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 시절
평안도 철산군 산골마을에 배무룡이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본디 향반으로 좌수를 지냈을 정도로
성품이 매우 순후하고 가산이 넉넉하여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다만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으므로 부부는 매양 슬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 장씨가 몸이 곤하여 침상을 의지하고 조는 동안,
문득 한 선관이 하늘에서 내려와 꽃 한 송이를 주기에
부인이 받으려 할 때 홀연 회오리바람이 일며
그 꽃이 변하여 한 선녀가 되어 완연히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오는지라.
부인이 놀라 깨어 보니 남가일몽이었다.
부인이 좌수를 향하여 꿈 이야기를 하며 괴이하게 여겼다.
좌수가 이 말을 듣고, "우리의 무자함을 하늘이 불쌍히 여기사 귀자를 점지하심이오." 하며,
서로 기뻐하였다.
과연 그 날부터 태기가 있어
십 삭이 차매, 하루는 밤중에 향기가 진동하더니 순산하여 옥녀를 낳았다.
아기의 용모와 기질이 특이하여 좌수 부부는
크게 사랑하며 이름을 장화라 짓고 장중 보옥같이 길렀다.
☆☆☆
장화가 두어 살이 되면서 장씨 또다시 태기가 있었다.
좌수 부부는 주야로 아들 낳기를 바랐으나 역시 딸을 낳았다.
마음에는 서운하나 할 수 없이 이름을 홍련이라 하였다.
장화·홍련 자매가 점점 자라가며
얼굴이 화려하고 기질이 기묘할 뿐더러 효행이 뛰어나니,
좌수 부부는 형제의 자라남을 보고 사랑함이 비길 데 없었다.
그러나 너무 숙성함을 매우 염려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한편 시운이 불행하여
장씨는 홀연히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좌수와 장화가 정성을 다하여 주야로 약을 썼지만,
증세가 날로 위중할 뿐이요, 조금도 효험이 없었다.
장화는 초조하여 하늘에 축수하며 모친이 회춘하기를 바랐지만,
이 때 장씨는 자기의 병이 낫지 못하리라 짐작하고,
나이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좌수를 청하여 슬퍼하며,
"첩이 전생에 죄가 많아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죽는 것은 슬프지 않지만, 장화 자매를 기를 사람이 없사오니
지하에 갈지라도 눈을 감지 못할 만큼 슬프니,
이제 골수에 맺힌 한을 가슴에 품고 죽으려 합니다.
외로운 혼백이 바라는 바는 다름이 아니오라
첩이 죽은 후에 다른 여인을 취하실진대 낭군의 마음이 자연 변하기 쉬울 것이니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바라건대 낭군은
첩의 유언을 저 버리지 마시고 지난날의 정의를 생각하시고,
이 두 딸을 불쌍히 여겨
장성한 후에 좋은 가문에 배필을 얻어 봉황의 짝을 지어 주신다면
첩이 비록 어두운 저승 속에서라도 낭군의 은택을 감축하여 결초보은하겠습니다." 하고
길이 탄식한 후, 이내 숨을 거두었다.
장화는 동생을 안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그 가련한 정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철석 간장이 녹아 내리는 듯하였다.
그럭저럭 장삿날이 다달아 선산에 안장하고
장화는 효심을 다하여 조석으로 상식을 받들며 주야오 과상하였다.
☆☆☆
세월이 여류하여 어느덧 삼상이 지나갔다.
그러나 장화 형제의 망극함은 더욱 새로웠다.
이 때 좌수는 비록 망처의 유언을 생각하였지만
후사를 안 돌아볼 수도 없어서,
이에 혼처를 두루 구하였으나,
원하는 여인이 없으므로 부득이 허씨라는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다.
