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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25 - 네로 자결후의 ‘네황제의 해’ 에 갈바와 오토에 비텔리우스 황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권의 제목을 악명높은 황제들” 이라고 붙인후 티베리우스 - 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의 4부로 나누었으며.... 8권은 “위기와 극복” 이라고 한 후 30년 역사를
갈바 - 오토 - 비텔리우스 - 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 - 도미티아누스 - 네르바 순으로 기술 했습니다.
제정 로마시대의 최고 역사가라고 일컬어지는 타키투스의 저술 가운데 이 시대를 다룬 “역사
(Historiae)" 가 있으니..... 13세부터 40대 초반까지 한창 시절을 이 시대에 살았던
타키투스는 저 역사를 적으면서 ”동시대인의 중언“ 을 기록하는 심정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타키투스의 또 다른 저술인 “연대기 (Annales)" 는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 에 가까우니..... 티베리우스의 즉위 부터 네로의 사망까지를
다룬 책은 타키투스가 태어나기 40년 전부터 10대 전반까지의 시간에 해당합니다.
‘역사’ 의 첫머리에는“ 내가 이제부터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 제국에는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찬 시대
이야기이다. 적과의 참혹한 전쟁, 동포들 사이의 불화와 반목, 속주민의 반란이 되풀이 되었고
본국 평화조차 많은 피를 흘리고 난 뒤에야 겨우 확보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넷이나 비명에 죽고.... ”
64년 7월의 로마 대화재와 제위 찬탈 음모사건 이후 네로 황제는 66년 가을 또 그리스 순회 공연을
떠났으니 올림피아, 코린토스, 델포이 등을 여행하던 중인 66년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진압을 하던중에 네로황제의 사망소식을 듣고는 예루살렘성 공격을 멈춥니다.
네로는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의 휘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유대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후 코르불로는
소환했으니 '베네벤툼의 음모' 로 알려진 네로 암살시도 때문이었는데, 코르불로의 맏사위
비니키아누스가 피소 음모 사건으로 살해당한 동생 안니우스 폴리오의 원수를 갚고자 일으켰다고 합니다.
네로는 코르불로와 게르마니아 사령관 2명을 의심해 모두 자살케했으니.... 파르티아전쟁의 영웅
코르불로는 사건과 무관한지라 코린트항에 내린 직후 '내란 주모 혐의로' 자살하라며
칼을 받자 울분에 찬 나머지 "악시오스!" 라고 결백함과 충성심을 밝힌 유언을 남긴 뒤 자결합니다.
로마 병사들 사이에 인기를 구가하던 코르불로와 게르마니아 사령관등 3명의 억울한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떨어진 네로의 인기를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었으며, 군단병들은 경악하고 분개했으니 젊은
장교들이 황제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근위대 장교와 병사들에 의한 암살시도도 있었습니다.
네로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여행후 이집트를 유람하기로 한 순간에 갈리아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킨지라 로마로 돌아오는데, 네로는 “로마인 답지 않은 행동과 태도”
에다가 황족들을 살해한 부도덕함, 사치를 위해 이탈리아 사유지와 북아프리카
농장들을 탈취 및 몰수한 조치, 군단병들의 급여 체불, 속주세 인상으로 발생한 반란이었습니다.
“우리는 황제에게 반항해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오.네로는 로마를 약탈했소. 원로원의 꽃이라는 꽃은 죄다 뽑아
버렸소. 그는 방탕으로 신세를 망쳤고, 어머니를 죽인데다 군주같지도 않소! 대체 누가 이런 네로를
황제라 부르겠소? 지금이야말로 일어설 때요! 스스로를 구하시오! 로마인을 구하시오! 세계를 해방시키시오!”
