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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인물]
역사왜곡 동북공정 강하게 질타한 주은래
- <주은래 평전.42>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이중 칼럼, 2012-05-09 오전 08:26:56
▲ 총리시절 중국내의 동북공정을 역사왜곡이라고 강하게 질타한 주은래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중국의 대국 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엔 아주 강했다.
모두 역사학자의 붓끝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
저우언라이는 중국외교의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었던 “불칭패(不稱覇)”를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려고 애썼던 지도자로 통한다. 저우언라이가 죽기 일곱 달 전에 마지막 남긴 글씨가 <스스로 패왕을 자처하지 않는다>라는 <不稱覇> 세 글자였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을 보는 세계의 눈은 곱지 않다.중국이 스스로 <불칭패>를 접은 지는 이미 오래라는 시각 때문이다. 역사에 “만일(萬一)”은 군더더기일 따름이다.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관련지어, “만일 저우언라이가 오늘에 살아있다면”이란 가정은 가능하다.그가 한 다음 말을 상기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중국의 이런 대국 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朝貢)이라 했고,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우호교류를 할 때에도 그들은 알현(謁見)하러 왔다고 말했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이라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모두 역사학자의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며,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이경일, <다시 보는 저우언라이>, 우석출판사 발행
저우언라이는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나름의 역사관과 현실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 발언으로 대충대충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우 나름의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양국 관계를 논했다.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의 이 같은 언급은, 한국의 한 전직 국회의원이 2004년 8월 13일 자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 관계 대화>라는 글을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정치인은 당시 베이징 대학에서 객좌연구원으로 활동했던 설 훈(薛勳) 전 의원이다.문화혁명 3년 전인 1963년 6월 28일, 중국을 42일 간 방문한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 30명이 저우언라이 총리를 예방했다. 저우 총리는 이날 북한의 역사학자들 앞에서,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를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며 자신의 역사관을 밝혔다.
이 대화 문건은 이경일 편저, <다시 보는 저우언라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저우는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를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제1시기는 중국과 조선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
제2시기는 두 나라가 제국주의 침략을 받았던
식민지 시대의 혁명적 관계.
제3시기는 1963년 당시의 사회주의 국가끼리의
형제당(兄弟黨), 형제국가 관계.
저우언라이의 발언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민족의 역사관계이다.
그는 “두 나라 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요하(遼河), 송화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민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 있다.경박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경일, 앞의 책
중국 지도자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을 그는
‘문물‘의 객관성에 기대어 과감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는 특히 문물에 의한 증명을 강조하고,
문물에 비해 역사기록은
완전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문물을 통해서는 사실 증명이 가능하지만
역사기록은 왜곡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사료(史料)의 불완전성과 상대성을 지적한 것이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 중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궈머러(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서적상의 기록은 완전히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들이 날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이경일, 앞의 책
저우는 북한 학자들과의 대화를 앞두고 특별히 대화의 요점을 준비했거나,아니면 평소 그의 역사 관점을 조선의 학자들 앞에서 작심하고 펴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총리로서 ‘제3세계’ 외교를 펼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의 후진국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중국이 강대국처럼 거드름피우는 것을 스스로 경계했고,그런 인상을 주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는 중국의 일부 역사학자들을 나무랐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는 여러분들 머리 위에 조선족은 ‘기자의 후손(箕子之孫)’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경일, 앞의 책
저우언라이의 말 가운데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라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광복 후 한국의 주류 사학자들은 한국 고대사의 중심부를 “평양”에서 찾으려 했다.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는 ‘패수(浿水)’라는 강에 대해 많이 헷갈려 왔다. 오늘의 중국 땅에 있는 강인지, 한반도의 평안도에 있는 또 다른 강의 이름인지 아리송했다.
<수경주(水經注)>라는 고대 중국의 지리서가 있다.
거기엔 “패수는 동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고 분명하게 적혀있다.
중국의 총리는 중국의 문헌과 문물에 근거하여
소신을 피력하고 있는데
거꾸로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저우언라이의 말을 빌리면
“무리한 시도”와 “역사 왜곡”을 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동북 공정’과, 일본이 한반도에 뿌리 내린 ‘식민지 사관(史觀)’은 그 지향을 같이하고 있다. 1963년이면 거의 반세기 전이다. 그때 저우언라이가 했던 말을 근거로 할 때 오늘 한국의 주류 사학자들은 일본이 ‘식민지 사관’을 굳세게 지키면서 중국의 ‘동북 공정’을 열심히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 된다.
