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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 교수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 출간 |
“기계만 보면 맥박수가 올라가고 머릿속이 온갖 지식과 감각과 역사에 대한 상상으로 고속 회전하는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 “기계에 숨어 있는 풍부한 지식의 지층을 캐내는 기계비평, 우리 시대의기계문명과 빨라져만 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 “기계가 내는 상징성의 소리를, 엔지니어의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인문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기계비평” “KTX, 선박, 항공기 등의 이동성기계, 속도기계 속에 숨어 있는 미학, 기호학, 상징성 따위를 이미지 중심으로 비평하는 초유의 시도 1. ‘기계비평’ 하나: 기계도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뭐, 기계를 비평한다고?” “기계를 어떻게 비평해? 기계가 비평이 돼?” 여태껏 기계를 비평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기계비평’이라는 말도 없었다. ‘기계비평’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매우 낯선 담론이다. 사실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 기계는 인간 만큼이나 아름답고 감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이를테면 기계는 여러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피스톤의 폭발음, 기어의 마찰음, 액슬의 회전음, 압축공기가 새는 소리 등등. “좋은 기계는 좋은 소리를 낸다.” 이는 악기에서 경주용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는 말이다. 기계는 예술작품 못지않게 풍부한 감각적 층위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주체적 조건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따라서 기계의 목소리는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그 목소리는 인간과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비평, 미술비평, 영화비평, 시사비평처럼 ‘기계비평’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계에는 역사가 있다. 하나의 톱니바퀴를 만들기까지는 오랜 역사가 걸린다. 그럼에도 톱니바퀴는 역사에 저항한다. 톱니바퀴를 낳은 패러다임의 낡음이 가해 오는 저항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처럼 기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기계는 다층적 함의를 가지고 발전해 왔으며, 인간에게 많은 의미로 다가옴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기계는 우리의 사회, 경제, 문화, 일상 등 모든 영역에서 깊게 뿌리를 박고 있다. 아니 기계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계비평은 현재 우리 주위에서 작동하고는 있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계의 지층을 드러내는 일, 알게 혹은 모르게, 은밀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밑에, 옆에, 틈새에 끼어 있는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기계의 지층을 캐내는 ‘지식의 고고학’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유령처럼 끈질기게 횡행하는 요즘, ‘기계비평’은 바로 인간과, 특정한 문화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문명, 그리고 인간과 기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을 요구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2. ‘기계비평’ 둘: 기계는 인간이 자신을 해석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은 인간이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대상인 기계에 미학적·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책에는 KTX·선박·항공기 등 저자가 직접 체험한 이동성기계·속도기계에 대한, 너무나 빠른 우리 시대의 속도에 대한, 인간을 교묘하게 속이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담론들로 가득하다. 책에는 또한 저자가 직접 들여다본 놀라운 기계의 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다양한 컬러 이미지들과 친절한 설명들이 곳곳에 실려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특히 저자는 경춘선 디젤기관차, 자동차 운반선 등을 승객이 아닌 ‘기관사’, ‘선원’의 신분이 되어 타고 가면서 체험한 기계와 속도에 대해 비평가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일상에서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기계와 속도의 세계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우리들의 감수성은 텔레비전이나 카메라, 자동차 같은 기계의 감각에 깊숙이 삼투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이미 이런 기계들에 의해 착색되어 있는 지 이미 오래다. 