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15.연중 제6주 월요일 강론>
<마르8,11-13>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합니다.
4,000명 5,000명을 먹이신 기적과, 마귀를 쫒아내고, 나병을 낫게하는 기적을 행했는데도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악의를 품고 올가미를 씌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비단 신약의 하느님이신 예수님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하느님께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시험하려 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에서, 마싸의 그날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나를 떠보았다.”(시편95,8-9)
한편으로 우리는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이 세상에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창조의 선성(善性), 죄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계약, 구원을 위한 당신 아드님의 강생, 성령의 파견, 교회의 형성, 성사의 효력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인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만일 악에서 더 큰 선을 끌어낼 수 없으시다면 악이 있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은 인간들은 어떤 두려운 신비 때문에 악에서도 선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구원의 초대를 회피할 수도 있습니다. 즉 기도와 수련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해서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감이 있어야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체적으로 자신이 선택하고 긍정적이고 책임감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을 시험한 이들은 안식에, 즉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아직 약속된 구세주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약속된 구세주인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큰 악에 접하게 됩니다. 즉 하느님이신 당신을 올가미에 넣어서 죽이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통을 다 받으시고 수난하시고 죽임을 당하십니다. 하느님의 침묵과 무능이 현실로 드러나고 인간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악이 승리의 잔을 마시려던 그 때 하느님은 가장 큰 선을 끌어올리십니다. 악의 결과인 죄로 인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십니다. 이제 악의 결과인 죽음을 없애셨기에 악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세례를 통해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로 새로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양육되며 예수님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최고의 악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의 모든 에고를 예수님께서 다 당신 것으로 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이며, 당신 부활로 에고로 인한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악을 내버려두시는 것은 그 속에서 더 큰 선을 끌어내실 수 있는 전능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능함은 다름아닌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쁨 속에서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 속에서는 크게 외치십니다. 우리의 고통은 귀가 먼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확성기입니다.”(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1898~1963년), 영국의 작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에고가 하느님께 가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한다면, 이 악의 한 가운데에서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이 자존심과 에고를 비워낼 수 있는 가장 큰 기회가 됩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 숨어있는 자존심과 에고가 고통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다 튀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모습을 드러낸 자존심과 에고를 예수성심께 봉헌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악의 한 가운데에서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수련작업이 가장 빨리 끝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악역을 하는 형제자매는 다름아닌 예수님이 구원하실 또다른 우리의 이웃인 것입니다.
그 형제 자매들 덕분에 우리는 빨리 에고의 세상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알고보면 바로 나를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전능함을 얻을 수 있는, 즉 에고 작업을 그분의 전능으로 빨리 끝낼 수 있게 되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정화로 갈 것인지 아닌면 절망으로 갈 것인지 나의 선택이며 거기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Mark8,11-13>
11 The Pharisees came forward and began to argue with him, seeking from him a sign from heaven to test him.
12 He sighed from the depth of his spirit and said, "Why does this generation seek a sign? Amen, I say to you, no sign will be given to this generation."
13 Then he left them, got into the boat again, and went off to the other sh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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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17.무지개 원리7 :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역경을 축복으로 바꾼 사람들
5m의 교훈
필자는 유학시절 알프스 산으로 등산을 간 적이 있었다. 산 정상에 도달했을 때 산장이 하나 있었는데, 산장에서 5m 떨어진 곳에 십자가가 있었다. 그 십자가에 얽힌 사연은 다음고 같다.
한 등산가가 알프스 산을 오르다가 심한 눈보라를 만났다. 그는 산 정상에 가면 산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눈보라를 뚫고 정상에 오를 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가 져서 어둠가지 내렸다. 그는 점점 심해지는 눈보라를 맞으면 어둠 속을 걸었으나 가도가도 산장이 나오지 않았다. 1m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헤매던 그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절망하게 되었고, 결국 그 자리에서 모든 것(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87)/
을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다음날 눈보라가 걷힌 다음, 사람들은 길가에서 얼어죽은 등산가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가 얼어죽은 장소는 바로 산장에서 5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만일 그가 눈보라와 어둠의 고난 속에서도 5m만 더 갔더라면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을 절망에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고난이 닥쳐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하곤 한다.