중국의 ‘동북 공정’은 시기가 오래되었고 뿌리가 깊다.
1963년이면 지금부터 48년 전이다.
당시 중국의 한반도 파트너는 북한이었다.
북한과 중국은 한반도 전쟁에서 ‘혈맹(血盟)’이 되었고,
둘은 이념과 국가이익을 공유하는 처지였다.
올해(2012년), 한국과 중국 수교도 20년이 된다.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낯설었고,처음엔 그 의미와 파장을 잘 몰랐었다. 화들짝 놀라 들고 일어났을 때에 중국 정부는 한국 정부를 달랬고, 다른 한 편에서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변함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었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저우의 이날 발언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오늘 중국의 학자들이 펼치고 있는 ‘역사 왜곡’의 질주를 생각하면 중국 지도자로서는 여간 어렵고 용감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이 하고 싶은 말을 그가 그대로 대신하고 있다.
그는 조목조목 고대사(古代史)에서 펼쳐졌던 두 민족 간의 밀고 밀리는 관계를 설명했다.진, 한나라 이후 중국은 자주 요하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침략이라고 말했다. 또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고 말했다.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고,이때 일어난 나라가 발해"라고 그는 설명했다.그가 말한 ‘훌륭한 장군’은 양만춘(楊萬春)장군이다.저우는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두만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사과도 했다.
한족(漢族)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중국)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이경일, 앞의 책
이어서 저우는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잘라 말했다.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이다. --이경일, 앞의 책
북한과 중국은 1962년에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을 맺었다.총리 저우언라이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맺은 조약이다. 이듬해인 1963년 9월, 국가주석 류사오치가 평양을 방문, 이 조약을 확인,“백두산 꼭대기로부터 한반도 남부까지를 다 ‘조선’(북한) 영토로 재확인한다.”고 밝혔다.공산중국은 북한에 한반도에서의 정통성을 인정해준 셈이다.
1964년 3월엔 베이징에서 북한 외상(外相) 박성철과 중국 외교부장 천이(陳毅)가 ‘조중변계의정서(議定書)‘에 서명했다.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을 잇는, 중국-북한 사이의 경계선은 이런 경로를 거쳐 다듬어졌다.백두산도 둘로 쪼개졌다. 여기에 중심역할을 한 사람이 저우언라이였다.
전쟁이 끝나고 50년대 말부터 중국은 북한에 대해 꾸준히 백두산을 요구했다.중국 측 자료엔, 1958년엔 천문봉(天文峰)에 기상대(氣象臺)를 세우고 60년대에 들어서 백두산 전역에 걸쳐 자연보호구를 지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한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1962년의 변계조약은 그래서 나왔다.중국은 북한 국경수비대 병사들과 일부 북한 주민의 ‘월경(越境)’을 문제 삼았다. 이런 ‘불법(不法)’사례들로 양국 간에 긴장이 조성되니 무슨 조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한국은 대체로 중국이 백두산을 힘으로 빼앗아간 걸로 본다.
겨레의 얼이 서린 민족의 성산(聖山)을 북한의 김일성이 지켜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거꾸로 중국은 저우언라이가 북한에 너무 양보한 것이라는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중국 쪽 백두산 일대는 고래로 청나라의 성산이었다는 주장이다.
1962년 두 나라가 변계조약을 맺을 때만해도 이름은 백두산이었다.조약 제1조에 백두산이 나온다. 청나라 말엽부터 중화민국, 위만주국(僞滿洲國)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도 백두산으로 호칭하던 것이 언제 장백산으로 바뀌었을까. 1983년 8월 13일, 덩샤오핑이 백두산을 다녀와서 제사를 하나 썼다.
<부둥장백산 종신유감(不登長白山 終身遺憾)>
현재 장백산 풍경구(風景區) 입구엔 장백산을 알리는 큰 바윗돌이 서있다.“백두산에 오르지 못하는 건 평생의 유감”이란 뜻의 이 제사가 그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덩샤오핑의 ‘장백산 찬양’ 이후 백두산은 급하게 장백산으로 변해갔다. 장백산 풍경구가 중국 10대 휴가명승지 제1위에 올랐다는 보도도 있었다.
문화혁명 때 저우는 백두산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홍위병이 외교부에 쳐들어와서 난리를 치던 판국이었다. 중국과 북한은 서로 대사들을 추방하거나 소환했다.1967년엔 국경지대에서 총격사건이 나기도 했다.조선족 자치주 주덕해(朱德海) 주장(州長)도 이 문제로 호되게 시달림을 받았다.
