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Leonard Newman (1925.1.26~2008.9.26)
폴 뉴먼은 195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60년, 70년대로 연기경력을 성공적으로 이어나간 몇 안되는
배우였다. 그의 반항적인 태도와 연기특징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꽤 번듯한 스포츠용품점 아들로 태어
난 폴 뉴먼은 어린 시절부터 연기에 흥미를 보였다. 모친의 후원아래 그는 학교 연극 '로빈후드'에 출연한
다. 오하이오 대학에 잠시 다니다가 해군에 입대해 태평양 전쟁에 잠시 몸을 담는다. 해군 비행조종사 프로
그램에 보내지지만 색맹으로 판정되어 어뢰사수로 복무하고 1945년 봄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USS 벙커힐
함선에서 복무한다. 제대후 예일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나중에는 리 스트라스버그의 액터즈 스튜디오
에 들어간다. '피크닉'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한 그는 1954년 '은술잔'으로 영화에 진출한다. 그는
액터즈 스튜디오 동기생인 제임스 딘과 연결되지 않은 인연이 닿아있다. 1955년에는 '에덴의 동쪽'에 동생
인 아론 역을 위해 제임스 딘과 함께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다. 제임스 딘은 형인 칼 역으로 출세길에 오르지
만 폴 뉴먼은 배역을 얻지 못했다. 1956년에는 제임스 딘의 사망으로 '상처 뿐인 영광'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해 뉴먼은 에바 마리 세인트, 프랭크 시나트라와 TV극 'Our Town'에도 출연한다.
East of eden에서 James Dean과 함께
1956 Somebody up there likes me(상처뿐인 영광)
폴 뉴먼은 195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60년, 70년대로 연기경력을 성공적으로 이어나간 몇 안되는
배우였다. 그의 반항적인 태도와 연기특징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꽤 번듯한 스포츠용품점 아들로 태어
난 폴 뉴먼은 어린 시절부터 연기에 흥미를 보였다. 모친의 후원아래 그는 학교 연극 '로빈후드'에 출연한
다. 오하이오 대학에 잠시 다니다가 해군에 입대해 태평양 전쟁에 잠시 몸을 담는다. 해군 비행조종사 프로
그램에 보내지지만 색맹으로 판정되어 어뢰사수로 복무하고 1945년 봄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USS 벙커힐
함선에서 복무한다. 제대후 예일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나중에는 리 스트라스버그의 액터즈 스튜디오
에 들어간다.
'피크닉'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한 그는 1954년 '은술잔'으로 영화에 진출한다. 그는 액터즈 스튜디오
동기생인 제임스 딘과 연결되지 않은 인연이 닿아있다. 1955년에는 '에덴의 동쪽'에 동생인 아론 역을
위해 제임스 딘과 함께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다. 제임스 딘은 형인 칼 역으로 출세길에 오르지만 폴 뉴먼은
배역을 얻지 못했다. 1956년에는 제임스 딘의 사망으로 '상처 뿐인 영광'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해 뉴먼은
에바 마리 세인트, 프랭크 시나트라와 TV극 'Our Town'에도 출연한다.
해군에 복무했던 시절
1956. Frank Sinatra와 함께 출연했던 TV드라마 "Our Town"에서
상처 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 1956)은 폴 뉴먼이 최초로 주연을 맡은 영화이며 그의
출세작으로 미들급 세계 챔피언 록키 그라지아노의 일대기를 그렸다. 아버지로부터 학대받던 어린
시절, 거리의 불량배로 전전하다가 범죄자로 교도소에 들어간다.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반항적 태도로
일관하던 그는 출소후 육군에 입대하지만 그것마저 견디지 못하고 탈영한다. 오직 돈을 위해 권투선수가
된 그는 뜻밖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며 6연승을 거둔다. 그의 연승가도를 발목잡은 것은
육군 탈영병의 신분. 불명예 제대와 1년간의 노역장 샹활을 마치고 다시 권투선수로 복귀한 그는 여동생
친구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이르른다. 새출발한 그는 연승가도를 달리고 드디어 타이틀 매치
까지 오르지만, 감옥 동료로부터 시합에 지지않으면 추악한 과거의 행적을 언론에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받는다. 타이틀을 놓칠 수도, 협박에 굴복할 수도 없는 그는 부상을 핑계로 시합을 포기한다.
