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세번째 사랑 못밝힌다…대학 때 꽤 알려진 그 여인
이문열, 시대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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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내 연애 소설은 왜 실패했나
실패한 사랑 이야기를 할 때 이문열의 낭만주의가 가장 소담스럽다고 말한 이는 역시 평론가 유종호 선생이었다. 내 초기 단편 ‘폐원(廢苑)’을 거론하면서다. 1980년 소설집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 붙인 ‘출발의 작가’라는 해설에서, 선생은 소설집에 실린 ‘폐원’이 잃어버리거나 금지돼서 더욱 치열한, 낭만주의 가운데서도 가장 낭만적인 모티브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어 강렬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향처럼, 금단(禁斷) 앞에서 더욱 격렬해지는 정념(情念)이 ‘지금 여기’의 황폐한 삶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동경하는 낭만주의를 부른다는 뜻이었다.
문학은 어쩌면 삶을 속속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자가 꿈꾸는, 이제까지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꿈인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도 그런 낭만적인 사랑이 있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
다만 내 경우 때로는 토니오 크뢰거와 같은 무기력한 사랑이었다.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혼혈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처럼 금발의 잉에, 잉에보르크 홀름을 홀린 듯한 눈으로 바라볼 뿐 끝내 다가가지 못하는 소심한 사랑 말이다.
세 번째 사랑 상대 못 밝혀
낭만적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다. 소설가 이문열씨도 연애 소설을 썼다. 이천 작업실 모습. 사진 이재유
첫사랑은 역시 짝사랑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 1학년까지 갔다. 끝내 고백해 보지 못했다. 두 번째도 짝사랑. 부산에서 건달처럼 지내던 시절 마주친 인형 같은 처녀였다. 여러 밤을 새워가며 숱하게 편지를 썼지만 문장만 늘었달까, 하나도 부치지는 못했다. 세 번째는 대학 시절 꽤 알려진 일이어서 조금만 사연을 밝히면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아직도 언급하기 곤란하다.
아내가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나도 불 꺼진 사랑의 제단 안의 하얀 재를 되살려서라도 필생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폭풍의 언덕』이나 『좁은 문』의 사랑처럼 강렬하면서도 묵직하게 가슴 아픈 이야기, 섹스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사로잡는 참사랑이라고 할까, 그런 향기가 느껴지는 소설 말이다. 쉰 무렵까지 비슷한 걸 몇 개 쓰긴 했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연애가 시원찮았으니 여자를 제대로 이해했을 리 없다. 그래서 내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은 세계문학에서 한 번쯤 본 듯한 여자이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새하곡’이나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 어떤 여자들은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에 나오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빌린 것이었다. 중편 ‘들소’에 나오는 ‘초원의 꽃’에서 영화배우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렸던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