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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술사가 관료의 정상에 오르다
최지몽(崔知夢, 907~987)은 해몽(解夢)으로 출세한 인물이다. 꿈을 해석하는 해몽은 점성술의 일종이다. 점성술은 해와 달, 별 등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해 인간의 운명과 미래를 예측한다. 천문 점성술로 불리기도 한다. 고려 때 이러한 업무를 관장한 사천대(司天臺)라는 관청이 있었다.
최지몽은 이 관청 관원으로 출발해 최고위직 재상의 자리에 오른 고려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태조 왕건을 비롯해 6명의 국왕을 보좌하면서 때로는 위기에 빠진 왕을 빼어난 천문 점성술로 구해내기도 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에 근거지를 둔 호족 왕규(王規, ?~945)는 두 딸을 태조 왕건의 제 15비와 16비로 출가시킨다. 태조 왕건에 이어 즉위한 혜종에게도 딸을 출가시킨다. 제 1비에서 6비를 배출한 개경, 서경, 충주 출신의 호족 세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위인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규는 살아있는 권력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권세가가 되었다.
“유성(流星)이 자미원(紫微垣, 천제의 궁궐 담장)을 침범했습니다.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980년, 최지몽은 경종(景宗, 고려 5대 국왕, 955~981, 재위 975~981)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객성(客星, 유성)이 제좌(帝座, 자미원)를 범했습니다. 숙위군을 강화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십시오.”
이 조언 덕분에 경종은 왕승(王承)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광종에게 무례를 범해 11년 유배생활을 한 최지몽에게 경종(광종의 아들)은 은인이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유배 중인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최지몽은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반란을 예견해 왕권 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경종은 최지몽에게 최고 관직인 내의령(內議令, 중서문하성 전신인 내의성 장관, 종1품) 벼슬을 내린다.
천문 점성술이라는 재능으로 고려 초기 왕권과 왕실을 안정시킨 최지몽은 987년(성종 6)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
최지몽의 재능은 이미 태조 왕건 때 빛을 드러냈다.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은 태조 왕건이 지어준 것이다. 최지몽이 해몽에 능하다는 소문을 들은 왕건이 그를 불러 자신이 꾼 꿈의 해몽을 맡겼는데, ‘앞으로 반드시 삼한을 통합해 통치할[必將統御三韓]’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매우 만족한 왕건은 그의 이름 총진(聰進)을 지몽(知夢)으로 바꿔주었다. 이름 그대로 ‘꿈을 잘 풀이한다’는 뜻이다. 또 비단옷과 함께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사천공봉(司天供奉)이라는 관직을 내린다. 최지몽이 18세 때인 924년(태조 7)의 일이다. 그는 후삼국이 통합되는 936년(태조 19)까지 12년간 태조를 수행했고, 이후 재위기간이 끝날 때까지 각종 현안문제를 조언하는 역할을 했다.
최지몽과 같이 꿈을 잘 풀이한 유명한 인물로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들 수 있다. 수천 년 전 인물인 그는 시기심 많은 형들에 의해 상인에게 팔려 노예 신분으로 애급(埃及, 이집트)에 끌려왔다. 여러 차례 기막힌 해몽을 한 요셉은 마침내 왕의 꿈을 풀이해 애급을 위기에서 구하고 총리대신에 오른다.
최지몽 역시 해몽으로 고위직에 올랐다는 점에서 한국판 요셉이라 할 수 있다. 요셉은 신의 뜻과 섭리를 잘 따르면 반드시 신의 선택과 축복을 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원리에 가장 충실한 인물로 설정되어 그의 이야기가 성경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야사(野史)에나 나올 법한 최지몽 이야기가 《고려사》라는 정사(正史)에 당당하게 실린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시대 사상과 이념의 풍토가 어떠했길래 그랬을까?
