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자는 [칼빈의
생애] - 칼빈이 스트라스버그에서 제네바로 돌아온 후 제네바 교회개혁의 방편으로 교회권징을 사용했음을 지적. 칼빈은 교회의 권위가 전적으로
주어진 당회가 없다면 개혁은 불가능, 장로정치야말로 성경적 교회정부. 따라서 장로회의 운영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 통과시킴. 하나님의 법(Jure
divino)사상은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 더욱 발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꽃 피움.
1) 청교도와 교회정치의 개혁 - 자율, 평등, 연합성의 원리
위클리프 - * 사무엘 밀러에 의하면 위클립이 성경에서 제시하는 것은 2직분 사상이라는 것을 영국교회에서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다.
위클립은 사도시대에 2직분(감독과 집사)만이 있었고, 감독과 장로를 동일한 직분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교황, 추기경, 대주교, 등의 직분은
없었던 직분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
토마스 크랜머 - 위클리프의 사상은 헨니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의 종교개혁을 도운 켄터베리의 대주교인 토마스 크렌머에게도 나타난다.
그의 [기독교인의 제도, 1533] = 신약에는 집사, 섬기는 자, 장로, 감독이라는 직분 외에는 다른 것이 없고 직분 상호간 등급이나 순서의
차이가 없다. 이것은 즉시로 2명의 대주교와 19명의 주교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주교들의 책"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국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주교들은 크렌머의 사상을 따라 장로와 집사만을 신약교회의 합법적인 직분으로 인정한 것.
요한 낙스 - 크렌머의 2직분 사상은 낙스에 의해 더욱 발전. 그는 에드워드 6세의 궁중설교자가 된 후 1552년 로체스터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3직분론에 근거한 주교직을 거절함.
죤 아 라스코 - 위클립, 크렌머, 낙스의 교회정부 사상은 폴랜드의 종교개혁자인 죤 아 라스코에 의해 더욱 발전. 그는 신앙의 박해를
피해 영국에 와 있던 폴랜드 개신교도들을 지도. 그는 교회를 치리하면서 '당회'라는 방편을 활용함으로 장로정치를 세워나갔다. 그는 "각 회중은
한 명의 목사,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하며 지교회의 문제점은 감독들에게 위임되어야 한다고 했다".
영국 교회에 소개된 2직분론은
(1) 영국 교회의 영향일 뿐아니라
(2) 칼빈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 대집사였던
윈체스터의 필폿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 그는 1554년 피의 메리에 의해 장로교 신앙을 고백한다는 이유로 사형 당함.
"나는 제네바
교회를 따르며 그 교회의 교리를 따른다. 그것들은 보편적이고 사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드워드 왕 때에 가르쳐지고 설교된 교리만을 따른다.
이것은 제네바의 교리에 따른 것들이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 - 필폿의 증언은 카트라이트에 의해 다시 제기됨.
(1) 대주교, 대집사의 이름들과 기능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2) 교회의 합법적인 목사직, 감독직, 집사직은 사도적인 제도로 축소되어야한다.
감독은 설교와 기도, 집사는
구제.
(3) 교회행정은 감독이나 대집사 등의 직원보다는 목사와 장로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4) 목사는 여러 교회가 아닌 하나의
지역교회를 목회하여야 한다.
(5) 아무도 목회지를 대기할 수 없다.
(6) 목사는 감독의 임명이 아닌 회중에 의해 공개적이고 공평한
선거에 의해 피택
카트라이트의 견해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짐(당시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감독주의가 성경적이냐에 대해
논란). 감독주의자인 영국 교회의 대주교인 리챠드 밴크롭트의 매국노란 비판 ; 이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장로정치에 근거한 교회개혁을
계속함.
카트라이트, 월터 트래버스의 [하나님의 말씀에 묘사된 교회의 거룩한 권징] - 1590년 500명의 목사들은 [교회의 거룩한
권징]이야말로 성경적인 교회정부 형태임을 주장하며 장로교 형태의 교회정부를 영국 교회에 세워갈 것을 서명함.
[교회의 거룩한 권징]에서
그들은 장로교 정치와 권징이 하나님이 주신 법(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평등성을 강조하였다. 교회집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규정. 이는 칼빈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카트라이트의 교회 정부형태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의해 영국 교회에 토착화 되었다.
2)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장로정치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소집 - 찰스 1세의 폭정 가운데서 의회를 장악한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의 행정체제와 예배를 로마 천주교회의
잔재로부터 개혁하여 성경적인 교리, 성경적인 예배, 성경적인 교회 정부 형태를 회복하기 위해, 자문을 구하는 회의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소집.
1643년 7월 1일 소집되어 1647년에 마침. 총회는 의회의 상원 의원 15명, 하원 의원 15명, 곳곳에서 모인 목사 120명으로 구성.
1,100회 이상의 논의를 거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작성. 총회에는 세 그룹의 사람이 참석(장로교도, 독립파, 에라스티안).