원로원은 갈리아에서 반 네로 봉기를 일으킨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했으며,
빈덱스는 히스파니아(스페인) 총독 갈바와 루시타니아(포르투갈) 총독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반란에 가담시켰고 선황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친구 갈바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네로는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 루키우스 루푸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니
루푸스는 빈덱스의 갈리아군과 결전을 벌여 격파하기는 했지만.....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로마군은 더 이상 충성하지 않았고 네로에게 불신임권을 행사합니다.
네로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병사들에게 불신임을 받게 되자, 갈바는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을 압박하였으며, 근위대 병사 1인당 8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겠다고
약속하니 근위대와 군단병 모두 마음이 네로를 떠났던지라 갈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자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해 공적으로 만든 뒤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니, 네로의
근위대장 중 한명인 가이우스 사비누스는 휘하 근위대와 함께 갈바 쪽으로
붙었으며 네로가 믿던 티켈리누스는 네로와 휘하 근위대를 내팽개치고 야반도주하듯 도망칩니다.
네로는 노예 파온의 집으로 달아나 숨는데, 이때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음을 알게되고
'원로원이 자신을 채찍질로 처형할 것' 이라는 소문을 전해듣고 공포에 질려있다가 원로원으로
부터 파견된 전령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측근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칼로 자기
목을 찌르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습니다. Qualis Artifex Pereo (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
그래도 네로가 시혜자이자 즐거움을 주는 황제로 기억되었던 까닭에 시민과 하층민의 원한이 깊지는 않았으니,
'그 시체를 테베레 강으로 던져라' 등의 험한 꼴을 당하지 않고 정중히 화장되었는데.... 하지만
황제에서 불신임당한 뒤 자살했기 때문에 죄인으로 대우하는데 시민들도 찬성해 영묘에 묻히지는 못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6대 황제가 된 갈바(Galba) 는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가문과 관계가 없는 첫 로마 황제인데,
68년 스페인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으로 있을 당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후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네로의 자살 후 혼란기였던 ‘네 명의 황제의 해’ 의 맨 처음으로 즉위한 인물 입니다.
갈바는 이탈리아 라치오주 테라치나 별장에서 BC 3년에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죽으니 아버지 가이우스 갈바는
부유한 명문가 리비우스가의 미인 리비아 오켈리나와 재혼하니 계모 집안은 갈바 가문 보다 정치적,
사회적 명성이 훌륭했으니 갈바는 그녀 친정 사람으로 입양돼 이름을 루키우스 리비우스 갈바로 바꾸었습니다.
갈바의 증조부 세르비우스는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갈리아 전쟁에서 활약했고, 할아버지는 정치인이었지만
역사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으며 부친은 변호사로 명성을 날렸고 친어머니
뭄미아 아카이카는 코린트를 함락시킨 영웅 루키우스 아카이쿠스의 증손녀였으니 고귀한 혈통을 자랑했습니다.
갈바는 겨울에는 해가 뜨기 전에도 음식을 먹으며 연회를 즐긴 악습으로 유명했으나, 엄격한 삶 아래 저녁
식사를 하면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시종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배를 굶지 않게 신경써서
사랑을 받았으니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는 진심으로 늘 예의를 갖춘 갈바를 칭찬했습니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뀐뒤 새 황제가 즉위하면 군단병 연봉의 3분지 1 정도에 해당하는 보너스를 지급하는게
관례로 내려왔는데 갈바는 병사는 스스로 지원한 사람이라며 주지 않아 불만을 샀으니,
타키투스는 갈바를 “좋은 자질을 타고 났다기 보다는 나쁜 자질이 없었던 평범한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국을 다스리려면 협력자를 선택해야 하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마르쿠스 오토를
선택했어야 했다고 말했으니, 첫재 오토는 수도 로마 원로원 계급이니 피통치자들의 거부반응이
적을수 있다, 둘째 오토는 10년간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을 지냈고 선정은 로마에까지 평판이 나 있다.
