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2절이 대문자로 된 것은 1절이 모든 물음의 해답이 된다는 뜻이다.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의 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므로 본받을 수 있다.
바울은 10장 33절에서 “나와 같이” 라고 말하므로서
자신도 고린도교회에 본이 되고자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19-23절 까지는 신앙의 테크닉이다.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신의 중심을 흩트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표를 내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자세이다.
11장 1절은 10장의 결론이면서 11장의 제목이 된다.
1절 내용이 지켜지는 방법이 바로 11장 전체 내용이다.
2절의 유전문제 - 형식과 내용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11장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1) 16절까지는 머리에 쓰는 문제이며,
2) 17절 부터는 성만찬의 문제이다.
두 부분의 차이점은 앞에 것은 칭찬하고(2절)
뒤엣것은 칭찬하지 않는 것이다(17,22절)
유전은 사도들이 전달해 주는 것과 문화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긴 머리는 중동여인들의 문화이다. 유전은 내용이 중요하다
그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유전의 이유는 주인을
의식하는 삶의 표현이다(10절) 사람의 권세는 머리에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의식하라(1절) 바울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고 너희는 우리를 닮아라’ 이다.
그런데 이 유전이 폐지된 이유는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다(15절)
레19:27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라’
21:5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라
민 6:5 ‘삭도를 대지 말라’(나실인)
욥 1:20 ‘머리를 민다’ 이것은 욥의 각오이다.
머리를 민다는 것은 수치와 모욕감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참회할 때에 간혹 머리를 깎는다.
겔44:20 제사장들은 머리 관리를 잘하라
옛날부터 동양에서도 머리를 소중하게 생각을 했다(상투)
16절 사실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다(요18:39절의 전례와 같은 말)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는 변론이 있었다. ‘해야 된다 안 해도 된다’
사도행전에는 없었으나 헬라 문화를 답습한 고린도교회는 이 규례가 있었다.
15절이 16절을 잘 설명하고 있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2절에는 여인들이 머리에 쓰는 유전을 칭찬도 했지만
3절에서는 ‘알기를 원한다’고 했다. 왜 머리에 쓰는가 그 의미를 알라는 말이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니님이 되심을 알아라는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의 유전이 있었지만 교회시대의 유전은 이와 차이점이 있다.
마15장의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지적하셨다.
그들은 손을 씻을 줄만 알지 그 의미를 몰랐다.
갈1:14절 유전에 대해 열심이었다.
골2:8절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
살후2:15, 3:6절 유전을 지키라. 고린도전서 11장과 같은 유전을 말한다.
결국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과연 여자의 영광이 남자인가? 그렇게 되고 있는가?
또 남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는가?
17절 이하에서 칭찬하지 않는 이유는 성찬을 잘 못하면 분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루터파와 칼빈파가 갈라진 원인도 성만찬 문제였다고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루터파가 주장한 화체설도 일리가 있고 칼빈의 기념설도 맞다.
다만 원리가 중요하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다.
화체설은 한 몸이 되는 것이며 기념설은 그와 같은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다만 떡과 잔이 실제의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주장은 억지가 있다.
만약 성만찬으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면 그 성만찬이 해롭다.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진다.
18절 첫째 문제는 분당이다
사실 교회의 편당은 불가피성이 있다.
그렇게 해야만 옳은 사람이 나타난다 바로 옳다 인정받는 사람이 나온다(19절)
20절 이하는 그만 각각이 되어 버렸다.
분당이 되면 각개의 활동이 되어버리므로 유익되지 않는다.
모래 같은 사람은 뭉쳐지지 않아서 문제이고 진흙은 줏대가 없어서 문제이다.
21절 이하는 분당이 각각의 양상으로 발전한다.
당시의 성만찬의 개념은 식사였다. 요즘처럼 예식이 아니었다.
일종의 뷔페였다. 그러다보니 한 쪽은 흠뻑 취하고 다른 한 쪽은 굶는 현상이 나타났다.
교회가 생긴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모임과 성만찬이었다.
그런데 형식을 강조하다보면 내용과 중심이 변질이 되고 만다.
22절 성만찬을 각각 취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게 되었다.
1) 성령으로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죄
2)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므로 형제들에게 대한 죄
마15장처럼 유전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밟아 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칭찬하지 않았다.
바울의 고민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랴’
이렇게 말하면 바울이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렇게 하라고 했다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편리한대로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참 편안해 졌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묵상을 많이 해야 한다.
23절 진정한 유전의 의미는 ‘주께 받은 것’이다.
24절 ‘행하라’인가? ‘기념하라’인가?
성만찬의 참 의미는 성령을 통해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분과 한 떡, 한 몸, 한 영이 된 비밀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이해하면 다른 복음을 다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성만찬 대신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영접이며 새 언약이다.
이것을 행하라 하심은 새 언약을 성취하라는 뜻이다.
주님의 몸을 성령 안에서 기념하면 행하는 능력이 나온다.
26절
1)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
2) 주의 죽으심을 전하라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이다.
출애급한 1세대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불과 구름기둥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죽었다.
2세대들이 법궤(말씀)를 매고 요단강을 건넌 다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세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사람들에게만 스며들어 온다. 배어든다.
