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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개마대산과 옥저의 강역들 다음은 낙랑국과 얼켜있는 낙랑군과 옥저등의 위치를 두고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가 벌리고 있는 논쟁중의 일부다.<역사비평>2016년 봄호에는 한국의 고대사학계를 대표한다는 학회의 일원인 젊은 학자가 글을 올렸는데 그의 변을 들어보기로 한다. 이에대한 반론은 필자의 의견으로 대신한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2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위가야 조선시대에 나타난 ‘한사군 한반도설’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일본인들이 처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군 낙랑현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었다는 중국 사서의 여러 주석서들이 ‘한사군 한반도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조선 초기 세종실록 지리지와 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위치 비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지리서는 모두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임둔군을 강릉 일대로 비정했다. ‘한사군 한반도설’의 저작권이 일본인에게 있지 않다는 점은 이들 지리지의 위치 비정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명백해진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16세기 박상의 동국사략으로 이어졌고, 17세기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저술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역사지리학 연구소서의 한사군 위치비정이 이루어졌다. 한백겸은 낙랑군과 임둔군의 중심지인 조선현(朝鮮縣)과 동시현(東暆縣)을 각각 평양과 강릉에서 찾았고, 현도군은 동옥저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종래 그 위치가 미상으로 남겨져 있었던 진번군의 위치를 처음으로 비정했는데, 중심지인 삽현(霅縣)이 춘천의 맥국(貊國)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그 영역이 춘천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대를 아울렀다고 하였다. --중략-- ....현대 국민국가의 관점으로 고대사를 인식하는, 또 자신의 현재적 관심사를 고대사 인식에 투영하는 사이비 역사학의 주장들은 때로는 황당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해프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이비 역사학의 주장들을 대중에게 보급하는 선봉장격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동북아역사재단측에서 제작한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은 한나라 소속인 고구려현을 만주와 평안북도 일대로 표시했고, 『동북아역사지도』는 이것을 베꼈다. 그런데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은 우습게도 서한(서기전 202년~서기 8년) 때의 지도라고 설명해 놓고 고구려 ‘군郡’이라고 표기했다. 『한서』「지리지」에는 고구려군이 없다.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을 뿐이다.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은 왜 『한서』「지리지」에 있지도 않은 고구려군을 만주와 평안북도 일대로 그려놓은 것일까?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둔갑시키려는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고구려가 처음부터 한나라 소속의 군이었던 것으로 설명해야 고구려의 전 역사를 중국사로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이덕일, 2015,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만권당, 133쪽)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82년이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대로라면 중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있지도 않은 ‘고구려군’을 조작해 내는 등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역사 조작을 자행해 온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학계는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그 지도를 그대로 베꼈다. 사실이라면 중국 역사학계는 교활하고, 한국 역사학계는 한심하며, 이덕일 소장은 탁월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덕일 소장이 말하는 지도는 중국역사지도집 2권 27-28페이지에 수록된 「서한 유주자사부」 지도이다. 이 지도는 중국 한(漢)나라의 행정 구역 말고도 그 주변에 위치한 여러 민족(?)들의 거주지도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고구려는 그 민족 중 하나로 적혀 있다. 그런데 지도를 그린 담기양은 고구려족의 거주지를 현도군이 설치된 지역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현도군이라는 표시를 고구려를 표시한 지역과 가까운 곳에 적었다. 이 때문에 이덕일 소장은 현도군에 붙어있는 ‘군(郡)’을 고구려에 붙여 읽어, ‘고구려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창조한 것이다.