3)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예배의 모범
총회는 오랜 논의 끝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3장], [대요리문답, 196], [소요리문담]을 만들어 냈고, [예배모범서],
[교회정부 형태]는 1644년 12월 [교회행정을 위한 지침서]는 1645년 7월 4일에 완성. 이 지침서는 영국의회에 의해 채택되었으나
독립파인 크롬웰에 의해 취소되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1647년에 교회를 위한 교회행정 지침서로 채택했다.
[교회행정을 위한 지침서]의 특징은
교회 정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강조. 교회직분 중 사도, 선지자, 전도자 등은 잠정적 직분으로 사도시대 이후 폐지되었고, 목사, 교사,
장로, 집사는 영구한 직분으로 생각. 교회치리구조는 노회, 대회, 총회로 구성. 예배순서는 기도, 감사, 찬송, 성경봉독, 설교와 요리문답,
성례, 축복, 헌금.
제6장 요한 낙스와 스코틀랜드의 장로정치
1) 요한 낙스와 의회중심적 개혁 - 낙스의 개혁방법(설교, 권징, 교육)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낙스에 의해 이루어짐. 그가 태어난 하딩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국경지역(전쟁에 시달림. 영국과의 관계개선을
희망). 위샤트의 지지자로 종교 개혁에 참가할 때는 30세 정도, 사제로 임직받은 상태. 노예생활시 영국왕 에드워드의 도움으로 석방. 로체스터
주교직 사양, 칼빈을 만나기 전부터 장로정치를 마음에 두고 있었음. 메리여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개혁자들 처형, 낙스는 제네바로 가서 칼빈과
생활(낙스는 칼빈의 제네바의 개혁된 모습을 "사도시대 이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 그는 칼빈의 도움으로 영국 피난민 교회를 3년 이상
섬기면서 장로주의적인 교회정체를 실현하였다. 곧 그는 제네바 피난민 교회를 위해 목사, 장로와 집사를 세웠다.
영국의 메리여왕이 개신교를
박해하자 스코틀랜드의 섭정인 메리왕비는개혁자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정치를 함. 따라서 낙스는 1555-1556년 고국을 방문.
그는
스코틀랜드를 누비면서 설교, 개혁주의적 방식으로 성찬, 개혁교회 교리 고백하면서 미사참여자를 비난.
이 때 낙스와 교제한 사람들 -
모레이의 백작이 된 제임스 스튜어트 경, 아길의 백작이 된 론 경, 그렌케인의 백작, 레싱톤의 윌리암 메이트랜드.
* 제일계약 - 위의
정치지도자들은 1557년 말, "그리스도의 회중"을 보호하며 사탄의 회중을 비난하는 "제일계약"(First bond)에 서명하고, 교회개혁을
실현하며, 개혁주의적인 예배를 실시하기 위하여 낙스에게 스코틀랜드로 귀국할 것을 권함.
1558 [괴물같은 여성통치에 대항하는 첫번째 나팔소리] -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여성에 의해 가해지는 박해를
혐오.
1558.11.17. 영국에서 메리 사후 엘리자베드 여왕의 즉위. 개신교에 관용정책,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들은 영국교회를 힘입어
스코틀랜드도 더욱 개혁코자 함.
1559년 낙스의 귀국(칼빈은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반대하시거나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지 않는 한
귀국하라) - 스코틀랜드에 팽배하던 미신과 우상숭배 제거, 폭정 배제, 장로교회 심는 운동(이 때 낙스의 기도 -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요).
에딘버러 조약에 의해 개혁자들의 승리 - 낙스가 스코틀랜드에 돌아가자 영국은 군대를 보내어 프랑스인들을 축출하도록 응원. 이 전쟁을
통해 귀즈가의 메리 사망.
1560년 4월 세인트 자일스 교회를 맡아 설교.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폐지, 미사
금함, 천주교의 모든 집회를 불법화, 프랑스 왕과의 단절을 선언. 이때 의회는 낙스와 다른 5명의 요한이 4일만에 작성한 개혁교회의 신조를
채택. 이것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이다. 12월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고, 치리서를 작성
채택 = 그들은 장로교회 정치를 교회정부 형태로 받고, 교회직원을 목사, 장로, 집사로 구성하였고, 장로와 집사는 일년에 한번씩 선거토록
함.
[치리서] - 도덕문제, 기독교적 교육을 위한 제안, 모든 교회는 라틴어와 문법과 교리공부를 가르치는 교사를 두고 마을마다
고등교육기관을 세우도록 함. 문맹률 감소(프랑스 개혁교회의 예를 따라 주교직을 변형하여 감독자라는 직분을 둘 것을 제안, 감독자의 의무는
말씀전파와 교인심방. 직무에 게으르면 물러나야 한다).
스코틀랜드는 낙스의 설교에 의하여 개혁됨.
* 앤드류 멜빌 - 그는 설교를 시작할 때는 - 마지막에서는 - 마치 설교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 속에서 날아오르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메리여왕이 폐위되면서 스코틀랜드는 강력한 장로교회 국가가 되었다. 의회는 1567년 1560년의 정책을 다시 확인했고 주교 대신 목사를
임명. 1572년 낙스가 사망하자 섭정이었던 Earl of Morton은 감독주의를 소개. 요한 더글라스는 주교로 임직.이런 상황에서 앤드류
멜빌의 귀국.
