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진국 : 698~926. 발해국 국호는
외부에서 부르던 명칭이었으니
스스로 부르던 이름이 아니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계속해서 고구려라고 자칭했었다.
그나마 일본식민사학은 대진국 곧 발해를
한국사에서 잘라 버렸었다.
한국사에서 대진국시대는 남북국시대사의 북조사에 해당한다.
종래 이 시대를 남조의 신라만을 꼬집어 통일신라시대라고 해 왔었다.
자기 땅을 잘라 내버리고 통일했다는 말은 논리 부재요, 어불성설이다.
설상가상으로 국사의 서술마냥 " 대동강으로부터 원산만에 이르는 선
이남을 통일했다"는 통일신라관은 지난날 일본식 민사학의
재탕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현 감찰원장 황영시 씨가 펴낸 <겨레의 역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를 남북국시대로 구분했음은 특히 인상적이다.
(참고하기 바란다.)
2. 개화 27년 : 고구려 28대 왕인 보잔왕(642~668)의 연호가 개화이다.
개화 27년은 곧 A.D. 668년이다.
고구려 마지막의 멸망 때까지 칭제 건원을 했다 함은
반드시 기억해 둘 일이요, 많은 교훈을 주는 일이다.
생각나는 것은 김부식이 저<삼국사기>권 5 진덕여왕 5년조에서
신라가 연호를 쓴 것을 나무라는 論曰(논왈)을 쓴 것이다.
이에 論曰(논왈)을 소개한다.
『논하여 가로대 삼대(하,은,주)에서 정삭을 고치고
후세에는 연호를 쓰는 것은 통일을 크게 하고
백성의 눈귀를 새롭게 하려는 까닭이다.
이러므로 때를 틈타 함께 일어나서 천하를 다툰다든지
또는 간웅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신기(천자의 지위)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면, 천자의 나라에 신하로서 속한
편방 소국이 본래 사사로 연호를 쓸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신라는 속으로 중국을 섬길 뜻이 있었던 듯하여
공물을 올리며 그 도를 구하였는데도
법흥왕은 스스로 연호를 사용했으니 이상스러운 일이다.
그후에도 그 잘못되고 그릇됨을 되풀이하여 여러 해를 지냈었다.
당태종의 꾸지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때에서야 비로소 당의 연호(영휘)를 받들어 쓰게 되니,
이것이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 할지라도
문득 허물이 잇어서 능히 고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논왈은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영휘란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원문 다음에 붙인 주이다.
신라의 법흥왕이 건방지게 연호를 썼다고 나무라는 김부식의 논리나
그의 정신 사상은 실로 중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잇다고 할 만큼
사대주의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3. 진국장군 대중상 : 乞乞仲象(걸걸중상)이라고도 한다.
<唐書,당서>엔 『걸걸중상이 震國公(진국공)이 되다』라고 있다.
대조영의 아버지.
4. 개원 : 만주 요녕성 창도현의 남쪽 남만주 철도 연변에 있다.
5. 동모산 : 중국 사서엔 東牟山(동모산)이라고 있다.
대조영이 동모산 옆에 홀한성을 쌓고 천도 하였다.
지금의 길림성 동화 부극이다.
6. 계성 : 지금의 북평 부근의 계.
7. 홀한성 : 발해 수도인 上京(상경), 龍泉府(용천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東京城(동경성)이다.
이 성의 남쪽에는 鏡泊湖(경박호)가 북쪽에
푸른 물의 牧丹江(목단강)이 둘러 싸고 있으며,
규모가 광대하고 웅장하다. 발해 926년,
契丹(거란)에게 망할 때까지 약 160년간
이곳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 어느 나라의 수도보다도
기개나 규모가 웅장하기로 으뜸인 도읍지가 바로 동경성이다.
8. 말갈 : 말갈은 전한과 위진시대에는 邑婁(읍루)라 불리고
남북조시대엔 勿吉(물길), 수와 당시대엔 말갈로 불렸는데,
중국사가 말하는 古老民族(고로민족)인 肅愼(숙신)의
후예이며 여진과 만주인의 조상이다.
이미 주해한 바와 같이 숙신은 곧 珠申(주신)→ 朝鮮(조선)의 어원이다.
