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11장
1. 은 삼십 개로 내 품삯을 삼은지라 (1-17)
선지자는 갑자기 심판에 대해 선포합니다. 9장과 10장에서 살펴봤던 선지자의 말은, 유다가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또 갑자기 심판을 말씀하시는지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란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유다를 돌아오게 하시고, 번성의 복을 주신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증거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를 돌아오게 하시고, 번성의 복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과 은총을 베푸심으로써, 누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가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1절부터 보면, 레바논의 백향목이 나오고 잣나무가 나옵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귀한 나무로써, 이스라엘의 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바산의 상수리나무는 흔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나무로써, 유다의 하층 계급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모두 불 살라지고, 곡하고 넘어지고 쓰러진다는 것은, 유다 전체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양떼를 먹이라고 하시는데, 그 양떼는 잡혀 죽을 양떼라고 합니다. 잡혀 죽을 양떼라는 것은 앞에서 예고된 대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로마에게 잡혀 먹힐 유다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잡혀 죽을 양떼의 처지에 있는 그들이 얼마나 가련한가 하면, 5절에서 말한 것처럼, 양 떼를 사들인 사람은 그들을 사서 노예로 삼아도 죄가 없다고 하고, 또 그 양 떼를 팔아서 그 돈으로 부요하게 된 것 때문에, 여호와께 찬송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련한 처지가 되어서 팔리고, 노예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양떼를 돌보고 양육해야 할 목자들까지, 양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배를 위해 살아갈 뿐, 불쌍한 처지에 있는 양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양떼의 처지인데, 그러한 양 떼를 먹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이 말씀을 보면, 여호와까지도 불쌍한 처지에 있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신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까지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들의 처지는 참으로 가련할 뿐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양을, 선지자가 목자가 되어 먹이는데, 어떻게 먹이는가를 이렇게 언급합니다. 7절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선지자는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양떼를 가련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막대기 둘을 취해서 하나는 은총이라고 하고, 하나는 연합이라고 하는 그 막대기로, 양 떼를 먹인다고 합니다. 곧 양떼를 가련하게 보면서, 은총과 연합으로 그들을 먹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련한 처지에 있는 양떼에게 필요한 것은 은총과 연합이며, 그것이 그 양떼를 배부르게 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합은 양을 스가랴 자신에게 연합된 관계, 곧 선지자와 하나 된 관계에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스가랴 선지자를 세워서, 목자 역할을 하게 한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차 이 땅에 오실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10절을 보면, 또 다른 말씀이 등장합니다. 양 떼를 가련하게 보고, 은총과 연합으로 먹이겠다고 했는데, 또 다시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대로 그냥 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꺾어서,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겠다고 합니다. 왜 갑자기 가련한 양들을 이렇게 매몰차게 대하신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참된 목자가 등장할 때, 기존의 거짓 목자들만이 참된 목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까지도 참된 목자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들을 가련하게 보고, 은총으로 먹이는 참된 목자를 왜 싫어할까요? 그것은 참된 목자가 자신들을 먹이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련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양들이 목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불쌍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목자, 곧 메시야는 그들이 원하는 힘의 방식이 아니라, 은총과 연합으로 양을 먹이는 방식으로 오십니다. 그것으로는 불쌍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목자를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절 “당일에 곧 폐하매, 내 말을 지키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언약을 폐하시고 심판을 받게 하신 일, 그래서 가련하게 되고 팔리는 자가 되고, 고통을 겪는 모든 것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의 신앙이 바른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들의 처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이라고 여겼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된 것은, 자신들의 가련한 것이 무엇인가를 몰랐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겪으면, 그 이유가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고통을 받는 것이, 죄의 당연한 결과로 여기기도 합니다. 바람직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고통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최대한 죄를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며 믿음으로 살면,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가련함은, 형편과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연약과 무능에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가련하게 여기는 목자라면, 죄에서의 해방을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단지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이 생각은 12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를 좋게 여기거든 품삯을 주라고 하시자, 은 삼십을 줍니다. 이것이 그들을 은총과 연합으로 먹이는 목자에 대해 그들이 생각한 가치였습니다.
은 삼십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값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한 목자에 대한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은 삼십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받은 값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유다가 생각한 예수님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은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를, 자신을 위한 종으로 취급하는 사람은 심판하고, 새로운 참된 이스라엘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번성의 복을 받은 것이 하나님 백성된 증거가 아니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면서, 그런 나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