☞ 허씨의 용모를 말하자면
- 두 볼은 한 자가 넘고,
- 눈은 퉁방울 같고,
- 코는 질병 같고,
- 입은 메기 같고,
- 머리털은 돼지털 같고,
- 키는 장승만 하고,
- 소리는 이리 소리 같고,
- 허리는 두 아름이나 되는 것이 게다가 곰배팔이요,
- 수종다리에 쌍언청이를 겸하였고,
- 그 주둥이를 썰어 내면 열 사발은 되고,
- 얽기는 콩멍석 같으니
그 형상은 차마 바로 보기 어려운 데다가
그 심지가 더욱 불량하여 남이 못 할 노릇만을 골라 가며 행하니,
집에 두기가 단 한시인들 난감하였다.
그래도 그것이 계집이라고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연달아 아들 삼 형재를 낳았다.
좌수는 그로 말미암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매양 딸과 더불어 죽은 장씨 부인을 생각하며,
잠시라도 두 딸을 못 보면 삼추같이 여기고,
돌아오면 먼저 딸의 침실로 들어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너희 자매들이 깊이 규중에 있으면서,
어미 그리워함을 늙은 아비도 매양 슬퍼한다." 하며 가련히 여기는 것이었다.
허씨는 그럴수록 시기하는 마음이 대발하여 장화·홍련을 모해하고자 꾀를 생각하였다.
이에 좌수는 허씨의 시기함을 짐작하고 허씨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우리는 본래 가난하게 지내다가,
전처의 재물이 많아 지금 풍부히 살고 있소.
그대의 먹는 것이 다 전처의 재물이니 그 은혜를 생각하면 크게 감동해야 맏땅한데,
저 어린것들을 심히 괴롭게 하니, 다시는 그러지 마오." 하고, 조용히 타일렀지만
시랑 같은 그 마음이 어찌 뉘우치겠는가.
그 후로는 더욱 불측하여 두 자매를 죽일 뜻을 주야로 생각하였다.
☆☆☆
하루는 좌수가 내당으로 들어와 딸의방에 앉으며 두 딸을 살펴보니,
딸 자매가 서로 손을 잡고 슬픔을 머금고 눈물로 옷깃을 적시기에,
좌수가 이것을 보고 매우 측은히 여겨 탄식하며,
'이는 반드시 죽은 어미를 생각하고 슬퍼함이로다.' 하고, 역시 눈물을 흘렸다.
"너희들이 이렇게 장성하였으니,
너희 모친이 살아 있었다면 오죽이나 기쁘겠느냐.
그러나 팔자가 기구하여 허씨 같은 계모를 만나 구박이 자심하니,
너희들의 슬퍼함을 짐작하겠다.
이후에 이런 연고가 또 있으면
내가 처치하여 너희 마음을 편안케 하리라." 하고 나왔다.
이 때 흉녀 허씨가 창 틈으로 이 광경을 엿보고 더욱 분노하여
흉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고, 제 자식 장쇠를 불러 큰 쥐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하였다.
그러고는 그것을 껍질을 벗기고 피를 발라,
낙태한 형상을 만들어 장화가 자는 방에 들어가 이불 밑에 넣고 나왔다.
좌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이것을 보이려고 하였는데 마침 좌수가 외당에서 들어왔다.
허씨가 좌수를 보고 정색하며 혀를 차는지라, 괴이하게 여긴 좌수가 그 연고를 물었다.
"집안에 불측한 변이 있으나
낭군은 필시 첩의 모해라 하실 듯하기에 처음에는 발설치 못하였습니다.
낭군은 친 어버이라,
나오면 이르고 들어가면 반기는 정을 자식들이 전혀 모르고 부정한 일이 많으나,
내 또한 친 어미가 아니므로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늦도록 기동치 아니하기에 몸이 불편하다 하여 들어가 보니,
과연 낙태를 하고 누웠다가 첩을 보고 미처 수숩치 못하여 쩔쩔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첩의 마음에 놀라움이 컸지만, 저만 알고 있거니와
우리는 대대로 양반이라 이런 일이 누설되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좌수는 크게 놀라
이에 부인의 손을 이끌고 여아의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들추어 보았다.
이 때 장화 자매는 잠이 깊이 들어 있었으니,
허씨가 그 피묻은 쥐를 가지고 날뛰었다.