세 번째는 오토는 36세 젊은이로 가장 먼저 갈바 지지를 선언했고 야심은 있었지만 72세의 늙은 갈바가 명이
다해 죽을때 까지 참고 기다려 줄수있는 인물이었는데, 69년 1월 갈바가 선택한 집정관은 총독시절
자기 수하에서 군단장을 지낸 비니우스였으니 전방의 로마군단병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인물이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 선택으로 갈바가 잃은 것은 첫째 배신감을 느낀 오토, 둘째 제국 방위를
짊어졌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전방 장병들 셋째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뼈다귀인지도 모를 인사에 불신감을
느낀 원로원 의원들, 넷째 로마시민들로서는 보너스도 주지 않는 황제가 하는 일이 소극적이라고 실망합니다.
갈바는 젊을적에는 평균 키에 파란눈을 가진 좋은 외모의 멋진 몸을 가진 귀족이었으며
더욱이 칼리굴라 황제 시절에는 전차 경주를 좋아한 황제와 레누스강
전선에서 나란히 전차를 몰면서 전장을 지휘할 정도로 운동 능력도 상당했습니다.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재혼 상대로 유부남이던 갈바를 점찍고 진지하게 접근하기도 했는데, 이때 그의 장모가
소 아그리피나를 질책하고 황족인 그녀를 상류층 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아내와 사별한뒤 상류층 여인들에게서 재혼 상대로 거론되지 못했고 즉위한 이후에도 홀로 살았습니다.
그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거치면서 법무관, 집정관(콘술), 황제 수행원, 군 지휘관, 원로원
속주 총독등 로마 귀족들이 거칠수 있는 ‘명예로운 경력’을 죄다 역임하며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칼리굴라
생전에 군대 지휘관과 속주 총독으로 훈련과 군율을 엄하고 공정히 다뤄 칼리굴라와 원로원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타라코넨시스 총독 갈바는 고령임에도 빈덱스의 반란이 심각한 것을 알고, 대망을 품고 빈덱스와 오토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니, 68년 4월 3일 카르타고노바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후
루시타니아, 바이티카, 이집트, 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총독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을 지지케 한뒤 동의를 받습니다.
그는 휘하에 1개 군단 밖에 없었음에도 다른 총독들이 자신을 지지한 것을 의식해 자신만만했으며....
라인강 일대 군단병들이 네로의 명에 따라 5월 빈덱스를 제압했는데, 그들은 고령의 갈바 대신
자신들의 사령관 루키우스 루푸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지만 루푸스는 야심이 없는지라 거절합니다.
명문귀족인데다 엄청난 부자였던 갈바는 황제에 즉위했을 당시, 원로원과 로마 백성들의 기대는 컸지만
네로 처럼 탐욕스러웠고, 사생활 역시 깨끗하지 못했으며 민심 수습책인 보너스 지급을
거부하는등 고지식했고, 즉위를 도운 오토등 공신들을 홀대하고 탐욕스러운 측근
인사들을 제2인자로 기용하는 실책까지 저질렀으며 악랄했던 두 근위대장들을 계속 기용하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갈바는 자신의 잠재적 정적이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루푸스라고 생각해 해임하고 본국
으로 소환했으니, 라인강 일대 군단병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열성 지지
세력이면서도 갈바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자는 자세였던지라 루푸스 해임은 그들을 자극
했으며 갈바는 "나는 돈으로 병사를 사지 않고 징집한다" 는 말까지 하면서 진짜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서기 69년 1월 1일 마인츠에 주둔하고 있던 라인강 군단이 갈바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
났으니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추대하니..... 갈바는 30살 귀족 루키우스
리키니아누스를 양자로 들인다고 선포했는데, 오토 대신 인품 좋은 피소를 선택한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처음 갈바를 지지했지만 대가를 받지 못한 오토는 1월 15일 오전 팔라티누스 아폴론 신전 제사중
황제를 수행하던 일행에서 빠져나온뒤, 준비된 가마를 타고 은밀히 로마 외곽
근위대 병영으로 들어갔으며 그는 사전 협의를 해둔 근위대에게 1월 15일에 황제로 추대됩니다.
