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이 모른 아버지 마음. 信天함석헌
한 밤을 또 꼬박 세웠습니다. 아침이 됐을 때 한 사람이 살창 밖에 와서 이리저리 돌아보더니 문득 나를 보고 “아, 자네도 왔던가?” 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우리 담임형사 고바야시(小林)이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조선 학생은 구역적으로 담임형사가 있어서 늘 동정을 살폈습니다.
그래서 내가 좀 항의 조로 “자네도 라니 어떻게 된 거요?” 했더니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냐, 잘못돼서 그런 거니 이리 나와요” 하며 문을 땄습니다. 있는 사람들께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 사람도 같이 가야 한다”고 덕일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나오니 이층 형사실로 데리고 가서 빵을 내놓고 먹으라 했습니다. 평소의 온순주의가 효과가 난 셈입니다. 담임형사들은 늘 주의해서 보고 이따금 찾아오기도 하므로 누가 어떤 사람인 걸 다 꿰뚫고 있을 것입니다. 필시 나 같은 것은 온순한 문제없는 학생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놓는 것입니다. 덕일이는 역시 거기서도 덕일이었습니다. 못 나간다고 엄살을 하는 겁니다. “나가면 죽일 텐데 못 나갑니다. 데려다주세요” 하니 형사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염려 없으니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 나와서 2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를 가려니 “저게 진짜다. 저게 진짜다.” 사방에서 일제사격이 오는 듯해 겨우 걸음을 옮겨놓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목사가 찾아왔습니다. 본래 우리 바로 건너편 집이 교회여서 일요일이면 거기를 더러 나갔던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크지 않아서 한 20명 모이는데 모두들 아주 진지한 태도로 종용하게 하는 예배였습니다. 지걸거리고 떠드는 우리나라 교회를 보다가 첨으로 그런 모임을 보니 퍽 좋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따금 갔지만 나도 무슨 말을 하려 않고 그들도 한 마디 묻는 것도 없었습니다. 목사는 도미나가 도쿠마(富永德磨)라는 분이었는데 퍽 점잖았습니다. 그래도 언제 말도 한 마디 해본 일이 없으므로 찾아 오려니는 상상도 못했는데 왔기 때문에 참 고마왔습니다. 현관에 선 채로 부근 사람들한테 잘 말을 해두었으니 조금도 걱정 말라고, 그러나 위험하니 절대 밖에 나가지는 말라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한 주일 동안을 집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집에서 반드시 큰 걱정 속에 있을 것인데 소식을 보낼 길이 없었습니다. 보통우편은 물론 전보도 끊어져 있었습니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전보가 통한다고 신문에 났는데 그것도 오직 한곳 중앙우편국에서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있는 데서 가자면 십 리도 넘습니다.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가면서 보니 그저 내다뵈는 대로 빨갛게 탄 흙뿐입니다.
그때만 해도 거의 모든 건물이 나무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동경의 중심이라는 니혼바시(日本橋)를 가니 한 주일이 지났는데도 냇물에 시체들이 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어머니가 아기를 업은 채 죽었는데 그 아기의 발목이 타서 떨어져 타다 남은 장작 그루터기 같았습니다. 저렇게 죽을 때 그 죽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래도 우편국에 가서 집에 무사하다는 전보를 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돌아오면서도 조금도 무서운 생각도 미운 생각도 없었습니다.
전보를 쳐놓고는 이제는 집에서도 마음을 놓으려니 했지만 후에 들으니 그 전보가 집에까지 가는데 한 주일이 더 들었답니다. 나는 그런 줄은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집에서 내가 살아 있는 줄 안 것은 지진이 나서 동경이 몽땅 땅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말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난지 두 주일이 넘어서야 겨우 된 일입니다. 그 동안에 그 마음들이 어떠했을까? 그 다음 내가 첨으로 집에 갔을 때, 아마 이듬해 여름방학일 것입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 말은 아버지가 “다 죽어서 다니시는 얼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슬픔과 안타까움 속에 싸여 있으려니 짐작은 하면서도, 그런 줄은 모르고 태평으로 있었습니다.
