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창병원 제 1대 원장 마틴 선교사는 누구인가?
마틴 선교사가 신병으로 안식년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뒤를 이어받은 플로렌스 J. 머레이 박사가 쓴 선교 회상록에 마틴 선교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마틴 박사는 병중이라 걷기조차 힘 든데도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는 캐나다 뉴펀들랜드 출신의 젊은 의사로, 이 병원을 스스로 설계해 지었다. 병원은 내가 본 당시 어느 선교병원보다 훌륭했다. 그때만 해도 그 지역에 연관공이나 전기공이 없었던 터라 연관시설이나 전기시설은 그가 다 직접 설치했다. 그가 갖고 있던 작은 발전기는 그 지방에서는 첫 번째 전력이었다. 그 전기로 병원 전등을 켰고 병원 물을 공급하는 펌프를 돌렸다.” 22)
마틴은 뉴펀들랜드 출신의 젊은 의사였다. 그는 세인트 존스에서 유서 깊은 감리교 신앙 가문에서 아버지 아더 마틴과 어머니 샬롯 쿨타스 사이에서 1890년 7월에 태어났다. 그는 일찌기 전기, 무선 등에 관심이 많았고 청소년 시절에 독학으로 전보를 배워 케이프 레이에서 마르코니 통신사 견습생으로 근무하였다. 17세에는 세인트로렌스강 하구에 있는 안티코스티섬의 운영자로 임명되었고 그 후에는 뉴브런즈윅의 세인트 존에서 근무하였다. 18세에 세인트 존스 감리교대학 재학생이었지만 뉴펀들랜드 북쪽 끝에 있는 세인트 앤서니에서 표범과 물개잡이 어부들과 래브라도 원주민들을 위하여 병원선을 운영하는 윌프레드 그렌펠 박사의 스트라스코나의 무선신호기사가 되어 자원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무선기사로 봉사하는 중에도 그렌펠 박사를 도와서 서적과 의류 구호를 담당하였고 때때로 환자들에게 밥을 먹이고 발치하며 상처를 드레싱하고 약을 투여한 등 간호사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그렌펠 박사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있는 곳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렌펠 박사의 병원선에서 봉사하면서 의사에 소명이 있음을 깨닫고 온타리오 퀸즈대학 의대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여름방학 때 병원선에서 엑스레이 기사로서 더 많은 책임을 떠맡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곳에서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나온 마가렛을 만나 해외선교의 꿈을 나누었다. 그는 의기투합한 마가렛과 가능한 일찍 선교지로 떠나고싶어 의대 재학 중인 1913년 12월에 감리교 교단에 소속된 청년으로 토론토 감리교 선교위원회에 선교사 지원서를 냈다. 그는 감리교 선교위원회로부터 1915년에 파송이 어렵다는 서신을 받고 자신의 신앙 고백서와 봉사활동 보고서를 첨부하여 감리교 선교위원회에 이른 파송을 촉구하는 편지를 냄과 동시에 장로교에 선교위원회에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1915년 1월에 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로부터 가을에 조선으로 파송한다는 편지를 받았으며 1915년 4월에 킌즈 의과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그 해 11월 3일에 마가렛과 결혼식을 올리고 후원교회인 오릴리아 교회로 가서 인사를 하고 마틴은 오릴리아교회 장로교 장로로 안수를 받고 당회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그해 12월 4일에 밴쿠버에서 조선을 향하는 배에 올랐고 요코하마와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 원산, 청진, 회령을 지나 1916년 초에 캐나다장로회 용정선교부에 부임하였다.
플로렌스 머레이 박사는 마틴 이야기를 계속한다.
