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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사람이 늘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쩔쩔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왜 그렇게 바쁘게 사십니까?”라고 물었지요.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많은 건물과 땅 그리고 돈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돈을 버려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왜 그렇게 돈을 버십니까?”라고 묻자 이번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족을 하지 못하고 더 큰 권력을 꿈꾸는 정치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왜 그렇게 큰 권력이 필요합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의 대답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찾고 있는 ‘행복’이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나이 지긋한 철학자를 찾아가 “행복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철학자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 평생 공부했지만 아직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대기업 회장을 찾아가서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회장은 “그것을 알기 위해서 평생 돈을 벌었지만 아직도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답답한 이 사람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약간의 동전을 깡통 안에 넣으면서 뜬금없이 “행복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먹을 것과 잠잘 곳만 있으면 행복한 것 아닙니까?”
생각해보면 행복이란 별 것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들을 모으고 모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럴수록 행복하지 않은 느낌만 계속됩니다.
그러나 앞서 나오는 그 걸인의 말처럼 아주 자그마한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재산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그리고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가족마저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 심지어 혈연관계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토록 원하는 참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첫째가 되려고 세상의 것들을 모으고 세상의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했지만,
이것들은 이 세상 안에서만 첫째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들을 멀리해서 비록 세상 안에서는 꼴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아 첫째가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디서 첫째의 자리를 얻는 행복을 원하십니까?
세상 안에서도 첫째, 하늘 나라에서도 첫째를 원하시죠?
그러나 둘 다는 안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비우는 만큼 채워주신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국회의원이나 의회의원 지방자치 단체장이 되려고 하다가 명예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회 청문회활성화법이 통과되었는데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자기들이 통과시켜놓고는 여야가 바뀌니까 소신도 바뀝니다.
잇속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출세라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 (마르10,28)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삼아 말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를 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아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재물, 권력이나 명예. 자식이나 건강을 첫째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관계나 소유물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따름과 보상>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 이 말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르 10,25)
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놀라서
“그러면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른 저희는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라는 뜻으로 한 질문으로 생각됩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더 있는데(마태 19,27),
이 말도 역시 “저희는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으니 합당한 보상을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말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르 10,29-31)
이 말씀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바늘귀로 빠져나가게 될 뿐만 아니라,
풍성한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약속하신 적이 없고,
사도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있는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을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 뒤로 옮겨서 읽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을 때도 있겠지만
내세에서는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복음 19장 28절-29절을 보면, 백 배로 받는 일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에서, 즉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을 보면,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루카 18,30)라고 되어 있어서
마태오복음과 모순된다고 시비를 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와 교리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다.’ 라는 말은,
현세에서 실제로 물질적인 보상을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은혜를 받게 된다는 뜻으로, 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풍요를 누리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만일에 루카복음의 표현만 생각하고서,
예수님께서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보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은 그 약속을 한 번도 안 지키신 분이 되어버립니다.
사도들도 그렇고, 순교자들도 그렇고, 성인 성녀들도 그렇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사이비’이고 거짓 예언자입니다.)
‘백 배’ 라는 말은 풍성한 은총을 뜻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재산과 가족이 백 배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의 행복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뿐인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지상에서는 부자로 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는 없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0)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것이 아니더라도,
또는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이 아니더라도,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재물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의 지상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는 관심도 사랑도 없이 부유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첫째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모든 것을 풍성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꼴찌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많을 것이다.’ 라는 말은,
처지가 역전되는 일이 백 퍼센트는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겉으로는 잘 구분이 안 되지만,
예수님과 복음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1) 한 일이라면, 즉 ‘위선’이라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버림’과 ‘따름’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마태 6,4).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떠남과 버림을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
우리는 날마다 어딘가를 향해 떠나며,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씁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몸짓 안에 담겨 있는 생각과 의식은 무엇일까요?
이 움직임 안에 행복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면
삶을 한번쯤 깊이 되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떠나지만 왜 떠나며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나는지,
시간과 돈은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모두의 선을 위한 것인지 복음에 비추어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현세에서 백배의 보상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29-30).
이처럼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보상을 약속하시지 않고,
늘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보상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며
항구히 추종하라는 새로운 부름인 셈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전히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고통과 박해가 따르는 만만치 않은 길이었지요.
'예수님 때문에’(10,29) 자신을 떠나서 지혜이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만이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추종하려면
제자들이 부모와 형제, 토지를 모두 버렸듯이 어려움과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법적인 포기가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애착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떠남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자체가 영성생활의 종착점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요 하나의 매듭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에 어긋나는 온갖 애착을 버리는 갓입니다.
그러려면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으로부터 떠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보상은
이런 떠남과 떠남에 따른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맺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부의 뜻을 따라 죽기 위하여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 떠나셨고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포기하셨지요.
