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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지키는 비밀
느헤미야 13: 1-3
1.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13:28-31
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29. 내 하나님이여 저희가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기었사오니 저희를 기억하옵소서
30.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관계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행복을 나눌 대상이 없이는 곧 관계가 없이는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말은 사실은 세속적인 단어입니다. 좀 더 성경적인 단어는 축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행복을 영어로 말하면 'happiness'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happen'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연히 누리게 된 행운정도의 의미를 갖습니다.
마치 로또 복권 당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이란 말은 영어로 표기하면 'blessing'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bleed'(피흘린다)라는 옛날 영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약의 피제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기쁨의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시온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의 도움으로 이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안에서의 기쁨의 삶, 곧 축복의 삶을 회복할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행복한(성경적으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행복이 그런 것처럼 행복은 행복을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는 12년간의 이스라엘 총독을 지낸 후 잠시 이스라엘을 떠나 페르샤로 돌아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6절)
그후 지도자를 떠나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 동요와 혼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모든것이 그동안 지도자 느헤미야가 강조한 삶의 원칙들을 져버리기 시작한데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할수없이 느헤미야는 다시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조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느헤미야가 떠나가 있었던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학자들 가운데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길게 잡으면 일년 정도까지 떠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돌아온 지도자 느헤미야는 다시 행복의 원칙을 강조하게 됩니다.
여기 그들이 다시 한번 행복한 백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밀들을 엿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칙들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변함없이 행복을 지키는 비밀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을 지키는 비밀-무엇일까요?
1.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잠시 지도자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떠나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치심을 망각한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돌아온 지도자 느헤미야는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낭독하는 것으로 그의 회복의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13:1을 보십시오.어떻게 본문이 시작되고 있습니까?
"그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3절을 보십시오."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라고 기록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백성이 다시 이 말씀을 붙들 때에만 그들의 회복이, 행복의 회복이 가능한 것을 확신한 때문이었습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에스라에게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도 느헤미야였습니다.
마음의 재건이 없는 심령의 부흥이 없는 행복은 불완전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참된 행복을 회복하고 싶으십니까?
진정한 축복을 다시 누리고 싶어하십니까?
그러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셔야 합니다. 돈을 붙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명예를 붙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기를 붙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이 말씀의 진리를 붙들고 사셔야 합니다.
유명한 시편 1편이 가르치는 복있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누가 복있는 사람이라 했습니까?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 다음을 기억하십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절)
그렇습니다. 성경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시1:3의 말씀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철따라 열매맺는 푸르고 푸른 복된 인생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들의 몫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을 지키는 유일한 성경적 대안인 것입니다.
인도에서 사역한 E.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성경의 중요성을 가르칠때 한 인도 청년이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성경을 붙들고 산다고 돈이 생기나요? 직장이 생기나요?"
이때 스탠리 존스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약속을 할수 있겠네. 만일 자네가 이 말씀을 붙들고 산다면 그때부터 이 말씀이 자네를 붙들어 인도할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결단해 보십시오.
이 말씀이 당신을 붙드는 새 인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만이 영원토록 변함없는 행복을 누리고 지키는 유일한 비밀이 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2. 구별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읽고 첫번째로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과의 분리였습니다. 인종적인 편견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세속적인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서 분리 즉 구별을 요구한 것입니다.
3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했습니다.
이어서 이어지는 4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벡성의 구별된 삶을 위해 두가지 경건의 실천생활을 요구하십니다.
이 두가지 영역은 또 다시 십일조의 실천과 안식일 준수였습니다.
십일조는 돈과 관련된 것이고, 안식일은 시간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이 무엇보다 돈 관리와 시간관리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를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돈 관리, 시간 관리에 승리하면 다른 모든 삶의 영역에서 승리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돈 관리를 생각해 봅니다.
