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의 수용과 꿈의 실현
- <수필시대> 3,4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이번 격월평의 관점은 시대 현실의 아픔을 껴안아야 할 수필가의 현실 인식과 꿈의 실현이다. 반영과 보수라는 측면에서 문학을 바라볼 때,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함께 아파하며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며, 돌파구를 찾도록 문학적인 노력을 다하는 것이 수필가의 올바른 자세다. 해결책이 눈에 보이는 데도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당국자에게는 해결책을 찾도록 언어적 질타를 가해야 할 것이다. 작가라면 '침묵하지 않는다'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침묵한다'는 것은 아예 어떤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규명할 의욕도 의지도 그리고 신념도 없는 자의 비굴함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침묵하지 않는다'는 어딘가 숨어 있는 것에 대하여 기필코 찾아내어 밝히고자 하는 의지이며, '침묵한다'는 눈앞의 현실을 항상 있는 그대로만 수용하고 인정하고 이에 타협해 보려는 안이함이다.
모든 문학이 다 그러하듯이 수필은 우리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하여 존재한다. 특히 수필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가감 없이 구체적으로 표출한다. 그러면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비인간적인 삶이나 부조리한 삶, 모순되거나 가식적인 현실 등을 진솔하게 밝혀낸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각성과 시정을 촉구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특히 경제, 남북 문제 등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작가의 입은 열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위기의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것은 타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그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려는 자세다. 수필가는 현실을 문학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문학적인 인간 행위, 즉 꿈을 키워 나아가야 독자들의 가슴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II.
강미나의 <나막신쟁이 날>이란 작품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작가의 시선이 '개인'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우리 이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간과한 상태에서는 발아될 수 없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작가는 글 속에 시대의 울음을 담아야 한다. '우리'를 지향하는 시선은 응당 현실의 문제를 문학 속에 여과하게 된다. 인간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존재다. 인간의 이러한 숙명으로 볼 때 그늘진 우리 이웃의 고통받는 삶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본질적 과제다.
이 작품은 좌절된 삶, 좌절된 꿈 속에서 절망하는 생선장수 여인의 ‘한’을 그린 수필이다. 어쩌다 남편과 자식을 잃고 살아가는 게 너무 서러워 낮술을 마시고 우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이 자체만으로도 이 수필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 문학적 기능을 다 한다. 문학이 주는 감동은 이런 익숙한 삶의 환기에서도 얻을 수 있다. 삶의 무게에 눌려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의 슬픈 영혼을 달래주지 않는 한, 이 사회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주제의식을 구체화하는 전략 차원에서 작가는 시장 풍경을 수필 속으로 끌어들였다. 성한 곳이 없는 우리 사회의 현재는 곳곳에 불씨가 남아 있다는 것이 이 수필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좌절된 삶과 좌절된 꿈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새로운 꿈과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가져야 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이 수필은 삶의 시련과 좌절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의욕과 희망,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문학의 아름다움이란 기쁨이나 감사 또는 동정이나 연민 등의 감정적 반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형상미학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고유의 강렬한 생명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수필미학의 발견 차원에서 훌륭한 독자들이라면 감상의 필요조건으로서 형식 미학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조건 없이 구조된 것은 예술이라 할 수 없고, 감각적 탁월성, 즉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학에 있어서 ‘미’는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내용을 어떻게 구조화하였느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그 표현이 익숙한 감성에서 뚝 끊어져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킬 때, 미적 쾌감을 주는 것이다.
“야야, 괘 안타. 니 서방, 니 새끼가 우찌 모릴까. 설 대목 제사상에 니 맘만 채리 놓으모 된다아이가. 됐다 고마 울어라” 토닥거린다. 둘둘 감았던 털목도리를 풀어 그녀 목에 둘러준다. 아까보다 더 큰 울음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잦아든 소리에 아지매가 내민 양재기 국물을 눈물로 삼킨다. 오늘 하루 땅으로 기어 햇볕 쬐지 못한 몸뚱이는 태엽 풀리듯이 시나브로 녹는다. 텅 빈 벌판에 빈 대궁의 갈대처럼 서걱이던 그녀가 손수레를 챙긴다. 방에 붙들린 가녀린 허리에, 절룩거리며 우는 언 발을 한 걸음 한 걸음을 뗀다. 등짝에 붙은 손수레 바퀴 그림자가 죽는 해를 찾아간다.
