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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31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성도 안에 계신 예수님. 信徒の内におられるイエス様。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4절~22절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15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22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4. ラオディキアにある教会の天使にこう書き送れ。『アーメンである方、誠実で真実な証人、神に創造された万物の源である方が、次のように言われる。15. 「わたしはあなたの行いを知っている。あなたは、冷たくもなく熱くもない。むしろ、冷たいか熱いか、どちらかであってほしい。16. 熱くも冷たくもなく、なまぬるいので、わたしはあなたを口から吐き出そうとしている。17. あなたは、『わたしは金持ちだ。満ち足りている。何一つ必要な物はない』と言っているが、自分が惨めな者、哀れな者、貧しい者、目の見えない者、裸の者であることが分かっていない。18. そこで、あなたに勧める。裕福になるように、火で精錬された金をわたしから買うがよい。裸の恥をさらさないように、身に着ける白い衣を買い、また、見えるようになるために、目に塗る薬を買うがよい。19. わたしは愛する者を皆、叱ったり、鍛えたりする。だから、熱心に努めよ。悔い改めよ。20. 見よ、わたしは戸口に立って、たたいている。だれか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開ける者があれば、わたしは中に入ってその者と共に食事をし、彼もまた、わたしと共に食事をするであろう。21. 勝利を得る者を、わたしは自分の座に共に座らせよう。わたしが勝利を得て、わたしの父と共にその玉座に着いたのと同じように。22. 耳ある者は、霊が諸教会に告げることを聞くがよい。」』
오늘부터 9주간은 예수님과의 행복한 동행을 위한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특히 예수동행일기를 배우는 교재의 내용을 정리하며 핵심적인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매 주일 나누는 말씀을 통해 예수동행일기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배우고, 주님과의 행복한 동행이 더욱 구체적으로 발견되는 시선을 갖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교회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에 마지막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칭찬은 없이 책망만을 들은 교회입니다. 그것도 매우 듣고 있기 힘들고, 두려운 내용의 책망이었습니다. 입에 맞지 않아서 뱉어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이죠.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무서운 책망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뱉어 버리시겠다고 심하게 책망하시는 이유가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부유하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벌거벗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요. 다시 말해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영적 상태와 주님이 보시는 영적 상태가 완전히 달랐다는 이야기이지요. 성경에는 주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시선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내면세계와 영적인 상태를 자세히 구체적으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세속의 평가기준과 하나님의 평가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여러 곳(요 7:24, 행 10:34, 롬 2:11, 갈 2:6, 엡 6:9, 골 3:25, 벧 1:17 등등)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더더욱 내면의 관리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4)
따라서 성도인 우리의 관심은 자신의 내면을 관리하는 일에 쏟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은 박해와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님 믿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소망을 갖게 하는 서신입니다. 또한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살도록 일깨우는 편지입니다. 매일 주어지는 하루만큼의 일상을 자신의 나머지 인생의 첫날이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날임을 믿는 것이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철저하게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외적인 형편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을 줄이고, 영적인 형편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을 늘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관리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도의 내면과 마음은 곧 성령님께서 사시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성령님은 곧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과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나의 내면세계는 예수님께서 살고 계시는 거처가 되십니다. 아멘!
하지만, 어떻게 실제로 우리의 내면세계가 예수님의 거처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7가지 증거가 있는데요.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10주간의 일대일양육을 받으면 좀 더 자세히 배울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7가지 증거를 간단하게만 소개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계시면...
첫째,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고전 12:3)
둘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롬 8:15,16)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고전 2:12)
넷째,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요일 4:12,13)
다섯째, 성령님의 근심을 느낍니다. (엡 4:30)
여섯째,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기고 싶은 소원이 생깁니다. (빌 2:13)
일곱째,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행 1:8)
대부분 7가지 증거가 확실하신 분이시겠지만, 한두 가지 정도 다소 분명하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 하나라도 분명한 증거가 있다면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살고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또, 모든 증거들이 자신에게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확실히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 계신다면 10주간의 양육(당신은 행복하십니까?)을 통해서 분명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어 책으로도 출판이 되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양육을 받으셨더라도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점검해야 할 마음이 있으시면 또 받으셔도 좋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확실하게 분별하고, 또 확증하기 위해서 10주간의 일대일양육은 매우 유용하고 또, 중요한 진단도구라고 믿습니다.
건강진단을 위해서 엑스레이나 아니면 CT 같은 것을 찍어 보면 자기 몸에 간이나 대장 소장 같은 장기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하나 자기가 끄집어 내 보지 않아도 알지요.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만 자기 몸 안의 장기가 기능을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아는 것은 아닙니다. 먹은 것이 잘 배설되는지, 혈색은 어떠한지, 맥박은 어떤지를 체크하면 우리의 몸 속의 장기가 건강한지의 여부를 헤아려 볼 수 있지요.