용렬한 좌수는 그 흉계를 모르고 놀라며,
"이 일을 장차 어찌하리오." 하며 고심하였다.
이 때 흉녀가 하는 말이,
"이일이 매우 중난하니 남이 모르게 죽여 흔적을 없이 하면,
남은 이런 줄은 모르고 첩이 심하여 애매한 전실 자식을 모해하여 죽였다고 할 것이요,
남이 알면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니
차라리 첩이 먼저 죽어 모르는게 나을까 합니다." 하고 거짓 자결하는 체하니,
저 미련한 좌수는 그 흉계를 모르고 급히 달려들어 붙들고 빌면서,
"그대의 진중한 덕은 내 이미 아는 바이니, 빨리 방법을 가르치면 저 아이를 처치하겠소." 하며 울거늘,
흉녀는 이 말을 듣고, '이제는 원을 이룰 때가 왔다.' 하고,
마음에 기꺼워하면서도 겉으론 탄식하여 하는 말이,
"내 죽어 모르고자 하였더니,
낭군이 이토록 과념하시니 부득이 참거니와,
저 아이를 죽이지 아니하면 장차 문호에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기세양난이니 빨리 처치하여 이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십시오." 하였다.
좌수는 망처의 유언을 생각하고 망극하나,
일변 분노하여 처치할 묘책을 의논하니,
흉녀는 기뻐하며,
"장화를 불러 거짓말로 속여 저희 외삼촌 댁에 다녀오게 하고,
장쇠를 시켜 같이 가다가 뒤
연못에 밀쳐 넣어 죽이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좌수가 듣고 옳게 여겨
장쇠를 불러 이리이리하라고 계교를 가르쳐 주었다.
☆☆☆
이 때 두 소저는 죽은 어머니를 생각하고 슬픔을 금치 못하다가 잠이 깊이 들었으니,
어찌 흉녀의 이런 불측함을 알 수 있었을까?
장화가 잠을 깨어 심신이 울적하므로
괴이하게 여겨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 있는데,
부친이 부르시기에 깜짝 놀라서 즉시 나아가니
좌수가 말하기를,
"너희 와삼촌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잠시 다녀오느라." 하였다.
장화는 너무나 이외의 영을 들었으므로
일변 놀랍고 일변 슬퍼 눈물을 머금고 말씀드렸다.
"소녀 오늘까지 문 밖을 나가 본 일이 없었는데,
부친은 어찌하여 이 깊은 밤에 알지 못하는 길을 가라 하십니까?"
좌수가 대노하여 꾸짖으며,
"장쇠를 데리고 가라 하였거늘 무슨 잔말을 하여 아비의 영을 거역하느냐." 하므로
장화 이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여,
"부친께서 죽어라 하신들 어찌 분부를 거역하겠습니까마는
밤이 깊었기로 어린 생각에 사정을 아뢸 따름입니다.
분부 이러하시니 황송하지만,
다만 부탁이오니 밤이나 새거든 가게 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좌수 비록 용렬하나, 자식의 정에 끌려 망설이므로
흉녀 이렇듯 수작함을 듣고 갑자기 문을 발길로 박차며 꾸짖어 말하였다.
"너는 어버이 영을 순수히 따라야 마땅하거늘,
무슨 말을 하여 부명을 어기느냐." 하고 호령하니
장화는 이에 더욱 서러우나 할 수 없이 울며,
"아버님 분부가 이러하시니, 다시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침실로 들어가 홍련을 불러 손을 잡고 울면서,
"부친의 뜻을 알지 못하거니와 무슨 연고가 있는지 이 밤중에 외가에 다녀오라 하시니
마지못해 가긴 가지만, 이 길이 아무래도 불길하구나.
다만 슬픈 마음은 우리 자매가 모친을 여의고
서로 의지하여 세월을 보내되 한시라도 떠남이 없이 지내더니,
천만 뜻밖에 이 일을 당하여 너를 적적한 빈방에 혼자 두고 갈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고 간장이 타는 내 심사는 청천일장지로다 다 기록치 못할 것이다.