중국역사지도집 2권(1982) 27-28, 「서한 유주자사부」 지도. 이덕일 소장은 ‘현도군’에 붙어있는 ‘군(郡)’을 옆에 비스듬히 적혀 있는 ‘고구려’에 붙여 읽고,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 전부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기 위해 ‘고구려군’을 조작해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무엇이 역사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이 같은 초보적인 실수를 하고, 또 그것을 대중에게 공표해서 망신살을 자초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을까. 필자에게 타인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국사를 중국사의 시공간에 편입시킴으로써 현대 중국의 침략 정책을 뒷받침하는 음모였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온통 이 음모를 명약관화하게 드러낼 수 있는 증거를 찾고, 또 그 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역사상을 만들어 내는 데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하지만 실수로) 중국이 고구려의 전 역사를 중국사로 포함시키기 위해 조작한 증거인 ‘고구려군’을 찾은 것, 아니 찾았다고 믿은 것이다. 그가 고대사를 당대를 살았던 고대인의 시각에서 보지 못하고 현대를 사는 자신의 입장을 투영해서 이해하는 것은 그의 역사 이해를 편협하게 만드는 일종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비단 이덕일 소장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사이비 역사학을 공유하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을 얽매고 있다. 이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의 역사학에서 ‘사이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날은 요원하다 할 것이다. 역사비평 2016년 봄호(통권 114호) --인용 끝-- 그러니까 논쟁의 요점은 지도상에 표시된 고구려가 현도군으로 표시된 끝자 '군'자를 빌려 고구려군으로 잘못해석했다는 말인듯 하다.그것 말고는 지도에 표시된 개마대산의 위치와 기타지명들의 위치는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이지도에 표시된 개마대산의 위치는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는 《후한서》《삼국지》<동이전>등의 기록과 반한다.따라서 개마대산의 위치가 왜곡됨으로서 옥저의 위치들이 모두 뒤틀렸고,그에 따른 지명들 또한 요동반도에서 한반도의 동북지역으로 수천리가 이동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東沃沮(동옥저)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은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검성'이다.] 동쪽으로 바다에 임한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에 연하고 남으로 '예맥'이 접한다. 그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집해1] 장회가 注하여, “개마(蓋馬)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속했다. 그 산이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고 평양은 즉 조선의 왕험성(王險城)이다. / 심흠한 왈, 명지(明志)에서는 해주위가 본래 옥저국의 땅이라 했으니 지금의 봉천 해성현이며 또한 봉천 개평현이다. 고려국의 개모성 또한 그 땅이었다. / 이조락 왈, 서개모의 옛 성은 지금의 봉천 개평현의 치소다. 《후한서》지53 < 고구려현.서개마현.상은대현이 신설되고,고현.후성현.요양현등 3개현은 요동군 에서 이적되었다.> 《전한서 지리지》에서 서개마현의 위치는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염난수로 들어가 서남쪽으로 입해하여 2100리를 흐른다고 되어있다.그런데 《수경주도 부록》에는 흥경의 동쪽땅으로 변한것이다.뿐만 아니라 서안평을 봉황성으로 비정한것이다. 《수경주도부록》에 의하면 원도군에서 고구려현은 폐지되고,상은대현은 개원,무순지역이고, 서개마현은 흥경 동쪽땅으로 비정하였다.따라서 서개마현이 동개마로 위치를 바꾸는 변동이 있었다.이때부터 옥저강역의 위치를 개마대산 동쪽으로 왜곡시키는 증조가 보인다.
《요사 지리지》해주 남해군 海州 南海軍 節度, 本 沃沮國地, 髙麗 為 沙卑城, 唐李世勣 嘗攻焉. 渤海 號 南京南海府, 疊石 為 城, 幅員 九里, 해주는 남해군 절도가 있다.본래 옥저국이다.고구려의 사비성으로 당나라 이세적이 공격했던곳이다.발해는 남경남해부를 삼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폭의 넓이가 9리다.(지도상 요주다)
해주 암연현이 있어야 할 개주에는 암연(岩淵)이라 표시하고 주변으로 개현.진주.건안등이 표시되어있다.그런데 아래 지도에는 암연을 한반도의 함경도로 옮겨놓았다.뿐만 아니라 발해의 서경 압록부를 동경(봉황성)보다 더 동쪽으로 옮겨놓았다.
요나라의 암연현이 함흥이라면 발해의 남경남해부가 청진쯤 되고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게 된다.그러나 동북120리에 있다는 해주와 동쪽에 있다는 신라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발해의 남경남해부와 암연현의 위치가 얼토당토 않은곳으로 옮겨진 지도다.따라서 역사왜곡자들에 의해 옥저의 위치도 옮겨진것이다. 옥저의 위치는 개마대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개마현을 옥저의 본국이라 하였으므로 서개마는 개마대산의 서쪽이고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요동의 중심지다.그리고 북옥저는 무순 살이호 까지이고 남옥저는 북옥저로 부터 800리 남쪽으로 떨어진 대고산(大孤山)이다.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잇고,남옥저와 북옥저의 거리는 800리다. 남옥저의 위치는 大孤山 《남당유고》<백제왕기> 옥저는 동북은 짧고 서남은 길다. 북옥저의 위치는 무순 살이호가 북방한계선
옥저,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 위치 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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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체 위가야 글과 구산님 글의 구분선이 어딥니까?