미술인간, 철학인간, 도박인간, 살인인간 등등 인간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타자의 존재에 감염되어 특수한 형태를 띠게 된다. ‘기계인간’은 그런 인간들 중 하나의 특수한 존재형태다. 이제 인간의 개념은 기계의 개념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다. ‘기계적인 것’을 뺀 순수한 인간적 본질이란 이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계비평의 근거는 기계인간의 출현과 관계있을 것이다. 기계가 한낱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뗄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인간들 말이다. 물론 근대/탈근대의 인간은 ‘정글의 왕자’ 타잔 빼고는 대부분이 기계인간이다. 신체의 말단에서부터 내장 깊숙이, 표현의 감정에서부터 무의식에까지 기계의 영혼이 바이러스처럼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인간 말이다. 3. ‘기계비평’ 셋: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작동하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다. 기계는 인간의 세계 속에서 가치를 지녀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고, 유통되어야 한다. 기계는 가치로, 말로, 이미지로, 역사로, 철학으로 작동한다. 기계를 비평한다는 것은 기계를 만들어내고 기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계를 평가하고 기계에 의해 평가받는 문명을 이해하는 일, 근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던 기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은 결국 우리의 기계문명, 근대문명에 대한 내면의 성찰에 다름없다. 이 책에서는 철도, 항공, 선박 등 세 가지 거대기계를 다루고 있다. 저자가 이런 기계들을 다루는 데는 이러한 이동성기계·속도기계가 근대 이후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속도에 대한 감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저자의 기계비평은, 더 작고 더 낙후한 상황에서 전수되고 개발되는 기계기술의 계보학을 따지는 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새우잡이 배나 낡은 선풍기 같은, 아무도 눈길 안 주는 기계 말이다. 저자를 놀라게 한 것은 기계의 규모, 무게, 복잡성, 정밀함 등 기계가 이 세계와 벌이는 메커니즘이었다. 저자는 그 체험을 ‘감동’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비평가의 임무는 자신이 체험한 놀라움과 감동을 설명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관찰자이면서 분석가의 눈을 통해 기계가 내는 상징성의 목소리를, 엔지니어의 언어를 인문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기계의 목소리를 인간의 소리로 번역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작동하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라 할 수 있다. 그 세계 속에서 ‘기계’ 또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말하지 않는 듯 보이는, 기계의 다층적인 목소리를 듣는 일, 그 목소리의 근원까지 파내려 가는 모험을 하는 일은 기계를 만든 인간의 운명을, 그러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길이기도 하다. 4. ‘속도비평’: 퀵서비스의 출현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소리를 보내세요? 선물을 보내신다구요? 당신을 보내세요! "그분께 가는 일,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그분께 당신을 보내세요.” “그리운 마음이 시속 300km로 달려갑니다.” 시속 300km’에 도드라지게 색이 입혀 있고, 마지막에는 “대한민국의 내일로 가는 길”이라는 자막이 뜬다. 바로 요즈음 TV에 나오고 있는, ‘속도의 화신’인 KTX의 광고다.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길은 끝없이 열려 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정말 빠르게만 가면 대한민국의 희망찬 내일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내일”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오늘도 KTX는 “시속 300km”로 열심히 앞으로만 달린다. 그 길은 충동(drive)의 길이다. 길은 어차피 달리라고(drive) 있는 것이니까. 대한민국의 내일로 가는 길은, 무엇을 향해 또 무엇을 위해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가도록 몰아 부치는(drive) 길이다. 