아무쪼록 잘 있거라.
내 가는 길이 좋지 못할 듯하나 되도록 것이니
그 사이 그리움이 있을지라도 참고 기다려라. 옷이나 갈아입고 가야겠다."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장화는 다시 손을 잡고 울며 아우에게 경계하여,
"너는 부친과 계모를 극진히 섬겨 잘못함이 없게 하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 내 가서 오랫동안 있지 않고 수삼 일에 다녀오겠다.
그 동안 그리워 어찌하여 너를 두고 가는 마음 측량할 길 없으니,
너는 슬퍼 말고 부디 잘 있거라."
말을 마치고 대성통곡하며 손을 붙잡고 서로 헤어지지 못하니,
슬프다! 생시에 그지없이 사랑하던 그 모친은 어찌 이런 때를 당하여
저 자매의 형상을 굽어살피지 못하는가.
이 때 흉녀 밖에서 장화의 이렇듯 함을 듣고는 들어와,
시랑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네 어찌 이렇게 요란히 구느냐?" 하고 장쇠를 불러,
"네 누이를 데리고 속히 외가에 다녀오라 하였거늘 그저 있으니 어쩐 일이냐?"
그러자, 돼지 같은 장쇠는
바로 염라대왕의 분부나 받은 듯이 소리를 벼락같이 질러 어깨춤을 추며 삼간마루를 떼구르며,
"누님은 빨리 나와요.
부명을 거역하여 공연히 나만 꾸지람 듣게 하니 이 아니 원통하오." 하며
재촉이 성화 같으므로
장화는 어쩔 수 없이 홍련의 손을 떨치고 나오려 하였다.
☆☆☆
이 때 홍련이 언니의 옷자락을 잡고 울면서,
"우리 형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었거늘,
갑자기 오늘은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가려고 합니까?" 하며 쫓아 나오니,
장화는 홍련의 형상를 보며 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하지만,
홍련을 달래며, "내 잠시 다녀오겠으니 울지 말고 잘 있거라." 하며 설움에 잠겨 말끝을 맺지 못하니,
노복들도 이 광경을 보고 눈물 아니 흘리는 자가 없었다.
홍련이 언니의 치마폭을 잡고 놓지 않거늘,
흉녀가 들이닥쳐 홍련의 손을 뿌리치며,
"네 형이 외가에 가는데 네 어찌 이처럼 요망스럽게 구느냐." 하며 꾸짖으므로,
홍련은 맥없이 물러섰다.
흉녀가 장쇠에게 넌지시 눈짓하니 장쇠의 재촉이 성화같았다.
장화는 마지못해 홍련을 이별하고 부친께 하직하고 말에 올라 통곡하며 가는 것이었다.
장쇠가 말을 급히 몰아 산골짜기로 들어가 한 곳에 다다르니,
산은 첩첩천봉이요 물은 잔잔 백곡인지라, 초목이 무성하고 송백이 자욱하여,
인적이 적막한데 달빛만 휘영청 밝고 구슬픈 두견 소리 일촌간장을 다 끊어 놓는다.
장화가 굽어보니 송림 가운데 한 못이 있는데
크기가 사십여 리요, 그 깊이는 알지 못할 정도였다.
한 번 보니 정신이 아득하고 물소리만 처량한데,
장쇠 말을 잡고 장화를 내리라 하니
장화는 깜짝 놀라며 큰 소리로 장쇠를 나무랐다.
"이 곳에 내리라 함은 어쩐 일이냐?" 하니,
장쇠가 대답하길,
"누이의 죄를 알 것이니 어찌 물으오?
그대를 외가에 가라 함은 정말이 아니라,
그대 실햄함이 많으되,
계모 착하신 고로 모르는 체하시더니 이미 낙태한 일이 나타났으므로,
나를 시켜 남이 모르게 이 못에 넣고 오라 하기에,
이 곳에 왔으니 속히 물에 들어가오." 하며 잡아 내리는 것이었다.
