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욥기 18:1-4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내용분해 : A. 수아 사람 빌닷이 두번째 변론을 시작함(1절)
B. 욥이 자신의 변호를 위해 계속해서 헛된 말을 지어낸다고 비난함(2절)
1.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2a절)
2.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2b절)
C. 자신들의 조언을 묵살하는 욥을 방관자로 비난함(3-4절)
1.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어찌하여 우리를 부정하게 보느냐 (3절)
2.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4a절)
3. 네가 그런다고 땅이 황무지가 되며 바위가 옮겨지겠느냐 (4b절)
오늘도 행복한 날,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 아침도 여전히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이 살만한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힘이요, 능력이요,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십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욥 18:1-4절 말씀으로 자신들의 조언을 거부하는 욥을 향한 감정적 비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 18 19장은 욥과 친구들 간의 제2차 논쟁을 다루는 제15-21장의 연속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과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루는 제 15-17장에 이어, 빌닷의 제2차 변론과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루는데, 이를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제 18장의 두 문단은 빌닷의 제2차 변론을 다루는데, 빌닷의 제2차 변론은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론을 재반박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는 욥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빌닷은 욥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즉 비록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회개를 촉구하는 친구들을 비난하며, 자기의 의를 거듭 주장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책망하며(1-4절), 악인이 받을 보응에 대하여 강도 높게 말함으로써,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5-21절).
그런데 이러한 빌닷의 변론은 비록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하에 진행된 것이지만, 사실은 욥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변하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즉 빌닷은 하나님의 참된 뜻과 섭리를 깨닫고 그에 따라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선입견과 인간의 제한적인 사고에 따라 독선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을 욥에게 퍼부은 것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변론의 태도는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되는 태도입니다. 즉 우리도 어떤 사실을 주장함에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뜻은 자기의 주장의 신빙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파는 실로 가증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버리지 않는다면 욥의 친구들이 그랬던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고 자기 합리화를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이용하려 드는 등의 자세를 늘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빌닷의 주장 가운데 악인이 받을 보응에 관한 것은, 욥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현세적 인과응보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종말론적으로 보면 틀림없이 실현될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작정과 계획에 따라, 악인들에 대한 결정적인 심판을 세상 종말의 때로 유보하여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부조리한 일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시기에 악을 절대 간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세상의 종말이 이르면, 악인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어둠과 멸망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이는 비단 세상 마지막 때까지 생존하여 있는 악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행위에 따라 엄정하게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부조리한 일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서도 결코 악인의 꾀를 좇거나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시 1: 1. 2).
다음으로 제 19장의 세 문단은 빌닷의 제2차 주장에 대한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루는데, 이를 좀더 상술하여 보면, 먼저 1-6절에서 욥은 친구들의 비논리적이면서도 일방적이고 비정한 변론을 반박 질책하며, 자신의 고난이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께서 강력한 주권으로 억누르신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이어 7-22절에서는 자신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고, 도리어 계속해서 고난을 가하신다고 원망하고, 자기의 고난으로 인하여 형제와 친척과 친한 친구들, 손님들과 계집종들, 아내와 동족, 어린아이들까지도 자기를 버리고 업신여긴다고 탄식하면서, 친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치심으로 고난 당하는 자신을 동정할 것을 호소합니다. 끝으로 23-2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며 그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친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이상에서 보듯 빌닷의 제2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론은 제1차 논쟁에서의 3번의 반론 및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에 대한 반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욥은 여기서도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고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별로 보는 친구들의 일방적인 매도에 대하여 반박 · 질책하며 자신에게 알 수 없는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장의 변론에서 욥은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도 후일에 자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실 구속자(救觸者)가 등장할 것 (25절)을 확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바라보며 (26절),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을 신앙하는 면모를 보입니다. 이는 욥이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고난에 처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불가해한 현실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혼란에 빠져 번뇌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욥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속자의 등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이는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임을 신앙 고백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구속사라는 보다 원대한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곧 인간의 모든 질고의 원인이 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욥은 아직 특별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인류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지는 못하였지만, 자신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이 해결하여 주실 것이라는 신앙 고백을 통하여, 장차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류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 구속이라는 구속사적 진리는 어느 순간에 생겨난 신학 사상이 아니라 이미 고대로부터 있어왔으며, 시간의 흐름과 추가적 특별 계시가 주어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구체화되고 완성된 것이라는 구속사의 연속성과 점진적 발전 사상을 일깨워 준다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건 분노는 자기 스스로를 찢는 행위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빌닷은 욥에 대하여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빌닷의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한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욥은 16:9에서 자기에게 임한 고난으로 인하여 분노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자기를 마치 맹수와 같이 달려들어 찢는다고 불평하였습니다. 빌닷은 바로 이러한 욥의 말을 인용하여 그가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여 마땅히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분노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몸을 찢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비난은 그가 욥의 고난의 원인을 잘못 이해한 상태에서 한 말이라는 점에서 욥에게 적용하기에 합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분노는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또 친구들로부터 억울한 모함을 받은 욥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욥의 입장에 처하게 되면, 분노하며 원망과 불평의 말을 쏟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심정적으로 인정되는 일이라고 하여도 분노와 그로 인한 원망이나 불평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욥의 분노는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에 대하여 임의로 하실 수 있다는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자기의 알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하여, 분노하고 원망하며 불평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분노는 원칙대로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욥의 분노는 스스로를 찢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는 꼭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더라도 사실 자기를 찢는 일의 다름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언제든 분노하는 사람에게 유익 대신에 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37:8을 보면 분노는 행악에 치우치게 할 뿐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악에 치우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분노는 우리에게 하동의 유익도 없고 해만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실례를 성경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들면, 가인이 분노하여 아벨을 살해함으로 유리하는 자가 된 것,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분노하여 세겜족을 멸함으로 야곱의 저주를 받고 약속의 땅 기업 분배에서 제외된 것, 모세가 분노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 유대인들이 분노하여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나라를 잃고, 복음의 주도권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것 등을 들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성경은 분노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엡 4:26,31 ; 골3:6).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자기를 스스로 찢게 하는 분노의 속성을 잘 깨닫고 아무리 억울한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분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