십일조의 실천은 무엇보다 우리의 소유가 우리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임을 의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십일조 정신을 가르칠때 가장 큰 의미로 강조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10분의 1만이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인데 그중에 10분의 1을 온전히 구체적으로 구별하여 주께 드림으로 그 나머지 10분의 9까지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부분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가 만일 10분의 1도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가 10분의 9를 주의 뜻대로 사용하며 살아가는 인생을 살수 있다고 기대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의 행복을 위해 생애를 바친 지도자로서 무엇보다 이 십일조의 회복을 열망한 것입니다. 드디어 백성들은 순종을 결단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회복의 시작이었습니다.
13:12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행복을 회복하는 전기가 된 것입니다.
안식일 준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 일주일 7일이 모두 주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의 하루를 구별하여 주를 예배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로 보냄으로 나머지 6일의 주인도 하나님 이신 것을 인정하고 날마다 매시간 시간마다를 주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성도가 일주일의 하루인 주일도 주의 뜻대로 구별하여 사용할줄 모른다면 우리는 그가 나머지 6일을 주의 목적을 따라 시간 낭비없이 선용하리라는 것을 기대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는 13:17에서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고 백성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주일 한 예배를 온전히 드리시고 다른 한 예배에서 봉사해 보십시오.
그리고 주일의 반나절 정도는 가족들과 함께 가정예배도 드리시고 가족들과 의미있는 대화도 나누시고 또한 여유가 있는대로 경건한 독서와 휴식의 시간을 가지시면 어떨까요?
물론 주변에 아파하고 병든 이웃들을 방문하고 위로를 나누는 것도 뜻깊은 현대적 주일 지키기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독특한 행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모으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데서가 아닌, 우리의 돈과 시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여짐을 인해서 감격하고 기뻐할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세상과의 동화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구별된 삶이 행복인 것을 기억하십시다.
3. 기도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1장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하는 것으로 이 책의 드라마가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기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가져오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장인 13장은 다시 기도로 마쳐집니다.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1절)
그리고 이런 그의 기도는 단순히 자기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리더로써 그가 사랑하는 백성들의 행복이 지켜지도록 도움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기도는 소위 기도의 말미를 장식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기도였습니다.
이 말미의 기도는 그가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위하여 최선의 섬김의 행동을 한 다음 꼭 그렇게 이루어지고 지켜지게 해 달라는 마음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같은 내용의 기도들이 13장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14절,22절, 29절에 정확하게 같은 내용의 기도가 반복되지 않습니까?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쉴수 없는 날마다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제의 기도로 오늘을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어제의 양식으로 오늘을 살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도움을,
오늘은 오늘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도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오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늘도 기도의 도움을 구하며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를 그치는 순간 우리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움, 그리스도인 다움을 잃어버립니다.
그 순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속물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한 행복의 전도자일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복의 비밀을 스스로 포기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기로 작정한 까닭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날 그날의 생존을 위해 희망없이 몸부림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당신의 모습이 아니신지요?
그렇게 계속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회복을 열망하십니까?
부흥을 사모하십니까?
다시 살아나고 싶으신지요?
말씀을 붙드십시오.
세상과 거룩한 결별을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당신의 무릎아래서 새날이 태어날 것입니다. 새 걸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오래전 이탈리아에 북 아프리카 출신의 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자기의 종교였던 기독교 신앙을 떠나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점차 시간이 흘러가며 그렇게 살아가는 자기의 마음의 내면이 행복하지 못한 것을 자각하며 괴로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무료한 자기의 내적 공허를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달래고 있던 순간 갑자기 바깥 정원에서 놀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창을 타고 들려 왔습니다.
"Tolle lege, Tolle lege"--"펴서 읽어 보아라. 펴서 읽어 보아라"
갑자기 그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오래동안 버려져 있었던 성경에 시선이 끌렸습니다.
실로 오래만에 그는 먼지 묻은 성경을 열었습니다.
로마서 13장 12절이하의 말씀이 펴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무릎을 꿇었습니다.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이 어두움의 세상과 결별하겠다고 그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신 주님께 약속했습니다.
그가 얼마 동안을 기도하고 일어섰을 때 그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영향을 끼칠 새 사람이 되어 그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성 어거스틴이었습니다.
