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철학을 개척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인생 역정(歷程)>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개성(松都) 출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퇴계(退溪)보다 12년 먼저 세상에 나온 인물로, 우리에게 박연폭포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더 각인되어 있으며,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개척했으며,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의 선비로 생을 마친, 주기학파의 영수였다는 사실에 우리는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는 중국의 기철학자 장재(張載·1020∼1077)에 못지않은 독자적인 ‘기(氣)’의 세계관을 연 인물이다. 그의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은 삶과 죽음은 기의 모임과 흩어짐과 같다고 적고 있다. 이는 귀신과 신의 변용에 대한 논변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을 정도이다. 그의 깨달음의 경지와 차도에 이른 인물은 여태껏 흔치 않다. 화담의 제자로는 영의정을 지낸 허엽(許曄 1517~1580)이나 박순(朴淳 1523~1589),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 민순(閔純), 박지화(朴枝華), 서기(徐起), 한백겸(韓百謙)과 같은 걸출한 선비들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 전해져 오는 얘기에 따르면, 황진이(黃眞伊)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키고 뒤이어 화담(花潭)을 유혹하려 찾아갔다. 그런데 유혹하는데 실패하고 그의 인품에 반했다는데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는 정말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실천한 높은 인격의 군자였을까? 아니면 명망의 굴레에 매인 소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여자에 대한 결벽증이라도 있는 사람일까? 조선시대에는 당연한 관습이었지만 화담은 본부인에게 아들 하나, 첩에게서 아들 둘을 가진 엄연한 가장이었다. 개인적으로, 화담과 황진이가 절제된 연인 관계였는지 아니면 학문적 사제 관계로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추측건대 그 두 가지 복합된 관계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뒤에 황진이를 그리워하는 글을 남긴 걸 보면 화담 또한 황진이에 대한 연정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황진이와 서경덕의 얘기는 조선시대에 불교(스님)보다 유교(유학자)가 더 우수함을 알리고자 각색되어 정착된 일화일 것이다.
그러나 화담(花潭)이 평생을 가난하고 고고하게 살다간 선비였음은 분명한 것 같다. 화담이 18세에 이르러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구절을 보고는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이고 날마다 그 이치를 궁구했다고 한다. 사색이 너무 지나쳐 병이 생기기도 했으나 그렇게 6년을 궁리한 후 만물의 이치를 홀로 터득했다. 스승 없이 사색만으로 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 뒤 화담은 입신양명보다는 자연과 제자와 더불어 학문과 예술을 논하며 깨끗하게 살았다. 죽기 전에 화담은 하인에게 목욕을 시키도록 하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죽고 사는 이치를 안 지 이미 오래다. 생각이 편안하다." 그가 살았던 화담(花潭)은 장단(長湍)의 오관산(五冠山) 아래 영통동(靈通洞) 어귀에 있는데, 본래 호칭은 화암(花巖)이었다고 한다. 산에는 두견화(杜鵑花 철쭉)가 많아서 못의 물에 붉게 비치니, 화담(花潭)이라는 이름은 이로 인해 얻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화담의 부모님 산소가 있어 그가 평생 여기에 정착해 살았다. 이제 화담은 아름다운 자연풍광 보다는 서경덕이라는 대학자가 거처하는 곳으로 더 명성을 얻었다. 이에 그는 ‘花潭’을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 원시유교에 이(理)와 기(氣)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철학적으로 심화한 중국 주자학이 조선 중기에 들어오면서 드디어 조선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주자학의 토착화이다. 이러한 토착화는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주리학파와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주기학파, 그리고 그 중간에서 이기의 상호작용에 비중을 두는 학파로 가닥을 잡는다. 그 주리학파의 영수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고, 주기학파의 영수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고, 그 중간이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였다. 조선 중기에 벌어진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는 아까운 인재들을 많이 앗아갔다. 이런 당쟁과 시련 속에서도 한국 성리학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 퇴계의 스승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율곡 이이인데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이가 화담 서경덕이었다.
