힌 소망이고 그 완성은 예수의 부활에 있다. 부활의 빛으로 읽을 때만 구약에 갇혀 있는 임시적인 소망들 하루해가 지나면 씻으면 이런 문제들은 영원히 제거 되어 버리고 그리고 땅에 있는 저주도 영원히 제거 되어 버렸다.
항상 완성된 기독록적인 빛으로 읽어야 된다. 예수 오시기 전에는 그런 생명의 책으로 읽을 수도 없고 누릴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지킬수가 없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졌어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겠거든 이 짐을 이방인에게 지울려고 그러느냐 ? 그 말이다. 너무 너무 어려워서 못 지켰다 그 말이 아니다. 우리가 볼 때 굉장히 복잡하다. 왜냐하면 먹을것과 먹지 못할 것을 다 물어 봐야 될것이니까.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니다. 그들은 이것을 지켰어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생명의 자유를 못 누렸다. 그런데 우리 조상이 수천년 졌어도 의롭다 하지 못한 것을 이방인에게 다시 지울려고 그러느냐? 그것을 져서는 지금 예수를 믿어서 의롭다 하는 그런 교제를 하나님과 못 누리잖냐? 그런데 왜 그 짐을 이방인에게 지울려고 그러느냐? 그것이 사도행전의 책망이지 이것은 너무 너무 어려우니까 아무도 못지킨다. 그런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거룩한 생명의 교제안에서 살았던 것이다.
질문을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데 다 알고 있는 줄 알고 성경을 안 읽는 것은 진짜 거구로다. 남편과의 사랑에 있어서도 다 아니까 더욱 더 물어 본다. 나를 사랑 하냐고.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그가 우리를 생명으로 사랑하시는 일에 질문이 없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 것이 성경을 다 아는 것으로 말고 성경을 덮어 버리면 안된다. 열심히 읽으라 그 말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어야 이 교육을 받는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