이날 그에게는 세가지 결단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첫째, 그는 거룩한 말씀을 붙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그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셋째, 기도의 무릎을 꿇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그가 그동안 그렇게도 목마르게 찾아왔던 거룩한 행복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동일한 행복이 여러분과 저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결단하신다면--
그리고 이 말씀의 인도를 따라 이 어두움의 세상과 자신을 차별화하고 살아가기로 결심하신다면--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의 구주요 주님되신 주 예수님과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로 구하며 살기로 결심하신다면--
우리는 이미 그 영원한 행복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할렐루야!
<설교 적용 질문>
1. 느헤미야 13장의 줄거리는 무엇입니까?
2. 느헤미야의 삶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정리해 보십시오(13:1참조).
3. 느헤미야의 삶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정리해 보십시오(13:31참조).
4. 느헤미야가 13장에서 백성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강조한 삶의 원칙들은 무엇들이었습니까?
5. 우리 각자의 삶에서 행복을 각자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오늘 가장 중요하게 기억될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믿음의 비밀 (민 27:1-11)
<시작하는 말씀>
할렐루야!
여러분 어떻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런 마음의 소원을 갖습니다.
한분도 예외없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모든 삶의 부분 부분들을 해결하시고, 치유하시고,
우리부족한 부분들은 잘라도 주시고, 태워도 주시고 방망이로 두들겨 주시고, 해결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의 힘과 능력으로 이겨내신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되,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매주일마다,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민수기 27장 1절에서 11절까지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아마 이 말씀은 평생에 오늘 듣고 끝날 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설교하는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전하는 이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여러분들의 삶의 부족한 부분들은 제거하는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케 하여주시옵소서.
오늘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슬로브핫 과 함께 그의 다섯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 다섯 딸들의 이름은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 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인데 오늘 본문에는 오직 다섯딸들만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족보에 올라갈 수 없는데, 다섯 여자의 이름이 여기에 정확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남성들이 은혜받는 시간이 아니고, 딸들이 은혜받는 날입니다.
주로 우리는 성경에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다니엘, 요셉과 같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거명하면서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딸들가운데서 룻, 한나, 드보라, 도르가, 마리아와 같은 이름이 나오지만,
오늘은 슬로브핫의 다섯딸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딸이 있는 자에게는 더 큰 생명 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딸이 둘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첫째딸을 낳고, 아들을 낳도록 기도드렸지만, 또 둘째 딸을 낳게 되었고,
그 아기의 돌 잔치에서 시편 144편12절말씀을 나누었는데, 굉장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시편 144: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 돌들과 같으며"
여러분, 장성한나무 보다는 왕궁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이 더 좋지 않습니까?
여하튼, 오늘 본문의 다섯딸들은 그 이름 값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들의 끝자가 전부AH 로 끝 납니다.
AH는 본래 JEHOVAH (여호와)의 이름에서 마지막 두음 절을 나타낸 것입니다.
슬호보핫이 다섯딸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지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믿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과 분깃을 받아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지었던 것 같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 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 보겠습니다.
모세는 120세에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는 돌아가시기 직전이었고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40년동안 광야에서 지도자의 길을 행사하고, 너무 늙고 힘이드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누가 남았는지 살펴 보면 민수기 26:6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0세이상의 장정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오늘 본문 당시에 노쇠한 모세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이 때 당시에 애굽에서 떠나온 장정만 60만1730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세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말씀의 권위가 그대로 확증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세대가 장성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들어가야할 가나안 땅은 애굽땅과 같지 아니하다.
너희가 들어가야할 가나안 땅은 너희가 성취하여 얻어야 할 땅이다.
무엇보다도 너희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땅이다.
