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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동광원 초창기 생활 좌담회 기록
장소 : 남원 대산 운교리 동광원2시
일시 : 2019년 04월 15일 오후 2시
(사회) 그때 사정을 잘 모르시는군요. 그런데 거기에 50년대 들어가셨잖아요? 그때의 이
야기를 조금 더 제가 알고 싶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때 사셨던 분들, 거기 다녀가셨던 분들, 그때 생각만 좀 얘기 해주시면 돼요.
부담 가지실 것 없어요. 말씀 안하시면 제가 물어볼게요.
거기 계실 때 누구누구 사셨는지 그분들 그 얘기 해주시면 돼요. 절대 부담가지시지 말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복 집사님 녹음기 안가지고 오셨어요?
(김금남) 8.15 해방 후니까 6.25때 이북서 온 반이 있었어요.
그 반을 다 데리고 진도에 갔었어요. 가니까 방이 이렇게 한 칸 있고 가운데 부엌이 있고,
또 이쪽에 방 한 칸이 있고 그러데요. 근데 가니까 서 집사님이 남반 한반을 데리고 사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귀주 어머니가 사시고, 그래서 여반을 데리고 가서 몇 년 살았는지 산 연수는 모
르겠습니다. 한참 살았어요. 한 일이년은 산 것 같아요.
(사회) 다른 분도 얘기하시지요.
(조성애) 저희는 그 쪽에서 한나 어머니하고 살았어요. 진도 처음에 갔을 때에, 그리고 서
울 학생 남반이라고 있었어요.
(김금남) 그 해 몇 살 때라고 말해요. 몇 살 때?
(조성애) 동광원에 오기를 12살 먹었을 때 와가지고 지산동에서 좀 있다가 갔으니까 이듬
해에 가지 않았는지 그렇게 생각이 돼요. 그때 가서 서울에서 내려온 남반하고 살다 온 사
람들과 같이 갔잖아요?
(오세휘) 아니에요. 우린 우리대로 갔고, 그 남반들은 한참동안 계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남반이 먼저 갔어요. 맨 처음에 갔어요. 연산에 집 안 샀을 때 갔어요.
그러니까 옥금씨 집으로 봄에 가서 살다가 얼마나 살았는지 몰라요. 한동안 살다가 군청
뒤에 향교, 향교에서 살았어요. 거기서 얼마를 살았는지 몰라. 그래가지고 인자 연산으로
가니까 집이 초가집 한 채가 있는데 아까 원장님 말씀대로 가운데 부엌이 있고 양쪽에 방
이 있고 한쪽에는 여반이 살고 한쪽에는 남반이 살았어요. 그게 진도에 가서 세 번째 이사
했을 때요. 세 번째 간 집이지요.
(방순녀) 진도에 가서 옥금씨 작은방으로 갔다가 향교로 갔다가 세 번째 간 집이지요.
(오세휘) 그렇지, 세 번째지.
(조성애) 우리도 처음에 진도 갈 때는 배에서 내려서 걸어가니까 거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옥금씨 어머니 집 같아요. 우리가 거시서 살았어요. 거기 가서 그리로 들어갔어요. 우리가
처음에 와가지고 배에서 내려가지고 가니까 오장로님도 옛날에 거기서 뭐 헛간 같은 데서
일하고 계신 게 기억이 나고.
또 거기서 저희들도 며칠 있다가 그때 연산에 왔거든요. 그래가지고 한쪽은 남반 요쪽은 여
반 그렇게 살았는데 그때 한나 어머니가 있었어요.
(사회) 한나 어머니도 계셨네요?
(김금남) 귀주 어머니가 처음에 갔을 때는 계신 것 같은데...
(조성애) 한나 어머니가 계셨고 그리고 서집사님도 계시고 지금 서울에 사시는 인옥씨 장
로님 하고 두 분이 남반들 하고 같이 계셨습니다.
(사회) 그럼 이야기가 거의 다된 건가요? 거의 그 이야기가 진도에서 만든 동영상에 나와
있어요.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하시더라고요.
(방순녀) 그리고 우리가 저 수인씨 차타고 해남으로 가서, 계속 찬송 부르고 갈 때 그때 같
이 안 갔어요? 그때 가가지고 두 반들이 같이 나왔어요.
