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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년 산책] 인문학의 위기, 무엇이 문제인가
출처 중앙일보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0183
내가 연세대학을 떠날 때는 ‘철학은 점점 더 필요해지는데, 철학과가 설 자리는 줄어드니까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했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대학마다 ‘인문학이 성장해야 하는데 인문학의 위기가 찾아온다’라고 한다.
지금은 교육계 풍조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고등학교 때부터 의과대학을 지망한다.
인류 정신·사상 인문학이 뿌리 인문학 배제하는 사회는 퇴보 히틀러의 독일과 옛소련이 사례 대학서 인문학적 소양 교육해야 |
김지윤 기자
사회가 보다 필요로 하는 공학과 지망까지 줄어드는 추세다. 그러니까 문과 대학에 해당하는 인문학은 어떻게 되겠는가. 앞으로 과별 지망 없이 신입생을 선발했다가 2학년으로 진학하면서 전공 학과를 선택시킨다면 많은 대학이 인문학부를 유지하기 힘들 것 같다. 인공지능(AI)의 기능에 의존한다면 인문학까지 기계공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인문학에서 창출해야 하는 인문학적 사유와 가치는 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 같다.
의과대 쏠림 현상의 심화
세계정신과 사상사의 흐름을 보면 인간 생활을 이끄는 정신적 가치와 기능은 인문학에서 출발했다. 인문학의 뿌리에서 이성적 사고와 윤리적 가치를 얻어 자란 것이 사회과학이 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과학적 사유가 주류를 이루면서 오늘의 메커니즘 사회까지 열매 맺게 되었다. 그 정신사적 나무가 크게 자라니까 뿌리가 되는 인문학은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 가치가 없는 듯이 착각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뿌리를 통해 나무가 자라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면 나무는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고 폭풍을 맞게 되면 뿌리째 쓰러질 수 있다. 그런 인문학을 소홀히 하거나 배제한다면 학문계는 물론 사상계 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이성적 사고와 양심적 가치를 배제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이다.
공산국가의 인문학 거부
지금 세계는 중동지역에 대해 그 후진성과 역사적 퇴락상을 걱정한다. 그 큰 원인은 종교적 가치와 세계관 때문에 인문학을 수용하지 못했고 인문학적 사유의 유산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이성의 자유로운 창조성과 사회적 생활 가치인 양심의 자유까지 억제해 왔다. 이스라엘의 구약 정신과 이슬람의 코란 적 인생 교리주의에 빠져 이성과 양심적 비판과 평가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부재가 근대화의 역사적 과정을 포기한 결과다. 우리가 공산주의 국가를 반대하는 것은, 공산국가는 그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인간적 자유와 이성적 사유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런 유물사관을 유일한 정신적 가치로 주장하는 동안 공산국가는 인문학을 거부할 뿐 아니라 배격하는 반휴머니즘적 잘못을 범하게 된다. 소련 국제공산주의 국가가 붕괴하였고 지금의 러시아, 중국, 북한을 비롯한 공산국가에는 사상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인문학적 자유 사상과 이성과 양심적 가치를 부정한 결과다.
이런 역사적 현실을 국내, 국제적으로 관찰한다면 인문학을 배제하거나 거부하는 국가와 사회는 스스로 정신적 빈곤과 종말을 자초하게 된다. 히틀러의 독재 기간의 독일도 그랬다. 공산 소련을 종식시킨 고르바초프는 공산국가의 유일한 인문학 정신을 가졌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인문학적 정신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성과 자유에 따라 인간성의 완성을 추구한다. 이성적 사유에 입각한 진리와 진실, 자유로운 정신의 창조에 따르는 사회 가치의 창출이다. 휴머니즘의 완성이다. 인간다운 삶의 창조 정신이다.
대학생활 초창기 인문학 교육 중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철학 과목을 강요하거나 문학과 역사적 연구를 대학의 필수과목으로 복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교육과정과 대학 교양과목으로 되돌려 인문학적 사유와 열매를 보편화시키자는 주장이다. 중고등 학교 과정의 대부분이 인문학적인 것이다. 정상적인 대학에서는 대학 생활 초창기의 많은 부분이 독서를 동반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기초교육이다. 고등학교까지는 국민다운 교양 교육이 필요했고 대학 초창기에는 지도자의 자질을 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교육적 노력을 충실히 감당한다면 인문학의 빈곤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 교정(敎程)의 중심 내용은 무엇인가. 정신적 고전에 대한 학습과 독해였다. 정신적 고전은 무엇을 알려 주는가. 인간은 누구나 이런 사상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 가치에 해당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학다운 대학은 적어도 대학 1·2학년 과정까지는 인문학적 사유와 가치를 위한 기초교육을 이끌어 준다.