편지가 온 것을 보고야 놀랐습니다. 교통이 회복된 다음에도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살아났으면 됐지, 갈 것까지 없지 않아, 어서 가을 학기 시작되어 시험 준비해서 명년에는 틀림없이 입학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며칠 만에 였든지 오랜 후에 처음으로 아버지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어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문구가 도무지 평소의 아버지 말씀 같지 않은 아주 열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네가 돌아오면 석헌아, 하고 쓸어안을 터이니” 어서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나서 스물 셋이 되도록 아버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고, 안기거나 업히거나 해본 기억도 없습니다. 위에서 대범이란 말을 했습니다마는 아버지야말로 유교식의 군자였습니다. 생긴 모습이나 말씨나 태도나 누구든지 보는 사람은 다 “아주 인자하신 분” 이라고 했지만 말에나 행동에나 감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군자는 포손(抱孫)이요 불포자(不抱子)라고 하지만 아버지야말로 정말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제 “석헌아!”하며 부르시는 것입니다. 죄 받을 말로 “이거 정말 아버지가 쓰셨을까?” 혼자 마음속에 물으며 몇 번을 다시 읽고 다시 읽었습니다. 생각 끝에 “아마 외삼촌님이 대필하신지도 모른다” 했습니다. 그이는 글도 잘하고 농담도 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내가 여나문살 됐을 때 권학문(勸學文)을 지어주신 분은 그분입니다. 이제 그 글을 다 잊었으나 마지막의 한 구절은 기억 합니다.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서제지탄(噬臍之嘆)을 면치 못하리라”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마음이 아픈 나머지 그더러 대신 쓰라 하신 것 아닐까 했습니다. 그러나 글씨는 아무리 봐도 틀림없는 아버지 글씨였습니다.
후에 집에 갔을 때 직접은 할 수 없고 동생께 했는지 누님께 했는지 나는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사랑이 지극하신 줄 모른 것 아니지만 평소에 말에는 아니 나타내시는데 그렇게까지 애절하게 하셨을까, 겉과 속의 차이가 너무 심한데 놀랐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동경지방의 땅이 쭉 갈라지고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나온 걸로 알았다고 했습니다만 나야말로 정말 도덕주의의 지각(地殼)이 터지고 혼이 지심(地心)에서 폭발돼 나오는 인애(仁愛)의 불길에 내 몸이 타 버렸습니다.나는 아버지를 알고도 몰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몇 번 몇 번 부르시는 것을 들으면서도 감정에 못 이겨 달려가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차서일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래도 아버지가 나를 믿어주시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몰랐어도 아버지는 나를 알고 계셨습니다.
조선놈 사냥
일본사람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서와는 반대의 것을 경험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인정 있고 맑은 사람들, 아침마다 만나며 “오하요고자이마스” “이이오뎅기데스네” 하는 사람들, “길은 길동무가 있어야, 세상은 인정이 있어야”라는 사람들, 말마다 “기리 닌존”(義理人情)이라는 사람들, 그 사람들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 엇메었던 일본도(日本刀), 그 깎아들었던 대창, 그 증오에 타는 눈들, 그 거품을 문 이빨들. 어디서 그것이 나왔을까? 몇 달 동안은 거리를 나가 다녀도 기운을 펴고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하숙을 얻기도 어려웠습니다. 셋방 있다는 광고 쪽지를 보고 찾아가서 “댁에 방 있습니까?” 하면 “네 있습니다” 해놓고도 한참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는 다시 “없습니다” 해버리고는 들어갑니다. 조선 사람이란 말입니다.
10월이 돼서, 다른 데는 아직 아니 되지만 화재가 나지 않았던 와세다(早稻田)에서는 고등예비학교가 개강이 된다고 해서, 어서 빨리 할 생각으로 그 부근으로 하숙을 옮겼습니다. 하루는 지나가노라니 길가에서 팽이 싸움을 하며 노는 아이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상자 위에다가 돛떼기 조박을 옴푹하게 깔아놓고는 무쇠로 만든 팽이를 그 위에서 둘이서 서로 돌려 싸움을 붙이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 맞부딪쳐 한 놈이 다른 한 놈을 몰아서 상자 밖으로 떨어뜨리면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 하나가 제가 돌린 팽이가 뜻대로 잘되지 않고 요리조리 돌아다니기만 하니까 그걸 보고 하는 소리가 “요 자식 뭘 해, 조선놈 사냥질 하고 있는 거냐?”하지 않습니까? 듣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코흘리개들이 조선 사람이 뭔지 알겠습니까? 얼마나 했으면 철모르는 애들까지 저렇게 됐을까? 조선놈의 신세를 다시 한 번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길가는 사람들을 보니 저것도 사람 죽인 놈 같고 이것도 사람 죽인 놈 같았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하겠다니, 머리가 아찔했습니다.