갈바는 황궁 안에서 오토가 근위대를 대동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빈덱스와 오토가 추대한
덕에 황제 자리를 얻은터라 반란군과 교전 전략부터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는 황궁 문을 걸어잠그고
방어전을 펼치기 보다는..... 과감하게 반란군과 대치하고 자신은 가마를 타고 대피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갈바의 전략은 가마를 타고 포룸으로 가는 순간 들통났으니 가마는 제15군단 병사들에게
적발됐고, 갈바는 가마 밖으로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진 다음 카무리우스 라는 병사
손에 목이 관통돼 포로 로마노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양자 피소 역시 살해된 다음 목이 잘렸습니다.
68년 빈덱스의 반란 당시 사람들은 갈바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으니 욕심이 있던 이들도 갈바를
중심으로 네로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갈바는 젊은시절 보여준 공정함과 엄격함,
성실함은 사라진 상태였으니 그가 살해된후 황제 자리를 놓고 69년 12월까지 내전이 벌어집니다.
갈바는 제7 게미나 군단을 포함 세개 군단을 편성했는데, 제정 내내 제 기능을 발휘해서 후대에도 "갈바
군단들" 로 불렸으니 3세기의 위기를 거쳐서도 존속해 4세기에는 모두 정예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 개편되었고, 제7 게미나 군단은 4세기 말까지도 히스파니아에 주둔하며 제국을 지켰습니다.
영화 쿠오 바디스에서 네로 축출후 차기 황제 후보로 갈바가 언급되며 마지막 장면에 마차를 몰고
로마로 향하는 모습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하는데, 폭군이 물러간 나라를 바로
잡을 희망으로 비춰지긴 하지만 정작 권좌에 오른 뒤의 행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자멸한 것입니다.
네 황제의 해인 69년에 1월 15일 갈바를 이은 제7대 황제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이며, 네로의 젊은
시절 친구인데 네로 황제의 두번째 부인 포파이아 사비나의 두번째 남편이었으나,
그만 네로에게 아내를 뺏긴 인물로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됐지만 비텔리우스와 내전에서 패해 자결합니다.
시오노 나마미는 말하기를.... “최고 권력자의 교체는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 전달 속도가
느렸던 시대라 사태를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켰는데, 마인츠에서 로마까지 전달이 열흘 걸렸으니
그 반대도 그러할 것인데 오토가 황제에 즉위한걸 마인츠의 게르만 군단이 안 것은 1월 말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게르마니아 군단이 비텔리우스를 옹립하기로 한 것은 1월 2일이었고 갈바가 살해딘
사실을 안 것은 1월 말이니, 그 한달 틈새에 게르마니아군단은 로마로 진군할 준비
를 했는데 7개 군단 4만 2천명과 비슷한 수의 보조병이 움직이는 대규모 군사활동 입니다.
라인강 주둔군과 다뉴브강 주둔군 다음으로 중요한 곳은 정보 전달에 한달이나 걸리는 중동(레반트)
인데,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의 4개 군단과 유대 전쟁을 치르는 베스파시아누스의
3개 군단은 새 황제 갈바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배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를 파견했습니다.
티투스가 그리스의 코린트에 들렀을 무렵 갈바가 죽고 오토가 황제가 됐으며 라인강 주둔군의 비텔리우스가
궐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30세 티투스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결국은 동쪽으로 되돌아
가는 길을 택했으니 이게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서 구하게 된 셈입니다.
할아버지 마르쿠스 오토 때 부터 원로원에 입성했던 집안으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에트루리아인이이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린시절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아내가 될 리비아 드루실라의 집에서 자랐는데,
그들은 성장후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최측근이었고 리비아와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헌신했습니다.
