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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장미가 피는 밤엔 생존을 +
그 날따라 유독 찬 바람에 여주는 두 손을 패딩 주머니 속으로 더욱 깊게 찔러넣었다. 선천적으로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한겨울의 날씨에 비해 얇게 입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신호를 기다리며 괜히 나왔다고 속으로 욕을 짓씹던 그때, 여주는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자신에게 손을 붕붕 흔드는 형체를 발견했다.
“어?! 한여주! 한여주 맞지!!”
“……변백현?”
백현은 여주와 같은 K 고등학교 학생이다. 순둥하게 생긴 외모에 걸맞는 유들한 성격에 K고에 안 친한 애가 없을 정도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교장이랑 인사 대신 하이파이브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유일무이하게 그 ‘안 친한 애’의 바운더리에 드는 게 한여주였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시끄럽고 산만한 것을 질색하는 여주에게 백현은 굳이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백현은 꾸준했다. 여주가 저만 보면 어색해 못 견디는 것을 대충 알면서도 계속 인사를 건네고 해맑게 웃어보였다.
여주는 신호등 불이 바뀌자마제 제게 달려오는 백현을 보고 못 본 척 등을 돌린 후 그대로 전력질주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단숨에 제 앞에 서 숨을 몰아쉬는 백현을 보자 그 생각을 고이 접었다.
“여기서 보니까 왜 이렇게 반갑냐. 어디가?”
“…영화관.”
“이야- 용감하다. 난 영화 절대 혼자 못 보는데.”
“엄마아빠 여행 가셨는데 집에 혼자 있기 좀 그래서 그냥…”
여주는 괜히 어색한 마음에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말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놨다. 사실 여주도 영화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었다. 며칠 간 해외 여행을 떠나신 부모님 탓에 큰 집이 허전해서 그냥 정처없이 나왔다가 개봉하기 전 부터 떠들썩 했던 영화를 보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잘됐다. 나도 마침 할 일 없었는데. 영화 같이 볼래?”
“……그러던가.”
얼떨결에 백현과 영화를 같이 보게 된 여주는 벌써부터 울려오는 것 같은 골에 관자놀이를 누르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 이래저래나 문제였다.
***
“뭐 볼래?”
“들장미가 피어나는 밤.”
순순히 그래, 대답을 하는 백현에 여주는 만족하며 화면을 두드렸다. 자리 없는데 F열 괜찮아? 웅.
관내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이 어두워지면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주변에서 팝콘을 씹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백현과 여주 둘 다 팝콘을 좋아하지 않아서 영화관에 퍼진 달큰한 향을 맡으며 어색하게 라지 사이즈 콜라만 죽죽 빨아댔다.
처음부터 영화는 좀비가 공사장에서 노가다를 하던 아저씨를 뜯어먹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경기도 화성의 제약 연구소에서 어느 괴짜 연구원이 투견장에서 의뢰한 광견병 안정제를 제조하다가 좀비 바이러스를 개발했는데, 세상에 발표할 준비를 하면서 연구실에 보관해두다 감기 기운이 있어 찾아온 동료 연구원에게 항생제와 착각해 좀비 바이러스를 투여하는 뻔한 클리셰였다.
여주는 곧이어 그 건설 노동자가 좀비로 변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영화 도중에 간간히 터지는 비명소리에 반해 미동도 하지 않는 여주를 슬쩍 본 백현은 쟤는 겁도 없네, 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실은 그 반대였다. 여주는 공포영화를 못 본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 세 가지가 귀신, 사람, 벌레 였다. 셋 다 실존하는 것임(여주는 귀신이 있다고 믿는다)에 반해, 좀비는 용이나 유니콘 같이 상상에 의한 창작물이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여주가 볼 수 있는 장르였다.
좀비의 개체 수가 점점 번져갔다. 건설 노동자가 그 근처를 지나가던 남학생을 물어 뜯고 그 남학생이 다시 도망치던 여학생을 물기 직전일 쯤이었다.
“아아악—!”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본 곳에는 관절이 기이하게 꺾인 남자가 영화관 직원의 목을 물고 있었다. 동시에 스크린에서도 여학생의 비명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주변이 소란해졌다. 여주의 손에 쥐고 있던 콜라가 툭 떨어지고 운동화 끝이 갈색으로 물들었다.
