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 2장 8절 – 20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셨을 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나아가는 자들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였던 사도바울도 다맥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영광의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셨을 때 사도바울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것도 열심을 가지고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 전통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통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배웠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아나니야를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때 사도바울은 그가 생명처럼 여겼던 전통을 붙잡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그 때까지 그렇게 신조처럼 여겼던 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전통을 버렸고 예수님의 뜻과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헌신이란 하나님의 행하심이 실재가 될 수 있도록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온전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헌신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역사하시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노아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셨을 때 노아는 오랜 세월 동안 오직 방주를 짓는 일에 몰두 하였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노아를 험담하고 정신병자취급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노아는 방주짓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노아처럼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시면 좌면우고하지 하지 않고 그 뜻과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은 자라고 하십니다. 이런 자들의 공통점은 뒤를 돌아 보지 않습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이 뜻과 목적을 보이셔도 그 뜻과 목적이 성취되는 자리로 나아가기 보다 자기가 치르어야 할 대가를 생각하므로 주저합니다. 이런 자들은 뒤를 돌아 보는 자들로서 일꾼으로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일꾼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그 일로 이끌기 위해서 복이라고 하는 것을 사용합니다. 복받으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태도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대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면 족하다는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나심의 기쁜 소식을 제일먼저 듣는 영광을 하나님은 제사장이나 권세자나 바리새인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은 대가를 생가하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궁전에 와서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에 나셨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미칠 화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주나심의 기쁜 소식을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성전에서 쓰는 짐승들을 키우는 목자들에게 주나심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양떼들을 목동들에게 맡겨두고 인도하시는 자리로 갑니다. 이 목동들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알면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