원래 제임스 딘을 출연시킬 예정이었던 이 작품은 그의 교통사고-사망으로 인해 막판에 무명의 폴 뉴먼으로
교체되었다. 후일, 그에 대해 맹렬한 경쟁의식을 보였던 라이벌 스티브 맥퀸이 단역으로 출연한다.
상처 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 1956)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 1958)는 테네시 윌리엄즈의 희곡을 영화화했다.
미식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브릭은 사고로 인해 삐뚤어진 성격과 육체적 결함으로 아름다운 아내의 욕망
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남부의 대부호인 아버지가 죽음에 임박한 사실이 알려지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재산상속 문제를 놓고 긴장이 고조된다. 매기역을 맡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역에 라나 터너와 그레이스 켈
리가 출연할 뻔 했다 1958년도 박스 오피스 10위 안에 드는 큰 성공을 거뒀다.
영화계 데뷔후 불과 4년만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주역으로 연기호흡을 맞추고
아카데미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니, 제임스 딘의 사망으로 낙담했던 헐리우드와 일반 영화팬들이 새로운
연기파 배우 폴 뉴먼의 등장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있었던 것인지 짐작이 간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 1958)
'길고 무더운 여름'은 한 젊은이와 그의 야망에 호감을 느끼고 가문을 키우려는 지역유지와 그의 두 딸, 젊은
이의 정부 사이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촬영 후 폴 뉴먼은 상대역으로 출연한 조안 우드워즈와 결혼
한다. 마틴 리트 감독. 오손 웰즈, 리 래믹 출연. 칸느 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 수상작.
'영광의 탈출'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이어진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귀국에 관련된 사건을 그렸
다. 2차대전 종전후인 1947년, 수천 명의 유태인들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처리문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고심하던 영국은 그들을 키프로스의 수용소에 억류한다. 영국군 장교출신 유태인인 주인공이 수용소에
잠입해 동포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엑소더스'호라는 화물선에 2,800명의 유태
인을 몰래 실어 출항하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영국은 배를 정선시킨채 그들을 하선시키려 한다. 수천명의
유태인들은 100시간에 걸친 단식투쟁을 벌이고, 결국 국제사회의 관심을 촉발시킴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향한다. '엑소더스'는 성경 속의 '출애급기'를 뜻한다. 이 영화의 강한 정치색으로 인해
폴 뉴먼은 이후 아랍국가들로부터 블랙 리스트에 오를 정도였다. 영화보다는 오히려 아카데미 작곡상을
받은 주제곡이 더 유명하다. 에바 마리 세인트, 랄프 리차드슨 외 출연.
영광의 탈출 Exodus 1960
조지 로이힐 감독과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가 첫번 째로 호흡을 맞춘 콤비영화. 1890년대를 무대로 은행
강도를 일삼던 실존인물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범죄행각을 그렸다. 두 주인공은 스스로 범죄에 대한
죄책감이 없으며, 이를 또한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소영웅적인 그들의 행각은 차라리 낭만적이기까
지 하다. 보안관에게 쫒기던 그들은 새로운 신천지 볼리비아로 무대를 옮기지만 결국 최후가 다가온다.
주인공 둘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엔딩을 스톱모션으로 처리해 여운을 길게 남겨줬다.
후일, 정무문(1972)에서 이소룡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들의 총탄 세례 속에 뛰어드는
라스트를 보면서 이 영화가 떠올랐다. 1960년대 후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를 필두로 낙관적 낭만
주의에 영합하던 대중영화에 실존적 스토리를 바탕으로 사회적 비판을 가하고자 했던 아메리칸 뉴시네마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영화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최고의 콤비를 탄생시킨 이 영화는 아마
도 최고의 버디 무비라 할 만하지 않을까. 애인마저 공유를 했으니 말이다. 폴 뉴먼이 캐서린 로스와
자전거를 타는 코믹한 장면을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비롯해 모두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에서
대공황 시절, 지방 소도시의 사기꾼 건달인 후커는 동료들과 멋지게 한 건을 올린다. 그러나, 그 거액은
시카고의 악명높은 갱단 두목 로네간에게 가야할 돈이었다. 엉겁결에 호랑이 코털을 건드려버린 것.