27절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
대문자로 시작한다. 그 의미는 지금까지의 결론이라는 뜻이다.
내용이 없으면 형식에 참여하지 말라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성만찬을 잡수셨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현하시기
위해 성령이 오시면 자신의 몸을 주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의 죽으심을 계속 기념하는 것은 바로 ‘오실 때’까지이다.
그런데 그 ‘오실 때’가 언제인지 각자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원, 형벌이 있느니라)
만약 주의 영으로 그 분과 하나 되는 내용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죄가 된다.
의식이 외식이 되고 만다. 차라리 안하면 죄가 아니다.
의료보험카드를 빌려 쓴다고 가정을 하면 그 사람자체 안에 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가짜 비표를 달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같은 예이다.
그래서 28절 ‘자신을 살펴라’고 하신다.
롬8:1-11절의 사람인가 확인 곧 시험해 보라(도키마조) :고후13:5, 요일4:1
고전12:13절의 말씀 곧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시인하는가?
그래야만 롬12:2절처럼 마음을 새롭게 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말씀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28-29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충분한 시험을 거친 후에 떡과 잔을 마셔야 한다.
비로소 그 떡과 잔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죄 곧 심판을 먹고 마시게 된다.
스스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판정을 해야 한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죄이며 판단이다. 스스로 판단이 된다.
롬2:2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되어진다(원칙)
벧전4:17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이 된다
계17:1 음녀의 심판(크리마)- 양쪽으로 갈라놓는 것이다
계20:4 심판의 권세 곧 판단의 권세이다(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30절 ‘이러므로’ - 약한 자, 병든 자, 잠든 자, 형벌의 결과를 말한다.
29절 때문에 이런 사건이 생긴다. 스스로 판단 곧 심판이 되기 때문이다.
32절에선 징계라고 한다.
그래서 28절 ‘살피고’(도키마조) -시험하고,
31절 ‘살폈으면’(디아 크리노) -분별을 하라
그리스도인인가? 세상 사람인가?
요8:15-16절 예수님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올바른 성만찬을 위해서는 고전2:15절의 신령한 자의 판단이 필요하다.
스스로 판단을 받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징계이다(32절)
그래서 만약 자신을 살필 수 없으면 32절의 결과가 온다.
주님의 판단아래 들어간다. 세상과 함께 정죄(카타크리노)가 되고 만다.
따라서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범하는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터득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새 언약을 자신 안에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만약 합당치 않으면 세상과 같아진다.
히12은 징계이다. 성도들이 히11장처럼 믿음의 삶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징계가 온다.
아들의 대우를 하신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도망을 가면 안 된다.
징계의 목적
1) 살리려고(히12:9)
2)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려고(히12:10)
3)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히12:11)
일차적인 징계는 스스로 판단이 된다. 다만 양심의 가책이냐 말씀에 의한 분변이냐?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다.
주님도 십자가의 고통과 수욕을 참으셨다.
버림의 고통을 이기셨다. 예수님은 피할 수도 이길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러나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시고 참으셨다(히12:2) ‘십자가를 참으사’
- 이건 단순한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전부이다.
불가지한 고통과 수욕이다.
욥33:14 잔소리 하듯 말씀하신다
15 꿈에서 까지 말씀하신다
16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신다.
17 꾀를 버리도록 교만을 막으시려고 계속 말씀하신다.
19절 이하에 징계를 받는다.
징계를 거친 후에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한다. 까불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들을 살리려 하시기 위한 징계는 필수과정이다(히11:9)
그러므로 참아야 한다. 까불고 떠들고 피하고 장난하지 말라
왕상19장의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는 그야말로 동작 그만이다.
여러 현상이 다 지나간 후에 천사가 ‘먹어라’ 한다.
그러므로 히12:12절은 징계를 받는 순간은 활동정지가 됨을 말씀한다.
그러나 태풍은 지나간다. 다만 그 흔적이 남을 뿐이다.
만약 이런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징계는 꼭 말씀을 통한 꾸지람으로 온다(히4:12)
-찔러 쪼갠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근본적이고 근원적 치료를 해야 한다.
33절 처음에는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으나 나중에는 그만 음식을 먹으려고 모였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폐단이다.
그래서
34절 만약 배고프면 집에서 먹어라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하라. 판단거리가 없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교회나 성도가 판단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옳은 기준이 없는 편견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편견은 기준에 의해 다시 판단을 받는다. 하나님의 기준에 판단을 받지 말라
영적인 차원을 어떤 의식이나 제도 안에 가두면 안 된다.
그리고 교회가 어떤 세력의 단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를 통해 오직 진정한 자아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사실 약한 자나 가난한 자는 그럴만한 원인이 있다.
안팎으로 건강하지 못하다. 교회가 그들의 편을 든다고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약자의 편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급의 질고에서
구원하신 것은 그들이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창1장에 설계된 인간성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뜻이다.
첫댓글 좋은 산앙 글 감사합니다.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천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시들은 꽃은 또 피지만 한번 꺽인 꽃은 다시 피지 못합니다.
병 없는 것이 제일가는 이익이요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제일 가는 부자입니다.
오늘도 몸도 마음도 따뜻한 기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