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주화백작품(고독한 여인)
표구제외 싸이즈 63cmx36cm
출생1910년 2월 17일
사망1994년 6월 2일사망
본명은 박성규(朴性圭).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청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30년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1935년에 도쿄의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를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서울에서 시적(詩的)인 표현의 파스텔화 개인전을 수차례 가졌으나 이 시기의 작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광복 직후 조선조형예술동맹(朝鮮造形藝術同盟)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935년 매일신보 문화부 기자로 취직한 후 도쿄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1945년 귀국하였다. 1946년 삽화만화가들(이승만, 윤희순, 김규택, 정현웅, 안석주, 김용환, 조병덕, 한홍택 등)과 함께 소묵회(小墨會)를 조직했고, 1950년에는 김환기, 유영국, 남관, 김병기, 손응성 등과 50년협회 결성에 추천회원으로 참여했다. 1952년 U.N. 군사령부 전속화가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후에 그는 이쾌대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립적인 성향의 조선미술문화협회에 참가하였다. 이후 1950년에는 국전의 아카데미즘과 재야 단체들의 이데올로기 논쟁으로부터 벗어나 “민족 미술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미술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새로운 우리미술을 재건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계열의 중견작가들로 결성된 50년 미술협회에도 가입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구체적인 활동은 펼치지 못했다.
1972년 미국 인디애나주의 셀던 스워프 아트 갤러리(Sheldon Swope Art Gallery)에서 한차례 개인전을 연 뒤, 1975년 20여 년간의 일본생활을 접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이 시기 박일주(朴一舟)로 개명하였고, 1959년까띠아 그라노프 갤러리(Galerie Katia Granoff)의 전속 화가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는 일본의 전통적 칠공예(漆工藝) 그림처럼 광택이 나게 그린 특이한 장식적 기법의 세미한 여인상 등을 집중적으로 연작하며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실현시켰다. 그 여인상들은 어릴 적 어머니를 생각하여 그린 것이라는 작가의 말 대로, 한국 여성의 아리따운 얼굴 모양에 흰 옷과 더러는 붉은 치마의 모습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었박일주, 그의 예술적 세계
- 마리-엘렌 브뤼이어(Marie-Helene Breuil)/뚜르 에꼴 데 보 자르 교수
박일주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꿈과 추억에 대해 표현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시대의 실제 예술 경향 밖에 있어서 그의 작품을 무엇으로 규정지으려는 것은 무리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에서 소재와 형태, 방식을 찾아내는데 익숙해지면 그것들이 극동문화로부터 기원된 것임을 알게 된다. 전통적으로 풍경화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보여주는 훌륭한 장소이다. 여기서 인간적인 면모는, 바탕을 뚜렷이 드러나게 하는 하얀 윤곽이나 뒤틀어진 자태에 항상 보이고, 금빛, 연보라, 빨강의 꽃이나 잎사귀에 나타난다. 환상적인 자연 속에 있는 여성 , 자연 속의 환상적인 여성이 서로를 향해 어우러져 있다. 그의 작품에는 그림 같은 성이 산재되어 있고 그 성에는 번쩍거림이 있는데, 이 나전칠기에 가까운 번쩍거림은 진주 빛과 금빛, 검은빛에서 느끼는 감탄과 동 일하다.
작품에서 나오는 인상은 영원히 꽃이 지지 않는 에덴동산과 같다. 보티첼 리의 「봄」과 똑같이 만발한 꽃, 똑같이 이상적인 자연,.게다가 신비로운 얼 굴로 둘 셋씩 짝을 지어 발끝으로 사뿐히 춤추는 자연의 힘, 아름다움의 화 신들을 다시 발견한다.