☆☆☆
장화가 이 말을 들으니
청천벽력이 내리는 듯 넋을 읽고 소리를 지르며,
"하늘도 야속하오, 이 일이 웬일이요?
무슨 일로 장화를 내시고 또 천고에 없는 누명을 씌워
이 깊은 못에 빠져 죽어 속절없이 원혼이 되게 하시는고?
하늘이여 굽어살피소서.
장화는 세상에 난 후로 문 밖을 모르거늘,
오늘날 애매한 누명을 쓰오니 전생에 죄악이 그렇게 중하던가,
우리 모친은 어찌 세상을 버리시고, 슬픈 인생을 남겼던고,
간악한 사람의 모해를 입어 단불에 나비죽듯 죽는 것은 슬프지 않지만,
원통한 이 누명을 어느 시절에 씻으며 외로운 저 동생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하며 통곡하니
그 정상은 목석간장이라도 서러워하련마는,
저 불측하고 무정한 장쇠놈은
서서 다만 재촉할 뿐이었다.
"이 적막한 산중에 밤이 이미 깊었는데,
아무래도 죽을 인생 발악해야 무엇하나 어서 바삐 물에 들라." 하니
장화 정신을 진정하고,
"나의 망극한 정지를 들으라. 너와 나는 비록 이복이나 아비 골육은 한가지라,
전에 우리를 우애하던 정을 생각하여 영영 황천으로 돌아가는 목숨을 가련히 여겨 잠시 말미를 주면,
삼촌 집에도 가고 망모의 묘에 하직이나 하고 외로운 홍련을 부탁하여 위로하고자 하니,
이는 내 목숨을 보존코자 함이 아니라,
변명하면 계모의 시기가 있을 것이요,
살고자 하면 부명을 거역하는 것이니
일정한 명대로 하려니와,
바라건대 잠시 말미를 주면 다녀와 죽음을 청하겠다." 하며 비는 소리,
애원이 처절하나 목석 같은 장쇠 놈은
조금도 측은한 빛이 없이 마침내 듣지 않고 재촉이 성화 같았다.
장화는 더욱 망극하여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명천은 이 억울한 사정을 살피소서.
이 몸 팔자 기박하여, 칠 세에 어미를 여의고
자매 서로 의지하여 서산에 지는 해와 동녘에 돋는 달을 대할 때면 간장이 슬퍼지고,
후원에 피는 꽃과 섬돌에 나는 풀을 볼 적이면
비감하여 눈물이 비오듯 지내왔는데,
십년 후 계모를 얻으니 성품이 불측하여
구박이 자심하온지라 서러운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오나,
밝으면 부친을 따르고 해가 지면 망모를 생각하며 자매 서로 손을 잡고,
기나긴 여름날과 적막한 가을밤을 장우탄탄으로 살아왔었는데
궁흉극악한 계모의 독수를 벗어나지 못하옵고 오늘날 물에 빠져 죽사오니
이 장화의 천만 애매함을 천지·일월·성신이든 바로잡아 주소서.
홍련의 일생을 어여삐 여기셔서
저 같은 인생을 본받게 하지 마옵소서." 하고 장쇠를 돌아보며,
"나는 이미 누명을 쓰고 죽거니와
저 외로운 홍련을 어여삐 여겨 잘 인도하여,
부모에게 호도하고 길이 무량함을 바란다." 하며
왼손으로 치마를 걷어잡고 오른손으로 월귀탄을 벗어 들고 신발을 벗어 못가에 놓고,
발을 구르며 눈물을 비오듯 흘리고 오던 길을 향하여 실성 통곡하며,
"불쌍하구나, 홍련아, 적막한 깊은 규중에 너 홀로 남았으니,
가엾은 네 인생이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간단 말이냐.
너를 두고 죽는 나는 쓰라린 이 간장이 구비구비 다 녹는다."
말을 마치고 만경창파에 나는 듯이 뛰어드니 참으로 애닯도다.