2) 앤드류 멜빌과 두 왕국 사상
앤드류 멜빌은 칼빈의 제자(제네바 아카데미의 헬라어 강사). 제네바에서 '퍼거'의 도움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본 연구.
법률연구(제네바 아카데미의 시민법과장). 멜빌의 귀국시
* 베자는 스코틀랜드에 편지하기를 "제네바 교회가 스코틀랜드에 보여줄 가장 큰
사랑의 표시는 앤드류 멜빌이다"
칼빈의 제네바의 대학 교육제도를 스코틀랜드에 이식함. 낙스에 의해 작성된 제일치리서를 개정하고 더 조직적인
장로교회를 세워감. 성경에 근거한 교회정부 형태를 추구. 이러한 노력은 "제2 치리서"에 나타난다. 칼빈과 같이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를 따라
교회의 직분을 둘로 나눔. 감독들, 목사들, 목회자들은 동일한 용어라 함. 이 사상은 1580년 총회에 채택.
장로교도 손에 양육된 제임스 1세의 장로교도 박해 - 앤드류 멜빌의 두 왕국 사상(스코틀랜드에 두 개의 왕국 두 왕, 나라의 머리인
제임스와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 제임스 왕도 그의 백성. 하나의 지체), 교회와 정부의 분리.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의 종교정책은 더욱 심함 -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윌리엄 로우드를 등용, 그의 명에 의해 1637년 7월
23일부터 장로교회 폐지, 성공회 의식에 의한 예배 실시. 그러나 이날 에딘버러 사제장인 '딘'이 존 낙스의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에서 성공회
의식을 따라 예배를 집전할 때 폭동이 일어남. 노동자 계층의 '제니 겟즈'가 의자를 집어 던짐 --->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에딘버러의
그레이 프라야 교회당에 모여 장로교회 정치와 예배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국가계약]을 맺음. 163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교회를 정화하고
장로교 형식의 예배를 실시하기로 결의(이는 찰스 1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 없음). 이러한 배경 인물이 '사무엘 러더포드'이다.
3) 사무엘 러더포드와 Lex Rex
러더포드는 낙스, 멜빌, 조지 부케넌의 전통을 따라 시민 불복종의 사상을 발전시킴.
[Lex Rex] - 정부의 기원 : 하나님에
의해 세워짐
정부의 목적 : 권선징악을 위해 있는 기관
정부의 형성 : 합법적 정부는 통치자와 백성의 계약관계에
의해 이루어짐. 통치자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이중계약 아래 있음. 백성이 계약을 깰 때 법에 의한 제제, 통치자가 계약을 깰 때 백성은 그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됨.
이러한 논리에 근거하여 찰스의 성공회 정책을 반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정책을 고수, 러더포드의 이 사상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유산이 되었고 러더포드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여함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핵심이 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도전으로 찰스 1세는 전쟁준비 - 영국의 내란으로 의회군에 의해 처형됨. 올리버 크롬웰의 독립파에 대한 편애는 성공회나
장로교의 반발. 그의 사후 찰스 2세를 '국가계약'에 서명케 하고 대관하였으나 장로교를 폐지하고 성공회로 돌아감, 따라서 스코틀랜드인들은
국가계약을 확인하고 찰스 2세에 대한 항전을 시작(이들을 계약파라 부름). 그의 사후 제임스 2세는 로마 천주교회를 국교로 만들려함. 1688년
왕위에서 쫒겨나고 그의 딸 메리(화란의 윌리엄공과 결혼)가 돌아와 '종교관용론'을 선포. 1690년 화란의 오렌지의 윌리엄 공이 통치하는 동안
스코틀랜드 의회는 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 안에서 회복, 1653년 이후 처음으로 장로회 총회 회집이 허락되었다. 총회는 정부와 교회의 논쟁의
장소가 됨(정부는 오렌지 공의 궁정목사인 윌리엄 카스타레의 지도 아래 승리).
1707년 5월 1일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한 의회 한 왕실로 연합. 영국은 감독주의가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가 주도적.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가 되었지만 1712년 '목사 임명권'이 의회에 통과되자 정부와 의회의 관계는 심각해짐.
[목사임명권](Lay
Patronage Act) - 어떤 교회가 공석일 때 그 목사를 임명하는 권한이 지역 사찰회에 있음. 목사 청빙권이 회중에서 지역 사찰회로 넘어
감으로 자유주의적 목사들이 정통신학을 고백하는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확장하는 계기가 됨.
1733년 에벤에셀 어스킨이 목사임명권 반대운동을 일으키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로부터 독립선언.
1752년 토마스 길레스피가
목사임명권을 거부하고 구원교회를 조직.
제7장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장로정치 사상
1)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회중정치와 장로교 운동(장로 정치 사상)
신대륙은 박해 받던 기독교인의 피난처, 1607년부터 유럽인들이 정착(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영국인들의정착), 영국 청교도 필그림
파더스, 플리머스에 이민 - 분리주의 자들로 종교적 자유 주장 / 메사추세츠에 이민 - 비분리주의적인 청교도. 이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개혁된
정부와 교회를 뉴잉글랜드에 세우고자 함. 비분리주의자들은 1630-1640년 사이 약 21,000명 정도 이민, 이중 4,000명은
장로교인이었으나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채택한 정부형태는 회중교회 형태.