그 길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엄청난 움직임을 촉발하고 담아내는, 속도의 담지자 모습을 하고 있다. KTX의 광고에서는 “그리운 마음이 시속 300km로 달려”간다고 사뭇 자랑스러운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의 감정은 ‘단위’로 나타낼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수치 단위가 아닌, 대단히 불확정적이고 주관적인 어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감정 중 숭고미를 인간의 스케일을 초월하는 사물에 대해서 지니는 경외의 감정이라고 했을 때, 높이가 몇 미터 이상 또는 무게가 몇 톤 이상이면 숭고미를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몇 미터’의 아찔한 높이와 ‘몇 톤’의 둔중한 무게로 우리의 삶 속에 침입해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속도는 서구의 희망이다”, “정지는 죽음이다”라며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 등에 미친 영향을 추적해 냈던 비릴리오는, 근대사회의 동인이 - 자본의 축적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속도에 대한 추구와 통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근본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이므로, 속도는 존재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존재를 있게 해주는 근본적 차원이다. 가만히 있는 듯이 보이는 물건도 초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가보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듯, 모든 것에는 속도가 삼투해 있다. 속도가 존재의 외부에서 부과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속도를 나타내는 어휘와 개념들이 우리가 존재를 말할 때 쓰는 것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속도와 정치》를 쓴 비릴리오나 《천 개의 고원》을 쓴 들뢰즈와 가타리는 속도를 인간존재가 세계와 삶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본질로 보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발휘하는 속도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논지를 더욱 밀고 나가서 인간의 감각, 사고, 행동, 체계 등 모든 국면에 걸쳐 있는 속도를 분석해 보면 그 인간 문명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떤 사람의 관상을 보면 그의 경력이나 성격을 읽어낼 수 있듯이, 어떤 사회와 문화의 속도를 읽어내면 그 사회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생활을 대기처럼 가득 메우고 있는 ‘속도’라는 차원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한국에서 속도는 너무 빠르지만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이 가장 효율적인 건 아니다. 속도와 효율은 반드시 정비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속도에 반하는 패러다임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혹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예를 들어 A에서 B 지점을 가는 데 가장 빠른 길을 찾는 게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런 본성을 잊어버리고 도시의 가장 숨겨진 면모를 잘 볼 수 있는 코스를 잡아보거나, 새로이 피어나는 잎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코스를 잡는 것은 어떨까 하는 제안이다. “(속도가 추상화해 버리는 자연과 우리 삶의 본질을) 상상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그 시간만큼 우리는 가치 있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아까운 시간이 아니”라는 저자의 말을 우리는 곱씹을 필요가 있다. 빨라도 너무나 빠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호수>, 정지용) 없던 시대를 살다가 그리운 ‘감정’마저도 시속 300km의 속도 수치로 보내야 하는 스피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퀵서비스의 출현 이후 시를 쓴다는 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속도의 패러독스, 느려야 빨라질 수 있다”는 속도비평가 이영준의 말은 우리 삶, 우리 시대의 아포리즘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5. ‘청년노동자’ VS ‘기계비평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VS “기계를 다룰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기계적’이라는 말은 흔히 부정의 의미로 많이 쓰인다. 흔히 ‘역사에 대한 기계적 이해’라고 하면 역사의 복합성과 풍부함을 보지 못하고 단순한 인과원리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려는 편협한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기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제 ‘기계를 다룰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간 기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기계적’이었던 데 있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장발달 단계를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생식기로 나누듯이, 대부분의 인간의 성장발달에는 기계기(machinic stage)라는 단계가 있다. 