●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서경덕은 독특한 학풍(學風)과 여러 기행(奇行)으로 이황·조식·이이와는 또 다른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정통 성리학과는 다소 거리를 둔 유학 해석과 학문 방법으로 명성을 떨쳤다. 먼저 서경덕은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는 다른 기(氣)를 중시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학설을 주장하였다. 하나의 원기(元氣)를 철학의 근본 주제로 삼아 “기(氣)는 우주공간에 충만해 있으며, 태허(太虛)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것(空無)이 아닌 기(氣)의 본체(本體)를 말한다.”는 독특한 주장을 내놓았다. 또한 기(氣)로 충만한 우주공간에서 양기(陽氣)와 음기(陰氣)의 움직임을 주재(主宰)하는 것은 이(理)이고, 이(理)는 기(氣)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제시했다. 좀 더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은 만물의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이(理)와 변화하는 현상태를 기(氣)로 나누어 보는 반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기(氣)가 만물의 본체(本體)이고 이(理)는 기(氣)와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 좀 무리가 있지만 서양철학의 관점에 따라 비유해보면, 이(理)를 관념, 기(氣)를 물질로 개념 지울 수 있다.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은 관념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관념인 이(理)가 물질인 기(氣)의 주재자(主宰者)라고 보기 때문에 물질을 관념보다 중시하는 ‘관념론(觀念論)’ 철학(정신, 이성 따위의 인간의 의식으로 물질적 현상을 밝히려는 이론)이라고 한다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물질인 기(氣)를 만물의 본체로 보고 이기(理氣)를 일체(一體)로 본다는 점에서 ‘유물론(만물의 근원은 물질)’ 철학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때문에 서경덕의 철학에 유물론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이황과 이이는 일찍부터 “그는 유학의 정통이 아니다”거나 “서경덕의 학문은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가 아닌 장횡거(張橫渠)에게서 나왔다”고 하면서 경계했다.
그런고로 서경덕은 조선의 철학사에서 유물론적 성향을 지녔던 아주 희귀한 유학자였다. 또한 서경덕은 학문하는 방법에서도 정통 성리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성리학의 태두인 주자의 학문 방법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독서(讀書)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면 마침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서경덕은 18세 때에 이미 독서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을 부정하고, 먼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직접 탐구한 후, 독서를 통해 확인하는 방법으로 학문을 했다.
● 서화담(徐花潭)의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서경덕(徐敬德)의 귀신사생론은 서경덕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설명한 것이다. 기일원론은, 우주 만물은 기(氣)에 의해서 생성되고 존재한다는 본체론(本體論)의 한 이론으로, 주자학(朱子學)에서는 현상계(現象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기(氣)이고, 그 기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는 것은 이(理)라고 하는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본체론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서경덕은 이와는 달리 우주 만물의 근원을 기(氣)로 보았다. 그런데 그 근원으로서의 기는 우주를 포함하고도 남는 무한량한 것이며, 가득 차 있어 빈틈이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이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만물을 생성하는 것으로, 이를 태허(太虛)라고 부른다. 이 태허는 바로 선천(先天)의 기(氣)로서, 이 선천의 기가 스스로의 힘에 의해 운동 변화하여 후천(後天)의 기로 된다. 여기서 태허로서의 일기(一氣)는 음양(陰陽)의 이기(二氣)로 분화함과 동시에 음과 양이 상호 작용을 하여 우주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주자(朱子)가 이(理)를 최고의 존재 원리로 보는 데 반해 서경덕은 기(氣)의 밖에 이(理)가 절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이(理)는 기(氣)가 작용할 때 그 바름을 잃지 않도록 하는데 불과한 것으로, 이는 기보다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한마디로 서경덕은 기(氣)가 최고의 존재 원리이며, 스스로 운동 변화하며, 이는 기가 운동 변화할 때 내재하는 원인(原因)으로 보았다.