물길이나 말갈이라 하는 말의 물 또는 말이라는 말은
우리말의 물(水)과 같은 발음이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말갈에는 7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粟末水(속말수, 송화강 상류)에
오래 거주한 속말말갈이 상당히 강대하였다.
고구려가 망하자 발해에 예속되었으며,일부는 신라에 들어 왔다.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말갈족의 중심 세력인 黑水(흑수)말갈은
거란에 부속하여 여진이라고 하였다.
여진은 生女眞(생여진), 熟女眞(숙여진)으로 나뉘어졌다.
뒤에 金(금)나라를 세운 것은 생여진의 阿骨打(아골타)였다.
9. 걸사바우 : 말갈 추장 이름.
당나라의 則天武后(측전무후)의 萬歲通天(만세통천) 연간(696)에
영주 부근의 거란인이 병사를 일으켜 趙翽(조홰)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주에 있던 고구려 사람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더불어 요동으로 도망쳤다.
무후가 이를 진압할 틈이 없기 때문에 비우를 許國公(허국공)에 봉하였으나,
걸사비우가 이를 받지 않았음으로 당나라는 李楷固(이해고),
索仇(색구)등을 시켜 토벌케 하였다.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대조영은 도망쳐 동모산에 성을 쌓고
진국왕이라 칭하였다.
10. 이해고 : 바로 위의 주를 참조.
11. 천문령 : 흥경지방의 영액성 부근으로 추정한다.
흥경은 요녕성 흥경부인데 통화, 회인, 집안, 임강의 4현을 관할한다.
청나라 태조도 여기 도읍한 적이 있다.
발해국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2. 구다 : 句茶川國(구다천국)과 같다. 캄차카(Kamchaka)를 말함.
사할린(가라후또) 쯔시마열도도 구다천국에 속했다.
仁安(인안) 16년(A.D.734년) 대진국이 성읍으로
삼았다 하는 기록은 상당히 중요한 뜻을 갖는다.
당시 캄차카에는 만주 문화와 유사한 오호츠크 문화가 있었고,
이것이 일본의 동북지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가지마는 말하고 있다.
참고할 만한 말이다. 한편 알라스카의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메리카 인디안들과도 연결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13. 등주와 동래 : 등주와 동래는 모두 산동성 지명이다.
이를 묶어 登萊(등래)라 쓰는 경우도 있다.
14. 요서의 대산 : 대산이나 帶水(대수), 帶方(대방)은
모두 같은 지방에 있는 지명인데, 이들이 요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황래도라 고집하는 식민사학 및 그 계자들이
꼭 알아둬야 할 지리 개념일 것이다.
15. 암연현 : 암연현을 지금의 옹진이라 함은 천만부당한 말이다.
태백일사 저자의 반도사관을 여러 차례 공박했거니와
여기에 그 사관의 부당함을 바로 <요사> 권 38지리
암연현의 원문을 들어 지정할까 한다.
『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암연현 동계신라 고평양성재현서남 동북지해주일백이십리
즉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옛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동북쪽으로 120리 지점에 해주가 있다」는 뜻이다.
평양 암연현 해주
120리
신라
위의 평양성, 신라, 해주, 안연현의 위치를 그림으로 살펴 보고,
이들이 과연 한반도의 지명들일까 하고 생각해 보라.
아무리 생각해도 한반도의 지명들일수 없고
만주 대륙의 지명들 임을 알 것이다.
중국사는 신라를 길림지방이라고 했으니
암연현의 동쪽에 길림이 있고 그 서남쪽에
옛 평양성이 있는 장소를 찾아 볼 일이다.
암연을 웅진이라 함은 반도사관에 집착된 망집에 불과하다.
웅진 서남쪽에 평양이 있고 동북쪽에 해주가 있다 할 순 없지 않는가?
특히 평양이 서남쪽에 있다면 옹진은 평양의 동북쪽
곧 평양북도 쪽에 있어야 한다.
옹진의 동북 120리지점에 해주가 있다는 점만 볼 일이 아니다.
옹진 서남쪽 바다에 평양이 있어야 하니 혹 옛 평양성
재현 동북의 잘못이라고 고집하는 망발일랑 하지 말라!
16.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 망발이다.
문맥으로 미뤄 봐 <요사>지리지를 인용한 것이 분명한데,
잘목이다. 암연은 어디엔가에 있는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