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독립운동가
誠齋 李東輝
성재 이동휘 선생은 1873년 빈농의 아들로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이승교는 아들을 아전으로 출세시키고자 단천군수의 통인으로 주선했다.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들에게 저지르는 추행을 보다못해 화로를 군수에게 던져 생일 잔치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이동휘 선생은 젊어서는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한 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후 이동휘 선생은 서울로 도피,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임관하였다. 이동휘 선생은 충성심이 강하고 청렴강직하였다. 고종은 이를 높이 평가하여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한다.
그는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부패지방관리들을 엄격히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승진을 거듭하여 그 당시 국방요충지인 강화도에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지금 강화도 군지에는 그의 업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강화도 군민의 존경과 사랑을 얼마나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군직을 사임하고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교육운동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교육자로 변신한다.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자결을 결심하는 투쟁도 전개하였다. 그후 이동휘 선생은 국민을 계몽시켜 구국운동에 참여시키고자 교육문화 활동을 전개한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이에 대항한 강화도 군민들이 봉기하자 그 배후 조종자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가 4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이동휘 선생은 서북학회와 비밀결사단체인 시민회를 통하여 계속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그는 기독교야말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기독교 전도활 동에도 힘썼다.
1909년 이후에는 캐나다 장로교선교회 전도사 크레슨의 영향을 받아 함경남북도 일대에서 기독교 전도를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한일합병 후에는 일제에 체포되어 인천 앞바다에 있는 대무의도에서 1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였으며, 유 배에서 해제 된 그는 1913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북간도에서 이동휘는 한인자치 기관인 간민회를 지도하면서 신교육보급과 기독교 전도활동, 기독교 전도활동,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3년 10월 일제의 위협이 고조되자 훈춘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연해주에서는 한인사회 의 파벌해소와 민족단결을 위한 활동에 최선을 다 하였다.
1914년에는 러시아와 북간도의 민족운동 세력을 규합하여 만주에 항일광복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광복전쟁계획을 수립, 총 지위하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 때에 일본과 러시아의 동맹관계로 광복전쟁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1915년 중·일조약 으로 중국과 연합을 통한 대일전쟁계획도 무산되었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후에는 독일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0월혁명 후 석방되기도 한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100여명의 한인적위대와 러시아 적군(赤軍)과 함께 우스리 전투에 참전하여 한인적위대는 절반이 상의 희생자를 냈다. 이 전투가 국권상실 후 일본에 대한 최초의 한인무장 투쟁이었다.
1919년 11월 3일에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에 취임하였고, 상해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1921년 1월 24일 상해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된다.
1921년 5월에는 한인사회의 여러 공산당조직의 갈등 속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을 계속 하였다.
1921년 6월에는 박진순, 이극로와 함께 인도양, 수에즈 운하, 지중해, 알프스산맥, 독일을 거쳐 4개월만인 10월에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였고, 레닌과 독립운동 전반에 대하여 논의하고 독립운동자금도 얻어왔다.
1923년 말, 국제공산당이 한명세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자 국제공산당과의 갈등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러시아 공산당에서는 이동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공산주의 를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한 민족주의자임이 분명하다.
그 후 이동휘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돕기위하여 최선을 다하였고, 그들 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러시아 극동지방의 스찬지방을 방문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환 중 심한 독감으로 1935년 1월 31일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첫댓글 이동휘 선생님,,, 새기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