우리도 말씀과 영적인 생활을 통해 우리 내면세계의 건강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외면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외적인 부분을 점검하고 보완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지요. 매우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외면적 환경과 여건들을 개선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쓰고 있는 데요. 우리가 사용하는 이 시간이란 곧 자신의 인생을 뜻하기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면적인 것을 관리하는데 인생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요. 문제는 우리가 인생을 들여서 관리하는 외면적인 조건과 형편의 결과에 하나님께서는 거의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성도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이렇게 외적인 형편이 풍족한 것에 안심하고 있으면서, 내면의 상태는 매우 형편없이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영적으로는 눈이 멀어서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인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자신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관리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18절에 정련한 금을 사고,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잠 17:3에 의하면 정련한 금은 인내와 연단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내와 연단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루어낸 정금으로 흰 옷을 사 입어야 합니다. 애초에는 주님께서 거저 주시지만, 그 옷을 더럽히거나 잃어버리면 정금으로 사 입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흰 옷은 거룩한 행실, 경건한 삶의 습관을 뜻합니다. 계시록 19장에 흰 옷과 관련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8)
안약으로 눈에 발라야 내면의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영안이 열립니다. 영안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2)
우리의 눈은 각자의 영적인 등불입니다. 때문에 말씀의 빛이 인생을 비추어, 무지와 죄악의 어두움이 물러갈 때 그 빛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곧 영적인 눈(영안)입니다. 영안이 뜨인 사람이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18절의 핵심 메시지는 복음을 믿는 믿음생활의 기본을 회복하라는 말씀이지요. 복음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복음을 통해 경건을 배우고, 복음을 통해 영안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왠지, 어렵게 느껴지는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뜬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되는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구요. 복음을 믿기만 하면 복을 받는다더니 율법과 계율 등을 말하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어리석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이미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적의 삶을 살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받은 복을 지키기 위해서 훈련할 과제가 있을 뿐이지요. 그 과제를 우리는 ‘경건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에 순종하여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지키며, 또한 체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사실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바로 20절에 고백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모두 동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먹고 마실 때조차 말이지요.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어떤 이들은 바울이 이 권면을 너무 심하다고 다소 볼멘 소리로 말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순종할 때 이것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영적인 훈련이 영적인 근육을 키우고, 내면을 강하게 지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과 일상으로 살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소명과 사명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 속죄하시고 임재하시는 것은 우리의 소명, 그리고 사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란 ‘살아가는 기준이 되는 목적’인데요.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리스도인의 단 하나의 소명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존재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그런데 우리의 거룩함은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모든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부터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식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배 후에 식사회를 통해 꼭 함께 한솥밥을 나누어 먹습니다. 보통 주일에는 식사모임을 통해 애찬을 나누고, 매달 첫 주일에는 성찬식을 통해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눕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또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실 때 주로 식사자리를 마련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치실 때는 거의 식사를 위해 집에 계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려 넓은 들판에 있었을 때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양의 식사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식사의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삭개오는 주님께 식사 대접을 하는 중에 자신의 회개와 결단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을 비판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일상생활에서 식사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인사와 약속도 유월절 식사를 통해 나누셨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후에도 보면요. 당신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고기를 잡으러 간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가서 물고기를 구워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교회가 예배를 마치면 바로 귀가하지 않고, 꼭 식사모임을 함께 하는 것은 사실 매우 영적인 활동입니다. 물론 교회가 오직 식사를 위해서만 모이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메뉴를 먹는가에 따라 교회 출석을 고민하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식사를 나누며 삶을 공유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그 집 안에서 주님께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식사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식사하고 일상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매우 일상적인 삶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은혜입니다. 가장 큰 축복입니다. 나의 일상 가운데 이미 주님께서 와 계신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적적인 일상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삶에 대해 기록해 놓는 것은 너무도 귀하고 소중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하루만큼의 시간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이지요. 무슨 대단한 문학작품이나 간증거리, 혹은 성공사례를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소한 하루를 돌이켜 생각해보며 모든 시간들은 주님께서 함께 동행하여 주신 은혜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동행일기를 기록할 때, 먼저 하루의 일과 중에 영적인 관점에서 중요하다 싶은 것을 먼저 몇 가지 적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날 아침에 읽고 묵상했던 말씀을 통해 받은 기도의 제목이지요.
내가 원하는 기도는 시간이 지나면 지치고 그 생각이 식어버립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매일 새롭게 부어주시는 기도의 제목은 매일 매일 같은 것이 없이 갱신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에 관하여 생각나게 하시고, 기도의 말소리로 하는 고백은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도의 제목은 주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고백이며, 결단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아침에 눈을 떠서 일기를 쓰는 그 순간까지 있었던 일상들을 복기하며 감사의 표현으로 고백을 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감사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질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내게 허락하신 삶의 조각들이기에 그 경험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다는 말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한 때는 매일 최소 50가지에 숫자를 매기며 헤아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물을 마시는 것도, 하늘을 볼 수 있는 시신경을 주신 것도, 알람 소리를 듣는 청력을 주신 것도 말이지요. 어찌보면 그게 그렇게까지 감사할 일인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순간이라고 믿으면 그것이 감사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통해 받은 기도와 일상생활의 감사찾기로 하루의 삶을 쌓아가면서 저와 여러분은 거룩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갑니다. 그 열매가 맺히는 시간들이 거룩한 삶이라는 소명을 완성해 나아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그 소명을 향해 나아가는 일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과 원수까지도 잃어버린 빛을 회복하는 거룩한 삶에 초대되는 것이지요.
19절에는 라오디게아교회의 성도에게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주님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열심’이란 그저 열정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신실함이 곧 열심이요 열성인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뜨거워졌다가 곧바로 식어지는 열정이 아닙니다. 매일 하루에 하루만큼씩 자라나는 일상을 이어 가는 끈기가 ‘열심’입니다. 일상에서 거룩한 삶에 대한 소명을 포기하지 않고 열매를 거둘 때까지 주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며 견디는 것은 열심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온전히 거룩한 삶을 완성하라는 소명에 합당한 사명들을 완수하는 거룩한 성도인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인 형편에 갇혀 살지만, 그 안에 예수님께서도 함께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일상생활에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과 함께 식사하며, 주님과 함께 일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거리가 곧 예수님께서 걸으시는 거리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분명하게 주님의 임재를 체감하지만, 어떤 이들은 전혀 무감각하게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삶을 삽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모든 일상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일상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동행의 축복을 차고 넘치도록 풍족히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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