어쩌면 이것은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의 회복에 관한 것일 수 있다. 내가 박일주에게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어디서 나왔는지 묻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라고 했다. 추억은 그의 환상의 양식이 되었으며 향수로만 남아있진 않다. 추억은 단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되찾아진 시간이다. 영원히 우리 시대에 놓여진 그의 작품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 을까.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적인 시각에는 반대되는 것이다. 시기 가 나눠지고 미술작품이 그 시대보다 진보적이거나 복고적이거나, 또다시 진보의 방향으로 행하는 것으로 그 시대의 구분에 따라 구분되는 실제적인 작품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시대적으로 이러한 의식 위에서 완전히 합당한 것이다 즉 작품이 그 시대에 포함되면 바로 역사적 의미를 띄게되는 것이 다.
박일주의 작품에서는 시대가 존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외떨어져 있다. 그는 작품에다 날짜를 기록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같은 소재를 다루고, 반복속에서 변화를 찾는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세 가지 시기와 세 가지 방식의 점진적인 변화를 본다.
그들은 소재의 사용을 기준으로 먹이 수채화에 여전히 사용되고, 여백이 풍경화에서 수평선을 암시하던 때를 우선시한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스타일이 전적으로 한정되었는데, 꼭 밤의 의미로 써만이 아닌 검은색이, 배경을 장악하고, 공간을 가득 채우곤 있다. 구도는 항상 완벽한 짜임새를 보여주는데, 반원형을 이루는 잎사귀나 꽃들은 천상 의 궁륭처럼 보여진다 나무줄기는 굵고, 꾸불꾸불하며 육중하다. 어떤 가 지들은 화면에서 돌출 되어 나오며 , 깊이는 빛을 동반한 여러 가지 단색으로 화면 뒤에서 배어 나온다. 일반적인 형태들은 더 양식화 되어있다.
더 최근의 작품 속엔 공간이 더 넓어지고 더 짙어졌으며, 검은색이 여전히 강하게 차지하고 있고 색깔이 덜 화려해지고 더 투명해졌다. 나뭇잎들의 양이 줄어들고, 나무는 더 가늘어지며 더 메말라있다. 하얗게 표현된 나무 줄기는 공간을 변화시키는 거리감 안에서 빛을 부여하여 오묘함을 더해주 면서 또한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채색한 효과는 옻칠에 가깝게 보이지만, 그 안의 기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구성에서 석고로 덮인 두꺼운 마분지 판 위에 연필로 공들여서 데생 한다. 그 다음에 여인들의 모습이나 자연적인 소재들과 같은 부분을 놓아 둔 채 나머지 모든 배경을 먹으로 채운다. 그리고 난 다음 데생한 부분을 수채화로 부각시킨다. 채색은 섬세하고 나뭇잎은 가벼운 터치로 되어있으 며 , 인물들 위에는 투명한 갈색 조로 옷주름과 세밀한 부분 묘사가 이루어져 특별한 관능성을 부여한다. 제작은 길고 세심하며, 작업장은 정밀화가의 것과 같다. 낮은 테이블 위에 놓인 판에 기대어 화가는 세밀한 부분에 집중 하는데, 데생이나 소재를 마무리한 다음 그 위에 금분을 사용하여 그리는 데, 이 재료만이 먹 위에 유일하게 착색될 수 있는 것이다. 금분은 물감처 럼 쓰이고 이것은 나전칠기에서 금가루를 옻칠 위에 사용하는 기법인데, 작가의 의도에 따라 흩어지는 느낌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 다음 먹빛 바탕을 긁어내는 세밀한 작업을 하고 마지막 덧칠은 검은 빛을 아주 특별히 반짝이게 하는 구아쉬로 하는 니스칠에 있다. 이 기법은 그만의 유일한 것이다. 작가는 1950년대 초반부터 이 기법을 지속적으로 실험해 왔다.
이 덧칠은 먹을 사용한 어떤 풍경화의 종류처럼 먼저 구상되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만의 특유한 것으로 굳어졌다. 검정색은 더 두드러졌고, 붓의 변화에 의한 것보다 외부로부터의 것에 의해 형태를 뚜렷이 한다. 이 기법과 동시에 여인상의 어떤 유형이 나타난다. 1952-53 년의 몇몇 데생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작품들에는 결정적으로 12 명정도의 모델이 고정적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끊임없이 반복된 여성상을 상세한 형태로 만들어준 것이다. 즉 여인들은 둥글고 작은 머리와 가는 팔, 다리를 갖고, 한국의 정통 의상인 한복을 입었으며, 풍만한 가슴과 관능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홀로 또는 여럿이서 등장한 여인들은 오늘날까지 모든 구도속에 나타난다.