루키우스 오토는 칼리굴라 암살 이후 터진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의 반란을 예상외로 손쉽게 진압했고,
병사들을 다룰때도 공정하고 엄격했으며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암살하려고 한 노예와 측근들을
기소해 논쟁으로 유죄를 받아낼 정도로 유능했으니 사후 원로원과 옛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부, 조모와 부친 모두 황실의 측근이었고 아버지 루키우스가 뛰어난 원로원 의원인 까닭에, 오토는 어릴 때부터
상류층 자제로서 자랐으며 요절한 누나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인 대 드루수스의
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약혼까지 시켰고 형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오랜 친구 네르바의 손녀를 배필로 맞이합니다.
오토는 아버지를 따라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알현했고 일찍부터 소 아그리피나의 아들인 네로와
친한 친구였으니, 황제 즉위 연령과 그에 따른 황제로서의 이미지가 극명하게
달라서 그렇지, 네로와 오토 그리고 네르바 황제에 티투스 까지 모두 같은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토는 네로가 즉위한 이후에도 함께 밤이슬을 맞으며 다니던 사이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네로가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면서 깨지게 되는데, 네로는 포파이아와 잠자리를 가졌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오토에게 강압적으로 이혼을 종용한후 포르투갈인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쫓아냈니다.
어린 시절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방탕한 막내도련님 이미지라 로마 상류층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았지만 강제로
아내를 뺏기고 추방된 일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니, 로마에서 쫓겨나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오토는 의외로 속주를 잘 통치했으니 플레이보이의 완벽한 변신은 수도 로마에까지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습니다.
갈바 황제는 오토가 맨 처음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실책이 많았으니...
특히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오토를 팽하려는 측근들을 기용한 일과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양자
로 삼은 결정이었는데, 피소의 등장은 고령의 갈바에 이어 제위를 꿈꾼 오토에게 큰 실망감을 줍니다.
라인강 군단들의 남하에 자극받은 경쟁자인 도나우 군단들의 적극적인 지지 표명으로 오토는 막아보려고
했으니, 비텔리우스에게 공동 권력을 제안하고 그의 딸과의 결혼을 제안했으며
가이우스 파울리누스라는 사령관이 오토에 가세해 그가 라인강 군단을 서전에서 격파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도나우 전선의 로마군은 라인강 주둔군과 같은 7개 군단인데 달마티아 속주에 2개 군단, 판노니아 속주에
2개 군단, 모에시아 속주에 3개 군단이니 휘하 병력이 없는 오토 황제로서는 천군만마이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오토가 불리한게 첫째는 거리가 멀어 제때 도착하기 어렵고 두 번째는 라인강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세웠으니 단합된 반면에 도나우는 3개 군단의 지지 온도가 달랐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텔리우스의 군대는 7만으로 두개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카에치나 에일리언우스가, 다른 하나는 파비우스 발렌스
가 지휘했는데.... 카에치나가 지휘하는 군대는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도착해 플라센시아를
공격했지만 오토니아 수비대에 의해 격퇴당했고 발렌스의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위해 크레모나에 머뭅니다.
오토측의 오토니아군은 전투뒤 카에치나군을 추격 섬멸하지 않아 라인강군단은 재편성할수 있었으며 이후
라인강 군단들이 합류하여 남하하였고, 파울리누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회전을
치르기로 결심하고 4월 비텔리우스와 격돌한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패배하자 깨끗하게 자결하게 됩니다.