그런 과정을 밟은 대학생이 역사학과 더불어 역사철학을 갖추게 되고, 법학을 전공하는 동안에 법철학의 정신을 찾아 지도력을 얻는다. 경제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더라도 그 원천적 가치와 민주적 방법을 보다 높여가게 된다. 그런 인문학과 철학적 사유와 가치를 터득한 사람은 대학 생활을 마치고 직장과 사회생활을 통해서도 그 휴머니즘적 의미와 가치를 구현시키는 지도력을 유지한다.
그런 인문학의 정신을 염두에 두고 철학, 역사, 문학 등의 학문을 전공하는 대학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인문학은 인간 정신의 출발이면서 결과를 창조할 수 있는 학문 중의 학문으로 역할 할 수 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빛명상
현대인은
우주를
잃어버렸다
당신은 티 없이 푸루른 하늘을 도취된 듯이 본적이 있는가? 여름 밤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바라본 그것이 '우주(宇宙)이다' 말이 어렵고 추상적이지만 실로 '우주'는 생생하게 우리와 아주 밀착되어 있다. 머리위에 펼쳐진 우주는 그 자체가 '기적 현상'이나 다름 없지만, 우리 현대인은 우주에 너무나 무관심한 듯하다. 우리의 눈과 귀는 텔레비전, 인터넷, 음악들로 온종일 채워지고, 또 우리의 머리는 교과서, 어학 책, 각종 수험서적으로 잔뜩 짓눌려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주와의 교감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바닷가의 노어부는 오랜 세월 바다와 씨름해 온 탓에 바다에 대한 육감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노어부는 바닷물의 맛과 맡아지는 향내 그리고 미세한 해류와 해풍만으로 바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 알 수 있다. 노어부와 바다 사이에는 끈끈한 교감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인의 기억에서 지워진 고대인들은 노어부처럼 우주와 교감을 나누었다. 그때, 우주와 교감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양의 신화와 경전 그리고 여러 고대 문헌을 통해 중단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현대인은 놀라운 기적 현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가버리고 있다.
고대인들에게 우주는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동서양을 관통하는 `생명의 나무(the tree df life)’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주를 상징하고 있는 `생명의 나무’는 우주목(宇宙木), 세계수(世界樹), 중심축(中心軸 : axis mundi), 지혜의 나무라고 불린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의 유물을 보면 나무가 중요한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인도에서 전해지는 『우파니샤드』에는 우주는 하늘에 뿌리를 두고 땅 위에 가지를 드리운 채 거꾸로 서 있는 나무로 그려진다. 이 나무가 우주의 신, 브라만(Brahman)을 나타낸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는 곳에도 보리수가 서 있었다.
유대교의 『카발라』에서도 생명의 나무인 `세피로드의 나무’가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상징으로 전승되고 있다. 기독교의 『창세기』도 에덴동산의 한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단군신화」를 보면 환웅이 이땅에 내려 온 곳은 바로 신단수(神檀樹) 밑이다. 이 신단수는 태백산 정상에 하늘을 향해 서 있다. 웅녀가 사람으로 환생하기 위해 기도를 드린 곳 역시 신단수이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신화와 종교에 나타나는 `생명의 나무’에 따르면 우주는 지상의 인간과 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를 인간의 삶과 별개로 놓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의 생명과 삶의 의미는 우주와의 교감 속에서 비로소 결정되었다.
인간의 `우주와의 교감’은 기독교의 『마태복음』에도 엿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중략)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동방박사는 어떻게 예수 탄생을 알 수 있었을까? 위에서 보듯이 이들은 별을 보고 알아낸 것이다. 바로, 동방박사들은 우주와 대화하고 교감하는 점성술사였던 것이다.
비유하면 `우주와 지구’의 관계는 `태평양과 섬’의 관계라 할 수 있다. 태평양에 떠 있는 섬은 해류와 기후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여 있다. 섬의 생태와 섬사람들의 삶은 태평양의 기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섬사람은 바다를 에워싼 주위의 구름과 바람으로 앞으로 다가올 기후를 예측한다. 이처럼 고대인은 별빛과 별들의 운행을 보고 다가올 미래를 점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 인간의 가슴에서 우주가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몇몇 종교는 신을 내세워 우주를 교리와 경전으로 박제화해버렸다. 또한 우주와 인간 사이에 성전과 성직자를 세워놓고 인간과 우주의 일대일 교류를 차단해버렸다.
그러면서 인간은 고요하게 자신을 관조하기보다는 신에게 의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근대 과학은 우주를 죽은 물건으로 여기고 우주와의 교감과 대화를 미신으로 치부해버렸다. 우주는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관찰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쯤 되면, 당신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도대체 `우주와의 교감과 대화’라는 건 말만 그럴싸하지 실체가 있습니까?"
