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부엌 / 한정숙
대문이 없는 우리 집은 사립 들머리 왼쪽에 퇴비가 산을 이루는 화장실과 그 옆으로 돼지우리, 오른쪽으로는 행랑채와 부엌, 나이 차가 많은 오빠가 지내던 문간방이 있었다. 안채는 정면에 앉았는데 안방을 가운데 두고 서재를 겸한 광이 왼편에, 오른편엔 오롯이 어머니의 공간인 부엌이 있었다.
나무로 짠 부엌문은 안팎으로 빗장이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과 외부 사람의 눈길을 막았다. 날이 궂고 바람이라도 불면 불꽃이 아궁이 밖으로 솟구쳐 나와 불을 지피는 사람의 눈물을 쏙 빼고 방을 데우는데도, 음식을 익히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우리 집의 부엌문은 바람도 한 번 더 막아주고, 낯선 이가 훅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문지기 노릇을 한 셈이다.
정재(부엌의 남도 방언) 문턱을 넘으면 바른 쪽에 큰 물독이 있는데 온 식구가 잠들어 있는 새벽에 일어나신 엄마는 양철 물동이를 들고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득 채우셨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항상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야 부자로 산단다.” 하셨는데 정작 물을 가득가득 채웠던 당신도 자식 넷이 큰 탈 없이 자란 것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으로 부를 누린 적은 없었다. 어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게으른 나는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모으는 것보다 쓰는 재주가 많다.
나는 부엌일을 자주 도왔다. 어렸을 때라 특별히 반찬을 만들 재주는 없어서 불을 지피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무쇠솥이 걸린 큰 아궁이엔 밥을, 양은솥이 걸린 다른 쪽엔 엄마의 주문대로 국이나 찌개를 끓였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주로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자랑하듯이 꺼냈고, 엄마는 늘 장단을 맞추며 아궁이 반대편 나무 찬장 앞에서 반찬거리를 만드셨다. 내가 안방에서 책을 읽거나 숙제할 때는 아궁이 앞에서 물어 가며 확인하셨다. 물론 칭찬 일색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친정엄마는 “우리 정숙이는 겁이 많아서 무서운 내용을 읽을 때는 소리가 작아졌어야. 6.25 전쟁 때 북한 공산군이 쳐들어 왔다는 대목을 읽을 때는 가만가만 읽더니 다른 이야기 읽을 때는 소리가 커지더라니까?” 하며 놀리기도 하셨다.
엄마는 들에서 캐온 나물이나 우리들에게 먹일 간식거리를 부엌에서 다듬고 씻으셨는데 집으로 돌아오며 따 온 신맛 나는 달콤한 꽈리와 까만 머루, 붉은 산딸기, 부드러운 삐비(삘기의 전라도 방언)는 늘 기다리는 먹거리였다. 벼가 제법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하면 풀숲에서 방아깨비와 메뚜기를 잡아와 불기운이 남은 재를 펼치고 구워 주기도 했다. 바삭하니 맛있었다. 살생을 싫어하는 어른이 된 지금이야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다. 엄마가 가져오는 간식거리가 모두 우리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논일을 갔다 오실 때 긴 막대로 풀숲을 두들겨 잡아 오는 개구리는 항상 아홉 살 아래 남동생 몫이었다. 원기소도 그랬던 것처럼.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오빠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세 살 아래 여동생과 나는 특별한 먹거리가 생기면 어린 동생에게 가려니 했고, 먹는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막둥이에게 얻어먹을 수 있는 행운이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때 맛본 구운 개구리 뒷다리는 사실 고소했다.
초가집이었던 우리는 주로 볏짚을 태워 난방을 하였는데, 밭작물 추수가 끝나면 말린 고춧대, 콩 대, 깨 대를 썼다. 볏짚은 재가 많이 나와서 싫고, 고춧대는 잘 마르지 않고 매워서 싫었다. 깨 대와 콩 대는 불기운도 좋고 탁탁 튀는 소리도 경쾌해서 재미가 있었다. 부지깽이로 요리조리 땔감을 움직이며 등 뒤에서 반찬을 만드는 엄마와는 아랑곳없이 내 세상으로 빠져드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아쉬울 뿐이었다.
콩 대를 아궁이에 넣어 밥을 할 때면 또르르 콩이 굴러 나오기도 하고 톡 튀기도 한다. 불속에서 그을려 나온 콩은 냄새도 구수하다. 제법 나이가 들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우울했던 적이 있다. 여러 차례 읽으며 공부했던 <칠보시>가 생각나서다.
자두연두기(煮豆燃荳箕)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 콩이 가마솥 안에서 눈물을 흘리네
본시동근생(本時同根生)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어찌 이리도 삶아대는가
고전 읽기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읽었던 <삼국지> 중 위나라의 시조 조조와 그의 장자 조비, 둘째 아들 조식의 이야기가 담긴 시다. 당시 조조가 문학적 재능이 출중한 조식을 총애하자 조비는 늘 동생을 경계하였다. 조조가 죽고 왕위에 오른 후에 그는 동생을 지지하던 신하들을 모두 없애고 ‘형제(兄弟)’라는 시제를 주며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죽이겠다.’ 하여 조식이 눈물을 흘리며 읊은 시다. 다행히 그 시를 듣고 조비는 매우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엄마께 들려드리자 우리가 알고 있는 전래동화 ‘의좋은 형제’로 되돌려주셨다. 참 멋쟁이 엄마다. 자신보다 보름 먼저 간 남동생의 발인 날 노제 때 애달픈 마음을 제문으로 올린 누나이니 말하면 무엇할까마는.
아궁이에서 나오는 불기운 때문이었는지 어린 시절의 부엌은 온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엄마는 늘 따뜻했을까? 부엌에 나올 일이 없었던 아버지는 엄격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2주에 한 번씩 내려와 웃음보따리를 풀고 가는 손주들을 보내고 설거지와 청소를 마친 남편은 “설하 할머니 여기 좀 보소. 어떤가? 얘들 오기 전보다 더 깨끗 하제?” 하며 공치사를 한다. 나는 엄마의 부엌에서 마지못해 빠져 나온다.
첫댓글 저도 불 많이 땟어요. 콧 구멍 속을 늘 깜했어요.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지금이 모습과 교차하면서 그려졌어요. 잘 읽었습니다.
우아로 한 몫하는 분께서 방아깨비와 메뚜기, 개구리 뒷다리까지 드셨다니 믿기 어렵네요. 하하.
아, 삐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삐비 많이 뽑아 먹었는데. 하하.
옛날이 하나도 그립지 않은데 삐비는 진짜 다시 먹어 보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여러 선생님의 글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게 큰 무쇠 솥엔 밥, 작은 양은 솥엔 국이나 찌개를 끓였다는 이야기네요.
잘 읽어 가다가
설거지와 청소를 마친 남편 이야기에 마음이 상해 버렸습니다.
아직도 부엌에 들어오지 않는 한 사람이 우리 집에 살거든요.
지난 수필집에서 자신의 흉만 동네방네 봤다고 타박하더군요.
흉도 관심이라는 걸 모르냐고 대답은 했습니다만 저도 마음이 상해 요즘은 아예 글에서 빼버렸습니다. 하하하!
제 나름의 복수죠.
시골 부엌은 다 비슷하네요. 선생님과 어머님의 대화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부엌의 과거와 현재가 다 예쁘네요. 현재가 훨씬 부럽습니다. 하하.
잘 읽었습니다.
아궁이의 온기에 가족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까지 합해져서 어린 시절이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