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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만찬을 준비하다
43: 1~17
○ 베냐민과 함께 온 형들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3.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창42:20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6.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7. 그들이 가로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너희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창42:37
9.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창44:32, 창42:37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번 갔다 왔으리이다
11.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찐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찌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창37:25
12.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여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창42:25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17:1, 느1:11
15.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16.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그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창43:19
17. 그 사람이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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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서 돌아온 후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양식은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에는 가축들도 많이 굶어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야곱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재산이 축나는 모습은 가난한 집보다도 더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구해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애굽에 가야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1, 2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다시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아버지는 말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유다는 형제들을 대표해서 아우 베냐민을 데려가지 못하면 그 사람이 자기들을 죽일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냐민을 보내주어야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올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야곱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줄 모른체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기가 꺾여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세상의 재력과 힘에 기가 질려 눌려있는 크리스천의 모습들과 흡사해 보입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세상으로만 나가면 소심하게 기가 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눌려서 사는 모습입니다.
둘째 야곱의 아들들은 진퇴양란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습니다. 그냥 있으면 굶어죽게 될 것이고, 베냐민을 데려가지 못한 채 애굽으로 가면 요셉의 손에 죽게 생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 속에서 인생을 통찰합니다. 인생은 머뭇거리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본질과 진퇴양란은 비슷합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능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진퇴양란의 상황에 빠지면 죽고만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인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진퇴양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장애물에 부딪혀 진퇴양란에 빠집니다. 요셉의 형들은 우리와 형태는 다르지만 이런 진퇴양란에 빠졌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아버지는 아들들을 원망합니다. ‘왜 진실을 말해서 나를 난처하게 하느냐?’라고 합니다. 어처구니 없는 아버지입니다. 책임은 자식들에게 떠넘기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자식들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무리 야곱을 좋게 봐주려고 해도 좋게 보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본질을 봐야 하는데 자꾸만 부분적인 문제에만 매달리고 불평을 합니다. 야곱은 본질을 자꾸만 피해갑니다. 그리고는 주변의 문제를 가지고 화를 내고 원망합니다. 듣다 못해서 아들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로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너희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아들들은 ‘그 사람의 질문의 의도만 눈치챘어도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들들의 심정은 오죽 답답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자꾸만 압력을 가하는데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아들들에게 압력을 가하지 마십시오.
야곱은 우격다짐으로 압력을 가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생기면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일이 그냥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억울하다고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일입니다.
제가 영국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한 성도님이 울면서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렇게 조심했는데 임신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던 상황이여서 남편은 아이를 낙태시키라고 했답니다. 그날 저는 낙태는 살인이라는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도는 고민에 빠져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러분, 의도하지 않은 임신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유다의 리더십
의도하지 않은 일이 생길 때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야곱은 자꾸만 꼬여가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하고 아들들만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유다는 결단력 있는 말을 합니다. 그는 주저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난처한 상황속에서 방향을 결정하고 밀고나갑니다.
9,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서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유다의 리더십을 발견합니다. 리더십이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사람은 참다운 리더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다에게서 올바른 리더십의 모범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의 변신을 봅니다. 사실 그는 요셉을 애굽에 팔게한 장본인입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의 섭리는 모른 채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것에 대해서 평생 괴로워 했는지도 모릅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기 위해서 구덩이에 넣었을 때 유다는 형제들에게 ‘우리 형제인데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라며 그들을 설득합니다.
이 말로 미루어 유다에게서 동정심의 일면을 엿보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는 동정심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한 채 돈을 받고 요셉을 팔아버리자고 제안합니다. 요셉의 죽음을 막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노예로 파는데 주동적 역할을 합니다. 유다에게 이중적 가치관이 있음을 또한 봅니다. 이제 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러자 유다는 자신이 생명을 내어놓겠다며 책임을 질 것을 약속합니다. 유다는 변했습니다.