“…야, 이 영화 쓰리디냐? 존나 생생하네.”
“ㅅ..사람이… 사람을 먹고 있잖아… 말도 안 돼… 좀비가 실존하는 게, 가능한 거였어…?”
그 자리에서 굳어있던 백현과 여주는 누군가 도망치라고 포효하는 순간 그 소리를 기점으로 죽을 듯이 달렸다. 자리가 없어서 앞 쪽에 앉은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를 만큼 질주하던 백현과 여주는 영화관에서 백화점으로 이어지는 비상구로 들어왔다. 여주가 문을 닫고 폐부에 가득 들어찬 숨을 몰아쉬는 순간 백현의 큰 손이 여주의 얼굴을 덮었다.
“...읍,읍!”
“조용.”
흔들리는 백현의 동공을 따라 계단 반 층 정도 위를 올려다본 여주는 좀비 한 마리가 중후년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의 목을 뜯어먹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좀비의 입에선 남자의 살점으로 보이는 것들이 핏물과 함께 우물우물 짓이겨지고 있었고 백골이 보일 정도로 목덜미가 움푹 패인 남자는 저항하던 것도 잠시 동공이 잔뜩 풀어진 채 쓰러졌다.
분명 그것은 불균형이었다. 비이상적이고 비이성적인 날 것의 행위, 혹은 그 이상의 것...
한 마디로 이 세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돌변연이였다.
여주의 입을 막은 백현의 큰 손 위로 여주의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졌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심장박동 소리가 정적을 가르며 여주와 백현의 귀 언저리에 울려왔다. 백현은 여주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쥐며 숨을 죽인 채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갔다.
-끼이익
“......?”
거의 한 층을 다 내려갔을 참이었다. 분명 굳게 닫았던 비상구 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뒤로 여주와 백현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들 서너 명이 덜덜 떨면서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고, 동시에 좀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위기를 직감한 백현과 여주는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마지 들려오는 괴성을 뒤로하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생경히 들려오는 살육의 소리에 여주는 자신의 귀를 도려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헉, 한…여주…. 지하주차장에서… 허억… 차… 타고 가자.”
“……하아 ….너 운전, 할 줄 알아….?”
“…허억… 죽…기야 하겠어.”
백현이 밀려오는 숨을 몰아쉬며 여주에게 제안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여주는 죽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삼킨 채 백현을 따라 뛰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백현은 곧바로 구석에 세워져있는 소화기를 들어 바로 옆에 주차되어있는 검은 캐딜락의 유리를 깨부쉈다. 역시 백화점 주차장이라 그런지 딱 봐도 고급 차들만 늘어져 있었는데 그걸 망설임 없이 깨부수는 백현의 패기에 여주는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와.
창문 안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잠금을 푼 백현은 휘파람을 불며 차 문을 열고 앞 좌석에 앉았고 뒤이어 여주도 그 옆좌석에 따라 탔다.
“시동 키는 법은 알아?”
“그 쯤이야. 야, 근데 브레이크가 이거냐?”
“…나 내릴래.”
해맑게 엑셀을 보고 브레이크냐 물어오는 백현을 보고 여주는 울고 싶어졌다. 좀비한테 죽기 전에 어디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죽는 모습이 여주의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허억……헉, 도와주세요…!!!”
“……?”
비상구로 따라들어왔던 남자들 중 생존자가 있었나 보다. 여주와 백현은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남자를 보고 황급히 문을 열어주려고 했지만 뒤따라 쫓아오는 좀비의 형체에 여주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으며 백현에게 소리쳤다.
“열어주지 마! 이미 늦었어. 다 죽고 싶어?!”
“……갈게.”
백현이 다급하게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꿨다. 그러는 와중에 남자는 어느새 백현이 깨부순 차 창 앞까지 다달아 있었다. 아직 창틀에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에서 베어나오는 혈흔들은 상관없다는 양 무통에 가까운 사람처럼 눈물을 죽죽 흘리며 어떻게든 차 안으로 들어오려고 애썼다.
동시에 좀비가 남자를 덮쳤다. 팔 한 쪽을 뜯긴 남자는 잠시 비틀거리다 보닛 위에 축 늘어졌다. 게임에서나 가능할 줄 알았던 말그대로 원샷원킬이었다. 이 모든 일은 백현이 기어를 P에서 D로 바꿀 동안 일어났다. 그 빠른 속도로 사냥을 마친 후에도 포식자는 탐욕스러운 눈을 까드득- 굴리며 먹잇감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가 아닌 괴물들의 일방적인 ‘인간 학살’이었다.