(조성애) 그래가지고 우리가 거기서 살고 있으니까 6.25 전에 오셨던 사시는 언니들이라고
이선생님이 같이 데리고 진도를 오셔가기고 우리가 거시서 살면서 그 바다에 다니면서 갈파
래 뜯고 쑥 뜯고 그러니까 몸이 막 깔따구는 많고 바다에 가서 젖은 갈파래 뜯어가지고 지
고 오면 물이 흘러가지고 이 등들이 다 젖어졌었어요. 하여튼 간에, 그때는 우리랑 가서 살
다가 그 전에 그랬어요.
(방순녀) 진도 모기라는 것은 밤에 길을 못가요. 요렇게, 요렇게 헤치고 가야지, 눈앞을 가
려가지고, 밤에 어찌나 모기가 뗴로 달라붙는지 요렇게, 요렇게 헤치고 가야해요.
(조성애) 그래가지고 깔따구들이 말도 못해요. 머릿속이고 어디고 다 파고 들어가지고 물면
은 아주 사람 정신이 없어져요.
(김금남) 지금 생각이 난 것이 이 학생반을 데리고 사는데 방이라고 이렇게 가니까 너무
좁지요. 그런데다가 어떻게 빈대가 많은지 벽에 전부빈대 구멍이에요. 그래가지고 도저히
잠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부엌에다가 가마니를 깔고 그러고 살았어요.
그러고는 조석으로 예배드리고 그리고 많이 바닷가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우리는 고기
안 먹을 때니까 절대 바다에 가도 고기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고 가면은 갈파래 그것이 나
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너벅발이라는 것도 나고 청각도 나고 그래가지고 한물질 때 가면 물
이 조금 빠지니까 바위에서 조금 뜯어오고 또 두 물질 때 가면 조금 더 깊은 풀이 나서 뜯
고 세물 지고 나면 그때 가니까 깊은데 까지 들어가도 이렇게 위에까지 안 올라오더라고요.
물이, 근데 제일 기억나는 것이 청각이 막 요렇게 기어 올라오더라고요. 그거 뜯는 것이 그
렇게 재미가 있고, 근데 그렇게 뜯고, 힘든 줄 모르겠어요. 거리는 한 십리가 넘은 것 같
아요.
그렇게 가면은 모두 힘껏 다 지치고 오죠. 그러면 남반이 받으러 와요. 그래서 도중에 인계
해주고 한 기억이 나요. 그래도 이런데(산중)서만 살다가 바닷가에 가니까 생소하고 그렇게
기쁘고 감사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쁘고 감사 하기만하고 그렇게 힘든 줄은 모르고 그러고
가니까 서울에 있는 사람 인옥씨가 수박을 많이 심어가지고 그거 먹던 것이 그렇게 기쁜
기억이 나요.
그리고 살고 있는데 이 선생님이 오셨어요. 오셔가지고는 저희들은 모르는데 같이 사니까
모르는데 너무 보기가 애처로웠던가 봐요. 우리 사는 것이 너무 사람들이 한참 크는 사람들
이 말라 가지고 있으니까 ‘가자’, 데리고 가고 싶었던가 봐요. 그래서 선생님 뒤따라서 모두
나왔어요. 목포로 해서 그렇게 나온 기억이 있어요.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방순녀) 그때 가서 살 때, 이선생님 모시고 살 때, 한참 가물어서---------
산골산에 예배를 보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식구 전체가 예배를 보러 갔어요.
예배를 보는데 이상해요. 예배를 막 끝내고 이선생님이 빨리들 집에 가시오. 비가 옵니다.
우리 집에 도착하기 전에 뇌성이 나고 소나기가 내려 가뭄을 해결했거든요.
그때 집에 가니까 수박 참외 옥수수 그날 식사가 무엇이냐면 아침은 큰 참외 반쪽, 저녁은
옥수수 1통, 참외 반쪽 먹고 나면 배가 부른데 옥수수1개 뜯어 먹고 나면 배고 고파요. 그
동안 다 꺼져 버렸어요.
그런 기억이 나고 그래가지고 그 반을 다 데리고 같이 나왔지요. 나올 때 풍랑이 어찌 심
해가지고 해남으로 왔는가? 목포로 왔는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나오니까 사람들이 모두 놀
래요. 이 풍랑 속에, 배들이 다 운항 금지령인데 어떻게 살아서 나왔는지? 식구 모두가 배멀
미를 하고 토하고 그랬어요. 그때 목포로 갔는지 해남으로 갔는지 기억이 안나요.
(오세휘) 해남으로 갔어요. 죽을 뻔했어요. 내가 어찌 토하고.
(방순녀) 그때 참 같이 나왔어요.