또 예전부터 바탕과 글자 색이 너무 대비되고 찬란하여 눈을 자극하니 글 읽기가 어렵다고 말해왔는데,
여전하군요.
더구나 낙랑군.섬 비정 주장도 어거지인데다가 논리.해설도 엉성하고 현재의 지명을 활용하는 식민사관 지리도 섞여 있어 글을 세밀하게 읽을 생각은 커녕 앞으로 다시는 읽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정녕 개선의 여지가 없겠습니까?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보니 구분선을 가지고 시비하지요.글씨의 색으로도 구분을 못하셨다니 다시 선을 추기시켰습니다.바탕색가지고 읽기가 불편하다고 불만하셨지만 그건 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선택한 사항입니다.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구산(九山) 후한시기의 낙랑군 문제는 대방군과 연계되어 좀더 섬세한 연구가 필요합니다.그랳지만 우선 그 위치가 바다라는 선입견을 제시함으로서 충격을 완화 하도록 예시한것입니다.백랑님께서는 옥저의 강역을 요서의 대능하 지역으로 주장하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의무려산을 개마대산으로 생각하시는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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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암님께서 반론이 있을듯 한데? 여전히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쫓겨 도망갔던 남옥저를 함경도 지역으로 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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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라는 문구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옥저의 북방한계선은 무순의 살이호입니다.그렇다면 무순에서 남족으로 800리 거리에 남옥저가 위치해야 되는것이 상식입니다.그곳이 남쪽으로 바다에 닿는곳입니다.그런데 심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옥저로 보신다는 말씀은 일반 상식을 벗어난 억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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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면 《삼국지》나 《후한서》의 동옥저에 대한 기록은 무시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염불암 >>함경도 방면으로 옥저 무리가 일부 이동해 가서 동옥저라 부른 것이 《삼국지》나 《후한서》의 동옥저에 대한 기록은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임니까?
***함경도방면으로 일부 무리가 이동해 간게 아니라 개마대산과 단단대령까지 통체로 이동되었으니 비운의 개마대산이라고 한것입니다.이때문에 2천여리의 영토를 도둑맞은 것이지요.2005년도판 동한시대의 역사지도를 본문에 추가했습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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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역사 도둑질 하는 것과 역사 문구는 구별해야지요. 삼국지에는 개마고원 방면을 개마대산이라고 했지 개마대령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는 이점을 분명히 구별하여 한반도 개마고원은 개마대산, 만주 중앙을 가로지르는 단단대령은 북개마대령이라고 하여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염불암님은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누가 개마대산을 개마대령이라고 하였습니까.구산은 지금 《삼국지》나 《후한서》의 개마대산과 단단대령이 왜 함경도와 평안도로 옮겨왔느냐를 가지고 말하는것입니다.여기에 고기를 끼어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산(九山) 00:32 new
>>그렇다면 古記나 三國史記에서 南沃沮로 불린 곳이 어디인지 살펴본다.