“마틴은 중간 키의 남자로 병 때문인지 야윈 체구에 얼굴이 창백했다. 숱이 많은 눈썹 아래의 파란 두 눈은 하찮은 사물이라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다 했다. 능력이 있는 그의 두 손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훌륭한 기계공일 뿐만 아니라 무선 전신 기술자 자격까지 갖추었으며, 아마추어 천문가이기도 하였다. 또 뛰어난 내과의이자 훌륭한 외과의였다. 그의 마음을 언제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6년 전에 이미 시료소를 차렸다. 병원이 지어질 때까지 이곳 선교부 여선교사 숙사의 방 둘을 빌려서 진료와 수술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조선어와 중국어 실력도 놀라웠다.”23)
마틴은 용정선교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진료소를 열었다. 1916년 여름에 새 건물의 기초를 닦았고 그 건물이 완성될 때까지 선교부의 여선교사 숙소를 이용하여 진료를 하였다. 그러나 3개월에 걸쳐 지은 진료소의 지붕이 샜고 재정의 결핍으로 진료를 접어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 봉착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를 향해 “지금이 북간도의 50만 조선인들을 위하여 일할 때”라고 말한다.24)
그는 1918년 11월 새 건물 완성과 비용 절감을 위하여 연관시설이나 전기시설은 그가 다 직접 설치했다. 병원의 전기불과 물의 공급은 다 그의 손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자신의 진료를 위하여 조선인 의사를 통역관으로 쓰는 것을 죄로 여겼다. 외국인 의사가 조선인 의사를 대동하고 진료하다 보면 병원을 찾아 온 환자들을 다 돌보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어와 중국어로 환자들과 직접 소통하고자 언어공부에 집중하여 수년 내에 그 뜻을 이루었으며 환자들은 그의 진료를 받으려고 줄 지어서 기다렸다.
“마틴 의사는 중국어를 할 줄 아는데, 정말이지 감탄할 따름이다. 그들이 마틴 의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희가 봐야하는데! 간도에 그만큼 평가를 받는 사람이 없어. 그는 전 지역에 알려져 있단다. 마틴 의사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어. 사실 그는 약 4개월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고 (관절염 때문에) 아직도 약하고 절뚝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투지가 대단해.”25)
“그는 이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자격을 갖춘 의사였고 1년에 2만 2천 명이나 되는 많은 환자들을 돌보았다. 또 그는 의료 일 외에도 행정사무, 의료요원 훈련 등 엄청나게 많은 일을 도맡아 했다. 그의 수석 조수로 이집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의과 학교에는 가보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틴 박사가 훈련을 아주 잘 시킨 덕분에 이 집사는 대강의 병세 진단은 물론 간단한 수술도 할 수 있었다. 마틴은 이 집사가 할 수 없는 어려운 병과 큰 수술을 주관했다.”26)
마틴은 1922년 1월 안식년을 맞이하였으나 건강의 악화로 바로 떠나지 못하였다. 그는 머레이 박사에게 병원 사역을 위임하고 4개월 동안 몸을 쉬고 난 뒤에야 비로소 떠날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그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병원의 선교비를 절약하려는 수고 때문에 과로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며 같은 선교부 안에 있는 바커 선교사 부부의 멈추지 못하는 과로를 늘 염려하였다. 바커 선교사는 안식년으로 캐나다에 들어갔으나 마틴 선교사의 염려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안식년을 떠나기 2개월 전에 함흥의 맥밀란 박사가 밤낮으로 전염병에 걸린 여학생들을 치료하다가 그도 발진티프스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머레이 박사에게 절망적으로 외쳤다. “당신과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운명을 마칠 것이오.” 27) 그의 예견대로 그는 1940년 11월 16일 신병 치료를 위해 안식년을 앞당겨 일찍 귀국하였으나 1941년 7월 그는 5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8부로 계속됨
2025년 10월 28일 화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
미 주
22) 플로렌스 J. 머레이 저, ⌜내가 사랑한 조선⌟, 42쪽, 두란노
23) 플로렌스 J. 머레이 저, ⌜내가 사랑한 조선⌟, 43쪽, 두란노
24) 스탠리 마틴 저, ⌜스탠리 마틴 의료 선교사의 편지⌟, 24쪽, 보고사
25) 플로렌스 J. 머레이 저, ⌜플로렌스 J. 머레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206쪽, 보고사,
26) 플로렌스 J. 머레이 저, ⌜내가 사랑한 조선⌟, 43쪽, 두란노
27) 플로렌스 J. 머레이 저, ⌜내가 사랑한 조선⌟, 56쪽, 두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