땅에서 분천이 샘솟는 곳이요, 여호와의 눈이 세초부터 세말까지 너희들을 권고하시고
Care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땅5이다. 하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시고,
이 젊은 세대가 기대감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얻을 땅 분배에 대한 설레임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실 그 땅을 기대하면서, 흥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의 속성은 하나님이 뭘 주실 까?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에 가게되면 하나님이 뭘 주실까? 어떤 은혜를 주실까?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의 순서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예배에 참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주실것인가? 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땅 분배를 시작하는데,
민수기 27장1절에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이 모세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광야에서 죽었고, 어머니에 대한 언급도 없는 것을 보니, 아마 다섯딸들만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슬로보핫의 가문에, 또 슬로보핫의 형제들에게 땅분배가 되었지만, 아버지 슬로보핫이 죽고,
그의 아들(오빠나 남동생)이 없었기 때문에, 분배가 안된다는 전통적인 관습때문에 딸만 있었기에 분배를
받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고보니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막막하고 두렵고 여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보 핫의 다섯딸들이 모세에게 담대하게 나아 간 것입니다.
이렇게 용기백배해서 모세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ㅔ 보면 다섯딸들의 이름의 끝부분을 AH라는
믿음의 사람,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으로 그렇게 이름을 붙 였을 뿐만 아니라,
슬로보핫이라는 이름은 '두려움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삭제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보호 받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을것 같은 두려움에 대해 보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두려움을 정복하는 것이고 믿음은 두려움을 기겨내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실까요?.
주여, 믿음으로 두려움을 정복하게 하소서.
믿음의 요소 가운데 하나는 두려움을 정복하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까요?
세상사람들은 심리학 공부를 한다든지 나름대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요소는 우리에게 짐지운 것도 있고, 어려움도 많이 있지만,
믿음은 두려움 을 정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상극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두려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빛이라면, 두려움은 어두움인 것 입니다.
빛이 오면 자동적으로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막5:36에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오늘, 이 예배의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서 믿음에 관한 씨앗이 뿌려지기만 하면,
우리의 삶을 어렵게 하는 두려움이 물러간다는 사실을 확증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있으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말라 너는 참새보다 귀하니라는 말씀과 마태복음 6:33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을 더 하신다는 말씀이지요.
공중의 나는 새들을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께서 저들을 거두시니 두려워말라
여러분, 공중의 새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백합화가 근심하는 것 보셨어요? 백합화는 근심하지 않습니다.
시적 제목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은혜가 있으면, 두려움은 물러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 어린 양이여, 너희는 근심하지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런 마음의 자세로 아마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이 모세에게 나아 갔던 것입니다.
이 다섯 딸들이 믿음의 훈련을 받았던 것 처럼 오늘 저는 초시간적인 믿음의 비밀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마음을 집중해서 가슴에 넣고 들어야 할 말씀은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 믿음을 생각하시고 왜, 이 믿음이 중요한지, 그 동안 많이 믿음에 대해서 들았습니다만,
오늘은 믿음의 다른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믿음은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 어떤 시기의 어떤 환경을 막론하고, 21세기의 오늘날이나, 3,500년 전의 모세의 시대에서나
상관없이,시대를 관통하는 진리 믿음은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초 시간적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믿음이 있다해도 실상은 믿음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 믿음이 있다하드라도 믿음이 많이 약한 것입니다.
혹은, 성경읽고, 말씀들을 때에는 믿음이 있는 것같은 데, 실제로 살아가는 삶에서는 이것이 그대로 적용이 되지 못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대로 삶에서 깨닫고, 확인하고
내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예수믿고 구원받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오늘 이시간,
바로 지금 우리들을 위하여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말씀듣고, 마음을 열고,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변화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내게 성령의 검으로, 말씀의 검으로 내게 확증되게 해 주시옵소서,
마음을 열고 기도 드릴 때에,
지금 이시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고 이미 받은 것으로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지금 이 순간 이 말씀이 여러분께 역사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삶에 바로 적용이 되도록,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여 여기 주사랑 교회 예배당에서 지금 말씀하옵소서.
지금 이시간 바로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다면 <초시간적인 믿음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I. 믿음은 (결단)이다.