●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한문학(漢文學) 화담(花潭)의 시는 세속의 시비경쟁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면서 진중하고 담박한 삶을 영위하는 선비의 자세를 담고 있다. 옛 선비들은 이러한 시들을 짓고 감상하며 노래했다. 화담(花潭)의 초려(草廬)를 닮은 곳에 모여 누군가 운치 있는 시를 지으면, 묵객의 변화무쌍한 운필이 화선지를 수놓고, 율객의 악기들은 시상(詩想)을 좇아 오묘한 소리를 지어 내었으며, 가객은 선율을 따라 청아한 목소리로 시를 노래했다. 그러한 공간을 풍류방이라고 불렀다. 풍류방의 선비들은 시향과 묵향 그리고 노래의 향기에 깊게 물들었다. 마치 '꽃을 희롱하니 옷에 향기가 가득하네(弄花香滿衣)'라는 옛 구절처럼 말이다. 풍류방에서 부르던 그러한 노래를 정가(正歌 가곡, 가사, 시조)라고 한다.
1) 책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讀書有感] / 서경덕(徐敬德 1489~1546) 讀書當日志經綸 독서를 하던 날에는 뜻을 경륜에 두었건만 歲暮還甘顔氏貧 늘그막에 안자(顔子)의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즐거이 돌아왔네. 富貴有爭難下手 부귀에는 늘 다툼이 있어 마음이 가질 않으나 林泉無禁可安身 숲과 샘은 탐하는 이 없으니 내 몸 편히 의지하네 探山釣水堪充腹 산을 찾고 강에서 고기 낚아 배를 채우며 詠月吟風足暢神 달을 노래하고 바름을 읊으니 정신이 즐겁고 만족하구나. 學到不疑眞快樂 학문은 진실한 즐거움을 알기에 의심 없이 도달하여 免敎虛作百年人 백년의 인생을 허무하게 살아가는 것을 면하도록 가르쳐 주네.
○ 조선 중기의 대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독서(讀書)>라는 자신의 시 속에 '부귀에는 늘 다툼이 있어 마음이 가질 않으나, 숲과 샘은 탐하는 이 없으니 내 몸 편히 의지하네'라고 갈파하며 탈속의 쇄락(灑落 개운하고 깨끗함)함을 즐겼다. 화담선생은 명리와 권세의 번화(繁華 번창하고 화려함)함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이른 아침 홀로 깨어 솔숲의 바람소리, 돌 위의 냇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담박(澹泊)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 차렸다.
2) 산거[山居] 1. 산에서 지내며 / 서경덕(徐敬德 1489~1546) 雲巖我卜居 내 운암에 살기로 한 것은 端爲性慵疏 다만 성품이 못나고 엉성하기 때문이네 林坐朋幽鳥 숲 속에 앉아 새들과 벗하고 溪行伴戲魚 개울가를 거닐며 고기들과 함께 즐긴다네 閒揮花塢帚 한가할 땐 꽃 언덕 길 쓸고 時荷藥畦鋤 때론 호미 들고 약초밭 매러 간다네 自外渾無事 이 밖엔 할 일 없어 茶餘閱古書 차 마시고 옛 책 본다네
○ 이 시는 산에 살면서 누리는 한가로운 정서를 노래한 것이다. 자연 속 운암에 살게 된 까닭은 모두 내 성질이 게으르고 사람을 잘못 사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자연을 벗 삼아 숲에 앉아서는 조용한 새와 벗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시냇가를 거닐며 노니는 물고기와 짝한다. 시간이 나면 한가롭게 꽃이 떨어진 언덕을 빗자루로 쓸고, 때로는 호미를 메고 약초밭에 가서 김을 맨다. 세상 밖의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니 차를 끓여 마신 뒤에는 한가롭게 옛글을 읽는다.