최지몽이 출생하기 전 태조 왕건이 꾼 꿈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906년 궁예의 부하로 있던 서른 살 왕건은 바다 위에 세워진 금으로 만든 9층탑에 직접 올라간 꿈을 꾸었다(《고려사》 권1 태조 총서). 9층탑 꿈 이야기는 《고려사》의 ‘이의민 열전’에도 보인다. 고려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였던 이의민(李義旼)이 어렸을 적에 그의 아버지 이선(李善)은 꿈속에서 아들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9층탑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들이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고 한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9층탑은 귀한 신분 외에 천하 통일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황룡사 9층탑이 만들어진 계기를 설명하는 《삼국유사》의 한 대목을 보자. 자장(慈藏, 590~658)은 당나라에서 만난 보살에게서 신라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韓)이 조공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신라로 돌아온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9층탑 건축을 청했고, 645년(선덕여왕 14) 황룡사 9층탑이 세워진다(《삼국유사》 권3). 이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다.
9층탑 꿈 이야기가 태조 왕건의 건국설화로 미화되고, 해몽에 능한 최지몽이 발탁된 사실은 고대 시기 제왕학의 지위에 있던 점성술이 고려 건국 무렵에도 성행했음을 알려준다.
태조 왕건의 미래를 예언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바로 도선(道詵, 827~898)이다. 왕건이 출생하기 한해 전인 876년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용건(龍建)과 함께 송악산에 올라가 산수를 둘러본 후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으시오.”
도선은 용건에게 겉봉에, ‘백 번 절하며 미래 삼한을 통합할 군주[未來統合三韓之主]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께 삼가 글월을 바칩니다’라고 적은 봉투를 주었다. 그는 왕건이 후삼국 통합 군주가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고려사》 권1 태조 총서).
도선이 당나라 황제를 만나러 가는 길에 옷을 던지며 “만약 내가 살아 있으면 이 바위가 하얗게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백의암. 지금까지 하얀색을 유지하고 있어 백의암이라고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출처: ⓒ변남주>
약 17년이 지난 893년, 왕건이 17세 되던 해 도선은 그에게 군사 출동과 군진(軍陣) 배치 방법, 그리고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의 법을 알려준다. 10여 년이 지난 906년 궁예의 장수였던 왕건은 9층 금탑에 오르는 꿈을 꾸고 난 후 대망을 품었다. 그리고 924년(태조 7) 후삼국 통합을 예언한 최지몽과의 만남으로 왕건은 날개를 달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선과 최지몽이 영암 출신의 동향이라는 점이다. 원래 후백제 견훤의 영역인 영암은 나주와 함께 중국, 일본으로 연결되는 서남해 일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외래 문물과 접촉이 빈번한 곳이었다.
최지몽의 아버지 원보(元甫, 향직 4품) 최상흔(崔相昕)은 성품이 청렴하고 인자했으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최지몽의 스승 대광(大匡, 향직 2품) 현일(玄一)은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했다고 하니, 천문 점성술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았을 것이다. 부친과 스승 모두 고위 향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암 최씨 일족은 이 지역의 유력층이었다. 이들은 서남해 해상 교통로라는 이점을 이용해 해상무역에 종사했고, 부를 축적하여 유력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외래 문물과 접촉이 잦은 영암의 지역 특성상 당나라로 유학해 선진 학문을 수학한 인물들도 있다. 도선도 당나라에 가서 풍수지리설을 익혔다. 성주산의 무염(無染)과 굴산사의 범일(梵日) 문하에서 선을 닦은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 869~948) 역시 892년 당나라에 가서 선법을 닦은 후 921년 귀국했다.