오늘 본문 민 27:1을 볼까요
"요셉의 아들 므낫세 가족에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나아 왔으니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지금 이 딸들은 그들의 기업을 모두 삭제당할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슬로브핫의 집안도 다른 가족들과 함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분배를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광야길을 걸으면서도, 가나안의 영광스런 기대에 대해서 설레임과 흥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약속과 꿈이 환상이 무너 져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형제들가운데 아들이 하나도 없음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분배를 받아야 할 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꿈도 기대도 갖지 못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꿈이 무너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와 닿아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똑 같은 가나안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허락되신 여러가지 영적인 부요와 축복과 열매맺는 삶과 성취와. 능력주시는 것과
새롭게 하시는 것 다 포함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적인 축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믿고, 은혜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이러한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영적인 가나안, 조금 더 높은 수준의 가나안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인 인격의 성숙,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 우리교회식으로 말씀 드리면,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믿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빚어지고 자라는 것, 인격의 성숙과 영적인 성숙도
우리로 하여금 이 가나안이라는 말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부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기가 막힌 말씀 아닙니까?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근심속에서도 기쁨, 가난속에서도 진정한 부요,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모든 것을 주신 부요, 이것을 다 가나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영적 부요와 성숙함을 소유하도록 이미 결정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축복, 가나안 땅이라고 하더라도,
이 축복을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이 중요 한 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으면 축복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진리는 영적인 부요와 축복은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초시간적인 비밀,
첫째, 우리가 적용할 것은 믿음은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축복과 부요가,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그러한 성숙과 은혜가 우리에게 다 있다고
할찌라도, 우리가 그것을 마음에 소원하고, 원해야 주시는 것입니다.
결단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중요한 주제를 앞에 놓고, 이런 생각 해 보았습니다.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처럼 주어진 축복이 현실적으로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모세 앞에 나아가서 가나안 땅의 자기들의 몫을 달라고 용기를 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단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고 기도하고, 마음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원하시더라도, 내가 원하는 마음의 결단이 없으면, 내 것으로 가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면서 그냥 자면 안됩니다.
주님! 오늘 이 하루도 주님을 더욱 기쁘게 닮아가게하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제자로 성숙하옵소서,
제가 마음 속에 소원하고 그리는 저의 삶의 영적 가나안복지에 오늘도 더욱 뚜벅 뚜벅 걸어갈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의 꿈과 소원들이 조금도 지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없다면, 저는 밤에 잠을 잘 수도 없고, 아침에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고 내가 결단한다는 것을 일컬어 믿음의 초시간적인 개별화작업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역사하는 믿음, 가나안 땅을 얻는 믿음, 능력을 얻는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 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에 우리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무슨 인간의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받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역사하는 믿음, 가나안 땅의 분배를 받는 믿음은,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축복과 부요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인격의 성숙과, 하나님 닮아가고, 예수님 닮아가는 그러한 축복은 반드시
저와 여러분이 원하고, 결단해야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러한 소원이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가만히 있지않고, 그들이 원하는 기업을 요청하기로 결심하고,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어려웠지요. 아버지도 죽고, 상속받을 아들, 오빠, 동생도 없고,
현실이 너무나도 척박하고 어려운 상태에서, 믿음으로 기업을 얻기로 결단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귀하게 보셨다는 것을 여러분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왜 이것을 강조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고, 꿈과 비젼과 기도제목을 갖지만, 실제로 결단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열명이 믿음의 꿈을 꾼다고 하더라도, 결단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십분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고 말은 하지만, 결단이 없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시간과 물질과 사회적인 위치와 삶의 에너지를 믿음으로 살기위하여
결단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 결단을 위해서 지금 현재의 안정과 평안에만 눈이 멀어져 버리면, 결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느헤미야 는 그 당시 당대 최대 제국의 가장 실권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의 삶의 위치에만 그대로 머무르기를 원했다면, 70여년동안 허물어져 있던
예루살렘성 벽이 50일만에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그런기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도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물론 슬로브 핫의 다섯 딸들은 균형감각이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자기들의 자격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수고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딸들은 율법으로는 가나안 땅을 자신들이 얻을 수는 없지만, 은혜의 차원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생각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히4:16말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와 같이 마음으로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믿음은, 은혜의 보좌앞에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위하여,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영적으로 힘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 하심을 잊어버렸거나, 그 핵심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시는 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단하고, 주님앞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원하시더라도, 우리자신이 그것을 은혜로
간절히 소원하고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는 믿음은( 기다림 )이다.