2) 개교회주의와 교회 연합사상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각 지교회의 (1) 자율성과 모든 직분의 (2) 평등성을 강조. 이 형태는 현대 장로교회 정치형태와 많이 유사.
권징을 위해 '대회제도'를 둠. 교회문제 해결을 위해 대회를 소집.
* 로져 윌리엄스가 분리주의 조장 - 뉴잉글랜드의 신성한 정부를
공격하자 청교도들은 그를 권징, 그를 초청한 세일럼 교회에 대하여 권면.
* 이러한 면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로건교수는 -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의 교회형태는 장로정치라 주장. 이들의 정부형태를 '장로교적 회중교회' 또는 '회중교회적 장로교회'라 부름.
3) 언덕 위의 도시
위그노 - 루이 14세의 낭트칙령 폐지 이후 박해를 피해 뉴잉글랜드, 뉴욕, 버지니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죠지아에 정착. 1687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챨스타운에 위그노 교회 설립. 칼빈주의적 교리와 정치를 채택.
화란인 - 1623년 뉴욕에 이민하여 뉴암스테르담을 건설,
화란어로 예배, 칼빈주의적인 교리를 고백, 장로정치를 채택, 화란개혁교회 세움, 뉴부런스윅에 신학교 세움(여기서 호레이스 언더우드가
신학훈련).
스코틀랜드인 - 1685년 제임스 2세의 계약파에 대한 박해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등지에 이민, 대부분이
뉴저지에 정착.
아일랜드인 - 1705년에서 1775년 사이에 50만명 이상이 이민. 스코틀랜드인과 함께 스코트-아일리쉬 전통을
유지하면서 뉴저지, 펜실베니아, 메릴랜드, 버지니아에 정착.
독일계통의 장로교도 - 1700-1770년 사이에 이민. 펜실바니아,
버지니아, 캐롤라이나에 정착.
제8장 미국 장로교회의 설립과 서명논쟁(성장과정)
1) 프란시스 매케미와 장로교회의 설립
미국 장로교회는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랜시스 매케미에 의해 설립됨. 윌리엄
스티븐스 대령의 초청에 따라 라간 노회가 선교사로 파송, 1638년 메릴랜드의 르호봇과 스노우힐에 교회를 설립.
*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장로교 노회인 1706년 '필라델피아 노회'를 조직.
필라델피아 노회 - 메릴랜드, 델라웨어, 필라델피아 지역의 7명의
목사들과 장로들에 의해 시작(1706.12.27.). 노회의 특색 : (1) 영국계통의 청교도적 장로교회와 스코트-아일리쉬 계통의 다양한 신앙의
뿌리를 가진 장로교도에 의해 세워짐. (2) 모든 권위의 순서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조직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앙의
규범으로 삼음. 급속한 성장(뉴저지와 롱아일랜드의 청교도 가세, 많은 목사와 신자들의 이민, 1716년 경에는 17명의 목사) - 노회는 분할을
결의하고 4개의 지역노회로 나눔. 펜실베니아 지역은 필라델피아 노회, 델라웨어 지역은 뉴캐슬노회, 메릴랜드 지역은 스노우힐 노회, 뉴욕과 뉴저지
지역은 롱 아일랜드 노회.
1717년 스노우힐 노회를 제외한 3개의 노회가 모여 필라델피아에서 최초의 대회가 조직. 17명의 목사와
40개의 교회, 3,000명의 신자. 스코트-아일리쉬의 주도.
2) Adoting Act - 신앙과 양심
1724년 대회는 어려움에 처함 - 목사임직을 받는 모든 목사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 이전에는 유럽에서
안수를 받은 자들이었으나 1724년 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자들이 나오면서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합리주의 사상이 미국에 번지면서
알미니안주의, 아리안 주의, 소시니안 주의가 교회를 위협) 요구하게 된것. 이에 대해 스코트 아일랜드 계통은 서명을 주장 / 영국과 뉴잉글랜드
계통은 양심과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반대.
** 서명법규(the Adoting Act) - 필라델피아 노회는 타협을 근거로 서명법규를 채택 : 신조에 서명하는 대신 목사나
목사후보생은 그 임직시에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그 대소요리문답을 우리가 따라야 할 건전한 신앙고백이라고 고백토록 규정. 승인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고시위원회에 동의할 수 없는 항목을 밝히고, 고시위원회는 그 의심부분이 신앙의 본질적인 것과 상치되지 않으면 승인토록 함.
제9장 대각성운동과 미국의 독립전쟁
1) 대각성 운동과 장로교회 운동
(1) 대각성운동
대각성운동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시작 - 에드워즈, 테넌트가의 사람들,
휫필드,
칼빈주의 각성운동이 뉴저지에서 시작됨.