물론 기계기라는 말은 누구도 정식화해서 한 말이 아니다. 기계기란 기계의 효용이나 매력이 인간의 심리적, 신체적 존재 속에 각인되어 인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 기간을 말한다. 내가 기계비평가가 된 것은, 결국은 기계기 때 내 안에 들어선 기계 애호가 어떻게 내 인생의 여러 단계를 거쳐 발현되었다가 억압되고, 그러다가 잠복했다가 다른 계기를 만나 다시 형태를 바꿔서 발현되는가 하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저자는, 자기에게 기계기는 세 살 때쯤 온 것 같다고 한다. 또 어릴 적의 기계기가 기계미에 대한 소년적 동경이었다면, 성인으로서 기계기는 각종 담론들을 들이대어 자신 주변의 기계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개인의 성장 발달단계에서 ‘기계기’가 중요한 이유는 기계기를 제대로 겪지 않은 사람은 자라서 최소한 ‘기계치’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기계 따위는 자신의 참된 인간성의 구현을 가로막는 천한 것이니 무시해도 좋다는 ‘(기계에 대한) 초월적 도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36년 전의 한 청년노동자의 외침은, 노동사회학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기계사회학’(?, !)에서는 어쩌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청년 노동자’의 말은 이제 “기계를 다룰 수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라는 한 ‘기계비평가’의 말로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아니면 자의반 타의반이든, 기계와 함께 살아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기계치’나 기계에 대한 ‘초월적 도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말이다. 기계는 조작의 대상이지만 인간의 조작을 거부하기도 한다. 기계가 조작을 거부한다는 차원은 인간이 기계를 만들었지만, 기계는 이미 인간의 의지를 떠난 운명을 띰을 의미한다. 바로 그 운명을 읽는 게 기계비평의 목적이다. 우리 삶 주변에 포진해 있는 기계들에 대한 지식의 계보학을 작성하는 일, 그 일이 바로 기계비평의 최종 목적일 것이다. 비평가(평론가)는 대상에 대한 진리를 설파하는 ‘도사’가 아니라, 그 대상을 특정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기계비평이란 인간이 왜 기계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당대에 내 옆에 있는 기계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기계를 바라보며 칭송하든지 아니면 왜 기계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를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은 “기계만 보면 맥박수가 올라가고 머릿속이 온갖 지식과 감각과 역사에 대한 상상으로 고속 회전하는 한 인문학자”가, 틈만 나면 기계의 세계로 뛰어드는 인문학자가 벌이는 ‘기계와 담론의 오디세이’라 하겠다. ◆ 차례 프롤로그: 기계비평이라는 것, 그 낯설고도 특수한 담론 비평가의 항해일지 너무 빠르다! 우리 시대의 속도에 대한 성찰 디젤기관차의 풍경 KTX의 속도미와 죽음감 추억의 비행기에서 기만의 테크놀로지까지: 항공기 이미지의 변천사 보이는 부산항과 보이지 않는 부산항 KLM 아카이브 조사연구 일지 사진이 과학의 증거가 되는 불가사의한 정황 테크놀로지의 배신 에필로그: 기계기의 형성과 부침- 내가 기계비평가가 되기까지 ◆ 기계비평가, 테크놀로지 비평가 이영준의 약력 1961년: 서울 청량리에 있는 위생병원에서 태어남. 1967년: 김포공항에서 더글러스 DC3와 록히드 컨스텔레이션을 본 게 비행기를 가까이서 본 최초 경험. 1969년: 아버지께서 일본에서 유나이티드항공의 마킹이 된 보잉707 모형을 사다 주심. 1970년: F4 팬텀, A4 스카이호크 등을 플라스틱 모델로 만듦. 1972년: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나온 항공화보집 《세계의 날개(世界の翼)》를 보고 비행기의 이미지에 빨려듦. 1973년: 친구들과 처음으로 배기량 0.049큐빅인치(0.819cc)의 엔진이 달린 유선조종 비행기를 돈암동의 삼원사에서 사서 날림. 아버지께서 합동과학에서 나온 천체 망원경을 사주셔서 그걸 조립해 달도 관찰하고 옆집의 인체도 관찰. 1974년: 청계천에서 저항기,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등을 사다가 플라스틱 비누갑을 케 이스로 해서 라디오 등을 만듦. CdS(황화카드뮴)와 릴레이를 이용해 빛을 받으면 부저가 울리는 장치를 만듦. 1975년: 《학생과학》의 열렬한 구독자가 되어 거기서 시뮬레이터, LED, 스마트폭탄 연료전지 같은 말들을 처음 봄. 친구 생일에 모형비행기 만드는 데 쓰는 접착제 엄브로이드를 선물. 항공대학에서 열린 전국모형항공기 대회에 무동력 글라이더로 참가해 남의 비행기만 실컷 구경하고 옴. 1976년: 제트엔진을 만들기 위한 설계에 착수. 