- 강미나, <나막신쟁이의 날>에서 -
본 일의 단순한 기록만으로 수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것이 바로 설명이 아니라 묘사의 묘미다. 수필이 갖는 언어 미학적 요소를 고려한 작가의 표현력이 박진감 있게 전개되면서 작중 인물의 슬픔을 더욱 깊게 그리고 크게 보인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을 ‘절경’으로 만드는 이 같은 연금술사적인 능력이 있는 수필가의 글은 평범한 소재라도 평범함을 뛰어넘는 미적 쾌감을 준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논문도 아닌 문예문에 생소한 어휘랍시고 각주를 달아 그 뜻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행위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란 점을 지적하고 싶다. 문학에서 설명은 문학의 맛을 죽이는 독소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각주를 달 것이 아니라 수필 속에 용해시켜 넣으면 그만인 것이다. ‘나막신쟁이 날’의 유래를 설명하는 게 이 수필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복혜의 <커플링ring>은 소재의 인간화 작업으로 감동을 창출한 작품이다. 소재를 끌고 가는 작가의 기량이 뛰어나다. ‘링’은 반지를 뜻하는 말이다. 수필을 감상하는 진정한 맛은 구체화되고 의미화된 문장을 독자들이 소화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그래서 수필 한 줄의 문장은 한 편의 시구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일반적으로 시 작품에서 시구는 압축과 긴장된 정서를 담보하고 있는 반면, 수필의 문장은 산문정신에 기대어 표현된다고 독자들이 예감하고 읽기 때문에 수필의 형상화된 문장 가치는 시구보다 더 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파편화된 작가의 내면을 관찰해야 하겠지만, 이 작가가 제재에 대하여 품고 있는 생각은 대단히 문학적이다. “결혼 반지를 끼는 것은 상대와 맞닥뜨려 부대끼고 씨름해야 하는 삶의 링에 오르는 일이다”라는 주제의식이 구체화된 문장은 일품이다.
‘반지’의 ‘링’을 언어적 변용을 통해 사각의 ‘링’으로 치환하여, 결혼 생활의 특성을 건투 선수의 사투에 비유한 것은 참신한 발상으로 많은 공감을 획득한다. 수필의 성공은 주제를 의미화할 적확한 제재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다. 손가락에 낄 ‘링’이 건투선수가 싸우는 사각의 ‘링’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앞에서 말한 평범한 감각의 경계를 뛰어넘는 작가의 연금술사적인 능력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는 ‘미’에 대한 미학적 감상의 길을 알고 있다. 단 하나의 ‘링’을 복수의 ‘링’으로 치환하여, 그 의미를 통일성의 기반 하에서 복잡하게 함으로써, 더욱 완전하게 주제를 소화하도록 하는 ‘제재’를 문학적 장치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이 수필 또한 가치를 획득한다. 수필을 형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축인 제재나 주제에 대한 고도의 세련된 인식이 수필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놓는다는 것을 이 작품은 잘 말해준다.
이 수필은 제목을 <커플링ring>으로 해놓고 두 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수필의 구성에는 다양한 구성이 있을 수 있다. 단순구성, 복합구성, 산만구성 등이다. 이런 수필은 복합구성에 해당된다. 수필을 포함하여 예술 작품의 최종 체크포인트는 통일성이다. 예를 들어 한 수필에 두 개의 제재, 세 개의 제재가 있든, 또는 두 개 이상의 이야기로 구성되든, 종국에는 주제가 같아야 된다. 이 수필은 두 개의 제재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하나는 커플링이고, 다른 하나는 단추다. 반지도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고, 단추도 음양의 조화를 나타낸다. 결혼살이란 결국 음양이 만난 부부의 조화로운 결합을 의미하기에 언뜻 보면, 결론적인 주제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지만 주제가 구체화되는 면에서는 좀 다르다. 전자가 변증법적인 삶을 통해 삶에 아귀를 맞출 필요를 역설한다면, 후자는 ‘반’에 해당하는 투쟁 없는 순리적 삶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제목이 대단이 중요한다. 차라리 ‘반지와 단추‘로 하는 게 훨씬 낫겠다. 제목을 ’커플링‘이라 해놓고, 수필 한 편을 이루고 있는 한 축의 제재인 ’단추‘에 대한 언급을 안 하는 것은,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이란 수필 개념을 혼란케 하는 것이다. 주제 정신을 함축하는 두 개의 유사한 제재를 병렬적으로 배치하여 부분에서 전체로 비약 발전시키는 능력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제재의 병렬 조합으로 주제 일반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비교나 대조를 통한 주제의 구체적 접근에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것이다.
배단영의 <갈고리>도 우리 시대 어두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서사 수필로서 감동을 주는 글이다. 작중 주인공인 진태 아버지는 한국동란때 한 쪽 팔을 잃고 극장 매표원을 하며 아들 하나를 키우며 평범하게 삶을 꾸려가는 사람이다. 이 수필은 장애인이지만 자기 일에 만족하며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직장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아들이 가출을 하게 됨으로써 집안이 풍지 박산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해서 망가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결에서 오는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가학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수필이기도 하다. 진태 아버지는 극장주인 아들과 진태가 싸운 관계로 직장에서 쫒겨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버스기사에게 굽실거리며 버스에 올라타는 아버지를 보게 된 진태는 병신자식이라는 아이들의 말보다 견딜 수 없는 치욕감으로 떨었다”는 표현에서 삶 속에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작가는 “아제의 갈고리는 삶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살고자 하는, 살아야 하는 목숨이 달려있는 모든 것들의 항변이었다”고 진술한다. 수필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삶의 마지막 발버둥을 지키지 못해 파탄난 장애인 가정의 몰락을 지켜보며,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한다. “아제가 갈고리로 자신과 아들의 삶을 이어갈 연결고리로 쓰고 싶었던 것처럼 나 자신도 현재를 버티고 서서 더 나은 삶을 영화처럼 꿈꾸고 있다.” 작가는 무지막지한 자본의 폭력에 쓰러져가는 선량한 사람들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도 삶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실현되지 못할지라도 보다 나은 것, 자신이 바라는 것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꿈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진태의 꿈, 진태 아버지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진태와 그 아들은 비굴하지 않는 삶을 꿈꾸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병든 자본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것이 이 수필의 주는 교훈이다. 삶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에는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다는 역설이 강하게 어필되어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수필은 우리에게 명징한 자아인식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이끈다 하겠다.