3) 산거[山居] 2. 산에서 지내며 / 서경덕(徐敬德 1489~1546) 花潭一草廬 화담의 한 칸 초가집은 瀟洒類僊居 신선이 사는 곳처럼 깨끗하네 山簇開軒面 창을 열면 늘어선 산들이 가깝고 泉絃咽枕虛 베갯머리엔 시냇물 소리가 조용하네 洞幽風淡蕩 골짜기 깊으니 바람 시원하고 境僻樹扶疏 땅이 외지니 나무가 무성하네 中有逍遙子 그 속을 거니는 한 사람이 있어 淸朝好讀書 맑은 아침 즐거이 독서를 하네
○ 송악산 오관산 자락 화담(花潭 꽃 피는 연못)에 한 칸 초가집이 한 채 있는데 맑고 깨끗하여 마치 신선이 사는 집 같다. 그 집 앞의 산들은 옹기종기 겹쳐 저 멀리까지 펼쳐졌고 집 앞을 흐르는 샘물 소리는 허공에 울려 퍼지고 있다. 골짜기 그윽하여 깊으니 바람이 돌아 흘러 소슬하게 불고, 그곳이 궁벽한 곳이라 사람의 베임을 벗어나 나무도 울창하게 자랐다. 그 화담에서 소요하는 나는 맑은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롭게 독서를 즐긴다.
4) 쏙독새 소리를 듣고[聞鼓刀] / 서경덕(徐敬德 1489~1546) 有鳥凌晨勸鼓刀 새벽부터 웬 새가 쏙독쏙독 울어 대나 鼓刀應在割烹庖 부엌에서 고기 장만할 때 내는 소리라네. 年年盤上無鹽久 해마다 밥상에는 무염식이 오래인데 莫向茅齋苦叫號 초가 향해 괴롭게 부르짖지 말려무나.
○ 새벽부터 쏙독새가 “쏙독쏙독 쏙독쏙독” 도마 칼질하는 소리를 내며 울어댄다. 빨리 일어나 부엌에 나가서 칼질을 하라는 것인가? 칼질이야 썰 고기가 있어야 하지. 고기는커녕 생선 한 토막 구경한지가 언젠데 무슨 도마질 하라고 재촉이람. 띳집의 조촐한 삶과 한 그루 감나무에 올라앉아 쏙독새 우는 풍경을 그려냈다. 없이 살아도 없는 줄 모르면 행복이련만, 저노무 쏙독새가 남의 애를 끓인다.
● 화담서원(花潭書院)은 개성(開城)에 있었던 화곡서원(花谷書院)으로, 1609년(광해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경덕(徐敬德)·박순(朴淳)·민순(閔純)·허엽(許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35년(인조13)에 ‘화곡(花谷)’이라 사액되었고, 1871년(고종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5) 우연히 짓다[偶吟] / 서경덕(徐敬德 1489~1546) 殘月西沈後 조각달이 막 서쪽으로 넘어갔고 古琴彈歇初 타던 거문고 소리 비로소 멎었어라 明喧交暗寂 밝고 소란함과 어둡고 적막함이 섞이니 這裏妙何如 (묻노니) 이 속의 오묘한 이치 그대는 아는가?
○ 황진이 뿐만 아니라 서경덕도 거문고를 즐겨 탔다. 위 시에서 나타나듯이 밤 자정이 넘으면 세상은 짙은 어둠에 쌓이고 음(陰)의 기운이 극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음이 극에 달하면 밝은 양(陽)의 기운이 시작된다. 조각달이 서쪽으로 넘어감으로써 다시 양기운이 시작되는 것과 같이, 거문고 연주의 양 기운에서 거문고 그친 음기운으로 교대하는 음양론을 표현하고 있다. 음기운의 마지막인 새벽달이 사라짐은 음에서 양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고, 반대로 거문고는 음의 새벽달이 있는 동안에 수선거리는 소리로 연주를 하여 음양의 짝을 맞추다가 새벽달이 사라지고 아침 양기운이 완연해 지자 거문고 연주를 멈춤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옛 선비들이 거문고를 사랑함은 이러한 음양철학이 악기 자체에 스며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고 더욱이 화담 같은 기(氣) 철학자의 시에 거문고를 등장시켰던 것도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다.
