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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남부면 명사리 쌍효문, 1905년 양한종 사망 사건 보고문(報告文)>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경남 거제시 남부면에는 아주 곱고 깨끗한 모래로 유명한 거제도의 명사십리(明沙十里) 해수욕장이라고 불리는 명사(明沙) 마을이 있다. 이 명사 마을과 면(面) 중심지 저구(猪仇) 마을과의 옛길 경계에 ‘쌍효문(雙孝門)’이 서 있다. 여기 쌍효문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19년 3월 나라에서 지정한 정려(旌閭)로, 전통문화의 얼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여기 명사마을의 ‘쌍효문’에는 효심으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하여 죽은 양씨 집안의 효자와, 남편 사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그의 부인 칠원(漆原) 윤씨(尹氏)가 만들어낸 열녀효부(烈女孝婦)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효심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 ‘쌍효문(雙孝門)’에 관한 양씨 집안의 기록문과 1920년 쌍효문(雙孝門) 낙성식(落成式) 한시(漢詩) 177편을 이미 번역하여 2021년 2월에 발표한 바가 있다. 당시 양씨 문중(梁氏門)의 쌍효록(雙孝錄) 기록문은 양씨 집안의 입장에서 당시 사건을 전개했고, 또한 기록물을 기술 할 시기는 사건 발생(1905년) 후 이미 10여 년이 흐른 후였지만, 다른 특별한 자료가 없어 양씨 집안의 기록물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 『각사등록(各司謄錄)』과 『창원항보첩(昌原港報牒)』에서 「1905년 8월9일 거제군 명사리 양한종 사망 사건 보고문(報告文)」을 발견하고 급히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이 「보고문(報告文)」은 사건 발생 몇 달 후에 직접 파견 나온 관리에 의해 사건을 조사한 보고서인지라, 대체로 객관적인 상황임을 알게 해준다. 이에 이번 지면을 빌려 1905년 명사리(明沙里) 양씨 문중(梁氏門)의 쌍효문(雙孝門)의 주인공 양한종(梁瀚鍾 1875~1905) 사망 사건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 먼저 ①<양씨 집안의 쌍효문(雙孝門) 기록문>의 사건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겠다. 내용은 이러하다. 1905년 5월, 남부면(당시 동부면) 명사마을 앞바다에 해적(왜구) 무리가 배 7척을 이끌고 침입했다. 해적들은 마을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박해 온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 사람들은 해적의 횡포를 막을 길이 없어 동동 구르고 있을 즈음, 마을 촌장(이장)이었던 양재현(梁在現) 씨가 해적 앞을 막아섰다. 그날 양씨는 홀로 해적 앞에 서서, 그들을 좋은 말로 타일렀다. 그러자 해적 무리 중 하나가 칼을 빼들고 양씨를 찌르려고 덤벼들었고 옆에 있던 양씨의 아들 양한종(梁瀚鍾 1875~1905)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대신 칼을 맞고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해적 무리가 훔친 양식과 재물을 배에 실어 도망가던 중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의 심판이었는지 왜적들이 바다로 도망하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배가 순식간에 뒤집혀 도적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몰살되었다는 내용이다.
○ 그런데 ②『창원항보첩(昌原港報牒)』에 수록된 「1905년 8월9일 거제군 명사리 양한종(梁瀚宗) 사망 사건 보고문(報告文)」 내용은 이러하다. 1905년 6월 12일 일본 유람선 7척이 거제군 명사리 근포 앞바다에 정박했다. 일본인 선원 7명이 상륙하여 민가에 난입, 엽전 2냥으로 달걀을 사겠다며 행패를 부렸다. 이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개를 때려죽이려 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려 했으며, 해산물을 무단 탈취하고 노인의 지팡이를 뺏어 때리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주민들과 충돌 상황이 발생했다. 70세 노인 장영직(張英直)이 만류하다가 구타당하자, 그의 아들 장한룡(張漢龍)이 분노하여 일본인의 뺨을 때렸다. 이에 일본인들은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려 하고 장영직을 배로 납치하려고 했다. 이를 보고 마을 이장(洞首)인 양내형(梁乃亨)이 이를 말리다가 다시 구타와 납치 위협을 당하였고, 그의 아들 양한종(梁瀚宗)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일본인을 때리며 저항했다. 결국 일본인 6명이 허리에서 칼을 뽑아 군중을 향해 휘둘렸다. 이에 양한종(왼쪽 쇄골 부위를 칼에 찔려 즉사)이 사망하고 옥성겸, 양내형, 김윤서, 양태숙 등 4명(자창의 깊이가 깊어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이 부상을 당했다. 이후 조선 정부(창원감리)가 일본 영사에게 범인 체포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살인을 저지른 일본인들은 사건 직후 배를 타고 도주하여 일본 영사관 측은 "찾아봤으나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며 회피했다는 내용이다.