「온조왕 43년(A.D 25년)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야호가 부양(평강)에 와서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왕은 한산의 서쪽에 편히 살게 하였다. 四十三年 冬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위에 나오는 南沃沮는 東沃沮를 南沃沮라 부른 것이다. 이는 滿洲의 沃沮, 濊 무리가 B.C 194년 이후 咸鏡道, 江原道 지방으로 이주하여 咸鏡道 지방은 沃沮라는 명칭을, 江原道 지방은 濊라는 명칭을 사용하자 그곳을 東沃沮, 東濊라 불렀는데, 이때 나오는 沃沮는 咸鏡道 방면의 沃沮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구산(九山) 00:56 new
***염불암님께서는 자신의 의견으로 제시한 말씀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님께서 주장한 다음글은 // "이는 滿洲의 沃沮, 濊 무리가 B.C 194년 이후 咸鏡道, 江原道 지방으로 이주하여 咸鏡道 지방은 沃沮라는 명칭을, 江原道 지방은 濊라는 명칭을 사용하자 그곳을 東沃沮, 東濊라 불렀는데, 이때 나오는 沃沮는 咸鏡道 방면의 沃沮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셨습니다.그러니까 온조왕 43년에 나오는 남옥저는 함경도에 있는 동옥저 무리라고 하신것입니다.그렇다면 온조백제가 함경도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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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암 11:16 new
구산님은 추리력이 대단하십니다. 삼국사기에 동옥저가 남옥저로 적혀 있다는 문구를 보고 온조백제는 함경도 근처에 있다고 단번에 추리해 내시니 구산님의 추리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평강은 함경도에서 좀 떨어져 있고, 온조왕 43년 당시 온조백제의 영역이 평강까지 뻗어 있었는데, 뭘 책임 지라는 것인가요? 평강이 함경도와는 한참 떨어져 있는데, 온조백제가 함경도 근처에 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하는 말입니까?
「온조왕 43년(A.D 25년)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호가 부양(평강)에 와서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왕은 한산의 서쪽에 편히 살게 하였다. 四十三年 冬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이대목을 염불암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20여호가 함께 이주하였다고 하는데 거리가 아주 가까운곳일까요?아니면 아주 먼곳일까요.당시의 교통사정으로 봐서 가까운곳으로 추정되는데 부양(평강)이 어디쯤인지는 모르지만 한산(漢山)의 서쪽에 살게 했다고 하네요.
염불암 11:12 new
평강은 고대에 부현 또는 부양이라고 불렀는데, 평강은 온조백제 영역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22년(서기 4) 가을 8월, 석두(石頭)와 고목(高木) 2개의 성을 쌓았다.
9월, 임금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났다. 한 번 싸움으로 그들을 격파하고 포로를 사로잡아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염불암 11:12 new
40년(서기 22)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1월, 말갈이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날쌘 기병 2백 명에게 막아서 물리치도록 시켰다
┗ 구산(九山) 12:06 new
말갈군 3천명의 침입을 받은 위래성이 어디길래 고구려도 아니고 말갈군의 침입을 받았을까요.위의 기사들로 보아 부현성(斧峴城)은 말갈과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것으로 보이네요.한양에 있었다는 위례성이 말갈군 3천명의 습격을 받았다???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기록이네요
[집해13]范書東夷傳云, 至光武, 罷都尉官. 後, 皆以封其渠帥, 爲沃沮侯. 沈欽韓曰, 沃沮, 自魏後不復著蓋百濟, 立國於其境, 而沃沮亡矣.
[집해13] 범엽의「후한서」동이전(동옥저전)에서는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폐지하였고 그 뒤에 그 거수(渠帥)를 모두 봉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다.” 하였다.(후한서 편 역주 참고) 심흠한(沈欽韓) 왈, 옥저(沃沮)는 위(魏)나라 때 이후로 다시 이름을 드러내지 못했다.(?)(不復著蓋) 백제가 그 지경에 나라를 세웠고 옥저는 망했다.
구산(九山) 06:15 new
옥저는 위(魏)나라 이후 망했는데 그 이유가 백제가 그 땅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하였네요.염불암님 주장대로 옥저의 강역이 모두 함경도에 있었다면 백제가 함경도에 건국하였다는 말이 됩니다.이게 잘못된 기록일까요?
구산(九山) 07:07 new
>>원래의 북옥저는 단군조선, 고구려 때 북쪽 수도로 사용된 백악산아사달, 북부여, 북옥저로 불린 장춘 방면을 중심으로 한 요하 동쪽 지역을 가리킨 말인데, 삼국지나 후한서의 저자는 우리민족이 사용한 옥저라는 개념의 의미를 몰라 동옥저를 일명 남옥저로 적고 남옥저의 북쪽을 북옥저라 적었다.