“변백현! 뭐해!!!”
“……..”
그 기이한 광경에 백현이 잠시 망설이는 찰나의 순간 백현과 여주를 발견한 좀비가 차체에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비상구에서 목을 뜯겼던 남자였다. 좀비의 얼굴이 앞 유리에 부딪혔고 살점에서 분비되는 눅진한 점액이 피와 함께 진득하게 차창에 흔적을 남겼다. 살육의 도의(道義)에 시뻘겋게 점철된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여주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정신을 차린 백현이 빠르게 차를 몰아 좀비가 사정없이 바닥에 나뒹구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거리는 이미 혼비백산이었다. 언뜻 보면 사람인 줄 알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한 좀비들이 몸을 약간 굽히고 허공을 응시한 채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여주와 백현은 알았다. 먹잇감이 나타나면 그들은 순식간에 돌변할 것이라는 걸.
골목길에 차를 대고 잠시 숨을 고르던 백현은 차를 뒤지더니 손수건을 찾아내 깨진 유리창 위에 덧댔다. 티는 별로 내지 않았지만 생사를 위협받았던 그 긴장감과 두려움이 푹 젖은 백현의 뒷머리에서 나타나는 듯 했다. 여주는 떨리는 손으로 애써 콘솔박스를 두드리며 그 다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야, 우리 집으로 가자.”
“…뭐?”
“들었으면서 또 묻지 말아줄래? 잘 들어. 우리집은 넓고 먹을 것도 많거든. 고층에 보안도 꽤 있는 편이고. 너 도원고 근처에 자취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애초에 밥을 잘 챙겨먹을 리가 없으니까 식량은 뭐 들을 필요도 없고. 그 근처 원룸은 끽해봐야 5층 이내일 텐데 거기까지 좀비가 안 올라오고 배길 것 같아?”
“……”
“난 식량과 잠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넌 나한테 없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난 이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봐. 어때?”
“…그래. 그게 맞는 거 같네. 근데 너 이럴 때 되게 냉철해진다. 나 방금 개쫄았잖아.”
“…출발하자.”
여주가 조목조목 대는 논리에 차분히 인정하다 금세 조잘대는 백현을 가볍게 무시한 여주는 라디오를 틀었다. 떨리는 여주의 손을 말 없이 응시하던 백현이 분위기를 풀려고 한 말인 것 쯤은 여주도 알고 있었다. 그저... 받아칠 힘이 없었을 뿐이다.
“괴생명체가 경기도를 넘어 서울까지 넘어왔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은 신속하게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여주는 듣기 싫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끈 뒤 핸드폰을 켰다. 동시에 재난 문자가 화면에 빗발치듯 올라왔다. 카톡이 수백 개 정도 쌓여 있었다. 핸드폰 뒷면이 뜨끈하게 달아오른 이유였다. 여주는 카톡을 뒤로하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좀비를 순화해서 말한듯한 ‘신원 미상의 물체, 혹은 괴생명체는 감염된 즉시 10초 내에 발현하며 물린다거나, 좀비의 피나 살점을 먹는 것이 아닌 이상 단순 접촉이나 공기 중으로는 옮지 않는다.’ 가 기사의 본문이었다. 거의 30분 동안 좀비와 추격전을 펼쳤던 여주와 백현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친구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 바빴고 거의 대부분 대피소로 이동한 것 같았다. 물론 대피소는 안전이 보장된다.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철저하게 나누고, 군대가 지키고, 사태가 심각해지면 해외로 대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주의 생각은 달랐다. 여주와 백현은 아직 미성년자다. 미성년자를 깔보는 어른들은 세상에 넘치며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당하고 무시되는 일들이 빈번할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이 형성되면 분명 권력을 쥔 세력이 생길 것이고 그들을 주로 서열이 나뉠 것인데 여주는 자신과 백현이 거기서 우위를 점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군대가 지킨다 해도 집단 내에서 하나의 감염자가 생기면 속수무책일 것이다.
“야, 우리도 대피소로 가야하는 거 아니야?”