저우는 주덕해를 여러 모로 보호했다. 주덕해는 중국에 조선족자치주를 만든 사람으로 조선족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를 끝까지 감싸주었던 저우언라이에 대해서 현지 조선족들은 고마워한다.아무튼 저우언라이가 북한 학자들과 만났던 1963년 6월은, 변계조약과 의정서 중간쯤의 시기이다. 류사오치가 북한을 방문,최종적으로 국경문제를 마무리하는 시점의 석 달 전이 된다.
짐작컨대 이 국경과 백두산 문제로 북한의 신경이 아주 날카로웠던 시기로 보면 될 것 같다.백두산의 양분이 강대국 논리의 소산이라고 보는 북한 측 불평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백두산의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국의 어떤 기록은, 당시 김일성이 중국과의 “혈맹”관계를 들어 시원시원하게 반을 내주며 통 큰 양보를 했다고 적고 있다. 모든 외교관계가 그렇듯이 백두산 문제도 그 실상(Fact)은 비밀 속에 감춰져 있다.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양측의 실랑이가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벅찬 상대와 겨루어 반쯤이라도 건진 것이 나름으로 대견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중국은 중국대로 자기네 사정이 있어서 혈맹인 북한에게 쉽게 양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 무렵 중국은 중인(中印) 국경분쟁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남쪽으론 인도와 국경문제로 다투고,북쪽으론 북한과의 국경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1953년에 휴전이 되고, 1958년에 북한 주둔 중국군대가 철수했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중국은 북한 정권을 살려준, 북한 정권의 은인이자 강자였다.
세상에 완전하게 합리적인 타결은 있을 수 없다. 설령 상당부분 합리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약자는 나름으로 상실감과 패배에서 오는 아쉬운 마음을 갖기 마련이다. 저우언라이의 동북지역 역사관계 이야기는 그러한 북한의 처지를 의식해 작심하고 말한 것일까.
저우언라이는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비교적 열린 관점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영토문제에 이르면 그 역시 단호한 처지가 되겠지만, 중국 ‘영토’ 안에서의 소수민족의 종교나 문화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북한과 소수민족 문제는 물론 별개이지만 참고로 저우의 민족주의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겠다.
그는 평소에 “대민족주의--특히 대한족(大漢族)주의--와 지방 민족주의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경계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저우가 중국 중심의 대국주의마저 거부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병상에서, 살아서 티베트에 한 번 가보지 않은 것을 무척 아쉬워 한 적이 있었다. “이젠 가볼 수 없겠지......." 하면서 회한을 나타냈다.
1950년, 티베트는 공산 중국에 편입되었다. 편입의 주역은 덩샤오핑이었다.덩은 저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였고 동지였다. 저우에게도 티베트는 강대한 중국의 일부였다. 풍광과 풍습이 특이한 티베트를 가보지 않은 것을 저우는 몹시 아쉬워했던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에 관한 그의 여러 발언들은 그의 열린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긴 하지만 확고하게 원칙론에 서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경 안에 사는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제국주의와 각 민족 내부의 공적(公敵)에 반대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각 민족들이 서로 단결하는 하나의 대 가정으로 만든다.각 소수민족 거주지에서는 자치를 실시하고, 언어와 문자를 발전시키며, 풍속과 습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유지 발전시킨다.인민정부는 각 소수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에서의 건설 사업을 지지한다.”
위의 글은 건국 당시 제정했던 <공동강령> 속의 소수민족 관련 부분이다.종교에 관한 그의 말도 재미있다. 역시 원칙론 적이다.“종교가 없는 사람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존중해야 하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역시 종교가 없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저우의 여러 발언들을 단순하게
‘원칙론 적’인 것으로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는 사정이 있다.
그런 융통성마저 문화혁명 시기에 거의 다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소수민족 자체의 존립근거마저 위협을 받았다.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毛遠新)이
동북지방에 황제처럼 군림하여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어버렸다.
<이 중/시인/전 숭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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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적 한계도 있겠지만 주은래 수상의 열린 관점을 잘 보여주었네요
특히 주은래 수상은 국수적 배타적 민족주의을 경계한것으로 보입니다
민족과 민족간의 평등 이라는 부분은 현대 자주철학의 민족관과 매우 닮아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