자기 것에 애착하고 소유의 끈을 놓지 못하며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을 맞으면 그 누구도 티끌 하나도 지니지 못한 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사람답게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죽음을 위해,
지금 여기서부터 애착을 버리고,
자신을 떠나 하느님께로 향해가는 삶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것만 챙기는 옹졸함,
재물에 대한 집착,
하느님의 주도권을 무시함,
악에 동조하고,
불의에 가담하는 삶,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을 청산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허무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일이 없도록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를 떠나 모두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그분 안에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꼴찌 인생이고 바보짓이고, 박해까지도 각오해야 하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최고로 행복한 인생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진정 소중하고 값진 것을 얻으려면
자신을 떠나 모두를 버리고 되돌려야겠지요.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강론 제목은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입니다.
‘거룩하다.’란 말만 들어도 신선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날로 속화되어 가는 세상에 존재 자체로 말없이 세상을 성화하는 거룩한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거룩한 사람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좋은 신자보다는 거룩한 신자가 절실한 현실입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베드로 사도를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베드 1,15-16)
그렇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주님께 불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필생의 과제이자 목표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다.’(holy;hagios)라는 어원을 살펴 봅니다.
거룩함은 일종의 경건이 아니라 ‘대다수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being set apart from the majority)’을 뜻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우리를 뭔가 다르게 하는 삶의 비전을 지니고 일관성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믿는 이들로서 그런 차이는 분명히 우리의 모든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거룩함입니다.
거룩함(holiness)은 역시 어떤 온전함(wholeness)을,
즉 우리 자신과는 물론 우리 주변과의 온전한 조화, 우리의 환경과 하느님과의 온전한 조화(a total harmony)를 뜻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거룩한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되는 삶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마음을 가다듬고 깨어 사는 삶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gird up the loins of your mind)’ 라는 표현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메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루카 12;35,36)
발목까지 늘어지는 겉옷 자락을 올려 띠로 묶는 것은,
즉시 일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모습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파스카 축제를 지낼 때에 취하는 여행자의 자세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몸가짐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깨어 준비된 자세로 미사에 참석함은 물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늘 깨어 준비된 삶을 사는 이가 거룩한 사람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희망을 걸고 사는 삶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어제도 말씀 드렸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생생한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속화되어 무너지지 않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영육의 무너짐은 순간입니다.
그리스도께 생생한 희망을 지니고 살 때 거룩한 삶이요 샘솟는 기쁨입니다.
또 이런 생생한 희망이 깨어 준비하며 살게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라져가는 세상에 희망을 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셋째, 끊임없이 안팎으로 비우고 버리는 삶입니다.
줄 때 받고, 버릴 때 얻는, 비울 때 채워지는 역설의 영적진리입니다.
텅 빈 충만이란 표현도 이런 진리의 표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설파하는 진리입니다.
1독서의 주인공이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은 현세에서 온갖 축복을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까지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이미 우리가 은연중 체험하는 진리가 아닙니까?
가끔 사랑하는 신자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물을 때 답이 생각나지 않다가 대답하곤 합니다.
“하느님 한 분만 필요합니다!”
이미 받은 축복이 넘치기에 더 바랄 것이 없음은 우리 수도자들이 체험하는 진리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 자리에 가득한 주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버리고 떠나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의 첩경입니다.
예전에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나눕니다.
-
어느 부자가 과연 그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미래의 구원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느님께 청했고 하느님은 이에 동의하여 그에게 천국과 지옥의 비전을 보여 줬다 합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지옥입니다.
그는 크게 놀랐습니다.
번쩍 번쩍 빛나는 그릇에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진수성찬의 식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식탁에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들 앞에 식탁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까닭은 그들은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지옥이었습니다.
다음에 간 곳은 천국입니다.
다시 그는 놀랐습니다.
처음 지옥과 똑같은 식탁이었는데 모두가 고도의 영적상태에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웃음소리가 식탁 곳곳에서 울렸고 그들은 실로 음식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젓가락이 짧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똑같은 긴 젓가락이었는데 여기서는 반대편의 사람에게 서로 음식을 집어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주고 받고, 주고 받고 하는 식사였습니다.
바로 여기가 천국입니다.
-
오늘 복음과도 잘 어울리는 일화입니다.
사랑으로 섬길 때 섬김을 받고,
줄 때 얻고,
비울 때 채워지고,
버릴 때 받습니다.
배우기 힘들지만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거룩한 삶에 이르는 공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으로 깨어 당신께 희망을 두고 버리고 비우는 삶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 늦잠을 포기하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합니다.
천주교 신앙을 반대하는 부모나 형제 친척을 뒤로하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어렵게 번 재물을 교회 유지나 자선 사업에 기부합니다.
신앙인이기에 사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와 선택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들이 나의 구원을 보장해 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33)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대변하듯,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일이나 어떤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전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만일 영원한 구원을 얻기에 방해가 된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입니다.
이러한 희생과 추종은 ‘고난 뒤에 따라올 불사불멸의 영광’,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낳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에는 박해와 시련이 따르지만 아울러 넘치는 보상이 뒤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가족을 멀리한 사람들은 백 배가 넘는 신앙의 형제자매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포기한 재물은 하늘 나라의 보물 창고에 저장되며,
우리가 베푼 자선은 하늘 나라의 상급으로 빛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보루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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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떽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