후백제 견훤은 그를 전주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물게 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태조는 경보를 왕사로 삼았다. 또한 그는 태조 왕건 사후에도 혜종과 정종의 왕사가 되었다. 견훤과 왕건의 추앙을 받은 경보는 도선, 최지몽과 같이 고려 초기 국왕과 왕실에 영향을 끼친 또 한 명의 영암 출신 인물이었다. 태조와 연결된 경보를 통해 최지몽이 추천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영암이 후백제 견훤의 영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이 왕건과 연결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왕건이 궁예의 장수로서 나주와 영암 지역을 정벌한 것이 연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903년 왕건은 이 지역 정벌에 나서, 금성군(錦城郡, 정벌 후 나주로 개명)과 주변 군현 10여 개를 빼앗는다. 견훤이 다시 나주를 점령하자, 왕건은 909년부터 912년까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이 지역을 확보한다. 다음은 910년에 벌어진 유명한 나주해전의 장면이다.
(왕건의 군사가) 나주 포구에 이르자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인솔하고 전함을 벌려 놓았다.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의 앞뒤 좌우로 배치된 군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여러 장수가 두려워하자 왕건은 “근심할 것 없다. 싸움에 이기는 것은 마음을 합하는 데 있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군사를 내어 급히 공격하자 적의 군함이 뒤로 물러났다. 이때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자[乘風縱火]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500여 명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자 견훤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
-《고려사》 태조 총서(總序)
해전이 이루어진 곳은 지금의 목포와 영암 앞바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덕진포는 영암군의 포구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람을 이용해 (견훤의 배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다. 오래전 방영된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작가는 《삼국지연의》의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마침 불어온 동남풍을 이용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한 사실에 착목해 왕건의 책사 태평(泰評)이란 자가 동남풍을 이용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극화했다. 동남풍을 이용한 왕건의 전략도 중요하지만, 승리의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이 지역의 정세와 지세에 밝은 토착 세력의 협조가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동남풍을 예측하고 이용하는 데 잘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앞서 왕규가 외손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제거하려 한 혜종과 그를 지켜낸 최지몽이 각각 나주 오씨의 외손과 영암 최씨 출신인 점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나주해전에 이어 고려의 왕위를 보전하는 과정에서도 두 집안의 결합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주해전의 승리는 ‘동남풍’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동남풍’을 이용해 해상에서 자본과 힘을 축적한 이곳 출신 해상 세력의 협조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의 후비 가운데 서열이 가장 높은 제 1비와 2비가 각각 정주(貞州, 개풍군)와 나주의 해상 세력의 딸인 점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최지몽의 부친 최상흔도 나주해전을 전후해서 왕건과 연결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해전의 승리에 일정하게 기여한 것이 분명하다. 최지몽 부친과 스승 현일이 고위 향직을 가진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지몽은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후광 속에서 왕건의 측근 참모로 진출할 수 있었다.
최지몽은 18세인 924년(태조 7) 천하통일을 예언하여 태조 왕건에게 발탁된 뒤 81세인 987년(성종6)에 사망할 때까지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까지 63년 간 6명의 국왕을 보좌한다. 국왕의 혈육으로 따진다면 혜종, 정종, 광종은 태조의 아들이며 경종과 성종은 태조의 손자이다. 최지몽은 요즘말로 하면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3대에 걸쳐 6명의 국왕을 모신 왕실의 원로였다.