거액을 손에 거머쥔 동료는 손을 씼고 새출발을 하려하지만, 갱단이 보낸 히트맨에게 죽음을 당하고
후커마저 부패경찰관에게 협박을 당한다. 가짜수표를 써주고 시카고로 도망친 그는 곤돌프를 찾아가
갱단 두목에 대한 복수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69년 조지 로이힐 감독의 '내일을 향해 쏴라'로 멋진 단짝
연기를 보였던 로버트 레드포드와 기가 막힌 호흡을 보여준다. 뭔가 좀 엉성한듯 하면서도 예술적 경기에
이른 두 사람의 대담한 사기행각은 관객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영화 전체를 파트별로 소제목을 달아
구분함으로써 연극적 전개 형식을 땄다. 로버트 쇼가 뒷통수를 제대로 얻어맞는 갱 두목으로 나온다.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영화의 인기와 함께 마빈 햄리쉬의
오리지널 주제곡이 한참 유행을 탔다.
스팅 (sting 1973)
재난영화를 꼽자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타워링'이다. 샌 프란시스코의 스카이라인을 일거에 바꿔놓은
140층짜리 초고층 빌딩의 개막준비가 한창이다. 폴 뉴만은 자신이 설계한 이 빌딩이 불량배선을 쓴 것을
확인하고 재시공 할 것을 경고한다. 개막식은 강행되고 결국 화재가 발생한다. 화마에 휩싸인 세계최고
빌딩의 진화에 용감무쌍한 소방대장 스티브 맥퀸이 도전한다.
'포세이돈 어드벤쳐'로 재난영화에 크게 재미를 붙인 워너 브라더즈사는 이번엔 '물' 대신 '불'을 택했다.
그런데, 20세기 폭스사의 제작자 어윈 알렌이 비슷한 소재의 판권을 구입함에 따라 두 영화사는 경쟁을
하느니 서로 힘을 합치기로 합의함으로써 이 영화는 양대 영화사의 최초이자 마지막 합작 영화로 기록됐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영화는 출발부터 초대작의 길을 걸었다. 스티브 맥퀸, 폴 뉴만, 페이 다나웨이, 리차드
챔벌레인, 로버트 본, 로버트 와그너를 비롯해 윌리엄 홀덴, 프레드 아스테어, 제니퍼 존스 같은 올드 배우
들이 총투입됐다. '포세이돈 어드벤쳐'에 이어 모린 맥거번이 이번에도 주제가 'We May never Love Like
This Again'을 불렀다. 아카데미 촬영상과 편집상, 주제가상을 받았다.
원래, 소방대장역은 작은 배역이었고 어네스트 보그나인이 맡을 예정이었다. 이 영화의 중심 인물이며 영웅
역할을 할 배역은 어디까지나 건축가였고, 그것을 스티브 맥퀸에게 맡길 예정이었지만 맥퀸은 엉뚱하게도
소방대장역을 하겠다고 나섰다. 따라서, 소방대장이 영화의 중심인물로 커지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비중이
줄어든 건축가 역에는 폴 뉴먼이 사인을 했다. 주연배우 두 명의 출연료는 각각 1백만 달러와 흥행수익의
7.5% 배분 조건이었다. 영화 외적으로도 팽팽한 자존심 경쟁을 벌이던 두 톱스타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제작진은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둘에게 똑같은 분량의 대사를 맡겨야 했고,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에
누구의 이름이 먼저 나오느냐, 영화 포스터에는 누구의 얼굴을 먼저 싣느냐는 문제를 놓고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다. 1956년 폴 뉴먼의 출세작 '상처 뿐인 영광'에서 이름도 없는 단역으로
잠시 얼굴을 비쳤던 스티브 맥퀸, 참으로 많이 컸다.
타워링 에서 (The Towering Inferno,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