민 27:5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품하니라"
이제 이 다섯 딸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모세앞에 왔을 때, 땅이 당장 분배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땅이 분배된 것은 나중 일이었고, 먼저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이런일이 전혀 없는 예외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6절에 여호와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신 후 에, 곧이어 이루어졌던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결단하고 하나님께 나아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다림을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다림을 통해 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기다림을 하나님의 거절로 받아 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인내를 배우는 신비한 과정입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앞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영혼의 북돋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교회의 건축과정을 지켜보면, 믿음으로 건축을하게되지만, 4 - 5년동안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준비하며, 교회를 지으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으로 빚어지는
신비한 과정이라는 것을느끼게됩니다. 믿음을 위해서 결단을 해도, 주님께서 24시간 뒤에
바로 그 믿음의 꿈을 이루어 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노아는 120년을, 아브라함은 25년을, 모세는 40년을 기다렸고,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셨지만,
30년을 목수의 집에서 자라시고, 또 목수로 일하시며,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단하고 기다리면, 믿음의 열매를 맺는 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꾀를 내어 가지고, 돌아 가거나, 슬쩍 넘어가면 더 큰 값 을 치루게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께 다음의 세번째 와 네번째의 원리를 가장 강조하고 싶습니다.
III. 믿음은 ( 용기 )이다.
오늘본문 민 27:2 "그들이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족장들과 온 회중앞에 서서 가로되
여러분, 이 하나님 말씀을 다시는 못 들을 지 모릅니다. 집중해 주십시오.
그러면, 온 회중이 얼마나 되었는 지 살펴 보겠습니다.
민 26:51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 함을 입은 자가 육십만 일천 칠백 삼십 명이었더라601,730명
이 부분은 남자 20세이상의 장정 들만 계수한 것인데, 아이들과 여자 들만 하더라도
100여만이 되었을 것이고, 그외 100여만명이나 되는 여자들가운데 다섯 딸들의 이름만 유일하게 나온 것은
대단한 용기인 것 입니다. 200만명의 사람들앞에서 이 다섯 딸들이 모세앞으로 뚜벅 뚜벅 걸어나오는 것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다섯딸들이 200만명의 수많은 무리앞에서, 이스라엘의 유산상속은 아들에게 대체적으로 넘어가는 전통적인 관습을
깨뜨리고, 모세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이 광경은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아주 독특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초시간적인 믿음의 비밀은 한마디로 말해서, 믿음은 결단 과 기다림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성령이 주시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보통 용기가 아니라 전통과 인습과 관습을 깨뜨리 는 용기 인 것입니다.
전통을 재창조하는 용기 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계속해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부딪히셨던 이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전통의 벽 때 문에
계속 부딪힘이 많았습니다. 내용은 상실되고, 껍데기만 남은 화석 화된, 그 딱딱한 전통의 벽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사역에 부딪힘이 많았습니다.
우리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시기를 원하세요? 정말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세요?
어릴때부터 해온 그 습관이 편하다고 할찌라도,
그..예배를 계속 똑 같은 Style로 5년 10년 동안 드려 왔어도, 똑같이 비난하고, 똑같이 실망하고, 똑같이 좌절하고,
똑같이 영권이 없이, 지금까지 내가 하나도 안 변했다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다섯딸들은 아들외에는 상속이 않된다는 전통적인 율례의 개념을 과감하게 박차고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00여만명의 여자들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잘못된 인습과 전통은 무 엇입니까?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런 생각들입니다.
법과 질서를 따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잘못된 관습과 형식과 굳어진 전통,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전통에 다섯 딸들이 과감하게 도전을 했습니다.
본래 딸들이 유산을 상속받 지못한다는 말이 율법에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 하나님께서는 그 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 새인들이라든지 종교적인 지도자들 이 그렇게 율례를 만들어서, 꽉 뒤집어 씌워 놓은 것입니다.