“5m만 더 가자!”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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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데도, 왜 악을 저지하지 않으신가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이 악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오로지 그것으로부터 더 좋은 일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309-314, 324]
“의미 없는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언제나 하느님의 지혜에 근거합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하느님은 우리의 기쁨 속에서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 속에서는 크게 외치십니다. 우리의 고통은 귀가 먼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확성기입니다.”(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1898~1963년), 영국의 작가,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신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당신 아버지에게 여쭈셨습니다.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27,46). 악과 관련된 많은 일들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하느님은 전적으로 선하심으로, 결코 악의 원흉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훌륭하게 창조하셨지만, 세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격변과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으며 세상은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소위 물리적인 악이 존재합니다. 선천적인 장애나 자연재해가 이에 해당되는데, 하느님의 자비로움에비추어 볼 때 이러한 악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반해 도덕적인 악은 자유를 남용한 결과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소년병과 자살 테러, 강제 수용소와 같은 ‘지상의 지옥’은 대부분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결정적인 문제는 ‘이렇게나 많은 악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선하신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정과 이성을 지닌 인간이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견뎌 낼 수 있겠는가?’ 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악에서 시작된 것은 없으며 악으로 끝나는 것도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악으로(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64)/
부터 최고의 선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최후 심판 때 모든 불의. 에 종지부를 찍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도래할 세상의 삶에는 더 이상 악이 존재할 자리가 없으며, 고통도 끝날 것입니다.->40, 286-287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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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 그리고 악의 문제
->309 만일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이 질문에 그 어떤 성급한 대답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창조의 선성(善性), 죄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계약, 구원을 위한 당신 아드님의 강생, 성령의 파견, 교회의 형성, 성사의 효력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두려운 신비 때문에 이 초대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어느 모로든 악에 대한 대답 아닌 것이 없다.
->310 하느님께서는 왜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나 무로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수 있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 q. 25, a. 6: Ed Leon. 4, 298-299참조). 그러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50)/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 로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하셨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이러한 변화는 어떤 존재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존재들의 소멸을, 더 완전한 것과 더불어 덜 완전한 것을, 자연의 건설과 더불어 파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그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리적 선은 물리적 악과 공존한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이교도 논박’, 3, 71: Ed Leon. 14, 209-211 참조)
->311 지성과 자유를 지닌 피조물인 천사와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과, 더 나은 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들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릇된 길을 갈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은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물리적 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대한 윤리적 악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윤리적 악의 원인일 수 없다(성 아우구스티노, ‘자유 의지론’, 1, 1, 1: CCL29, 211(PL 32, 1221-1223);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1-2, q. 79, a. 1: Ed. Leon. 7, 76-77 참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여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악에서 선을 끌어 내신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최상의 선이시므로, 만일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신 충분한 능력과 선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당신의 피조물들 안에 어떠한 악도 존재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 ‘교리 요강, 신앙과 희망과 사랑’, 3, 11: CCL 46, 53(PL 40, 236))
->312 이리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능하신 섭리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서 야기된 악의 결과에서, 물론 윤리적 악의 결과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51)/
되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창세45,8; 50,20)(토비2,12-18(대중라틴말성서) 참조). 이제까지 저지른 가장 큰 윤리악은 모든 인간의 죄로 일어난 하느님 아들의 배척과 살해였다. 이 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풍성한 은총으로(로마5,20 참조)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을 끌어 내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313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성인들도 이것이 사실임을 계속 증언해 왔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자신들에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 문제를 삼고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오며, 모든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목적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십니다.”(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대화’, 138: G. Cavallini 편(로마 1995), 441면)
성 토마스 모어는 순교를 앞두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딸을 위로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비록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 눈에 매우 나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이다.”(마르가리타 로퍼, ‘알링톤의 알리치아에게 보낸 편지’(1534.8): ‘토마스 모어 경의 서신’, E. F. Rogers 편(프린스턴 1947), 531-532면)
또 노리치의 줄리언 여사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하며,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다 선하리라는 사실도 굳게 믿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52)/
당신도 모든 일이 선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노리치의 줄리언, ‘하느님 사랑의 계시’ 13, 32: ‘노리치의 줄리언에게 바치는 책’, E. Colledge-J. Walsh 편, 2권(토론토 1978), 426면과 422면)
->314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그 섭리의 길을 알 수가 없다. 종말에, 우리의 부분적인 인식이 끝나고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1코린13,12) 보게 될 때, 비로소 이러한 길을 완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 심지어 악과 죄의 비극을 통해서 까지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결정적인 안식(Sabbath)으로(창세2,2 참조) 이끄신다. 이 결정적인 안식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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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말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우리는 단지 피조물들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인식과 사고의 한계를 가진 인간적 방식으로만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56)/
->286 인간의 지성이 이미 기원에 대한 답을 찾아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는, 비록 종종 모호하거나 오류로 왜곡될 수도 있지만, 인간 이성의 빛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업적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계시에 대하여’, c. 1: DS 3026 참조). 그러므로 신앙은 이러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39)/
있도록 이성을 비추어 주고 견고하게 한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히브11,3).
->287 창조의 진리는 모든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므로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이, 이 주제에 대해 깨닫는 데 유익한 모든 것을 당신 백성에게 계시하고자 하셨다. 모든 인간이 창조주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지식을 넘어서서(사도17,24-29; 로마1,19-20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창조의 신비를 점진적으로 계시하셨다. 성조들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들을 선택하시어 당신 백성으로 만드신(이사43,1 참조) 그분께서, 땅의 모든 백성과 온 땅이 당신에게 속해 있으며, 당신 홀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시편113[115],15; 123[124],8; 133[134],3)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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