야곱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지나온 세월 하나님의 훈련을 그렇게 많이 받고도 그는 여전히 소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늘 상황에 이끌려 다닙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많은 문제를 겪으며 진퇴양란의 상황속에서 요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소신껏 그리고 책임감 있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가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적극성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 베냐민을 내어주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을 보내는데 동의한 것은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어쩔 수 없이 반 강제적으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안가면 큰 일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교회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이유없이 불편한 마음에 의무적으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와 세상에 두발을 각각 들여 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든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세상적인 방법 택하는 야곱
야곱은 언제나 문제를 이끌어가지 못하고 늘 끌려다닙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찐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찌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야곱의 살아가는 방법은 뇌물을 쓰는 것입니다. 그는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가야 한다면 꼭 뇌물을 가지고 갑니다. 형 에서를 만나러 갈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는 암염소 2백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백마리, 숫양 20마리, 젖나는 약대 30마리, 그 새끼, 암소가 40마리, 황소가 10마리, 암나귀가 20마리, 새끼나귀 10마리로 형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야곱의 처세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발휘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상적인 방법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여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이런 식의 야곱이 꼭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야곱의 방법론입니다. 야곱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는 돌아온 돈을 다시 가져갈 뿐만 아니라 그 두배에 해당하는 돈을 가져가라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오래 살아가다가 예수를 만날 때 그순간부터 갑자기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에 익숙해져 있어서 세상속에서 살아가던 방식으로 살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던 물질과 자식까지 다 내놓아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물질적인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요, 보호자라는 생각보다는 현실적으로 물질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드디어 자기 아들을 내놓겠다고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물질을 주고,결국 아들까지 내놓게 됩니다. 이것은 야곱의 인생에서 최고의 결단입니다. 피눈물 나는 아픔이고 자신을 죽이는 결정이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그렇게 결정하기는 했어도 결국 그렇게 합니다.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면 포기는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고 그래서 간신히 예수를 믿는 분들, 희미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포기가 불확실하고 희미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을 버리는 것이 그 만큼 어렵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결국은 이리 맞고 저리 맞고 이곳에 가서 부딪히고 저곳에 가서 부딪히고 온갖 상황을 다 겪어 결국 하는 수 없이 모든 것을 내놓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베냐민을 내놓는 야곱처럼 마지막 것까지 내놓게 됩니다. 그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포기를 빨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포기입니다. 무엇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한 여자를 선택해서 결혼한다는 것은 지구상에 있는 다른 모든 여자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선택하고 얻을 수 있겠습니까?
둘 다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흔히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생각 때문에 우리는 둘 다 놓치게 됩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나쁘게 사는 것도 괴롭고, 그렇다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빼앗기기는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까지도 포기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차피 포기할 일이고, 한번은 죽습니다. 마음을 정하고 사십시오. 그렇게 머뭇머뭇한다고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지켜지는 것도 아닙니다. 일찍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면 복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영적 보상이 주어집니다.
포기(抛棄)속에서 하나님을 발견
그런데 억지로라도 물질과 자식을 포기한 야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는 드디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마음의 자유함을 얻습니다.
14, 15절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째 야곱은 드디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제서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포기하고 나서야 기도를 배웁니다.
둘째 야곱이 말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옵니다.
‘잃으면 잃으리라’입니다. 그는 자식을 포기합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걸림돌 중 하나가 자식을 포기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의 것인양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셋째 아들들이 드디어 움직입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그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그 사람이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봅니다. 만일 형들이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다시 감옥에 가야만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 사이에 있는 베냐민을 보고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그래서 만찬을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는 정오에 이들을 정중하게 초청하라고 합니다.
베냐민을 무리 중에서 발견한 순간에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여러분이 포기하기 어렵고 힘들었던 것을 포기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얼굴은 기쁨으로 변합니다. 죽을 것만 같았던 헌신, 불가능한 순종, 그것을 보는 순간 요셉은 만찬을 베풀고, 그들을 환대하고 축복합니다. 헌신은 이토록 귀합니다. 포기는 이렇게 멋있는 일입니다.
내가 죽을 듯하게 느끼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얼굴에 활짝 핀 웃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구원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포기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강제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기쁘게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만찬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출처/저자| 하용조 목사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