(오세휘) 먹을 것 이 없으니까 바닷가에 가서 밤낮 파래 같은 것 먹고 사니까 화장실은 큰
둠벙 같은 것을 만들어 사용하니까 너풀너풀 ----
(조성애) 그때는 먹는 게 그러니까 배앓이들을 잘했어요.
쑥을 삶아가지고 한나 어머니가 쑥물이 쓰니까 잘 안 먹으려고 하니까 쑥물을 잘 먹어야 예
수를 잘 믿는다고 그러시면서 큰 통에다 떠가지고 다니면서 떠먹여 주시던 그것이 항상 제
일 안 잊혀 지대요.
우리가 거기서 살 때 쑥을 삶아서 쑥을 식량으로 하고 쑥물을 하나도 안 버리고 그릇 그릇
다 두어서 그걸 다 마셨거든요.
(오세휘) 한번은 서집사님 하고 같이 살 때, 아침에 해가 떳더라고요. 몇 사람이 안 일어
났어요. 서집사님이 바께스에다 물을 떠다 확 찌끄렀어요. 그게 생전 안 잊어버려져요. 나는
일찍 일어났는데 몇 사람이 자고 있다가 이양반이 참다못해 바께스에 물 질러서 방에다가
이불 덮고 있는데, 생전 안 잊어버려져요.
잠자리도 안 좋았어요. 가마니를 깔았더라고요 기억나실 거예요. 가마니를 깔고 가만 누워
있다고 물 찌끄러 버렸지요.
(조성애) 그러가지고 물을 갖다 부어 버렸어요. 방문을 열고, 이 양반들이 자다가 놀래가지
고, 뒷산으로 다 올라가고 그랬어요.
하루에 두끼 먹는데 아침은 참외 반쪽 저녁은 옥수수 한통
(방순녀)두끼를 먹었는지 어떤지 그때 식사가 참외 반쪽 하고 옥수수 1개 였으니까
참외 반쪽 먹고 나면 참외가 크니까 배부른데 옥수수 한통 뜯어먹고 나면 곧바로 배가 고
파. 그때 여럿이 갔을 때 그랬어. 학생들하고 여럿이 갔을 때 그리고 거기서 살 때는 주로
주식이 갈파래였으니까.
(사회) 예, 파래 소화가 안돼요.
(방순녀) 그때 쑥이 없었어요. 거기에 진도 연산, 진도 땅이 사토라고 이름이 났더라고, 죽
은 땅이라고. 그래서 쑥을 먼데에서 캐다 심었대요. 서집사님 계실 때, 그 뒤에는 쑥이 있
었는데.
(조성애) 우리는 하여튼, 그때 갈 때, 진도 처음에 갈 때, 4월 달에 갔어요. 4월 달에,
왜 기억이 나냐면, 옥금씨 어머니 집에를 들어갔는데 부활절이라고 쑥을 캐오라고 해서 떡
을 해주셨던가 해서 4월 달이란 걸 기억 하거든요. 그때 인옥씨랑 오장로님 이랑 같이 살았
거든요.
(오세휘) 예, 내려와서 서울서 살던 사람들이 그대로 목포에서 어느 장로님 집이라는 곳에
서 신세지고 아침 얻어먹고 배타고 진도 집에 왔어요.
(사회)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능곡이죠? 경기도 능곡에서 사시다가 이리 오신 거죠?
(김금남) 그때 내려간 사람들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오세휘) 50년대예요. 하여간,
(방순녀) 그러니까 그때 내려간 사람들 이름을 말씀해 주시라고요
(사) 혹시 같이 내려오신 사람들?
(오세휘) 태현이 명훈이 성춘이 나 의용이 명진이
(방순녀) 태평이
(오세휘) 태평이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
(복은순) 있었어요. 거기서 살다 나왔어요.
(오세휘) 아 그러면 다 데리고 왔구나. 하여튼 서울 살던 사람들은 다 데리고 나왔어요.
(사회) 그때는 그러니까 오장로님 안계시고 서집사님이 책임자로 계셨어요?
(오세휘) 예, 처음에는 오장로님 계셨는데 언제 가셨는지는 모르겠고.
(사회) 오장로님이 먼저 내려가셨고 향교에 사실 때는 서 집사님이, 그리고 귀주 어머님도
계셨고 근데 한나 어머님도 계셨다는데 그러면 귀주 어머니 전에 계셨나요?
(오세휘) 한나 어머님은 기억이 안나요.
(김금남) 한나 어머니은 기억이 안나.
