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나 문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본의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년)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일본의 문화적 상징이 칼을 든 무사인 사무라이고, 그 칼을 쓰는 법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친 검객이 무사시인 관계로 그만큼 일본의 전통 문화와 역사에서 무사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사시가 썼다는 책인 오륜서(五輪書)는 아직도 일본의 많은 학생과 직장인들이 즐겨 읽는 베스트셀러로 남아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이 상세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관련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선 무사시는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와 1614년 겨울에 벌어진 오사카 겨울의 전투와 1615년 여름에 벌어진 오사카 여름의 전투, 그리고 1637년에 벌어진 시마바라(島原)의 난 등 6번의 대규모 전투에 참가했으나 승리를 증명하는 증명서인 감장(感状)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간죠란 전투에 실제로 참가하여 무공을 세운 군인한테 장수가 주는 표창장인데, 이런 표창장을 대규모 전투에 6번이나 참전했으면서 한 번도 못 받았다면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설마하니 무사시 반대편의 적군들이 무사시한테 공적을 주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그만 피해서 다녔다고 봐야 할까요?
무사시가 소설이나 영화 같은 대중 매체에서 마치 귀신 같이 무시무시한 검술을 지닌 초인처럼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그의 검술이나 싸움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고 봐야 적합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대해 무사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무사시는 사실 출세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검술을 통해 도를 닦고 정신 수양을 하려는 사람이었다.”라고 반박하기도 하지만, 도를 닦고 정신 수양을 하려는 사람이 무엇하러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험한 전쟁터에 6번이나 참전했을까요?
게다가 무사시가 출세에 관심이 없다는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무사시는 그의 나이 56세가 되던 해인 1640년, 구마모토 번의 영주인 호소카와 다다도시(細川忠利 1586~1641년)를 찾아가서 관직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또한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 이력에 관련된 내용도 의문투성입니다. 그가 오카야마현(岡山縣) 오하라쵸(大原町)에서 태어났다거나 아니면 효고현(兵庫縣) 타이시쵸(太子町)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명색이 일본을 대표한다는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 고향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신세인 것입니다.
아울러 무사시는 정정당당한 대결이 아니라, 검술 시합에 일부러 늦게 오는 지각을 해서 상대방의 긴장감을 늦추게 하는 치사한 전략까지 썼습니다.
한 예로 무사시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숙명의 라이벌인 사사키 고지로(佐佐木 小次郞)가 무사시와 싸운 이른바 간류지마의 결투 때, 무사시는 예정된 시각보다 일부러 2시간이나 늦게 나타나는 비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누마타가기(沼田家記)라는 문헌과 간류지마 현지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무사시가 고지로를 이기자 무사시의 제자 4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고지로를 죽였다는 내용까지 언급됩니다.
아울러 무사시가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고수들을 만나 모두 싸워서 이겼다는 내용들 또한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승리를 주장하는 근거들이 대부분 오륜서나 이천기(二天記), 무공전(武公伝) 같이 무사시를 찬양하는 자들이 쓴 일방적인 기록들 뿐입니다.
한 예로 무사시의 양아들인 이오리는 1654년에 세운 고쿠라 비문(小倉碑文)에서 자신의 양아버지이자 스승인 무사시가 쇼군한테 검술을 가르칠 만큼 뛰어난 검술을 지닌 요시오카 가문과 대결을 벌여 요시오카 가문의 주인인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비롯하여 무려 70여 명의 요시오카 가문 제자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고 기록했으나, 이는 고쿠라 비문이나 무사시를 찬양하는 자들이 남긴 기록에서만 발견될 뿐, 다른 문헌이나 유적에서는 전혀 그러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본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대중들이 갖고 있는 천하무적의 검객 무사시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이는 일본의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1935년 8월부터 1939년 7월까지 일본 아사히 신문에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연재하면서, 무사시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별로 없자 자신의 상상력으로 흥미 위주의 내용들을 창작하여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마구 덧붙여서 각색한 것이 큰 인기를 끌면서부터였습니다.
결국 오늘날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미지는 다분히 소설가가 만들어낸 허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출처: 일본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262쪽
첫댓글 쪽발이들의 신격화 쑈는 자격지심의 디엔에이에 깊이깊이 박힌 열등의식에 기인...툭하면 자민족의 약간의 성과에도 과장, 과대, 영웅, 신격화로 포장하여 열광, 발광해대는 기괴한 민족성이 있죠•~그영향으로 쪽국 아류 쥐신라멘국 쥐혁거세의 닭알 탄생신화 개뻥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