* 후레링 하이젠 - 뉴저지의 각성운동을 일으킴. 화란 개혁교회의 목사로 뉴저지로 이민하여 래리탄 계곡에서 목회. 죽은 정통을 공격하며
회개와 개혁의 필요성을 설교, 특히 장로교회의 특징인 철저한 권징을 강조, 가정에서 신앙교육 실시, 신앙고백을 삶에 실천할 것(설교에 의해
일어난 그의 부흥운동은 대각성운동의 효시가 됨).
* 윌리엄 테넌트(Log College) - 후레링 하이젠의 부흥운동을 계승, 뉴욕으로 이민한 뒤 자신의 집에서 1726년 그의 네
자녀에게 신학을 교육함. 1727년 필라델피아 근교 네샤미니에 통나무 대학을 세워 그의 아들과 열 다섯명의 젊은이에게 신학교육(성경언어,
논리학, 신학, 복음적인 열성을 교육). 그의 아들 길버트 테넌트는 뉴부런스윅, 사무엘 블레어는 슈레스버리, 존 로우랜드는 뉴부런스윅, 아론
버르는 뉴아크, 사무엘 피니는 노팅햄, 로버트 스미스는 페쿠아와 랭카스터에서 큰 부흥운동 일으킴.
* 죠나단 에드워즈 - 노쌤톤 회중교회 목회, 1734년 뉴잉글랜드에 만연한 알미니안 사상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되는 칭의"에 대해 설교하면서 큰 부흥운동을 체험. 청교도의 설교를 따르면서 '연상법' 사용 :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있는
죄인"
* 죠지 휫필드 - 1740년대의 대각성운동. <설교> 직접 대화하는 것과 같은 설교, 연극적인 제스쳐, 찬송, 상상력
동원해 설교함으로 회중을 사로잡음. 뉴잉글랜드 30만 인구 가운데 25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윤리적, 도덕적 개혁이 일어남. 합리주의 자유주의
사상들이 영향력을 상실하고 칼빈주의 사상이 뿌리를 내리게 되어 장로교회는 크게 확장.
(2) 대각성으로 인해 장로교회의 분열과 합동
대각성은 교회분열을 초래, 부흥운동을 지지하는 이들(New Side) - 예일대학과 통나무 대학을 나온 자들 : 부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 / 반대하는 이들(Old Side) - 찰스 촌시와 죠나단 메이휴를 따르는 하바드 계열로 나뉨 : 부흥은 사탄의 역사.
분열의 이유 - (1) 순회설교자들이 교구목사의 허락 없이 설교함으로 교구의 질서가 깨짐. (2) 부흥을 지지하는 목사들이 반대파의
형식적이고 죽은 신학을 공격(에드워즈는 올드 사이드의 알미니안 신학 공격, 길버트 테넌트는 1741년 노팅햄의 설교를 통해 죽은 형식주의 공격
"회심치 못한 목회자의 위험" 이에 대해 <--> 죤 핸콕은 "자질을 갖추지 못한 목회자의 위험"이란 설교로 반박). (3) 목회자의
자격에 대한 차이. 부흥운동 당시 이민자들은 많아지고 목회자는 적었다. 목회자 수급에 대해 올드 사이드는 목회자의 자격을 유럽이나 뉴잉글랜드에서
대학을 나온 자로 규정, 그러나 통나무 대학출신인 뉴 사이드는 미국 형편에서는 이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함. (4) 신학적인 차이, 올드 사이드는
대체로 자연신교에 빠져 원죄설을 부정, 예정론 거절. 뉴 사이드는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 1741년 길버트 테넌트의 설교는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결과, 장로교회는 분열.
1741년 장로교회의 분열 - 필라델피아 노회는 대각성 반대자가 우세, 뉴부런스윅 노회는 지지자가 우세. 필라델피아 노회를 비롯한
교회들이 뉴부런스 노회를 제명함.
뉴브런스윅 노회는 1745년 뉴욕, 뉴캐슬 노회와 연합하여 뉴욕대회를 조직. 두 개의 장로교회가 미국안에
섬. 올드 사이드 27명의 목사, 뉴 사이드 22명의 목사.
교회합동의 요구 - 1758년 뉴 사이드를 중심으로 합동운동이 전개됨. 올드 사이드는 지도력의 빈곤과 교회들의 지지를 잃었으므로 승복.
합동한 교회의 명칭을 '뉴욕 필라델피아 대회'로 부름. 합동원칙 (1) 목사후보생의 훈련, 학문적, 종교적 체험은 대회가 아닌 노회의 관할,
(2) 목사들은 다른 교구에서 설교할 때 그 교구 목사의 허락을 받고 할 것, (3) 1741년 뉴부런스 노회를 제명했던 뉴욕대회의 결정은
불법으로 한다고 결의. 합동된 교회의 수는 200개, 100명의 목사. 뉴 사이드 73명, 올드 사이드 27명. 교인의 수는
10,000명.
(3) 장로교회의 확장
* 세무엘 데이비스 - 훅스 매너의 사무엘 블레어의 통나무 대학에서 수학, 버지니아 지역에 교회 세움. 1747년 뉴캐슬 노회에 의해
선교사로 파송받아 노버 카운티, 곧 리치몬드에 와서 교회 세움. 1755년 하노버 노회 조직 :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할 것을 역설
'겁쟁이가 받게 될 저주', 많은 사람이 군대에 지원.