(조성애) 아녀요. 귀주어머니는 언제 살았냐면 저기 저 돈지 살 때에 귀주 어머니가 살고
계셨거든요. 돈지 가기 전에 귀주 어머니가 가셨어요. 귀주어머니가 제일 오래 살았어요.
거기에서.
(방순녀) 돈지 가시기전에 귀주 어머니가 함께 살다가 우리 나올 때 돈지로 같이 가셨어요.
(조성애) 그래가지고 우리가 언니들하고 같이 두 번째 같이 갔을 때구나. 그때는 거기 살다
가 남반하고 바꿨거든요. 우리는 돈지로 가고, 인경이 그 양반들이 연산으로 오고 그랬어요.
제가 두 번째 가서 살 때에 그때여, 그때가.
(사회) 원장님이 데리고 간 소녀반 누구, 누구인지 기억나세요?
(김금남) 이북서 온 사람 다 갔을 때요?
(조성애) 근데 저는 가만히 생각 하니까 하나도 모르겠어요. 몇 명이 간지도 모르겠고, 이
름도 모르겠고. 누구라도 한명 같이 살았다면 그때 누구누구 갔었는지 물어나 보겠는데 다
나가고 저 혼자거든요, 남은 사람이라고는. 그러니까 어디다 물어 볼데도 없고.
(방순남) 그때 같이 갔던 사람이 성애양 인숙이 경숙이.
(조성애) 경숙이는 그때 안 갔어, 거기 안 살았어요. 안 갔어요. 또 한사람 있는데 생각이
안나요.
(방순녀) 한 열일곱 분 된 것 같은데..
(조성애) 그 정도 된 것 같은데 세상에 그렇게도 깜빡, 그분들 다 이북에서 온 분들 다 가
버렸잖아?
(사회) 기록에는 안농에 피란민들이 있었잖아요? 진도 금골에, 거기 고아들 데리고 있었다
고 그렇게 쓰여진 것 같거든요. 혹시 안농 피란민들 중 고아들, 동네 사람들 아니고요.
(김금남) 그게 아니고, 이북서 온 다른 피란민들입니다.
철순이도 그때 갔잖아?
(방순갑) 철순이도 갔어요? 그때 나도 갔는데 왜 갔을까?
(방순녀) 언니 갔을 때는 여럿이 풍랑 만났을 때 갔다가,
(방순갑) 해남으로 갔다가 진도로 갔어요. 그때 여럿이 갔어요.
어떻게 식구들이 그때 열댓명 된 것 같아. 다 배 멀리를 해가지고 한나 어머니하고 나하고
만 배멀미를 안 해가지고.
(방순녀) 그때 올 때 갈 때는 안 그러고 올 때.
(방순갑) 나도 같이 갔어. 풍랑 만날 때 같이 갔어. 그때 갈 때.
다른건 기억 안 나는데 남반이 먼저 가서 살아가지고 인옥씨가 바작에다 수박 참외를 가득
싣고, 그거밖에 눈에가 안 보인다고.
(방순녀) 그때 우리가 갈 때 그 금남언니가 거기 계셨어요. 농사져가지고 그놈 먹고 금남
언니랑 전부 같이 나왔어요. 그때 언니가 갔을 때 산골산에서 예배 볼 때에요. 예배보고
내려와 가지고 풍랑을 만났어요. 바다로 해초 뜯으로 간다고 했는데 못 갔거든.
(김금남) 우리가 그때 얼마나 못되었었나봐. 얼마나 말라 비틀어졌던지 밤이면 빈대 때문
에 잠을 못 자니까 부엌에서 가마니 깔고 두러누워서 자고 날 새면 갯가에 나가야 하고 그
래도 그렇게 재미가 있습디다.
(방순갑) 모기 때문에 밤에도 갯가에 나갔지, 그렇지 않으면 안가지.
(김금남) 바다에는 어쩔 수가 없어, 바다에는 뭐 뜯으러 가지. 깔따구는 말도 못하고 그러
니까 사람들이 뼈 만 남았었나봐. 근데 우리는, 나는 몰랐어요. 재미만 있고 그랬지, 그리고
예수 믿으려면 그렇게 고생해야 하는 것 같고, 십자기 진 것 같고, 그렇게 좋더라고. 나는
그래서 그렇게 힘든 줄 몰랐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보시더니 그냥 저를 부르시더만 그러면서
안되겠다고 다 데리고 가자고 그래서 그때 광주에서 오신 식구들이랑 같이 모두 나온 것
같아요, 내 생각에.