신상면의 <두려움>은 위기 극복의 지혜를 주제로 내세우고 있는 수필이다. 글의 구조는 금융위기를 맞아 찾아온 어리이집 경영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배경과 그 극복 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깨달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친다면 참다운 의미에서 문학일 수 없다. 그리고 추상적인 제목은 문학의 맛을 앗아간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위기에 맞서 싸우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 일독할만한 가치를 준다. 다만 그 표현이 여운이나 함축으로 승화되지 않고 직설적으로 노출되어 미적 쾌감에 이르지 못하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수필의 감상 포인트는 부부가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상기시켜주는 자상한 면모를 보는 데 있다. 몇 가지 한계를 지니면서도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단서를 전개부 삽화로 끌어들이면서 문학화의 길을 걷는 부분은 바람직한 모습이다.
어느 날 아내는 책을 읽었다며 그 내용을 전했다. ‘조종사가 비행하는데 쥐가 선을 갉아 먹은 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선이라서 쥐를 빨리 없애야 추락을 면할 텐데... 속이 탔다. 고도를 낮출 까 아니면 높일 까. 그는 고민하다가 고도를 순간에 높였다. 얼마 후, 쥐소리가 잠잠하기에 착륙하여 조사해보니 쥐가 죽어있었다. 산소가 없어서 죽은 것이다.’그것이 바로 답이었다.
아내는 생각을 바꿨다. 현재 상태에서 유치원을 팔기보다는 돈을 더 투자하여 유치원 안팎을 손보기로 했다. 건물 전체를 다시 색칠하고, 고장 난 것은 고치고, 필요한 것은 구입하여 원아들이나 학부형들이 깜짝 놀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 뿐 만아니라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또한 아이들이 유치원을 방문했을 때, 꼭 다니고 싶은 욕구가 생기도록 놀이기구를 갖추었다. 그리고 학부형의 입소문을 기대했다. 이러한 몇 년의 수고가 열매를 맺어 이제는 많은 원아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정원에 넘쳐 대기자가 생길 정도까지 이르렀다.
- 신상면, <두려움> 중에서 -
사람의 한 평생은 순간의 선택이 좌우한다. 나이가 들수록 도전과 위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작가는 현재의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 나가 어린이집 경영에 성공했다. 작품의 미적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작가의 의연한 모습이 아니라 발상의 인과관계를 분명히 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에게 닥친 위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위기 앞에 나약해지면 위기는 더 기승을 부리는 법이라는 걸 말해준다. 수필의 주제 전달은 그 과정에서 그것이 문학적 장치에 의존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이 위기를 이겨낼 지혜를 발견하는 데에 있어서, 살아온 연륜 그리고 독서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중요한 진술이다. 부부가 위기 상황에서 투자를 강화하는 지점에서 마음을 맞추고 있다는 것도 향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내용적으로 무난하나 주제를 의미화하는 면에서 문학적인 기교가 요구된다. 구체어로 제목 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제목 뒤에 영어 스팰링도 불필요했다.
III.
이번 월평은 수필을 독자와의 상호교섭 작용으로 이해하면서 현실의 문학적 수용과 꿈의 실현 차원에서 대체적으로 멈출 수 없는 꿈의 문학적 형상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론에서 다루었던 작품들은 부득이한 상황이나 타의에 의해 자신의 꿈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마는 처절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또다시 새로운 꿈을 갖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꿈은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라는, 강렬한 의지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삶의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들을 수필 작품으로 보여주고, 새로운 꿈의 의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실의에 빠진 독자들을 구원하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문학의 역할을 다 한다고 하겠다. 남북 분단의 한을 ‘두만강 물’로 의미화한 오길순의 <뗏목 위의 노래>,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영국 청소부 아줌마의 삶에서 받은 잔잔한 감동을 그린 은옥진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등도 좋은 수필이었다. '남자의 침묵‘에 대한에 유머스런 응시가 돋보인 최재남의 <말 걸면 죽어>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이다. 이들 작품은 감상은 했으나, 지면 관계로 감상 행동의 결과를 올릴 수 없었다. 원망은 고스란히 평자가 안아야 할 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