내가 당했던 것은 약과입니다. 어떤 목격자가 전하는 말을 들으면 한 사람이 그 칼과 창을 든 사냥꾼에 쫓겨 도망을 하는데, 그 부르짖는 소리가 응 소리라 할까, 앙 소리라 할까? 짐승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허방지방 달아나는데 그것을 뭇놈이 추격을 하더랍니다. 가다가 하는 수 없이 기진해서 무슨 구멍엔가 틈엔가로 들어가니 그것을 여럿이 따라가 창과 칼로 그저 찌르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집 이층에 방을 얻어가지고 있었는데 그 주인이란 자가 어디 밖에서 조선 놈 모두 죽인다는 소리를 듣고 들어와서 제 집에 있는 놈도 죽여야 한다고 도끼를 들고 층계로 올라오더랍니다. 그것을 그래도 그 사람의 늙은 어머니가 있어서 “제 집에 있던 사람을 어디 그러는 법이 있느냐”고 한사코 말려서 겨우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무식해서만도 아닙니다. 이것은 내 귀로 직접 들은 것입니다. 와세다(早稻田)고등예비학교는 와세다(早稻田)대학에 부속으로 있는 고등학교의 선생들이 나와서 강의를 해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선생들은 일본에서는 최고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보십시오. 하루는 한문 시간인데 그 선생은 나이도 상당히 들어 그때 인상으로 50줄이나 된 것으로 보였는데, 지진 때의 무슨 얘기를 해가다가 “나도 조선놈 사냥 했어요.” 아주 당당한 태도로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 결코 험악해 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점잖은 학자지요, 또 학생 중에 한국 사람들이 있는 것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아무리 시험준비 강습소라 하더라도 젊은 학생들을 보고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도, 꺼리는 기색도 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듣고 앉아서 세상이 세상 같지 않았습니다. 용기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뭇매에 맞아 죽더라도 한 마디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부끄럽게도 아무 말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수백 명 일본 학생 중에서도 아무도 항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항의는 커녕 그저 하하 웃고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하고 듣고 있었습니다.
후에 안정이 된 다음 우리 유학생회에서 조사단을 조직해서 조사한 것에 의하면 그때 학생들은 방학이라고 본국으로 많이 돌아가고 남아 있던 사람이 많지 않던 관계도 있지만 도심지에 있던 학생은 죽은 것이 적고 주로 후쿠가와(深川), 혼조(本所)하는 공장지대와 시외 지역에 살던 노동자가 많이 학살됐는데, 불 놓느니 우물에 약치느니는 전연 없는 거짓말이고, 한편으로 풍설을 돌리고는 보호한답시고, 모두 잡아 유치장 창고 같은데 수용해 놓고는 집단적으로 모조리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린애, 남자, 여자 할 것 없었고 임신이 돼 만삭된 여자를 태아 째 찔러 죽였다는 것까지 있었습니다.
평소의 일본 사람을 보고 이해가 아니 가는 일입니다. 땅이 흔들린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흔들린 인간성이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도 지진으로 인해 터져 올라온 불길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내가 아버지에게서 본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불길입니다. 그때 일본 민중은 미쳤었습니다. 민중이 아니었습니다. 민중은 없었습니다. 그 모든 일을 보며 들으며 참 섭섭했습니다. “야, 이게 일본이냐? 이렇게 옅고 좁은 사람들이냐?”그때 젊은 마음에도 미워한다기보다도 업신여기고 싶었습니다.
한 줄기 온천
지각이 터지면 불도 나오지만 또 온천도 솟습니다. 불은 태우고 죽이지만 온천은 살리고 낫게 합니다. 일본에는 화산이 많은 대신 온천도 많습니다. 일본의 성격은 두 가지가 다 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지진으로 인해 조선 놈 사냥 같은 끔찍한 일도 있었지만, 또 온천 같은 인정 미담도 많이 터져나왔습니다.그중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유학생 감독부에서 생긴 일입니다. 유학생 감독부란 것은 그전 대한제국 시절에 일본에 가 있던 우리나라 대사관 자리입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대사는 없어졌고 합병 후 그 자리에 유학생 감독부라는 기관을 두고 동경에 가 있는 우리나라 학생을 돌보고 감독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 기숙사가 있었습니다. 150명가량 수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총독부에서 관할하는 것이지만 성의있게 지도한다는 것보다는 무슨 위험한 일이나 하지 않나 감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숙사의 설비 같은 것도 신통치 못하고 따라서 가려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나도 한두 차례 가 봤을 뿐입니다마는 한 백 명 내외 되는 사람이 있지 않았나 합니다.