* 알렉산더 크레이그헤드 - 노스 캐롤라이나에 교회를 세움. 뉴 사이드의 목사로 버지니아 벨리에 와서 교회를 세우므로 세무엘 데이비스와
함께 남장로교회의 터를닦음.
최초의 총회 - 1788년 뉴욕 필라델피아 대회는 16개의 노회로 성장. 뉴욕과 뉴저지, 필라델피아,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등 4개의
대회로 분할하고 총회로 모일 것을 결의.
1789년 5월 16개 노회, 177명의 목사, 111명의 목사 후보생, 419개의 교회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회 총회가 소집됨. 총회 이름을 '미장로교회'라 칭하고 존 위더스푼 박사를 의장으로 선택.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조로 채택, 이 때부터 총회장을 사회자라 부르는 moderator의 전통이 시작됨. 당시 장로교회 목사의 수준은
높았고, 교육기관은 명성을 얻었고, 독립전쟁에 참여했으므로 백성의 지지를 받음.
2) 독립전쟁에 대한 장로교도들의 자세
영국은 미국의 힘이 커가자 두려움을 느낌(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국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 과도한 세금, 성공회를 국교로 할 것을
요구). 반대운동은 장로교인들에 의해 제기됨. 목사들은 강단에서 독립을 설교함으로 적극참여.
* 존 위더스푼 -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종교적 자유를 위해 투쟁. 1768년 스코틀랜드에서 이민. 대륙회의 당시 뉴저지의 학장. 많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독립운동에 참가. 영국군들이
조지 워싱톤, 풋남 리와 위더스푼의 허수아비를 불사름.
미국의 독립전쟁은 (1) 종교적인 배경을 갖는다. 장로교도들이 영국의 정책을 두려워 한 것은 영국 국교회가 미국에서 감독정치를 실시하면
박해,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과 세속권이 교회의 문제를 간섭하게 되므로 장로정치를 주장하는 장로교도는 군주정치를 받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문화적인 배경으로 미국을 세운 국부들은 '계약사상'에 근거하여 나라를 세웠다. 미국에 이민온 스코트-아일랜드 계통의 장로교도들은 폭정에
대해 불복종하는 주장의 전통을 견지하고 당시 장로교도들은 영국에 대한 반역을 '정치적인 칼빈주의'라 불렀다.
이런 맥락에서 장로교도들은
교회의 자유를 위해 침례교, 퀘이커, 합리주의자와 연계하여 독립전쟁을 수행.
* 1775년 5월 제 2차 대륙회의 - 장로교인으로서 참석자는 대륙회의 회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존 위더스푼, 대륙회의 서기인
찰스 탐슨, 나중에 총회장이 되었던 제임스 에프 암스트롱, 죠셉 클락을 포함한 11명.
1775년 5월 17일 뉴욕필라델피아 대회가
회집되어 미국의 독립을 위해 거룩한 금식과 기도의 날을 선포. 장로교도의 공에 힘입어 미국정부체제는 장로교 정치체제인 공화정치제도를
채택.
* 링글 - 그러나 이미 미국은 칼빈주의 영향 아래 있었다.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미 3/4이 칼빈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
제10장 2차 대각성 운동과(선교운동) 프런티어 운동
1) 제2차 각성운동과 장로교회
독립전쟁의 여파로 미국은 도덕적 타락을 겪음. 이 때 미국인들을 치료하는 운동이 프런티어 운동과 함께 일어난 제2차
대각성운동이다.
2) 교회연합 운동과 장로교회
대각성은 다른 교단들과의 연합운동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초반 미국 장로교도들은 미국에 개혁주의 신앙을 토착화시키기 위해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과 교제하는 것을 장려 - 1801년 장로교 총회가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를 통합할 계획을 세우면서
가속화됨 --> 통합계획은 복음전도를 위한 전략으로, 당시 사람들이 서남부로 이민 - 변방에서 이사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연합사업 요청.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는 모두 칼빈주의적 교리를 고백하고 예배형식도 동일.
* 죠나단 에드워즈 2세는 두 교단을 통합.
연합활동으로 많은 이들이 장로교로 돌아옴.
3) 프런티어 운동과 장로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부흥운동은 프런티어 지역에서 크게 일어남. 이 시기는 계몽주의와 자연신교, 경건주의 신학이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 이 때 아치발드 알렉산더, 존 홀트 라이스, 제임스 맥그리디에 의해 1798년과 1801년 사이에 프론티어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남.
* 제임스 맥그리디 - 1799년 켄터키의 호겐에서 그의 성도들에게 일주일에 한시간, 한 달에 하루를 기도할 것을 설교. 기도의
결과 큰 부흥. 부흥운동의 특징은 캠프 미팅으로 통나무 강단과 통나무 의자를 사용하여 천막 안에서 자면서 집회. 이 결과 주일학교 운동, 내지와
외지 '선교운동'이 일어남. 계몽주의, 합리주의는 영향력 상실.
이러한 부흥운동은 교세확장의 전환점이 됨.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에서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나 파송할 목회자의 절대 부족, 반면에
감리교회와 침례교회는 교회조직과 목회자 교육에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개척자들을 따라가며 교회를 세움.