오토는 3월 14일 로마를 떠나 북쪽으로 진군해 브릭셀럼에 기지를 세웠으니 아디우트릭스
1군단, 제미나 13세, 제미나의 전방 파견대, 프라토리아 가드, 검투사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총참모부에는 가이우스 파울리누스와 같은 장군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토측 아디우트릭스 군단이 비텔리우스의 베테랑 라팩스와 충돌한 곳이 중요한 전투였으니 지휘관이 전사했고
오토의 13군단은 비텔리우스의 알라우대에게 패했으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4만명이 목숨을 앓고
오토니아군은 베드리아쿰에 있는 진영으로 도망쳤고..... 다음날 비텔리우스군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브릭셀럼에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오토의 수하들은 후방에서 더 많은 병력이 오고 있다고 말하며
싸움을 종용했지만 시오노 나나미에 다르면 오토는 30년 뒤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극찬
했던 것 처럼 더 많은 죽음을 초래하기 보다는 깨끗하게 자살을 택했는데 황제 자리를
3개월도 채우지 못했고 승리한 비텔리우스는 로마로 행진해 원로원으로 부터 황제로 승인받습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앨 고어는 5,100만 표(48.4%) 를 득표해 54만여 표를 앞서 1위를 기록했으나
선거인단 수에서 271 대 266으로 공화당의 조지 부시( 5,046만표, 47.9%) 에게 석패했는데, 플로리다 주
에서는 2,700여표 차로 패배하였으나 플로리다주 일부 선거구에서 수작업 재검표 결과 400여 표차까지 줄었습니다.
그러니 플로리다주 전체 지역에서 재검표를 할 경우에는 결과가 뒤집혀 선거인단에서 역전할 수 있었는데....
공화당 성향의 판사들이 주도한 미국 연방 대법원의 재검표 중지 판결이 나자 재의를 요구하면
대통령이 없는 상황이 몇개월간 이어져 미국이 큰 혼란에 빠질 것으로 보고 깨끗하게 승복한 것과 유사합니다.
내란의 여신은 아직도 의심의 여지가 있고,
부드러운 오토가 이길 가능성이 있을지언정,
그는 많은 피를 흘릴 수도 있는 싸움을 포기하고,
확실한 손으로 그 가슴을 찔렀도다.
반드시 카토의 삶이 카이사르 자신보다 더 위대해지도록 해주시오.
그 죽음에서 그가 오토 보다 더 위대했을까요? - 마르티알리스
도미티아누스 시절의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오토가 군을 모아 반격했다면 이겼을 것을 밝히며, 시를 지어
죽음이 소 카토 보다 신념 있었다고 칭찬했으며 마르티알리스, 타키투스 등은 오토가 비극을 막고
본인 명예, 자신을 믿고 싸운 부하들의 넋에 책임을 지고자 자신을 희생해 더 큰 희생을 막았다고 극찬했습니다.
오토는 잘생기고, 멋쟁이였으니 여성들이 연상되듯 자신의 수염을 면도후 물에 적신 빵으로 문질러 면도후
피부를 관리하는등 왁싱에 신경을 썼고 성격도 매력적이고 유쾌한 사람이었는데....
대머리 부분이 컴플렉스라 가발을 쓰고 다녔으니, 워낙 잘 가려 대머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의 제8대 황제는 비텔리우스인데 5대 황제 네로를 존경하고, 그의 정책을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니,
로마 출생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루키우스 베테리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집정관에 시리아 속주 총독을 역임한 사람이며 모친 섹스틸리아는 명문가 마르쿠스 섹스틸리우스의 딸이었습니다.
부친 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귀족이 아닌 이탈리아의 기사계급 출신이었는데, 자신의 재능만으로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 일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으니 정치,
행정력을 인정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주사위놀이, 전차 경기등의 지식과 분석 능력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별볼일 없던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 클라우디우스는
즉위후 비텔리우스의 부친을 신뢰했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역시 황제가 정치적
이유로 자신의 조카인 소 아그리피나와 재혼하려고 할 때 근친혼으로 이야기가 많던 결혼을 통과되게끔 만듭니다.
부모와 처가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아래 잘나간 만큼, 그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까지 승승장구했는데, 비텔리우스의 연이은 성공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년 시절부터 카프레이아 별궁
으로 건너가 교육도 받고 인맥도 쌓은 것과 아부 기술이었으니 네로 시대에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냈습니다.