○ 참고로, 명사리 「쌍효문(雙孝門)」은 1919년 3월, 양한종(梁瀚鍾 1875~1905)의 아들인 영복(泳福) 영희(泳禧) 영상(泳翔) 3형제가 세운 것이다. 내부의 쌍효기실비(雙孝紀實碑)는 감장을 하여 보호각을 설치하였고 보호각의 문 위에 「雙孝門」이라 새겨져 있다. 비제는「有朝鮮朝奉大夫童蒙敎官南原梁澣鐘璂妻淑夫人漆原尹氏雙孝紀實碑」로 되어 있다. (유조선 조봉대부 동몽교관 남원 양한종 기처 숙부인 칠원 윤씨 쌍효기실비)
○ 그리고 이듬해 1920년 경신년(庚申年)에 거제지역 유림은 물론 경상도·제주도·전라도의 유림들이 세상에 본보기가 됨을 기념하는 쌍효비를 칭송한 여러 글들을 모아 「쌍효록(雙孝錄)」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양씨 문중에 보관돼 오고 있다. 또한 효자를 잃고 효손을 두게 된 경위와 과부가 된 윤씨가 시아버지를 극진히 공경하고 모신 경위를 쌍효록에 자세히 기록하였고, 마을 어귀에다 세상의 본보기가 됨을 기념하고자 쌍효비를 세웠다. 쌍효록(雙孝錄)에 기록되어 있는 한시(漢詩)들을 살펴보면, 총 175명이 참여하여 177편의 한시(漢詩)를 남겼고, 7언 율시 162편, 7언 절구 9편, 5언 율시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편(詩篇)의 작가는 현(現) 거제시 거주자가 129명이고, 한산면은 14명, 통영은 12명, 그 외 전라도(14명)와 경남 일대의 분들이다.
○ 지금도 남부면 명사마을에는 양희운 씨를 비롯한 6가구 20여 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명사초등학교 입구에는 명사 마을 사람들이 1923년(계해년 봄)에 세운 양한종의 아버지 양재현 공의 시덕비(梁公在現 施德碑 癸亥春 里民 竪)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내용은, “양재현 공의 시덕비를 계해년 1923년 봄에 마을 사람들이 세웠다.”
● 「1905년 8월9일 거제군 명사리 양한종 사망 사건 조사 보고문(報告文)」
이 「보고문(報告文)」은 광무 9년(1905년) 8월 9일자 보고서 제56호의 내용으로, 당시 거제군수 윤상우가 외부(외부대신)에게 보고한 '거제도 명사리(현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 명사마을) 일본인 살상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당시 일본 영사관의 미온적인 태도와 범인 도주로 인해 사건 해결이 난항을 겪고 있던 절박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요약건대 살인을 저지른 일본인들은 사건 직후 배를 타고 도주했다. 조선 정부(창원감리)가 일본 영사에게 범인 체포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일본 측은 "찾아봤으나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며 회피했다. 자국 백성이 참혹하게 죽었음에도 범인이 외국인(일본인)이고 도주 중이라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끝까지 추적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내용인즉, 6월 12일 일본 유람선 7척이 거제군 명사리 근포 앞바다에 정박했다. 일본인 선원 7명이 상륙하여 민가에 난입, 엽전 2냥으로 달걀을 사겠다며 행패를 부렸다. 이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개를 때려죽이려 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려 했으며, 해산물을 무단 탈취하고 노인의 지팡이를 뺏어 때리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충돌 상황이 발생했다. 70세 노인 장영직이 만류하다가 구타당하자, 그의 아들 장한룡이 분노하여 일본인의 뺨을 때렸다. 이에 일본인들은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려 하고 장영직을 배로 납치하려 했다. 마을 이장 양내형이 이를 말리다 다시 구타와 납치 위협을 당하자, 그의 아들 양한종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일본인을 때리며 저항했다. 결국 일본인 6명이 허리에서 칼을 뽑아 군중을 향해 휘둘려다 보니 양한종(왼쪽 쇄골 부위를 칼에 찔려 즉사)이 사망하고 옥성겸, 양내형, 김윤서, 양태숙 등 4명(자창의 깊이가 깊어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이 부상을 당했다.
이후에 거제군수 윤상우가 직접 현장에 가서 시신을 검시(검척)하고 부상 상태를 확인하여 상부에 보고하게 된 것이다. 이 기록은 대한제국 말기, 일본인들의 무도한 횡포와 이에 맞선 우리 민초들의 저항, 그리고 당시의 참혹했던 인명 피해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료다.