갑자기 물결이 하늘에 닿으며 찬바람이 일어나고 월광이 무색한데,
산중으로부터 큰 범이 내달아 꾸짖기를,
"네 어미 무도하게 애매한 자식을 모해하여 죽이니 어찌 하늘이 무심하겠느냐." 하며
달려들어 장쇠 놈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떼어먹고 온데간데없으니
장쇠 기절하여 땅에 거꾸러지니 장화의 탔던 말이 크게 놀라 집으로 돌아왔다.
☆☆☆
흉녀는 장쇠를 보내고 밤이 깊도록 아니 오므로 매우 이상히 여기는데
갑자기 장화가 타고 간 말(馬)이 소리를 지르고 달려오기에,
흉녀 생각하기를 장화를 죽이고 온 줄 알고 내다본즉,
말은 온몸에 땀을 흘리고 들어오는데 사람은 없는지라,
흉녀는 크게 놀라 이에
노복을 불러 불을 밝히고 말 오던 자취를 더듬어 찾아가게 하였다.
이윽고 한 곳에 다다라 보니,
장쇠가 거꾸러졌기에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한 팔 , 한 다리와 두 귀가 없고
피를 흘리며 인사불성이라 모두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때 문득 향내가 진동하며 찬바람이 소슬하므로
괴이하게 여겨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향내가 못 가운데서 나는 것이었다.
노복이 장쇠를 구하여 오니, 그 어미 놀라
즉시 약을 먹이고 상한 곳을 동여 주니, 장쇠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흉녀가 크게 기꺼워하며
그 사연을 물은즉, 장쇠는 전후 사연을 다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흉녀는
더욱 원망하며 홍련을 마저 죽이려고 주야로 생각하였다.
☆☆☆
그러던 중 홍련이 또한 집안 일을 전혀 모르다가
집안이 소란함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계모에게 그 연고를 물으니,
"장쇠는 요괴로운 네 형을 데리고 가다가
길에서 범을 만나 물려서 병이 중하다." 하기에
홍련이 다시 사연을 물은즉, 흉녀는 눈을 흘기며,
"네 무슨 요사스런 말을 이토록 하느냐?" 하고, 자리를 떨치고 이러나므로,
홍련이 이렇듯 박대함을 보고 가슴이 터지는 듯하며 일신이 떨려,
제 방으로 돌아와 형을 부르며 통곡하다가 홀연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물 속에서 장화가 황룡을 타고 북해로 향하거늘,
홍련이 내달아 물으려 하니 장화는 본 체도 안 하는 것이었다.
홍련이 울며,
"형님은 어찌 나를 본 체도 안 하시고 혼자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
그제야 장화가 눈물을 뿌리며,
"이제는 내 몸이 길이 달라서
내 옥황상제께 명을 받아 삼신산으로 약을 캐러 가는데,
길이 바쁘기로 정회를 베풀지 못하지만 너는 나를 무정타고 여기지 말아라.
내 장차 때를 보아 너를 데려가마." 하며 수작할 즈음에
장화가 탄 용이 소리를 지르거늘,
홍련이 깨달으니 침상일몽이었다.
기운이 서늘하고 땀이 나서 정신이 아득한지라,
홍련은 이에 부친께 이 사연을 말씀하며 통곡하여 하는 말이,
"오늘을 당하여 소녀의 마음이 무엇을 잃은 듯하여 자연히 슬프오니
형이 이번에 가서 필경 무슨 연고가 있어 사람의 해를 입었나 봅니다." 하고 실성통곡하였다.
좌수가 여아의 말을 들어보니,
숨통이 막혀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눈물만 흘리는 것이었다.
흉녀가 곁에 있다가 왈칵 성을 내며,
"어린아이가 무슨 말을 해서 어른의 마음을 이다지도 슬프게 이렇듯 상심케 하느냐." 하며
등을 밀어 내기에 홍련이 울며 나와 생각하기를,
'내 꿈 이야기를 여쭈니 부친은 슬퍼하시며 아무 말도 못 하시고,
계모는 낯빛을 바꾸니 이렇듯 구박하니, 이는 반드시 이 가운데 무슨 연고가 있다.' 하며
그 허실(虛失)을 몰라 애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