“나 낯선 곳에서 못 자. 출발하기나 해.”
역시 휴대폰을 확인한 백현이 여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백현에게 설명할 기력도 없이 대충 쏘아붙인 여주는 지친 눈을 감고 웅얼댔다. 이번엔 브레이크랑 엑셀 헷갈리면 뒤져.
***
용케 여주의 집까지 도착한 백현은 차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차를 정차했다. 중간에 달려드는 좀비들이 간혹 있었지만 차의 속도를 따라잡진 못했다. 비록 주차칸을 두 자리나 차지하긴 했지만 백현의 주차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아, 물론 미성년자치고.
“미안합니다, 제가 운전은 처음이라서.”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차주들은 지금쯤 여기 없을 것이다. 아마 집에 꽁꽁 숨었거나 다른 차를 타고 대피소로 도망쳤겠지.
여주는 그런 백현을 흘깃 보고 차에서 내린 뒤 트렁크를 뒤졌다. 500ml 짜리 생수 30 묶음과 연료 첨가제 2병이 들어있었다. 큰 수확은 아니었지만 나름 쓸만하다고 생각하며 여주는 끙, 힘을 준 뒤 생수 묶음을 들어올렸다.
“너네 집 물 사 먹어?”
그렇게 물으며 백현은 여주의 손에 들린 생수 묶음을 가져와 가볍게 들었다. 여주는 작년 운동회 전종목을 백현이 쓸고 다녔다는 걸 기억해내며 다시 한 번 백현의 쓸모를 느낀 채 대답했다.
“아니. 정수기 써. 하지만 물이 보장된다고 장담은 못 하지.”
“에이, 설마 수도를 끊을까.”
“모르는 일이지. 당장은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여주는 말끝을 흐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나중에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일단 물자를 끌어모으는 게 득이었다.
***
“다녀왔습니다.”
“저도 다녀왔습니다.”
집에 사람이 있던 없던 집에 들어오면 꼭 내뱉곤 하는 여주의 습관이었다. 그런 여주의 습관이 꽤나 웃긴지 백현은 웃음을 참지 못 하고 피식거리다 복사기처럼 여주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여주가 가볍게 눈을 흘기자 백현은 딴청을 피우며 여주의 집에 들어섰다.
“우와~ 집 좋당.”
현관문을 지나자 길게 늘어선 복도에 백현은 감탄하며 스케이트를 타듯 매끄러운 하얀 장판에 미끄러졌다. 여주는 한숨을 작게 쉬며 그런 백현을 뒤쫓아갔다. 분명 오늘 아침에 나왔는데 일주일은 지나서 집에 온 것 같이 느껴졌다.
“너 외동이야?”
“어엉.”
“형제 있을 거 같이 생겼는데.”
“그런가. 그런 말 자주 듣긴 했네.”
벽에 걸린 가족 사진을 보고 백현이 말을 걸었다. 대충 호응해준 여주는 눈 앞에 보이는 푹신한 소파에 다이빙하듯 풍덩 몸을 던졌다. 그리곤 한 쪽 다리를 들어 멀뚱 서있는 백현에게 자신 쪽으로 오라고 발짓했다.
“왜, 내가 그새 편해졌나보다? 학교에서는 나한테만 어색해 죽으려하더니.”
“그거는…”
“그래서 뭐. 왜 불렀는데?”
장난으로 말했는데 말을 얼버무리는 여주에 백현은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안 들어도 낯을 가려서 그랬을 거다.
“우리 이제 체계적으로 굴러가야 하는 건 알지.”
“그럼.”
“이 사태가 얼마나 장기화가 될 지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우리 물자를 좀 파악해야 할 것 같아. 일단 우리 부모님이 두 달 정도 세계여행을 가셔서…”
“와우, 쿨하시다.”
“…그래서 일단 식량은 당분간 충분하거든. 전기만 끊기지 않는다면 충분히 조리해먹을 수 있는 것들이고…”
“그럼 물자 체크부터 해야겠네. 비조리 식품이랑 조리 식품 나눠서.”
“그렇지.”
바로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백현에 여주는 안심이 되었다. 백현을 순전히 힘만 보고 데려온 거라 융통성이 제로일까봐 걱정했는데 하위권에서 노는 것 치곤 머리가 좋은 것 같았다.