저지 게르마니아 속주 사령관 비텔리우스는 엄격한 규율을 유연하게 다루고 성격이 좋은덕에 인망을 얻었는데,
갈바에게 불만을 품은 라인강 군단병들에 의해 쾰른에서 황제로 추대되었고 천운이 따랐는지 갈리아,
브리타니아, 라이티아 주둔 군단들에게도 지지선언을 받으면서 반 갈바 운동의 새로운 황제로 세력을 모읍니다.
기대와 달리 비텔리우스는 황제감이 아니었고, 네로를 존경하고 사랑했을뿐 네로 보다 못한 위인이었으니,
부하들을 먼저 보내고 뒤따르면서 열매만 따먹는 전형적인 윗분의 행태로 "갈바 타도" 를 외쳤는데,
로마 여행길에는 환락과 축제, 술파티에 몸을 맡겼고 수행원들과 병사들도 무질서함 속에서 진군 합니다.
비텔리우스는 6월 말에야 로마에 개선했는데,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가 되니 내전의 상처를 수습하기는커녕 소금
을 뿌리니 도나우 군단 병사들을 백인대장들을 처형하고 병사들을 크레모나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투입시키는 어이없는 짓을 했고 도나우 군단을 이긴 지역을 시찰하며 했던 말이 "적의 피는 냄새도 향기롭구나!"
이 적들은 도나우 군단이라? 이들이 비텔리우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곤 하나 같은 로마군이었기에 문제가
큰 발언이었으니, 내전 수습에는 평상시보다 더 고난이도의 정치력을 발휘해도 모자랄판에 이 말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뻔하니, 비텔리우스와 크레모나 시민들에 대한 도나우 군단의 분노는 깊어집니다.
비텔리우스는 근위대를 해고하고 라인강 군단 병사들로 새로 꾸렸지만 본국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근위대 전체를 반발하게 만들어 적으로 돌렸으며 해고된 근위대 병사들과 가족들은 적이 됩니다.
비텔리우스 즉위후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 장교로 복무해온 게르만 족장 율리우스 키빌리스 주도로
터진 바타비아 반란과 벨기에에서 시작돼 갈리아 북동부로 퍼져나간 켈트인들의
반란을 퀸투스 루푸스에게 진압하라고 지휘권을 내렸는데 그는 1년만에 두 반란을 모두 진압합니다.
비텔리우스는 네로를 존경했으니 네로의 영혼을 위로하고 정책을 계승하기도 했지만 문제는“로마의 돼지”
답게 폭식에 탐닉하며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니, 느긋하고 게으른데다가 방종한 사람이라,
로마 귀환후 한 일이라곤 귀족 가문들의 희귀하고 맛난 레시피로 만든 고급 요리 탐닉에만 치중했습니다.
비텔리우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당해 증오심에 불타던 도나우 군단이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자 무키아누스는 유대반란 진압군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비텔리우스 타도를 선언하면서 내전이 시작됩니다.
무키아누스가 로마로 진격하자 도나우 군단은 무키아누스에 앞서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베드리아쿰
에서 비텔리우스가 보낸 진압군과 전투를 벌여 도나우 군단이 승리했고 비텔리우스편의
총사령관이었던 카이키나 마저 도나우 군단에 사로잡히면서 이제 비텔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됩니다.
궁지에 몰린 비텔리우스의 패잔병들이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로마장관 사비누스를 살해하고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불태웠지만 비텔리우스는 무기력하니, 전 아프리카 총독이자 원로원 의원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500명 기병을 이끌고 도나우 군단에 맞서 분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해 항복합니다.