6) 유수(留守) 심언경(沈彦慶)에 차운하여[次留守沈相國彦慶韻] / 서경덕(徐敬德) 自喜淸時作逸民 맑은 세상에 숨어 사는 사람된 것 스스로 기뻐하고 還嫌投刺謁邦君 명함 내밀어 임금 뵙는 일 도리어 꺼린다네 無才醫國趨風土 풍토에 맞춰 나라를 바로잡을 재주 없어 有約棲山卧白雲 흰구름 베고 누우며 산에서 살기로 했네 世上功名雖不做 세상의 공명을 얻지는 못했지만 道中糟粕尙能分 도리와 관계된 것은 그래도 분간할 줄 안다네 睡餘忽被垂佳句 졸다 일어나 뜻밖에 좋은 시구 받고서 爲謝先生更右文 선생께서 다시 문(文)을 숭상하심에 감사드리네.
이 시는 개성 유수 심언경(沈彦慶)이 보낸 시에서 차운해 지은 작품인데, 벼슬살이는 자신과 맞지 않아 하지 않지만 도리를 분별하는 일만큼은 잘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내용이다.
7)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 양경우(梁慶遇 1568~1629) 存無蹤迹死無名 살아서 자취 없고 죽어 이름 없으니 自是高人遁世情 고인이 속세의 정을 벗어났기 때문 不有山花隨水去 흐르는 물에 떠가는 산꽃이 아니면 秖今誰更識先生 지금에 누가 다시 선생을 알겠는가
8) 화담[花潭] 화담의 경치 / 성현(成俔 1439~1504) 碧山如畫間晴嵐 그림 같은 청산에 갠 아지랑이 가물거리고 觸石鳴泉落小潭 샘물은 콸콸 돌에 부딪쳐 못으로 떨어지네 滿眼奇觀深不足 눈에 가득 뛰어난 경관 못다 본 게 많은데 僕夫嗔我屢停驂 마부는 내 말 자주 멈추는 걸 짜증 내누나
● 서경덕의 명성은 수 백 년이 흐른 후에도 약해지기는커녕 더욱 빛을 발했다. 군사(君師)라 자처할 만큼 제왕이면서 동시에 한국사 최고의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정조왕까지 나서서 특별히 서화담 선생(徐花潭先生)을 중국 북송(北宋) 때의 대사상가인 소강절(邵康節)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극찬했기 때문이다. 서경덕의 기(氣)철학은 음양이 만물의 본체가 될 뿐만 아니라, 우주론적 방면으로 발전해 천도(天道)와 하나가 되고 도덕적인 의미까지 획득하게 된다는 송대의 음양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사물까지도 천체에서 어둠의 음(陰)과 밝음의 양(陽)이 따로 분리될 수 없듯이(일체), 리(理)와 기(氣)도 하나라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가 <우연히 짓다(偶吟)> 시에서 비유한 거문고 소리는 물론, 작은 물건 하나까지 이를 적용해서 만물의 이치를 판단하려 했다.
○ 한편 현대과학에서는 이러한 음양론(陰陽論)과 이기론(理氣論)은, 황당한 사변적 추상적인 이론일 뿐이다. 특히 거문고 소리 유무를 음양에다 연결시킨 화담의 논리는, 아무리 500년 전이라도 터무니없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음양론, 즉 일음일양(한번 음이 되면 한번 양이 된다)은 천지의 도(道)인데 물(物)은 음양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음양으로 말미암아 이룬다.”는 논리가 주역(周易)을 포함한 철학서 오경(五經)까지 기저에 깔려, 오랜 세월 동양인의 의식을 지배하다보니 새로운 패러다임은 물론, 현대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또한 '누구는 누구의 제자'라느니, '그 누구는 누구를 사숙했으므로 누구의 학문(도통)은 누구를 통해 누구에게 이어졌다'느니. 학연 지연 혈연을 통해 짙게 드리운 폐쇄성, 이것이 동아시아 사상사를 설명하는 판에 박힌 소위 '도통론'(道通論)이다. 동양철학을 공부할수록 안타까운 심정에 때때로 가슴이 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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