지진 나던 날은 얼마나 되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나 적어도 몇 십 명은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조선인 학살이란, 이제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정부로부터 명령이 있어서 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 사람 있는 곳이면 다 있었던 일입니다. 거기서도 청년단, 재향군인 하는 사람 들이 기숙사에 달려들어 모두 학살해 버리고 끌어냈더랍니다. 그 옆에 변호사 한 사람이 살았는데, 그 이름을 기억 못해 아깝습니다마는, 그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가서 인도상 그럴 수 없으니 하지 말라고 막으려 했답니다. 법률가로서의 당연한 직책입니다. 그러나 그 단원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는 위로부터 시퍼렇게 명령을 받고 실행령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법률가는 법의 정신을 지켜 그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느냐 꾸짖었지만 이쪽은 도저히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는 하는 수 없이 그러면 내가 당국에 가서 알아볼 터이니 알아봐서 정말 그렇다면 나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니 마음대로 해도 좋으나 제발 그때까지 참아줄 수 없느냐고 간청을 했답니다. 그래서 그 죽이려던 사람들도 승낙을 하고 변호사가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변호사는 변호사니만큼 어디까지나 법치국가의 양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났던지 그것은 알 수 없고, 또 얼마 후에 돌아왔는지는 모르나, 하여간 아무런 시원한 대답도 못 얻어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래도 그냥 몇 십 명을 죽게 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관 사람들을 보고 양심에 호소해 설득을 시작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위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야 없지 않느냐, 한데 모아놓고 감시를 해서 반항하는 기색이 있거든 죽여라, 그렇지 않고 온순한 태도거든 살려주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설명 간청을 했습니다.
아마 성의로 했을 것입니다. 그래 그들도 양심이 있는지라 그 말에 동의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을 모두 끌어내어 마당 한가운데 앉혀놓고 칼을 뽑아들고 슬슬 돌아가며 밤새 감시를 했습니다. 시험하자는 것이니까 이따금은 칼등으로 등어리를 치기도 하고 발길로 차기도 하더랍니다. 학생들은 내막이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만 있으면 그 전원이 학살을 당하는 판입니다. 그런 줄 전혀 몰랐지만 밤새도록 그 아슬아슬한 운명 아래서 다행히 한 사람도 반항을 한 사람은 없어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그 사람이 누군지 참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더 좋은 지도 모릅니다. 좋으나 마나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 아름다운 일은 늘 그런 것입니다. 그 근본 사실이 그런 대로 그 선한 일을 어느 개인에게 잘못 돌리지 말고 당연히 받을 일본 마음 전체에 옳게 돌리기 위해 그렇게 된 일입니다.
목구멍 넘어가면 그만
내가 혼고쿠(本鄕)에서 와세다(早稻田)으로 이사를 나가는 날 주인하고 있었던 그 집 부부가 나를 보고 하는 말 중에 “뜨거운 것도 목구멍을 넘어가면 그만이다” 하는 일본의 옛 격언을 말해주었습니다. 목구멍 넘어가면 그만이라 했건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늘까지 걸려 있어 다른 말은 다 잊었는데 그것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본래 듣는 그 순간 조금 불쾌하게 들렸습니다. 내가 자기네 신세를 잊어버릴 것이라고 찔러주는 말로 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 지진으로 쓰라린 일 겪었지만 잊어버리라는 위로의 의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쩐지 가슴이 찔리우는 것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진리는 언제나 좌우에 날을 가진 칼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잊는 것이요 또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잊어버려야 하고 잊어버려서는 안 되기도 합니다. 이날까지 잊지 못했다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또 다 잊어버렸다면 사람은 못됐을 것입니다. 지진도 그렇고, 학살사건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보면 평화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잊지는 못하지만 용서는 한다”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용서의 서(恕)자는 여심(如心) 곧 같은 마음입니다. 선악, 시비, 화복은 서로 달라도 마음은 한 마음에 가야 합니다. 한 마음에만 이른다면 잊지 못해도 잊은 거요 잊어서도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됨 곧 참이요 사랑입니다. 인생, 역사의 문제는 이렇게 해서만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은 정말은 지나간 다음에 있습니다. 살았으면 다가 아닙니다. 그 뒷처리를 맡은 것이 삶입니다. 지진과 불길과 칼날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문제 아니라, 그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불탄 재를 쓸어내고 죽은 사람을 묻고 원수와 다시 만나서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환란에서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자 사람들은 차츰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 큰 재난의 원인을 무엇이냐 스스로 물었고 조선 사람들은 제 학살당한 동포를 조사하고 추도하고 그것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여기 정말 끔찍한 시련의 의미와 거기 대해 급제냐 낙제냐가 갈리는 것입니다.