* 컴버랜드 장로교회의 분리운동 -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에 자극 받은 사람들이 장로교회를 확장하기 위해 목사의 수준을 낮추어 수급을
원활히 할 것을 제안, 2차 각성운동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지식을 따를 때 일어난 것으므로 분쟁만 야기하는 교리적 논쟁을 지양할 것을
주장.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근거한 미국 장로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 교리를 배척하려는 시도를 보임.
** 분리운동에도 불구하고 교회연합과 대각성 운동의 결과 1800년에는 180명이던 목사의 수가 2,140명으로, 449개의 교회가
1,695개의 교회로, 2만명의 교인이 22만명으로 성장. 부흥운동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선교운동으로 발전.
* 사무엘 밀즈 - 1806년 사무엘 밀즈와 윌리엄스 대학 학생들의 선교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는 '건초더미의 서약'이 있었다.
그들은 선교에 헌신한 후에 '형제들의 선교회'를 조직. 외국 선교활동은 지원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라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1810년 '미국
해외 선교부'가 생김. 1812년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는 버마로, 루터 라이스는 아시아로 선교를 떠남 --->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장로교회 안에도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됨. 1789년까지 건초더미의 서약의 영향으로 5개 이상의 선교부가 미국에 생기게 됨. 밀즈의 선교지 연구.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주일학교 생김. 미국에 소책자 협의회가 조직되어 기독교 소개, 장로교인들의 능동적 참여.
1812년 3명의 학생으로 프린스톤 신학교가 뉴저지에 설립. 초대교수는 아치발드 알렉산더, 세무엘 밀러. 나중에 찰스 핫지 /
부흥운동을 힘입어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들이 세워짐. 1818년 어번 신학교, 1823년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 1827년 웨스턴 신학교,
1828년 컬럼비아 신학교, 1829년 레인 신학교, 1830년 매코믹 신학교, 1836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
제11장 남북전쟁과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결(도전 받는 장로교회)
1830년대의 장로교도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흑인 문제. 흑인 노예 해방문제는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에 의해 멀리 번짐.
* 피니 -
변호사, 1821년 개종. 1830-31년에 걸쳐 뉴욕주의 로체스터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킴. 인위적, 갈망석을 둠. 회심 없는 부흥은 마귀의
집회, 회심 체험 강조. "어떻게 하면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는 설교를 하는가?"(랠프 왈도 에머슨의 합리주의적 설교를 꼬집음) 피니는
노예해방을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
* 죠지 번 - 피니의 노예해방 주장을 계승. 영국 태생, 버지니아의 렉싱톤 노회에서 안수받음. 설교를 통해 노예제도의 그릇됨을
주장.
노예문제로 사회가 혼란하게 되자 교회는 입장 표명.
1787년 뉴욕 필라델피아 대회 = 회원들의 유익과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사용할 것을 권고, 1818년 장로교 총회 = 어느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모순,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도
반대된다. 문제가 심각하게 되자 1836년 총회는 이 모든 문제를 무기한 연기. 1860년대 교회 안에는 북부 중심의 즉각적인 노예폐지론과
노예제도는 성경적이라는 남부 중심으로 나뉨.
노예문제, 신학적인 문제와 선교정책의 차이는 장로교회를 혼돈 가운데로 몰아넣음.
1) 자유주의 신학의 일어남
유니온 계획에 의해 회중교회 출신의 목사들이 장로교세 확장에는 공헌했으나 상호간의 신학적 차이는
교회를 혼란으로 인도함. 스코트-아일랜드 장로교회 츨신의 목사를 중심한 보수파(Old School)는 회중교회 출신 목사를 중심한 진보파(New
School)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 (1) 칼빈주의 대신 자유로운 신학적 입장을 취함 - 교회조직, 관리, 선교활동에 있어 다른 입장. (2)
특히 선교활동에 있어 재정관리문제가 심각. 보수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따를 것과 모든 선교활동을 교단 직영으로 운영할 것을 주장.
(3) 노예문제가 교회분열을 심화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논의를 꺼림. 그러나 진보파들은 통합 계획에 대해 만족, 신학적 관용을 주장, 선교활동을
초교파적으로 시행, 노예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
2)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장로교도들의 반응
시간이 흐르면서 두 세력의 간격은 더욱 멀어짐.
1831년 피츠버그대회가 서부
해외 선교부를 조직하자 보수파는 1837년 장로교 해외 선교부를 조직해 서부 선교부 기금과 사업을 자신들의 관할 아래 두려
했다.
1835년 보수파는 교회를 순회하며 불건전한 교리의 보급과 신앙적 방종을 경고. [행위와 증거]란 소책자를 교회에
보급.
1837년에 이르러 보수파는 장로교회 안에서 5/9 이상의 다수가 되자 (1) 통합 계획을 폐지, (2) 통합계획에 의해 조직된
4개의 노회, 웨스턴 리저브 노회, 위티카 노회, 제네바 노회, 제니시 노회는 장로교 노회에 소속될 수 없다고 선언 - 진보파를 장로교회에서
제거함을 의미. 보수파는 남부와 북동부 지역을, 진보파는 북부지역을 차지하게 됨 - 이러한 교회의 분열은 미국 사회를 지리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두 교회의 적대감은 남북 전쟁의 원인을 제공.