전통의 부정적 Power였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딸들은 은혜의 기초위에, 모세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요청했습니다.
모세도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지 못했기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모세도 이런 요청에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하나님께 물어볼 정도 였습니다.
모험과 용기가 없이는 믿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올바른 믿음에는 반드시 모험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관습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너무 얽메이지 말고,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역사하도록, Room을, 빈 공간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믿는 것이 얽매이는 것이고,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자유가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예수믿는 것, 그 속박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진짜 예수믿고, 믿음으로 살면, 영광스러운 모험의 삶이 펼쳐집니다.
그 부요가 얼마나 대단한지, 믿음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확증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적용하겠습니다.
IV. 믿음은 ( 재생산 )을 가능케 한다.
민 27:8-10 너는 이스라엘 자손 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기업을 그 딸에게 돌릴 것이요
딸도 없거 든 그 기업을 그 형제에게 줄 것이요 형제도..없거든 그 기업을 그 아비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이 슬로브 핫의 다섯 딸들이 자기 아버지의 유산과 기업을 모세를 통하여 확증하고, 6절에서 분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다섯 딸들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아름다운 율례와 전통으로, 하나님께서 재생산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Reproduction)
이 다섯딸들때문에, 이들만 축복을 받게된 것이 아니라,
다음의 이 다섯딸들과 비슷한 형편에 처한 사람들에게 다 혜택이 주어지게 되었고,
그들보다 더 못한 사람들도 받게되었습니다. 참..믿음때문에 이스라엘에 는 새로운 원칙과
새로운 법이 제정되게 된..것입니다.
참 믿음으로 결단하고, 참 믿음으로 기다리고, 참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바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왜 하필이면, 주님께서 겨자씨를 비유로 믿음의 문제에서 겨자씨의 비유를 들었겠습니까?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혜택을 받는 것이 겨자씨입니다. 잘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자라고 재생산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근육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근육은 강화할수록 더욱 튼튼해지고, 쓰지 않으면 퇴화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옆에 있기 만 해도, 그 감격과 은혜가 전달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앙의 사람들은 옆에 있기만 해도 같이 부정 적으로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강력 한 믿음의 사람들을 주위에 두기만 하면, 그 사람들의 믿음의 수준처럼, 그 능력을 전수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이나, 마태복음 17장에서 겨자씨를 가지고 말씀하신 이유는,
네가 겨자씨같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너를 통해서 남들도 잘 되고, 믿음이 강화되고,
재생산되어서, 축복의 근 원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믿음은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 사실이 믿음의 초시간적인 비밀인 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Miracle Complex:기적의 땅)의 이 건축은 믿음의 눈으로, 지은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영적 감격이 되 는 것은,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의 믿음이 결국, 마리아가 다윗의 혈통 을 잇게하는
메시야의 계보의 정통성을 잇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중요시하게 여깁니다.
아들 Style로만 계속 나옵니다.
사실 요셉은 예수님과 관계가 없지요. 물론, 크게보면 마리아도 솔로몬의 계보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슬로브핫의 딸들을 통하여..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딸들도 유산상속이 가능하다는 율법의 새로운 법칙을 정함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예수님의 메시야왕국의
정통성의 계보를 잇도록, 이 딸들이 놀라운 기여를 한 것입니다.
딸도 아버지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전례를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자체도 은혜가 되지만, 우리 주 위의 소외된 자, 고아와 과부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 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이 딸들의 믿음의 결과로,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이 되는데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고,
재생산이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노예들, 예수님시대의 목자들, 우리 주위의 힘들고,
어렵고, 세상의 짐을 지고가는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기업과 가나안의 분배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확증할 수 있는 축복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저는 오늘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는 사람은 되었지만,
나는 정말 믿음으로 용기를 갖는 이런 일들이 약합니다. 나는 믿음의 재생산 이 부족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주님, 조금 더 제가 결단하게 하시고, 기다리면서도,
그것을 거절로 알지말게 하시고, 주님 나에게 믿음으로, 뚜벅 걸어갈 수 있도록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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