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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병대
 
 
 
카페 게시글
한사군(낙랑.수성 등) 비운의 개마대산과 옥저의 강역들
구산(九山) 추천 0 조회 229 18.03.06 00:01 댓글 2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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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03.06 00:22

    첫댓글 대체 위가야 글과 구산님 글의 구분선이 어딥니까?
    또 예전부터 바탕과 글자 색이 너무 대비되고 찬란하여 눈을 자극하니 글 읽기가 어렵다고 말해왔는데,
    여전하군요.

    더구나 낙랑군.섬 비정 주장도 어거지인데다가 논리.해설도 엉성하고 현재의 지명을 활용하는 식민사관 지리도 섞여 있어 글을 세밀하게 읽을 생각은 커녕 앞으로 다시는 읽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정녕 개선의 여지가 없겠습니까?

  • 작성자 18.03.06 12:00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보니 구분선을 가지고 시비하지요.글씨의 색으로도 구분을 못하셨다니 다시 선을 추기시켰습니다.바탕색가지고 읽기가 불편하다고 불만하셨지만 그건 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선택한 사항입니다.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 18.03.06 12:10

    @구산(九山) 후한시기의 낙랑군 문제는 대방군과 연계되어 좀더 섬세한 연구가 필요합니다.그랳지만 우선 그 위치가 바다라는 선입견을 제시함으로서 충격을 완화 하도록 예시한것입니다.백랑님께서는 옥저의 강역을 요서의 대능하 지역으로 주장하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의무려산을 개마대산으로 생각하시는것인지 궁금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8.03.06 17:45

    염불암님께서 반론이 있을듯 한데? 여전히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쫓겨 도망갔던 남옥저를 함경도 지역으로 보시는지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8.03.07 00:02

    옥저라는 문구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옥저의 북방한계선은 무순의 살이호입니다.그렇다면 무순에서 남족으로 800리 거리에 남옥저가 위치해야 되는것이 상식입니다.그곳이 남쪽으로 바다에 닿는곳입니다.그런데 심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옥저로 보신다는 말씀은 일반 상식을 벗어난 억설입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8.03.07 07:31

    그러시면 《삼국지》나 《후한서》의 동옥저에 대한 기록은 무시하신다는 말씀인가요?

  • 작성자 18.03.07 12:16

    @염불암 >>함경도 방면으로 옥저 무리가 일부 이동해 가서 동옥저라 부른 것이 《삼국지》나 《후한서》의 동옥저에 대한 기록은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임니까?

    ***함경도방면으로 일부 무리가 이동해 간게 아니라 개마대산과 단단대령까지 통체로 이동되었으니 비운의 개마대산이라고 한것입니다.이때문에 2천여리의 영토를 도둑맞은 것이지요.2005년도판 동한시대의 역사지도를 본문에 추가했습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8.03.07 14:56

    >>중국이 역사 도둑질 하는 것과 역사 문구는 구별해야지요. 삼국지에는 개마고원 방면을 개마대산이라고 했지 개마대령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는 이점을 분명히 구별하여 한반도 개마고원은 개마대산, 만주 중앙을 가로지르는 단단대령은 북개마대령이라고 하여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염불암님은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누가 개마대산을 개마대령이라고 하였습니까.구산은 지금 《삼국지》나 《후한서》의 개마대산과 단단대령이 왜 함경도와 평안도로 옮겨왔느냐를 가지고 말하는것입니다.여기에 고기를 끼어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 18.03.08 01:04

    구산(九山) 00:32 new


    >>그렇다면 古記나 三國史記에서 南沃沮로 불린 곳이 어디인지 살펴본다.


    「온조왕 43년(A.D 25년)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야호가 부양(평강)에 와서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왕은 한산의 서쪽에 편히 살게 하였다. 四十三年 冬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위에 나오는 南沃沮는 東沃沮를 南沃沮라 부른 것이다. 이는 滿洲의 沃沮, 濊 무리가 B.C 194년 이후 咸鏡道, 江原道 지방으로 이주하여 咸鏡道 지방은 沃沮라는 명칭을, 江原道 지방은 濊라는 명칭을 사용하자 그곳을 東沃沮, 東濊라 불렀는데, 이때 나오는 沃沮는 咸鏡道 방면의 沃沮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 작성자 18.03.08 01:08


    보인다.