科學이냐 天譴이냐?
첫째 이 환란의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 대해 두 개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과학이 부족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본 사람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대답을 먼저 하고 나선 이는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이었습니다. 그는『사선(死線)을 넘어서』라는 소설로 유명해졌고 빈민굴(貧民窟) 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크리스천이니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마는 나는 지진 직후 그가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하는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는 무산계급 노동자를 위해 싸우느니만큼 “사람들은 이 지진을 하나님의 천견(天譴)이라 하지만 만일 천견이라면 하나님이 왜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들은 두어두고 아무 죄 없는 후쿠가와(深川), 혼조(本所)지역의 30만 노동자를 죽여버렸느냐!” 하고 목을 짜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의견으로 하면, 지진 나라에 살면서 일본 사람이 과학적인 정신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참혹한 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천견(天譴) 곧 하나님의 책망이란 설명을 한 것은 우치무라(內村鑑三)입니다. 사실은 천견이란 말은 시부사와(澁澤榮一)가 먼저 했답니다. 그는 유명한 큰 재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이 자본가는 왜 그냥 두었냐고 쏘아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부사와(澁澤)의 자세한 말은 어디서 얻어듣지를 못했고 공공한 비판으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우치무라가 자기의 성서연구 모임에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일본 민족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서 그런 재난을 보냈다는 것입니다.내가 아는 한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50년간 일본 사람이 사실로써 대답한 것을 본다면 그 대답은 둘 다 들은 것 같지 않습니다. 외면으로 보면 부흥은 곧 놀랍게 됐고 오늘 일본은 과학 연구와 공업의 일선에 서서 나갑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6,7층 이상의 건물은 지진 때문에 지을 수 없다 해서 큰집이라는 것이 마루노우치(丸內)빌딩이었는데 지금은 일본 건축술은 놀랍게 발달해서 몇십 층도 있지 않습니까? 그 의미로 한다면 가가와 도요히코의 경고는 어느 정도 들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보면 일본의 공해는 세계에서 앞장을 섭니다. 지진은 어느 지역에 한때 해를 입힐 수 있지만 공해는 전역을 아주 멸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과학일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천견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 문구를 기억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일제 말년을 건지는 예언자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은 대동아전쟁 때 일본열도를 동해의 면도칼이라 했고, 중국의 교만한 머리의 털을 깎기 위해서 하나님이 너를 들었지만 그 머리를 다 깎은 후 면도칼 너는 어쩌려느냐고 울었습니다. 중국의 교만을 부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면도칼은 자신의 교만을 과연 버렸을까? 요새 일본서 그 학살사건에 죽은 사람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고 그것을 스스로 반성 비판하는 글도 나왔답니다. 나는 그것을 크게 평가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해의 물결을 타고 새로 대륙으로 밀려드는 새로운 형태의 침략의 면도칼에 비하면 너무도 약한 거나 아닐까?
일본은 과연 죄를 뉘우쳤을까? 회개는 사람 마음의 깊은 곳의 사실이니 남은 말할 수 없습니다. 겉에 나타난 것을 보고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이 만일 관동대진재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알아 서양문명 수입에서부터 청일 러일전쟁, 한국 병탄(倂呑)을 죄로 알아 깊이 뉘우쳤던들 대동아전쟁의 참혹과 수모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두고 대진재 이후의 부흥이 사실은 조센징을 희생으로 잡아 제사지내고 된 일이라는 것만 알았더라도 아시아의 역사가 이렇게 더 어려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죄한 조센징 왜 죽였습니까? 당시에 일어나던 공산주의자들이 혁명 일으킬까 두려워서 민심수습책으로 한 것입니다. 사실 그때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던들 일본은 지진 정도가 아니라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5년 10년 내에 부흥이고 뭐고 생각할 여지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전국이 거의 초토가 됐다가도 급속히 부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는 진재 당시 공산혁명을 면해 그후 20년 동안 나라 터를 튼튼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이 조선이라는 가엾은 파리한 염소가 다시 제물이 되어 피를 흘려 제사지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번영에 한국의 희생이 어쩔 수없이 들어가는 것은 눈감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그것을 깨달았을까? 회개는 감정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격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일본 성격은 변화됐을까? 군대라는 것과 경제와, 침략이라는 것과 관광이라는 것이 형태는 물론 다르지만 속에 숨은 성격이 문제입니다.이런 말은 묵은 상처를 건드리기 위해서도, 약자의 콤플렉스를 드러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역사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마음 문제요, 마음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산 관련을 이루는 하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외손뼉이 울 수 없듯이 나라 사이의 관계를 참 의미로 정상화 하지 못하는 한 일본도 한국도 아시아의 살아남도 세계의 평화도 없습니다.