로마를 점령한 베스파시아누스측의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황궁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탈출이
실패하니, 비텔리우스는 황궁 안의 방 한 곳에 숨었는데, 침대 매트리스와 집기로
자신이 숨은 방을 막고 걸어 잠그며 필사의 몸부림을 쳤으니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로마 점령 전부터 복수심에 불탄 병사들은 황궁을 수색했고 비텔리우스는 발견되어 비참하게 병사들에게 끌려
나왔는데..... 체포 당시 짐승 다루듯 끌려 나왔고, 입은 옷은 거의 찢겨져 반절 이상 벗겨진 상태였습니다.
반나체로 로마 시내로 끌려간 비텔리우스는 분노한 시민들과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 포로 로마노에서 갖은 모욕과
고문을 당한뒤 참수형을 선고받아 목이 잘렸으며 시체는 티베르강에 던져졌고 머리는 장대에 꽂혀
퍼레이드 행렬에 동원되었으며 비텔리우스의 8살된 아들 아울루스 게르마니쿠스와 동생도 같은 날 살해되었습니다.
비텔리우스의 아내 갈레리아 푼다나와 딸 비텔리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졌는데, 비텔리아는
아버지의 부관이자 벨가이 속주 총독을 맡았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와 결혼했으며
다음해 70년 발레리우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집정관으로 지명된후 임기를 수행하기 직전 사망합니다.
비텔리아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설득을 받아들여 다른 남자와 재혼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제공한 집에서
유복하게 살았으니, 프랑스의 계보학자이자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 등 일부 역사가들은 비텔리아
의 재혼 상대는 88년 보결 집정관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모계 조상인 리보 프루기 라고 추정합니다.
비텔리우스는 식충이로 널리 알려졌고, 탐욕과 부도덕함에 양성애적 사생활로 악명이 높았는데, 그는 한
연회에서 생선 2천마리, 새 7천마리를 요리 재료로 사용할 정도로 사치를 부렸고, 식탐과
식욕이 엄청났으니.... 몇 달동안 그가 연회 비용으로 소비한 금액만 무려 9억(?) 세스테르티우스 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제국 일년 세입이 평균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였고, 티베리우스가 남긴 말도 안되는
유증금이 2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가 즉위후 유언 집행과
'빵과 서커스', 추모식으로 8개월간 쓴 금액이 2억 세스테르티우스인걸 감안하면 말 그대로 미친 소비였습니다.
69년에 단명한 세 황제 중 제일 무능한 인간으로 공인될 정도로 평가가 최악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전체를 살펴봐도 로마 원로원에게 "네로 + 도미티아누스를 합친 것 같은 황제" 라고
비난받은 콤모두스 보다 술 더 떠서 엘라가발루스 정도는 되어야 나란히 놓을만 할 정도의 암군이었습니다.
칼리굴라가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유언장에 따라 공공건축물 건설을 재개하고, 티베리우스가
중지시킨 건물을 개보수함과 동시에, 어머니, 두 형, 고모부 정식 장례 수행, 즉위후 민심 확보 차원에서
개최한 빵과 서커스 제공, 국가 기념일 축제로 8개월 동안 2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썼는데 비해 몇곱절 이었습니다.
비텔리우스는 황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라인 강 전선의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하다시피 한 데다가
무리한 징병까지 감행해 게르만 부족들의 반감을 사 바타비아 반란의 원
인을 제공했으니, 로마에 입성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생깨나 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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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겸손[謙遜]없는 자부심[自負心]은 자만[自慢]이 되고
겸손[謙遜]없는 용기[勇氣]는 무모[無謀]함이 되며
겸손[謙遜]없는 지식[知識]은 아집[我執]이 됩니다.
겸손[謙遜]없는 비지니스는 고객[顧客]을 무시 하게 됩니다.
겸손[謙遜]없는 승리[勝利]는 오만[傲慢]이 되고 맙니다.
겸손[謙遜]이라는 비움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데
자만[自慢], 무모[無謀],
아집[我執], 무시[無視], 오만[傲慢]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더 담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 편안한 하루길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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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에.... 로마에
황제가 4명이나 들어섰다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