(방순녀) 그때 빈대라는 것은 자다자다 못자고 나와서 옷을 벗어서 보면 옷이 빨개 옷속에
가 빈대가, 그걸 못 잡아 탈탈 털어가지고,
(김금남) 그때는 약도 안 할 때잖아요? 약도 없었어.
약이 있어도 안 할 때지.
(방순갑) 그러니까 바다에 가서 앉아있었잖아.
(방순남) 그것은 돈지에서 살 때 그랬지.
(방순갑) 아니야, 그 때 아니고 거기서도 그랬어.
(조성애) 우리가 가가지고 봄에 묵정밭 판 것 생각 안 나세요? 묵정밭,
(모두) 묵정밭도 개간했지.
(조성애) 조금만 애기들을 데려다가 그 벌판에 바람이 얼마나 세요? 진도 바다 바람이 거
기 나가서 묵정밭 밭 이룬다고 그 땅을 많이 팠어요.
(사회) 성경 공부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 이죠?
(방순녀) 그 이후예요.
이후에 계명산에 3번째 갔을 때 공부방에 갔어요.
(사회) 그 계명산에서 찍은 사진 보면 1기 2기 그니까 1회 2회 졸업생 사진만 있던데.
(복은순) 저희들이 2기 였거든요. 언니들이 72년도에 계명산에서 공부하고 73년도에 가셨
고 우리는 73년도에 계명산에서 공부하고 74년도에 저희들이 4명이 가서 일년 살았어요. 귀
주 어머니하고 74년도에.
(사회) 그때는 그러니까 진도에서요?
(방순남) 네, 진도에서.
(사회) 그리고 성경 공부방은 1번만 그렇게 하셨나요?
(복은순) 아니요, 성경 공부방은 7회까지 마치고.
(사회) 7회까지?
(복은순) 네.
7회까지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 다 데리고 진도로 갔어요.
7회까지는 계명산에서 마쳤고.
거기서 공부를 마치고 무조건 일년은 진도 도암 부안 계명산 광주 신한 몇 명씩 갈라서 일
년간 농사를 지었어요. 그리고 일년 지나서 왔거든요.
저희들 살 때는 집이 짚으로 된 옛날 집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까 돌집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국자언니에게 물어봤어요. 그 돌집을 언제 지었냐고 했더니 국자언니 계셨을
때 그 돌집을 지었대요. 그 초가집을 헐어버리고 사문자가 와서 자기기 인건비도 안 받고
지어준다고 몇 사람 데리고 와서 집을 지었는데 지붕을 아직 끝내지도 않고 가버렸대요.
그런데 그 돌을 어디서 나서 다했냐했더니 리어카로 산골산에서 전부 날이 날마다 돌을 날
랐대요. 엄청나게 고생이 많았더만요. 그래가지고 사문자(씨)가 지붕을 안하고 나가서 안
오더래요. 그래서 어쩔수 없이 동네가서 이장님한테 사정을 해서 인부를 얻어서 지붕을 했
는데 이렇게 돌로 쌓기만 했지 제사는 안했대 안하고 가서 국자 언니가 그 밖은 돌이니까
재사는 안 해도 되잖아요? 집안은 국자 언니가 그걸 다하셨대요. 재사를 흙으로 안에 엄청
나게 고생이 많았죠. 처음에는 인건비를 안 받는다고 하더니 나가서 계속 독촉을 하더래요.
인건비 주라고,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때 당시 국자언니가 좁쌀 있는거 깨 전부 팔아가
지고 인건비로 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먹을 것도 없이 일 년 동안 고생을 많이 하
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74년도에 살 때 초가집 이였기 때문에
아마 70년대 쯤 지은 것 같아요. 그 돌집을,
(오세휘) 광주씨 아들 이름이 무엇인지 그 사람을 내가 보냈어요.
초가 집 때는 이렇게 집이 안 컸어. 더 작았는데 방 두개하고 가운데 부엌있고 그랬는데 지
금은 크더라고요. 집이,
(김금남) 우리 계명산에서 공부 끝나고,
(복은순) 언니가 73년도에 살았어.
(김금남) 첫째방에서 저하고 해신이하고
정은언니, 정은이는 조금 살다 그냥 가버리고 그리고 어머니들하고 그러고 살았죠 .