원흉은 누구냐?
“이게 진짜다” 했던 것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모든 사건은 결국 진상을 들어내잔 것입니다. 그 의미에서 화복도 생사도 없습니다. 문제의 근본이 어디 있느냐? 사건을 일으킨 원흉은 누구냐? 창조 이래의 인류역사는 어떤 의미로는 이 원흉 찾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관동대진재의 원흉은 누구냐? 지진 화재가 문제 아닙니다. 그 핵심은 조선인학살에 있습니다. 수로야 얼마 아니 되지만 그 죽음은 지진 화재에 죽은 것과 의미가 다릅니다. 실지로는 사, 오천이지만 그 뜻을 말하면 조센징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니까, 결국 전체 조선이 학살된 것 입니다. 인명, 물자의 손상이 큰 변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잃은 일본 민족이 그 인간성을 잃고 짐승처럼 미쳤던 것이 정말 큰 지변입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파죽의 형세로 세계열강의 지위에 올랐다 해도 제 화를 면하기 위해 생사람을 몇이라도 죽였다면 역사의 시련장에서는 낙제입니다. 나는 정말 불길 속에 앉아 학살의 소식을 들으며 젊은 마음이지만 슬퍼졌습니다. 야, 일본이 요것밖에 못되느냐 했습니다. 밉기보다도 가엾었습니다.
이때까지 해온 이야기에서 아실 것입니다마는 지진 속 불길 속을 항상 두 개의 일본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성으로 대표되는 일본, 권력으로 대표되는 일본, 어느 것이 참 일본입니까? 물론 첫째 것입니다. 그것은 늘 약해서 맹수 같은 둘째 것에 쫓기고 짓밟히고 처녀같이 강간을 당하지만, 그것이 참 일본이요, 그러기 때문에 이길 것이요,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한때 공산주의가 인텔리 청년 사이에 성했을 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느냐?” 하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일본인을 누가 그렇게 미치게 했던가? 지진? 아닙니다. 불?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선전한 것은 정부였습니다. 그들은 왜 그랬던가? 나라를 건지기 위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란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 속은 것이 있습니다. 속은 사람은 물론이고 속인 저희도 속고서 충성인줄 알고 했습니다. 공산혁명을 막으려고 오스기 사카에(大杉榮)를 죽인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는 자기 사혐(私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일본제국을 위해 했습니다. 대일본제국이란 것이 문제입니다.문제는 국가주의입니다. 그것이 동양평화란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한국을 먹었고, 혁명을 막기 위해 조센징을 제물로 잡았습니다. 혁명은 왜 무서워합니까? 그것으로 일본이 망할까봐? 아닙니다. 혁명으로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는 것은 지금 있는 정권입니다. 대일본제국은 전체 일본이 아닙니다. 어떤 수의 사람의 것입니다. 국가란 언제나 그렇습니다. 모든 도둑의 근거는 이 소위 국가라는 것입니다. 국가란 이름하에 나라를 도둑해가지고 있는 소수의 지배자, 이것이 대일본제국이었습니다. 그것이 제 권좌를 뺏길까봐 한 흉계가 조선인 학살입니다.이 점에서 제물이 됐던 우리도 우리를 제물로 잡았던 동해의 면도칼도 다 같이 반성할 것은 우리를 속여 미치게 했던 이 원흉을 잡아내는 일입니다.원흉은 이제는 이미 잡혔습니다. 그러나 그 잔당은 아직 남았고 안정이 아니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일본에만 있는 것 아닙니다. 이제 역사는 그 살갗으로 사람을 구별하던 정도는 벗어났습니다. 관동대진재의 제단에서 피를 한데 섞은 일본의 씨과 한국의 씨은 이 역사의 원흉의 잔당을 잡아 새 시대를 여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