“라면 세 봉지, 3분 카레 7팩, 우리 손만두 2팩, 참치캔, 고추참치캔 각각 다섯 개...... 햇반이 뭐 이렇게 많아? 너네 집 밥 안 해먹어?”
“전부 다 레트로트 식품이네. 그나마 에너지바가 좀 있어서 다행이야.”
백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여주는 메모장의 에너지바에 밑줄을 두 번 죽죽 그었다.
“그치만 이거 가지곤 한 달도 못 버텨. 내 두 달 정도 식량이지만 우리 둘이 먹을 거니까.”
“...설마 나중에 또 나가야 한다는 거야?”
“아직은 나도 모르겠어. 식량이 떨어지면 물론 나가야겠지. 굶어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골똘히 생각하던 여주는 그 후를 생각하기 싫었는지 입을 굳게 다문 뒤 지친 듯 허공을 응시했다. 백현도 공감하는 듯 조용히 욕조에 받아둔 물을 확인하러 욕실로 향했다. 여주는 그런 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조용히 핸드폰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뭐해?”
“다 씻었어? 이것 좀 도와줘.”
아예 욕실에 간 김에 씻고 나온 백현이 여주가 문 앞에 두었던 여주 아빠의 면 티를 입고 나온 뒤 본 것은 여주가 자신의 키만큼 신문지를 쌓아두고 창문에 열심히 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거 왜 붙이는데? 무슨 태풍 온대?”
“...그럴리가. 사태가 이렇게 된 만큼 우리는 좀비 뿐만 아니라 인간도 조심해야 돼. 좀비가 불 켜진 우리 집을 보고 층 수를 세서 쳐들어올 리는 없지만 인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 우리 당분간 좀 어둡게 살자. 절약도 할 겸. 그리고 내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다행히 후각이랑 시각은 퇴화된대. 청력은 그대로인 것 같긴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백현은 자연스레 여주에게 신문지를 토스받고 도맡아서 창문에 신문지를 발랐다. 한 겹 가지고 불빛이 완전히 가려지진 않겠지만 밤에는 최소한의 불빛만 사용하고 커튼으로 가려두면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다.
***
벌써 어둑해진 밤에 이불을 펴고 누운 백현을 흘깃 본 여주는 젖은 머리를 털며 태블릿을 꺼냈다.
“뭐해? 안 자?”
“한 명은 깨있어야지. 둘 다 자는 새에 죽기 싫으면.”
“그럼 내가 깨있을게. 넌 자.”
고개를 저은 여주가 태블릿을 두드리며 말했다.
“3시간 씩 교대로 자. 너가 오늘 운전부터 몸 쓰는 일은 다 했잖아. 난 상황 좀 보고 있을게.”
“...괜찮겠어?”
“응. 지금 우리 너무 불리해. 이렇다 할 무기도 없고, 식량도 많지 않고, 집도 이웃주민이 맘만 먹으면 유리창 깨부시고 침범할 수 있지. ...방안을 마련해야겠어. 내가 너 많이 부려먹을 거란 소리야. 그니까 일단 자둬.”
백현은 태블릿의 빛으로 간신히 보이는 여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늘의 일을 떠올리다가 이내 몰려오는 피곤에 작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백현의 숨이 고르게 변한 걸 확인한 여주는 눈을 감아도 떠도 여전히 자신을 감싸는 어둠에 무릎을 모아 웅크린 뒤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사태가 터지자마자 나름 자신의 역할을 두뇌라고 확정한 여주는 판단이 먼저라고 자신을 세뇌하며 두려움, 서러움... 그런 것들을 본능적으로 외면했었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부모님이 보고싶다. 현재 해외로 바이러스가 퍼질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국가에서 다 차단했기에 해외에 있는 부모님은 안전하겠지만 대피소로 간 친구들도 언제 감염될 지 모르기에 불안함이 밀려왔다. 믿을 건 백현 밖에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급식 맛있게 먹기 따위인 고작 열여덟 살 둘이서 뭘 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여주는 거칠게 눈물을 닦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되, 방심은 안 된다.
긴장한 손끝과 대비되게 여주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생존 계획을 적어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괴성을 애써 무시한 채 생존 1일차의 밤이 깊어갔다.
첫글입니다! 잘 부탁 드려요 'ㅅ'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2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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