나무 또한 박일주의 미술에서 반복되는 소재이다. 이는 귀한 고목에 숭배의 뜻을 표현하는 한국의 토속신앙에 관한 것으로, 나무 밑에서 옷을 벗는 작품이 주는 여인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토속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키낟. 또 다를 소재로는 벗꽃나무의 가지, 새, 독수리 그리고 십장생 중의 하나인 학이 있는데 이들은 시와 회화의 전통 주제이다.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인들을 통해 우리에게 술과 취기의 신 디오니소스 행열에서의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서람, 취한 사람의 취기를 다시 생각하게 하며 또한 끈달린 술병, 쟁반위에 놓인 술병, 손에 든 술병, 바닥에 놓인 술병을 통해 뚜렷이 취기를 보인다. 이 취기는 관능미의 또다른 표현이고 조개무리들 또한 이를 뚜렷이 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다.
시대성을 초월한 환상적인 화면들은 1986년에 잠시 귀국하여 서울 예총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을 통해 처음 알려져 주목을 끌었다. 그 뒤 1993년까지 국내에서 몇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1994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유해를 청도에 안장하였다.
박일주 회화에 대하여
- 강 월 도 /한성대 교수
박일주는 한국 화가이다. 그는 50대 후반이다. 젊은 시절 그는 일본 동경에서 서구식 회화를 공부하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국내의 몇 안 되 는 유수의 파스텔화가로 알려졌다. 동란 중에(1952) 그는 동경으로 가서 약 20 여 년을 머물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팔거나 전시하고자 하는 어떤 노력도 않은 체 작품에 몰두해 왔다. 그는 그의 회화의 양식이나 매체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를 통해 왔다.
그의 가장 최근의 회화는 대략 16×24인치 크기의 특별한 "스크레퍼 판"(scraper board)에 구아쉬(gouache)로 그렸다.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섬세한 결과에 압도된다. 이는 그의 유일한 관점을 보여주기 위한 장인의 대작임에 분명하다.
그의 그림들에서 그의 색채는 진한 먹 검정과 대비되는 색칠하지 않은 흰색의 배경 위에 펼쳐 있다. 이 두 대조의 색깔은 낮의 밝음과 밤의 어두움으로 캔버스 위에서 무시간적 추상성을 보이는 듯하다. 이 색깔들은 비어드스래이(Beardsley)의 스케치에서 보이는 흰색과 검정 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 색깔은 동양전통의 칠기 작품의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인상은 나무와 새들을 그들의 '발가벗은' 형태로 - 마치 그것들이 칠기바탕에 새겨졌듯이 - 그리는 데에 더욱 강조된다. 아마 여인들의 형태를 제외하고, 이 그림들의 소재의 대부분은, 중국 과 한국 동양화의 보편적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부 화면 에서 이 그림들은 우리에게 보아쉬(Bosch)의 회화를 생각나게 한다.
보니첼리(Botticelli)의 그림에 드러나는 여인들과 같은 여인의 자태 는 선녀의 정수로 천상의 선녀들이라 할까. 그들은 축제적 분위기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농촌 처녀의 관능적 변모들이다. 그들의 둔 부나 허리곡선 그리고 가슴은 그들이 더 유럽식 외모를 하고 있으나 그들의 눈은 동양적이다.
이 회화들은 동양적 신화나 상상력의 전통에 다분히 뿌리내리고 있 다. 동시에 이 회화들은 서구 전통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 대의 한국, 일본, 중국 서양화가의 대부분의 작품이 서양화라는 뜻에 서는 그의 작품은 서구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박일주의 회화의 유일한 정제미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197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