    구산(九山) 00:56 new


    ***염불암님께서는 자신의 의견으로 제시한 말씀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님께서 주장한 다음글은 // "이는 滿洲의 沃沮, 濊 무리가 B.C 194년 이후 咸鏡道, 江原道 지방으로 이주하여 咸鏡道 지방은 沃沮라는 명칭을, 江原道 지방은 濊라는 명칭을 사용하자 그곳을 東沃沮, 東濊라 불렀는데, 이때 나오는 沃沮는 咸鏡道 방면의 沃沮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셨습니다.그러니까 온조왕 43년에 나오는 남옥저는 함경도에 있는 동옥저 무리라고 하신것입니다.그렇다면 온조백제가 함경도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 되네요.

    답글 | 수정 | 삭제

  • 작성자 18.03.08 12:39


    염불암 11:16 new


    구산님은 추리력이 대단하십니다. 삼국사기에 동옥저가 남옥저로 적혀 있다는 문구를 보고 온조백제는 함경도 근처에 있다고 단번에 추리해 내시니 구산님의 추리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평강은 함경도에서 좀 떨어져 있고, 온조왕 43년 당시 온조백제의 영역이 평강까지 뻗어 있었는데, 뭘 책임 지라는 것인가요? 평강이 함경도와는 한참 떨어져 있는데, 온조백제가 함경도 근처에 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하는 말입니까?


  • 작성자 18.03.08 12:41




    「온조왕 43년(A.D 25년)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호가 부양(평강)에 와서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왕은 한산의 서쪽에 편히 살게 하였다. 四十三年 冬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이대목을 염불암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20여호가 함께 이주하였다고 하는데 거리가 아주 가까운곳일까요?아니면 아주 먼곳일까요.당시의 교통사정으로 봐서 가까운곳으로 추정되는데 부양(평강)이 어디쯤인지는 모르지만 한산(漢山)의 서쪽에 살게 했다고 하네요.


  • 작성자 18.03.08 12:42

    염불암 11:12 new


    평강은 고대에 부현 또는 부양이라고 불렀는데, 평강은 온조백제 영역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22년(서기 4) 가을 8월, 석두(石頭)와 고목(高木) 2개의 성을 쌓았다.
    9월, 임금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났다. 한 번 싸움으로 그들을 격파하고 포로를 사로잡아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 작성자 18.03.08 12:43

    염불암 11:12 new


    40년(서기 22)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1월, 말갈이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날쌘 기병 2백 명에게 막아서 물리치도록 시켰다

  • 작성자 18.03.08 12:44





    ┗ 구산(九山) 12:06 new


    말갈군 3천명의 침입을 받은 위래성이 어디길래 고구려도 아니고 말갈군의 침입을 받았을까요.위의 기사들로 보아 부현성(斧峴城)은 말갈과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것으로 보이네요.한양에 있었다는 위례성이 말갈군 3천명의 습격을 받았다???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기록이네요

  • 작성자 18.03.09 07:11


    [집해13]范書東夷傳云, 至光武, 罷都尉官. 後, 皆以封其渠帥, 爲沃沮侯. 沈欽韓曰, 沃沮, 自魏後不復著蓋百濟, 立國於其境, 而沃沮亡矣.

    [집해13] 범엽의「후한서」동이전(동옥저전)에서는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폐지하였고 그 뒤에 그 거수(渠帥)를 모두 봉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다.” 하였다.(후한서 편 역주 참고) 심흠한(沈欽韓) 왈, 옥저(沃沮)는 위(魏)나라 때 이후로 다시 이름을 드러내지 못했다.(?)(不復著蓋) 백제가 그 지경에 나라를 세웠고 옥저는 망했다.

  • 작성자 18.03.09 07:12

    구산(九山) 06:15 new


    옥저는 위(魏)나라 이후 망했는데 그 이유가 백제가 그 땅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하였네요.염불암님 주장대로 옥저의 강역이 모두 함경도에 있었다면 백제가 함경도에 건국하였다는 말이 됩니다.이게 잘못된 기록일까요?

  • 작성자 18.03.09 07:13

    구산(九山) 07:07 new


    >>원래의 북옥저는 단군조선, 고구려 때 북쪽 수도로 사용된 백악산아사달, 북부여, 북옥저로 불린 장춘 방면을 중심으로 한 요하 동쪽 지역을 가리킨 말인데, 삼국지나 후한서의 저자는 우리민족이 사용한 옥저라는 개념의 의미를 몰라 동옥저를 일명 남옥저로 적고 남옥저의 북쪽을 북옥저라 적었다.