***이상이 염불암님의 옥저에 대한 소견이군요.그러니까 《삼국지》나 《후한서》의 저자들이 역사를 오판하여 왜곡시켰다는 말씀이네요.이같은 염불암님의 의견이 참으로 현명하신 판단일까요? 옥저땅에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기록도 주석자인 심흠한의 무식에서 나온 결과로 보시는지요,
염불암 11:52 new
염불암은 만주에서 사용된 옥저라는 용어는 부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함경도에서 사용된 옥저라는 용어는 나라 명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옥저의 강역이 모두 함경도에 있었다는 것은 염불암 주장이 아니고 구산님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심흠한이 무식한지 유식한지는 내가 알 수 없습니다. 고인을 그렇게 삐딱한 시각으로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줄 압니다.
자치통감 권97 晋紀 영화 2年(A.D 346년)조에 모용씨가 북부여를 공격한 것에 대하여 고기에는 북옥저를 공격하였다고 적혀 있슴니다. 또 太康 6년(A.D 285년)에 선비 모용외가 부여를 침공하니, 부여왕은 칼을 빼어 자살고 자제들은 도망쳐
옥저를 保全하였다고 나옵니다..
「부여는 무제 때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 6년에 이르러 모용외가 처들어가 깨뜨렸다.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자제는 도망쳐 옥저를 보전하였다. 제가 조칙을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토록 충과 효를 지키었다. 나쁜 오랑케에게 멸망을 당하니 걱정스럽다. 남은 무리들이 다시 복국하도록 계책을 세워라" 하였다. 한 신하가 주청하기를 동이교위 선어영이 임기응변의 계략을 잃어 부여를 구하지 못했으니 조칙으로 선어영을 해직하고 그 직무를 하감이 대신토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해, 다음 부여왕 의라가 하감에게 사신을 보내어 백성을 이끌고 옛 나
라로 돌아가기를 청원하였다. 하감이 황제께 보고하고 독우
가침을 보내어 병사들로 하여금 의라가 옛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호송토록 하였다. 모용외가 요로에서 이를 막자,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가 무리를 이끌고 퇴각하니, 의라가 다시 나라를 얻었다. 이후 모용외가 자주 부여를 노략질하여 부여인을 중국에 팔았다. 제가 이를 불쌍히 여겨 조칙으로 이들을 속환시켜주고 사(司), 기(冀) 2주에 조칙을 내려 부여인의 매매를 금하였다.
진기 영화2년조 내용
「부여는 처음 녹산(장춘 방면)에 거주하였는데, 백제의 침공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짐에 따라 서쪽으로
보내어
군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중략..마침내 부여를 공략하고 그 왕 현과 부여인 5만여 구를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황은 그 왕 현을 진국장군으로 임명하고 딸을 처로 주었다(初夫餘居於鹿山 為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設備 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 慕容恪..中略..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為鎮軍將軍 妻以女).」 資治通鑑 卷97 晋紀 永和 2年條
위에 나온 것처럼 백제와 관련되어 나오는 옥저는 만주의 북부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산님은 엉뚱하게도 자꾸 동옥저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모를 때는 묻고 공부해야지 이해가 안된다고 아무렇게나 지어내어 말하면 안됩니다
염불암 11:53 new
온조백제 이후 204년경에 건국된 구태백제는 장춘 방면의 북부여 무리가 공손강이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세워져 온조백제와 마한을 복속시킨 나라인데, 한반도로 이동하지 않고 남아 있던 북부여 무리가 그 후 위나라에 귀부하여 구태백제와 다른 길을 걷자 구태백제는 313년경에 모용외 지역인 요서에 진출하였을 때 북부여(북옥저)를 공격하여 서쪽으로 쫓아버린 것이고, 위에 나온 내용은 그 이후 일어난 일을 적은 것입니다. 이무 만주에서는 고기를 제외하고 옥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부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옥저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동문서답이군요.북옥저는 무순이 북쪽 한계선이고 부여는 무순 북쪽에 있는 나라입니다.그렇다면 옥저의 강역은 무순 이남에서 요동반도 남해안까지가 됩니다.그런데 왜 부여를 등장시켜 물타기를 하시나요?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금주 금마군(대련지역)은 준왕의 망명지이고,백제의 초기 강역이었습니다.고려가 이곳에 남경을 새운 비밀을 풀수 있는곳이기도 합니다.염불암님께서 단 1프로라도 역사찾기에 관심이 계신다면 《삼국지》《후한서》등의 기록들을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