노예문제로 시작된 장로교회의 분열은 다른 교회에게도 영향을 미쳐 1844년 침례교회가 남북으로 1845년감리교회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진보파의 장로교회 총회는 노예제도를 정죄하는 결의를 통과시킴. 남부의 소수 진보파는 북부에서 이탈하여 '연합남부 대회'를
조직.
* 가드너 스프링스 목사 - 보수파는 노예제도 인정하는 입장. 1861년 뉴욕에서 가드너 스프링스 목사가 노예폐지론을 들고 나오면서
분열운동이 가속화됨. 그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장로교회를 하나로 하기 위해서는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 가드너 스프링스의 제안은 총회에서
156대 65로 채택. 그러나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의 장로교회는 보수파에서 이탈하여 1861년 '미연방장로교회'를 조직(벤자민 팔마, 쏜
웰의 지도아래 아틀랜타의 아우구스타에 총회 - 결국 노예문제로 장로교회는 4조각으로 나뉨).
남북전쟁이 끝나고 1870년부터 화해의 무드 속에서 북부의 진보파, 보수파 모두 노예문제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어 북부의 진보파
교회와 보수파 교회는 1870년 합동 '미국 장로교회'를 조직(남부는 합동에 반대). 재결합된 북부 장로교회는 크게 부흥 --> 선교활동에
적극 참여,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듬.
19세기는 신학적인 격변의 시기
*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 미국 장로교 신학자들에게 받아 들여짐.
* 제임스 우드로우
- 성경을 진화론에 입각하여 해석하려 함.
* 찰스 브릭스 - 성경의 고등비평 사상을 미국 교회에 소개. 총회의 정죄 - 성경의 축자
영감과 무오성 선언.
제12장 20세기 장로교회(근본주의 운동과 장로교회)
20세기 전야에 미국을 특징지은 사건들
(1) 부흥운동
* 제레미야 랑페에 - 1857-1858년에 기도운동이 일어남. 1857년 6명의 동지와 기도 시작, 6개월 뒤
10,000명이 기도에 참석, 뉴욕 근처에 50만-100만명이 기독교로 돌아옴.
* D.L.Moody - 이러한 기도운동은 무디의
부흥운동으로 연결됨.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은혜를 받은 후 벤쿠버의 브리티시 아일랜드에서 부흥운동 시작, 1873-1875년 사이 시카코의
복음화를 주도, 대중집회운동 전개, 찬송과 기도 회개운동이 일어남.
* 르우벤 토리, 집시 스미스, 빌리 샌디, 빌리 그래함 - 무디의
전도운동을 계승.
(2) 사회개혁 운동 : 19세기 말의 복음주의 운동은 노예폐지 운동과 금주와 같은 사회개혁운동으로 나가게 됨. 남북전쟁으로
음주문화가 만연할 때 금주운동과 절제운동, 1895년 살롱 폐지 협의체 조직.
(3) 자유주의 운동 : 1903년 북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 - 역사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입장을 떠났음을 보여줌.
이후 북장로교회는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합동.
(4) 근본주의 운동 :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이 심해지자 신앙옹호를 위한 노력이 교회 안에서 일어남. 현대주의의 위협, 기본적
교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별로 근본주의자들은 모임을 가짐. 1909년 [근본적인 것들 - 진리의 증언]이란 책자가 나옴.
근본원리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성경의 무오성,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임박한 육체적 재림이었다.
그러나 이 입장에
서있던 근본주의자들은 전천년설 만을 바른 신앙이라 주장 - 다른 근본주의자들은 설 땅이 없게 됨.
1920년대의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구성 - 교과과정이 구시대적, 실천신학은 없고, 성서에 대한 연구도 없고, 성서비판만 강조. 교수
가운데 사변적 독일 신학에 심취한 자, 이단자들이 다수. 프린스턴은 새로운 교장을 새움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실천신학 교수였던 스티븐슨은 직무를
감당할 때 너무 독단적 학사 운영으로 많은 문제. 복음주의적이지 개혁주의가 아니었다. 이러한 가운데 그레샴 메이첸이 변증학 교수로 자리에
오르게 됨. 자유적인 총회는 스티븐슨을 지지하여 메이첸에게 압력을 가해 프린스턴을 떠나게 함.
* 그레샴 메이첸 - 프린스턴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움. 그는 C.R.C. 계통에서 교리적인 신학자를 영입하고, O.P.C. 교단을 만들었다.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를 세울
때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많은 교회들이 그를 지지하였으나 천년왕국설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보수신앙에 대한 불신을 초래. 1930년대의
웨스트민스터는 근본주의 신학의 중심지. 그러나 필라델피아 근본주의 협의회가 웨스트민스터를 비난하고 전천년설을 공식적 교리로 채택하고, 훼이스
신학교를 세워 나감으로 보수세력은 약화되었다. 천년왕국 논쟁으로 근본주의자들은 분리주의자로 인정되어 많은 이들이 자유주의 교회로 떠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