    ***이상이 염불암님의 옥저에 대한 소견이군요.그러니까 《삼국지》나 《후한서》의 저자들이 역사를 오판하여 왜곡시켰다는 말씀이네요.이같은 염불암님의 의견이 참으로 현명하신 판단일까요? 옥저땅에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기록도 주석자인 심흠한의 무식에서 나온 결과로 보시는지요,

  • 작성자 18.03.09 14:40


    염불암 11:52 new


    염불암은 만주에서 사용된 옥저라는 용어는 부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함경도에서 사용된 옥저라는 용어는 나라 명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옥저의 강역이 모두 함경도에 있었다는 것은 염불암 주장이 아니고 구산님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심흠한이 무식한지 유식한지는 내가 알 수 없습니다. 고인을 그렇게 삐딱한 시각으로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줄 압니다.

    자치통감 권97 晋紀 영화 2年(A.D 346년)조에 모용씨가 북부여를 공격한 것에 대하여 고기에는 북옥저를 공격하였다고 적혀 있슴니다. 또 太康 6년(A.D 285년)에 선비 모용외가 부여를 침공하니, 부여왕은 칼을 빼어 자살고 자제들은 도망쳐

  • 작성자 18.03.09 14:46


    옥저를 保全하였다고 나옵니다..

    「부여는 무제 때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 6년에 이르러 모용외가 처들어가 깨뜨렸다.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자제는 도망쳐 옥저를 보전하였다. 제가 조칙을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토록 충과 효를 지키었다. 나쁜 오랑케에게 멸망을 당하니 걱정스럽다. 남은 무리들이 다시 복국하도록 계책을 세워라" 하였다. 한 신하가 주청하기를 동이교위 선어영이 임기응변의 계략을 잃어 부여를 구하지 못했으니 조칙으로 선어영을 해직하고 그 직무를 하감이 대신토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해, 다음 부여왕 의라가 하감에게 사신을 보내어 백성을 이끌고 옛 나

  • 작성자 18.03.09 14:58


    라로 돌아가기를 청원하였다. 하감이 황제께 보고하고 독우
    가침을 보내어 병사들로 하여금 의라가 옛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호송토록 하였다. 모용외가 요로에서 이를 막자,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가 무리를 이끌고 퇴각하니, 의라가 다시 나라를 얻었다. 이후 모용외가 자주 부여를 노략질하여 부여인을 중국에 팔았다. 제가 이를 불쌍히 여겨 조칙으로 이들을 속환시켜주고 사(司), 기(冀) 2주에 조칙을 내려 부여인의 매매를 금하였다.

    진기 영화2년조 내용
    「부여는 처음 녹산(장춘 방면)에 거주하였는데, 백제의 침공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짐에 따라 서쪽으로

  • 작성자 18.03.09 15:01

    보내어

    군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중략..마침내 부여를 공략하고 그 왕 현과 부여인 5만여 구를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황은 그 왕 현을 진국장군으로 임명하고 딸을 처로 주었다(初夫餘居於鹿山 為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設備 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 慕容恪..中略..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為鎮軍將軍 妻以女).」 資治通鑑 卷97 晋紀 永和 2年條

    위에 나온 것처럼 백제와 관련되어 나오는 옥저는 만주의 북부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산님은 엉뚱하게도 자꾸 동옥저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모를 때는 묻고 공부해야지 이해가 안된다고 아무렇게나 지어내어 말하면 안됩니다

  • 작성자 18.03.09 15:03

    염불암 11:53 new


    온조백제 이후 204년경에 건국된 구태백제는 장춘 방면의 북부여 무리가 공손강이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세워져 온조백제와 마한을 복속시킨 나라인데, 한반도로 이동하지 않고 남아 있던 북부여 무리가 그 후 위나라에 귀부하여 구태백제와 다른 길을 걷자 구태백제는 313년경에 모용외 지역인 요서에 진출하였을 때 북부여(북옥저)를 공격하여 서쪽으로 쫓아버린 것이고, 위에 나온 내용은 그 이후 일어난 일을 적은 것입니다. 이무 만주에서는 고기를 제외하고 옥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부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옥저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작성자 18.03.09 18:57



    참으로 황당한 동문서답이군요.북옥저는 무순이 북쪽 한계선이고 부여는 무순 북쪽에 있는 나라입니다.그렇다면 옥저의 강역은 무순 이남에서 요동반도 남해안까지가 됩니다.그런데 왜 부여를 등장시켜 물타기를 하시나요?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금주 금마군(대련지역)은 준왕의 망명지이고,백제의 초기 강역이었습니다.고려가 이곳에 남경을 새운 비밀을 풀수 있는곳이기도 합니다.염불암님께서 단 1프로라도 역사찾기에 관심이 계신다면 《삼국지》《후한서》등의 기록들을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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