(복은순) 우리는 저하고 겸이언니하고 나숙자 언니하고 고복선언니하고 근디 셋이 키가 다
작아요. 다 작은데 배에서 내려가지고 옛날에는 뭐 짊어진 것도 없응게 다 보따리로 싸니까
꽤 컸어요. 그래가지고 4명이 배에서 내려가지고 이고 연산까지 오는데 그렇지않아도 키가
작은 사람이 이것을 이니까 더 키가 작게 보여 가지고 저희들이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이 상황에도 성현이 이모 큰 사람들은 다 다른 데로 가고 그중에서 제일 작은 사람들만 진도
로 가가지고 그래도 귀주 어머니가 엄청 저희들한테 병원에, 저희들이 72년도 까지 병원에
다니다가 공부방을 하느라고 병원 그만 뒀거든요. 십년 동안 저희들이 기독병원에서 보조
간호사로 일을 했는데 병원에 다닌 애들이 왔다 해가지고 귀주어머니가 저희들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가 몰라요.
() 진도로 간 사람들은 부잣집으로 가가지고 사랑받고 살았는데 우리는 이숙자 나성애 박
옥주 그렇게 넷이 없는 데로 가가지고 일 년 동안 우리는 고생고생 하고 살고 그랬죠.
(복은순) 그래도 부안으로 간 사람들은 소식을 들으니까 일이 가을에 빨리 끝났다고 하더
라고 그런데 진도는 김선생님 아시지만 12월까지도 일이 있어요. 밭에가, 유채 옮기고 뭐하
고 우린 아직 할일이 겁나게 있는데 도암 식구들은 일찍 끝나고 다 끝났다고.
() 진도는 부잣집이라 잘 먹고 사는데.
(복은순) 우리는 먹기는 잘 먹었지.
() 우리는 못 먹고.
(복은순) 방으로 절반이 고구마가 쌓여있고 그래가지고 우리는 먹는 것도 잘 먹고 고생은
안했지.
(방순녀) 공부방이 끝나고 목지에 간 것은 7일방까지 끝나고 광주로 다 내려갔고 1일방에
서부터 7일방까지 저 혼자만 갔어요. 그때 어머니들도 순이씨 어머니 종우씨어머니 배자어
머니 그렇게 가시고 우리도 저 사연양 또 유엘라 또 하나 나갔어요. 그 사람 학생 여섯인가
하고 장로님하고 열둘인가 진도로 갔어요.
(복은순) 몇 년도에 가셨었어요?
(방순녀) 그때가 아마 68년도일까? 78년도 일까 ? 그래가지고 거기서 일 년 살고 계화도로
왔으니까. 계화도로 와서 지냈어요.
공부를 72년도에서부터 시작 했는데요
72년도에 자기들이 살았고 78년도에 우리가 진도로 간 것 같아. 아니 77년도에 갔구나. 78
년도는 계화도로 가고.
(복은순) 우리가 74년도 살았는데요.
확실히 79년도에 계화도로 갔어요. 그 안에 진도로 갔었지. 진도서 바로 거기 갔으니까.
(조성애) 우리하고 그때 같이 가셨었어요. 그것은 그 전에,
(방순갑) 그니까 내가 진도를 3번을 갔어.
(조성애) 우리 살다가 언니들만 두 분이 나오시고 우리들만 계속 살았어요.
그때 경숙이 성애 독임이 --- 그때 8명인가 산 것 같은데.
(방순녀) 정식으로 공부방이 진도로 갈 때는 다 끝나고 1일방에서 7일방까지 장로님이 지
적도 하고 가고자 하는 사람에 한해서 12명인가 간 것 같아요. 장로님까지 명수는 확실히
모르겠고 그래가지고 일 년 살고 계화도로 갔어요.
(조성애) 진도에서 살때에 돈지 어머니 모시고 거기서 사는데 여기 순심언니 애 많이 쓰셨
어요. 우리 데리고 산으로 나무하러 다녔지. 들로 밭매러 다녔지, 날마다 그러고 살다가
살다가 힘들이 드니까 그때 명순어머니하고 귀주어머니 하고 순심언니하고 돈지어머니하고
어른들이 세분이여.