* 덧붙여 이번 「1905년 8월9일 거제군 명사리 양한종 사망 사건 보고문(報告文)」은 발신자가 창원감리(昌原監理) 현학표(玄學杓)이고 수신자는 외무대신(外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창원항보첩(昌原港報牒)』이다.
*「1905년 8월9일 거제군 명사리 양한종 사망 사건 조사 보고문(報告文)」*
광무 9년 8월 9일(光武九年八月九日) 보고 제56호. 본년(1905년) 6월분에 거제군수 윤상우의 보고를 접수하여 검토한즉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번 달 16일에 본군 명사리 임음(任陰)이 5월 12일 자로 올린 수본(보고서)을 접수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일본 유람선 7척이 본 마을 경계인 근포(芹浦) 앞바다에 떠 있었는데, 오늘(5월 12일) 그 배의 선원 7명이 작은 배를 타고 해당 포구 마을 앞으로 상륙하였습니다.
이들이 상인과 백성들의 해산물을 강제로 빼앗는 일로 시비가 오가며 다투다가, 결국 마을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려 5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중 양한종(梁瀚宗)은 즉사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군수(본인)가 직접 범행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당일 명사리로 달려갔습니다. 칼에 찔려 죽거나 다친 자와 매를 맞아 상처를 입은 자들을 차례로 조사해 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피해 상황] 사망자 양한종의 왼쪽 쇄골 부위에 칼에 찔린 흔적 한 곳이 있었습니다. 검척(치수를 잼)으로 측정하니 상처의 둘레 길이는 2촌 2분(약 6.6cm), 너비는 6분(약 1.8cm)이었으며, 깊이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습니다. 또 부상자 옥성겸·양내형·김윤서·양태숙 등 4명은 칼에 찔린 상처가 각기 깊거나 얕았으며 부위 또한 위중하거나 가벼운 차이가 있었으나, 아직 생사를 판가름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우선 상처의 모양과 치수는 재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경위] 일본인들과 충돌하여 칼에 찔리게 된 근본 원인을 조사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해당 선원들이 당일 낮 정오쯤에 우리나라 엽전 2냥을 들고 와서 달걀을 사겠다고 하며, 마을의 집집마다 함부로 쳐들어갔습니다. 짖는 개를 만나면 때려죽이려 하고, 밭일하는 부녀자를 보면 쫓아가 겁탈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걸어 놓은 조개(해산물)를 값도 치르지 않고 빼앗았으며, 구걸하는 노인의 지팡이를 빼앗아 도리어 노인을 때렸습니다.
이에 마을 주민 중 나이가 70세에 가까운 노인들을 때리는 행동을 보고 장영직(張英直)이 말리자, 일본인이 또 장영직을 때렸습니다. 장영직의 아들 장한룡(張漢龍)이 그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일본인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려 하고, 장영직을 붙잡아 자기네 배로 실어가려 했습니다. 이때 마을의 이장(洞首)인 양내형(梁乃亨)이 타이르며 이를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내형의 뺨을 때리고 억지로 끌고 가려 했습니다.
이에 양내형의 아들 양한종(梁瀚宗)이 끌려가는 아버지를 붙잡아 말리며 일본인을 한 차례 때리자, 일본인 6명이 갑자기 허리 사이에서 칼을 뽑아 들고 사람들 틈 속에서 마구 휘둘렀습니다. 이때 양한종은 중상을 입고 즉사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상처를 입고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창원감리 현학표의 보고] "해당 마을 사람들의 진술(招)이 한결같이 일치합니다. 이 사건은 이미 사람의 목숨이 달린 중대한 범죄(人命之獄)이므로, 마땅히 범인을 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범행을 저지른 일본 배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즉시 도망쳐버려 붙잡아 대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외국인의 범행이라 하여 조사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한 법의 근본(삼장)이 이로부터 영원히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이에 그 대략적인 상황을 보고하오니, 그날 정박했던 증기선이 아닌 돛단배(帆船) 7척에 탔던 일본인들의 행적을 일본 영사에게 특별히 통지하여, 그들을 수색해 잡을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이를 근거로 조사해 보니, 외국인이 개항장도 아닌 곳에 멋대로 들어와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물건을 사겠다고 무례하게 행동하다가 끝내 사람의 목숨까지 살해했으니, 듣기에 매우 놀랍고 비참합니다.