최지몽의 역할은 국왕을 단순히 보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왕규의 모반을 막아 혜종과 그의 형제인 정종, 광종의 목숨은 물론, 광종의 아들인 경종의 목숨도 구했다. 그는 왕실의 참모이자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왕조 창업과 전쟁, 반란 등 험난한 시기일수록 온전히 관료로서의 삶을 마치는 일은 쉽지 않다. 더욱이 왕실과 국왕을 위태롭게 하는 모반의 조짐을 예견하고 조언하는 천문 점성술사들은 주변의 시기와 견제로 일반 관료와 같이 평탄한 삶을 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최지몽이 귀법사 행차에 광종을 수행했다가 무례한 행동으로 11년간 유배를 당한 것도 그러한 예이다. 중국의 선진 문물인 과거제와 관료제를 도입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중국의 문사들을 적극 유치했던 광종에게 점성술과 같은 고려의 토속과 전통을 중시한 최지몽의 존재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최지몽의 유배는 그러한 사상과 이념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유배까지 당했던 최지몽이 다시 복권되어 관료로서 장수한 사실은 천문 점성술이 당시 사상은 물론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도선의 존재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중세에서 고대로 시기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천문 점성술은 왕실의 운명을 예언하고 보호하며, 제왕의 통치와 교화 능력을 향상시키는 제왕학(帝王學)의 지위를 갖는다. 도선과 최지몽의 활약은 천문 점성술이 고려 초기 사상문화의 측면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최지몽과 같이 태조 때 발탁되어 성종 때까지 6명의 국왕을 보좌한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최승로(崔承老, 927~989)다. 유학에 능통한 그는 유교이념을 고려 왕조의 통치이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최지몽과 대조적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의 출생과 성장은 매우 극적이다. 자식이 없던 최은함(崔殷諴)이 중생사(衆生寺) 관음보살에 기도해 얻은 아들이 최승로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오자 최은함은 생후 3개월이 되지 않은 아들을 이 절의 관음보살 아래 감추고 몸을 피했는데, 보름이 지나 견훤의 군사들이 물러난 뒤 절에 갔더니 아이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고 한다(《삼국유사》 권3 탑상조). 최은함은 경순왕을 따라 태조 왕건에게 귀순했고, 개경에 정착한 지 3년 만에 최승로는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는다.
최승로는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12세 때(938년)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았다. 태조는 최승로에게 《논어》를 읽게 하였는데, 매우 기뻐하며 소금밭[鹽盆]을 하사했다. 왕의 교서와 외교문서 등을 짓는 원봉성(元鳳省) 학생으로 소속시키고, 말안장[鞍馬]과 녹봉 20석을 주었다.
-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최승로는 최지몽과 달리 경전과 유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발탁되었다. 이후 성종 때까지 그는 고려의 학술과 문장을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의 지위를 누린다. 983년(성종 2)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는 그의 사상과 당시 고려사회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성종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 고려의 정치제도를 완비했는데, 최승로는 성종을 보좌해 유교 정치이념을 뿌리내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최승로는 유학과 문장의 재능으로, 최지몽은 천문 점성술로 각각 태조 왕건에게 발탁되어 천수를 누리면서 관료로서 성공의 길을 걸었다. 현실주의 경향이 강한 유학이나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관장한 천문 점성술은 근본적으로 다른 성향의 사상과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이후 성종 때까지 약 60년 간 고위직으로 조정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후삼국 전쟁이 한창일 무렵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와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자, 문신 최응(崔凝)은 왕건에게 왕이 된 자는 전쟁 때 반드시 유교 이념을 닦아야 합니다. 불교나 풍수지리 사상으로 천하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건의했다. 이에 태조 왕건은 ‘지금 전쟁이 그치지 않아 한 치 앞의 편안함과 위태로움도 알 수 없다. 백성들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부처님을 비롯해 산수의 신령한 도움을 청하려 하는 것이다. 어찌 이런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전쟁이 그쳐 편안해지면 유교 이념으로 풍속을 고치고 백성을 교화할 것이다’라고 했다.
- 최자(崔滋), 《보한집(補閑集)》 권상왕건이 전쟁 후 유교이념으로 백성을 교화할 것이라고 한 말은 유교 관료 최응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다. 사실 그는 유교이념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전쟁의 참화로 인한 하층민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불교와 풍수지리 사상도 수용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에게 유교, 불교, 풍수지리 사상은 서로 달라 충돌하는 배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한 점은 그가 남긴 〈훈요십조〉에서 불교, 유교, 풍수지리,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의 수용과 공존을 강조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상이 공존할 수 있는 터전은 고려 초기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천문 점성술에 밝은 최지몽이 역사 속 인물로서 오늘까지 전해진 것은 통합과 공존, 다원성을 추구한 고려시대 사상과 이념의 특성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지몽 - 점성술사가 관료의 정상에 오르다 (고려인물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