그리고 우리가 그때 한 8명이나 되었을까? 서순언니에다 길람언니에다 나간 장순언니 언니
라고 그분도 계셨고 거기서 살때에 겁나게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래가지고 저 먼데까지가
서 나무를 해가지고 오면 산지기가 마을까지 오면 딱 뺏어가버리고 하여튼 집에 마을까지
다 오면 뺏어 산지기가 나무 해가지고 왔다고 다 뺏기고 죽 오면 우리는 아침에 양식이 없
으니까 한나절동안 가서 야산에가서 나무를 해다가 그때는 좁쌀가지고 엿밥들을 많이 하대
요. 동네 사람들이 살면서 한나절내 나무 해가지고 나무주고 조 엿밥을 갖다가 바꿔먹는거
야. 말하자면 솥에다가 하면은 좁좁 잘잘한 것이 증기가 다 빠져버리면 먹다가 껍질만 세져
도 날아가는거야. 엿밥이, 그래가지고 소를 길렀는데 그때에 인욱씨가 사셨을 때 소를 기르
다가 가셔버링게 인자 소를 기를 사람이 없응계 저보고 인재 꼴을뜯어다가 먹이라고 해서
저는,
(방순갑) 몇살 먹었는데 소를 먹여?
(조성애) 그때 많이 먹었으면 14살이나 먹었을까, 하여튼 어렸을 때 가가지고
(방순녀) 15살 때 였을거예요.
(조성애) 그래요? 그러면 산에가서 꼴 베어다가 소먹이고 그랬는데 한번은 꼴을 베러 갔더
니 버섯들이 이렇게 났어요. 막 덥북덥북 군데군데 많이 났어요. 꼴을 얼른 베어 놓고 버섯
을 따가지고 가야겠다하고 꼴을 베어놓고 버섯을 따는데 그것이 독버섯인지도 모르고 땄어
요. 그때는 버섯이니까 그걸 해가지고 와가지고 명순언니가 볶아 줬는데 먹을 때는 그렇게
잘 먹었는데 토요일 날은 꼴도 많이 베어야 하는데 그걸 먹고 사람들이 너줄허니 다 쓰러져
버렸네. 독버섯이어서. 그래가지고 저녁때는 꼴도 못 베러가고 다 누웠다가 그래도 한사람도
죽지도 않하고 그대로 괜찮았어요. 그런데 그 꼴을 베려고 봄이라 아직 풀은 안 길어나고
그 앞 논에가 독세기 들이 군데군데 나가지고 수북수북 나요. 그러면 그때는 장화가 있을
까 뭣이 있을까 옷을 걷어 붙히고 들어가서 그 독세기를 베어다 먹이는데 찬바람에 종아리
가 채 썬 것처럼 다 터가지고 그때는 뭐 바를 것도 없고 새빨갛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살다
가 거기서 농사를 짓고 그랬는데 가을쯤 되었는가 그래가지고 자고 예배드리고 밥 먹을라고
청소 하고 보면 식구들이 하나씩 없어져요. 못살겠으니까 나가는 거야. 거기서 몇 사람 나가
버리고, 그리고 채종답이라고 보리를 심어가지고 농사를 지어가지고 씨 종자로 나가니까 그
보리를 베어가지고 이삭을 다따가지고 그때는 디딜방아에다 다 부셔 가지고 그 씨알을 하나
하나 골르는데 깨지게 그런 것은 다깨지고 하여튼 그때 우리 돈지 어머니가 거기서 살으실
때에 많이 고생하셨어. 우리 산으로 데리고 다니지, 들로 데리고 다니지, 그러시면서 고생
많이 하셨어요. 거기서 살다가 농사를 다 지어놓고 그러고 있었는데 추수를 안 하고 거즘
깨를 벨때가 되었는가 깨를 베어 놓았던가 어쩄던가 그러고는 그때 나와버렸거든요. 돈지
에서 살다가, 오래 되어서 다 잊어버려서 얘기도 못하겠네.
(방순녀) 그때는 식량이 귀하니까 보리를 껍데기째 찧기 시작하면 한 번도 안 까불러요. 끝
까지 찧어가지고 그대로 해먹어. 그냥 죽 끓여먹고. 밥은 상상도 못하고 그렇게 했고.
진도 가서 살면서 젤로 안 잊어버린 것은 여름에 보리를 베었을 때 비가 오니까 보리를 뒤
집잖아요? 뒤집은 데마다 독사가 2-3마리는 다 있어요. 산에 가서 풀을 깎다보면 앞에가 구
물구물해, 뒷산에가 풀은 없고 맨 독사야. 저녁에 잘라면 맨 눈앞에가 뱀이우굴우굴해. 우리
잔방에도 들어오고. 그래도 뱀 물린 사람은 없었어요. 보리를 찧기 시작하면 끝까지 쪄가지고 그 겨채 해먹었고.