이에 대해 보충설명을 하겠다. 당신이 바라보는 머리 위의 우주는 멀리 떨어진 채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지구에는 엄청난 우주의 에너지 입자와 방사선이 쏟아지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없고, 피부로 느낄 수 없을 뿐이다.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지는 에너지 미립자와 방사선을 총칭해 `우주선(宇宙線 : cosmic rays)’이라 한다.
`우주선’의 주성분은 양성자(P)이고, 그 외 10% 정도의 헬륨(He)과 적은 양의 리튬(Li), 베릴륨(Be),붕소(B) 등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의 에너지 상한선은 1020~1021eV인데, 세계 최대의 양성자 시크로트론을 만들 수 있는 최대 에너지가 712eV(LHC)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양임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우주선은 대기권에서 걸러지고 나서 지상으로 떨어진다. 어떤 학설에 따르면 `우주선’이 인간의 몸을 침투해 DNA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현재 밝혀진 것이 이 정도이다.
좀 더 쉬운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햇빛을 기분 좋게 쪼여본 일이 있지 않는가? 겨울 지나 봄 초입에 따스하게 살갗에 닿는 햇빛은 숨죽이는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할 것이다.
이것은 다만 착각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다. 햇빛을 쬐면 세로토닌, 멜라토닌, 성장 호르몬 등이 분비되고 게다가 암 예방에 좋은 비타민 D가 생긴다. 여기까지가 현재의 의학계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고대인들은 이처럼 물질적으로 `우주와 교감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시절에는 그래서 지구와 지상의 삶과 인간은 우주와 빈틈없이 하나로 이어졌다. 이 바탕 위에서 `생명의 나무’가 자라났다.
하지만 이제 우리 현대인은 우주를 쉽게 느끼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우주와 단절된 채로 고독한 자아와 실존적 죽음을 대면하기에 이르렀다.
출처 : 해독제 2012년 7월 7일 초판 1쇄 P. 34~39
다시금
떠오르는
명상과
영성의 삶
당신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책을 아는가? 이 책은 2006년 출간과 동시에 200주 가가이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또한,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출판되어 850만 독자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 책은 2010년에 국내 영화로도 소개되었다.
이 책은 대체, 어던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영화는 뉴욕에 거주하는 31살의 여성 저널리스트 리즈가 이혼을 결심한 후 이탈리아, 인도 그리고 발리 등을 여행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이탈리아에서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인도에서는 아쉬람에서 명상과 요가를 하고, 발리에서는 한 주술서를 만난다. 이 과정에서 중니공 리즈는 인도의 명상과 요가에서 마음의 아넝을 얻는 것과 내면의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줄거리를 보면, 왜 전세계인들이 열광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알다시피 뉴욕은 세게 유행의 중심지이다. 이곳에 거저하는 뉴욕커는 전 세계인의 문화를 이끌어 간다고 할 수 있다. 뉴욕커 리즈가 추구하는 것은 마음의 안정과 내면의 치유인데 이것을 명상과 요가로 해결한다. 이러한 리즈의 모습은 곧 전세게인의 입장과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상에서 마음의 안정과 내면의 치유를 얻는다는 것 말이다.
이를 통해서 현재 사람들은 '명사'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종교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명상 속에서 찾는 것은 이제 세계적인 트랜드로 자리 잡은 듯하다. 신을 섬기는 것에서 탈피해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자아의 본질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것이다.
명상에 대한 현대인의 이러한 관심은 결구 '이성(理性)'의 한게에 부딪히는 데서 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성'으로는 온전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현재의 삶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내면의 호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 않는가?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것만 같은 가속도의 삶에 질식할 것 같지 않는가? 감동과 동감의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기성종교에 이성이 호락호락 투항 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해서 다시금 조명을 받는 게 이성이 아닌 '영성(靈性)'이 아닌가 싶다. 이성을 껴안으면서도 이성에 구속되지 않고, 또한 종교와 공통 분모를 가지면서도 종교의 도그마가 전혀 없는 것이 바로 영성이다.
영성, 명상에 대한 추구는 한때의 유행에 지나지 않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세계미래학회는 이성과 지식의 시대가 지나 영성의 지대가 온다고 전망하고 있다. 2030년에는 글로벌 지식사회와 글로벌 시민사회가 되고, 2050년부터는 영성의 시대가 열린다고 밝혔다.
『메가트렌드』의 저자이자 미래학자인 존 나이스비트는 말했다.
"영성은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성함을 경험하는 것과 그것을 경험하려는 욕구의 전부다."
조지 워싱턴 대학 윌리엄 하랄 교수는 말했다.
"2020년 정보 시대가 끝나고 지식 이상의 가치와 목표를 중시하는 영성 시대가 올 것이다."