중학생의 재정형편으로는 제트엔진을 만 드는 데 필요한 내열재료를 구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 제트엔진 대신 성냥황을 까서 모아다가 알루미늄 호일에 넣어 고체연료로 삼고, 분필을 깎아 만든노즐을 통해 추진력을 발생시키는 추진기관을 만들어 자작한 미그기21의 모형을 약 2미터를 비행시키는 데 성공. 1978년: 고등학교 교련시간에 M1 소총의 분해결합을 익힘. 1979년: M60·치프틴·센추리온·레오파르트 등의 전차, M8·마더 등의 장갑차, B52 폭격기 등을 모형으로 만듦. 1980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들어가지만 대학 시절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이 제일 적었던 시기임. 교련시간에 M16 소총의 분해결합을 익힘. 1981년: 서울대 식물학과에서 처음으로 사진 현상하는 법을 배움. 1983년: 친구에게서 미국의 대학 도서관은 도서목록이 전부 전산화되어 있다는 얘기를듣고 심오한 학문의 세계를 얄팍한 테크놀로지로 해결하려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깊은 경멸감을 가짐. 1984년: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에 들어가서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을 읽고는, 테크놀로지를 경멸하는 어쭙잖은 하이데거리즘에 빠져 고등학교 때 만든 프라 모델들을 전부 파괴. 1985년: 기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점 때문에 사진을 일생의 업으로 공부하기로 마음먹음.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멸과 의심은 사진기계에 대해서는 작용하지 않다. 자연과학대학에 놀러갔다가 컴퓨터로 논문 쓰고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로 출력하는 광경을 처음 보고 의아해 함. 1987년: 소련의 어느 학자가 쓴 마르크스주의 관련 해설서에서 과학기술은 사회주의 건설의 원동력이라는 구절을 읽고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다시 알게 됨. 디스플레이 속도가 타이핑 속도를 못 따라가는 XT급 PC로 워드를 쓰기 시작. 1988년: 컴퓨터에서 내 글을 블록 설정해서 복사한 후 다른 글에 붙여서 짜깁기한 것 이 꼼꼼한 독자에 의해 탄로가 남. 1993년: 미국 뉴욕주립대 미술사 박사과정 시절, 처음으로 운전면허를 따고는 내 차를 몰아보면서 자동차라는 이동성 기계의 매력을 느낌. 미국 빙엄턴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A10, FA18, P3C 등 미국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온갖 중요한 기종들 을 가까이서 봄. 1994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을 보았으나 이상하게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함. 1998년: 아버지한테 휴대전화를 처음으로 선물받고 당혹해 함. 1999년: 컴퓨터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름. 손으로 글 쓰는 능력은 현저히 퇴화. 2001년: 성남비행장에서 열린 서울에어쇼에서 수호이27의 유명한 코브라 기동과 서머솔트 기동을 처음 봄. 항공에의 꿈을 못 버리고 전기모터로 나는 모형비행기를 구입하나 시간과 끈기 부족으로 끝내 날리지 못함. 2002년: 나의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니콘 쿨픽스5700을 구입. 2003년: 예술비평을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음. 테크놀로지 비평의 기초인 공장과 연구소 등 산업시설 견학을 시작함. EF소나타를 몰아보고는 한국의 자동차산업 수준 에 놀람.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있는 철도박물관을 가보고는 최첨단의 고속철도가 있는 한국에 철도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음을 보고 통탄함.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항공박물관에서 온갖 항공기들의 변종들과 이종들을 보고 테크놀로지는 레벨이 아주 다양함을 느낌. 이정우의 소개로 카이스트 박사과정에 있는 박해천을 처음 만남. 독일 진스하임에 있는 기술박물관에서 나치 시대의 희한한 테크놀로지들을 봄. 스탠퍼드대의 선형입자가속기를 보려고 예약까지 했으나 실패. 서울대 홍성욱 교수 등과 함께 과학기술철학 연구 모임을 시작. 서울대에서 열린 동아시아 과학기술연구 콘퍼런스에서 <항공기의 구경습관>에 관 한 짧은 논문을 발표해 과학기술 연구에 데뷔함. 2005년: GMC EMD GT26CW형 디젤기관차를 타고 경춘선을 여행하며 디젤기관차와 철도 운행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움. 생애 최초로 헬리콥터를 타고 인천 일대를 항공촬영하며 항공이란 매우 위험하고 힘들고 거친 일임을 깨달음. 디젤기관차 탄 체험을 바탕으로 한 논문을 중국 선양에서 열린 과학기술철학회에서 발표했으나 아무런 반응을 못 얻고 중국이란 나라의 낯섦에 대해 절감함. 2006년: 자동차 운반선 그랜드 머큐리를 타고 거친 바다를 11일간 항해하며 선박과 항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새로운 세계를 겪어봄.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 항의 관제탑을 구경하며 항공관제의 실상을 목격함. 한 달간 네덜란드 암스테르 담에 있는 KLM항공사의 이미지 아카이브에 있는 사진 1만여 장을 들여다 봄. 이를 토대로 향후 항공기술에 대한 논문을 쓸 계획. 현재: 계원조형예술대학 사진예술과에서 학생들에게 엉뚱한 기계 얘기를 가르치고 있음. |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