(오세휘) 이제 생각하니까 한나씨 어머니가 나중에 오셨는가 어쨌는가 진도 읍에 있을때는
안계셨는데 나중에 연산 와서 살다가 그때는 걸어다니니까 군내면 분토리에서 올라올라면
마지막에 고개가 벼랑박 같아, ‘우리가 길을 가다가 되면 쉬어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가다가
쉬었다간다.’ 그런 얘기를 해준 것이 아직도 막 생각이 납니다. 한나 어머니가 언제 오셨는
지 몰라도 같이 좀 살았어요.
(방순녀) 귀주어머니가 젤로 오래 사셨죠. 귀주어머니가 끝까지 살다 함평으로 오셔가지고.
(사회) 모두들 고맙습니다. 피곤하실 것 같으니까 이만 마치죠.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오세휘) 다 잊어버려가지고.
(사회) 많이 말씀하셨어요. 고맙습니다.
뒷이야기
(복은순) 돌집 집짓기 전까지, 70년대
(사회) 저희가 84년도에 갔어요.
(복은순) 집 지을 때는 국자언니 말씀이 김선생님께서 풀무원에서 사시다가 식구들이 와가
지고 예배실 거시서 살으셨다더만요. 그렇지 않으셨어요?
(사회) 아니요, 그 분들 나오시고 우리 들어가고. 같은 날에.
(복은순) 그랬어요? 아 그러셨구나.
(사회) 그 녹진 가는데 큰 간척지 그걸 국희종 의사선생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순창에 계시
는, 그분이 풀무원에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오셔셔 그 땅을 한번 사보라고 그래서 저희가 답
사를 갔었어요. 83년도 일 거에요.
(복은순) 진도를요?
(사회) 예, 그 때 오영환 선생하고 같이 갔지요. 춘일씨가 안내를 하셨지요. 그 자리에 가서
보니까 물이 별로 없어요. 저수지가 멀리 다른 곳에 있고 물이 적어요. 땅은 넓고 그래서 우
리는 맞지 않는다고 그랬더니 춘일씨가 여기 해보라고, 여기서 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 동영상을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못 보여드려요. 집사람 얘기가 ‘우리가 어떻게 여기
서 살아요? 땅도 내놓고 그랬으니까 그 흙집 거기서 우리가 살면서 형님들 사시는 것도 좀
배우면서 다른 사람한테 내놓은 땅이나 빌려 주세요.’라고 그러니까 그럴 거 없이 여기서 하
라고, 그런데,
(복은순) 국자언니 말씀은 오셔가지고 거기서 살으시면서.
(사회) 산 것 아니에요.
(복은순) 정원장님이 오셔가지고 저분들한테 집을 드리라고 그래서 드리고 나오셨다고 하
더라고요. 예배당 거기서 사셨어요? 예배보는데요?
(사회) 아니요, 나오시고 우리가 들어갔어요. 같은 날. 그러니까 답사하러 갔을 때 한 이야
기 가지고 혼동 하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때 세놓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춘일
씨가 일 년인가 소죽 끓였대요. 왕겨로, 그러면서 기도를 아침마다 하셨대요. 우연히
‘떠나야지’ 하는 생각이 난거요.
‘떠나야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근데 저희 할멈은 8개월 풀무원에서 기도를 했지요.
그런데 그 때는 그 얘기를 안 하시다가 나중에 얘기 하시는 거예요. 그 기도를 하셨다고.
그러니까 흙집에서는 우리가 살지를 않고, 나가시는 날 우리가 들어갔어요. 녹진토지 답사
갔을 때 그 흙집에서 살게 해달라고 얘기만 했었지요.
그래가지고 원선생님과 정원장님이 얘기해서 매매 형식으로 했는데 돈이 안됐어요.
천만원 계약금으로 드리고 서울에 있는 아파트 팔아가지고 올 건데 그 아파트가 안 팔려가
지고, 그래서 해약이 된 거예요. 일하는 소까지 포함이 되어가지고 삼천오백인가 삼천만원인
가 됐었는데 그건 해약이 되어가지고 그렇게 되었어요.
(복은순) 돌집 지을 때는 국자 언니하고 춘옥언니하고 재심언니가 계셨어요.
(사회) 저희가 갈 때에는 수진양하고 돈지 어머니 그렇게 네식구가 사셨지요.
(방순남) 돈지어머니도 모시고계셨어요.
(복은순) 에~, 예.
(방순남) 재심씨가 살았을 때에는 집지을 때 사실 때요. 그때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