사실, 아득한 시절에는 모든 종교의 근간에는 영성의 삶과 명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시절의 고대인들은 침묵 속의 내면 관조와 호흡을 통해 만물 속에 깃든 정령과 교감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숲속의 나무와 조잘거리는 새, 대지를 뛰어다니는 동물들과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과 바위와 허공을 떠다니는 구름 그리고 바다와 머리 위에 터진 듯이 펼쳐진 하늘과 그 위에 수놓아진 별들 어느 것 하나 정령의 숨결이 배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안타깝게 이 시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현재까지 고대의 전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인디언의 삶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반드시 들어맞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인디언의 영성적 삶과 명상은 오늘날 거대 기업화한 종교와 달리 많은 면에서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동물학자 어니스트 톰슨 시튼의 편저 『인디언의 복음』에 따르면 텍사스의 촉트족 인디언과 60년을 살았던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북미 인디언들이 구세계(유럽)에 지금까지 알려진 비기독교 종교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종교와 위대한 창조주에 대한 가장 숭고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미 인디언은 사제도 없고 우상도 없고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도 지내지 않지만 직접 위대한
영(靈)에게로 나아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보면서 그분을 예배했고, 자기를 신령(神靈)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는 위대한 영에게 경배했다.
그는 영이며 유사한 영을 피조물에게도 심어놓아 그 둘 사이에 교제가 있도록 한 분이다.
같은 책에서 인디언 토벌대로 활약하면서 실제 수우족과 함께 몇년을 살았던 시튼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더 이상의 친절과 진정한 기독교 정신을 어디서든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나이든 사람, 과부들과 고아들을 누구보다도 먼저 돌보았다.
캠프를 옮길 때마다 그들 중의 누군가는 신경을 써서 과부의 천막을 제일 먼저 옮기고 제일
먼저 세웠다.
사냥한 후에는 매번 큼직한 고기 덩어리를 가장 필요한 집 문앞에 떨어뜨려 주었다. 나는 형
제처럼 대접받았다. 강조하건대, 그 인디언 무리만큼 진정한 기독교도들로 구성된 교인들의
공동체를 이제까지 나는 본 적이 없다.
인디언은 기본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동족에게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가가 중요한 삶의 척도였다. 인디언의 사고와 행동과 말에는 영이 깃들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는 영적인 것, 영성적인 것에 두어졌다. 그들이 경배한 `위대한 영(Great Oversoul)’은 `인디언의 신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만물의 창조자이며 지배자인 한 위대한 영이 있고 우리는 그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분은 영
원하며, 눈에 보이지 않고, 전지(全知)하고 전능(全能)하며, 형상화할 수 없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존재는 살며 움직인다. 그분은 모든 경배와 헌신을 받으실 분이다. 모든 선한 것은 그분에게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분을 경외하며 그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기도와 희생, 그리고 선행을 통해 그분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
고행과 금식, 그리고 고족한 찰야(徹夜)를 통해 그분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이런 지식에 의해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비인격적이지만 때로는 동물과 새, 구름, 비, 산, 사람들과 사물에 영감을 불어넣고 친히 들어오기도 한다. 그분 아래 작은 신들이 여럿 있다.
인디언에게는 이러한 `위대한 영’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것이 매일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인디언들은 지평선에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홀로 말없이 기도하면서 태양을 각자의 영혼으로 맞이했다.
인디언의 한 선지자는 불안하고 시퍼런 상처가 아물지 않은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고대로부터 영성적 삶과 명상을 간직해온 인디언이 주는 명쾌한 처방이 아닐까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햇빛에 감사하라. 살아 있고 힘이 있는 것에 감사하라. 감사할 것이 전혀 없다면 그 잘못이 네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쉬어라.
도널드 K. 스웨러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장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역시 영적인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인간 공동체는 자연을 포함하기 때문에 자연 없이는 인간도, 인간의 번영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현대인들이 옛 사람들의 `영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무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미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지 않아요. 나무의 영혼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력의 풍요로움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지요. 자연의 영성을 찾아가며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게 `문명병’을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출처 : 해독제 2012년 7월 7일 초판 1쇄 P. 40~45
첫댓글 인간과 신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네요. 둘이 아닌 하나, 일자로서의 나를 돌아봅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빛명상과 영성적인 삶 감사드립니다.
명상과 영성의 삶
귀한 글 감사합니다
명상과 영성의 삶,
빛명상을 할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
귀한내용의 글 감사합니다.
해독제의 빛글 감사합니다.
어린시절 툇마루에 누위
홑아지는 별들을 보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빛명상을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빛의글 감사합니다.
<명상과 영성의 삶> 귀한 빛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주와 단절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인류의 자유와 행복,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을 마음에 담습니다.
우주와 교감하며 살아온 고대인들과 달리 오직 과학과 종교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우주와의 교감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주와 교감하는 빛명상과 함께 진정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명상과 함께 빛안에서
살아가는 오늘에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주마음의 보살핌에 살아갈수있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