이에 경무서 순검과 일본 순사를 해당 지방에 함께 파견하여 모든 형편을 조사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성명을 알 수 없는 그 일본인을 찾아내어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라는 뜻을 주항(마산항) 일본 영사에게 즉시 통지하고 여러 차례 직접 독촉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당 영사는 '여러 항구를 샅샅이 뒤졌으나 자취를 감추었다'라고만 답할 뿐입니다.
해당 군(거제군)의 보고서와 유가족(尸親)의 소송장이 연달아 접수되고 있고, 죽은 자의 원한을 갚아주는 것이 참으로 급한 일이나, 도망친 범인을 찾아내기 어려우니 상황을 돌이켜볼 때 매우 답답하고 민망할 따름입니다. 이에 보고하오니 살펴 보시고 법에 따라 처리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광무 9년 8월 9일. 창원감리 현학표, 외부대신 이하영 각하 앞.
*[정부의 지령 제71호] "양민(백성)이 피해를 입은 것이 참으로 슬프도다. 해당 범인이 스스로 죄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멀리 도망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니, 일본 영사와 다시 교섭하여 반드시 찾아내어 처형함으로써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원한이 없도록 할 것." 8월 15일.
[光武九年八月九日. 報告第五十六號. 本年六月份에 巨濟郡守尹相佑報告 接閱온즉 內稱, 本月十六日에 本郡明沙里任陰五月十二日出 手本을 接准온즉, 內開에日本周覽之船七隻이 浮在於本里境芹浦前洋, 而今日에 同船格七名이 乘小艇下陸於該浦村前야 以奪取商民海物之事로 有言往言來之詰이다가, 畢竟에 棒打我人, 致傷者五人內에 梁瀚宗이 卽死고 其餘人은 未分死生이다잇기로, 郡守躬審摘奸次, 當日馳往于明沙里야 其被刺而死與傷者와 被打而致傷云者을 次第摘奸온즉, 死者梁瀚宗은左缺盆骨에 有被刺痕一庫듸 以檢尺量之즉 圍圓長이 二寸二分이요 廣이 六分이요 深難以量이올고, 被其刺傷之玉性兼·梁乃亨·金允瑞·梁太淑等四人은 刃傷이 各有淺深고 部位가 亦有緊歇야 其死其生이 猶在未判故로, 被刺形樣을 姑不尺量옵고 第其與日人致鬧被刺之根委 査問온즉, 其鬧事根因은 同日船之人이 當日近午에 持我葉錢二兩고 謂買鷄卵, 而攔入該村家家야遇吠犬則打之欲殺고, 見田婦則逐而欲劫고 見掛蛤而無價奪之고 有丐老而奪杖反打키에, 該村民人中, 年近七十之張英直이爲挽打丐之擧즉 又打英直커늘 英直之子漢龍이 憤其父之被打, 而打日人之頰니, 日人이 灑石油而欲放火고 捽英直而載其船제 該洞首梁乃亨이 諭以止之즉, 日人이 不惟不聽其諭止之言이라 乃打乃亨之頰, 而且欲曳而載커늘 乃亨之子瀚宗이 扶挽其父之曳往고, 且執日人而一打즉 日人六名이 忽出腰間之刀야 在人稠中而揮刺제 瀚宗은受重卽死고 餘人은 受輕尙在이다. 該洞各人之招가 一辭同然이온바 此事가 旣係人命之獄니 質問이 當有元犯之招. 而該犯日船之人이 見此人死而伊卽逃去야 未得捉質오나 此以外國人犯, 而置諸不究면 古今莫越之三章이 惟恐從此而永泯이옵기, 玆陳其槪報告오니 同日船七隻不汽伊帆之日人形跡을 特爲知照于日領事시여 俾爲詗捉等因이온바, 此 據査오니 外國人이 擅入未通商口岸야 未解言語고 要買需品이라가 恣行無禮야 竟至於殺害人命오미, 聞極驚慘이기 警署巡檢과 日本巡査 竝爲派送于該地方야 所有情形을 摘奸以來고, 該姓名不知日本人을 査捉償命之意로駐港日領事에게 卽行照請고 屢回面催이오되, 該領事所答이 廣探各港에 埋沒踪跡이다오며 該郡報牒과 尸親訴狀은 迭相接到이올더려 比死者償命이 寔係急務이오나 在逃元犯을 難以詗捉이다온즉, 顧念事狀에 極涉悶▼{忄+益}이기 玆에 報告오니 査照셔 按章處辦심을 伏望. 光武九年八月九日. 昌原監理玄學杓, 外部大臣李夏榮閣下.
指令第七十一號, 梁民之被害가 吁亦慼矣라. 該犯이 自知罪固難逭고 遠颺不現다즉 日領事와 又復交涉야 期要詗捉處刑야幽明無冤케 事. 十五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