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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에서 - 4 - 동학 태평천국 전쟁의 경과 - 5
태평천국의 입도의식과 식사의식은 반도에 심어진 동학의 의식과 완전히 동일하다. '홍수전 태평천국혁명의 기원'/새밭,데오도르 햄버그,1979. 초판본은 1854년 4월 홍콩에서 나왔다. 한국 동학사에서는 1860년 수운의 대각득도, 1861년의 포교시작 6~7년 전이다. P88 '테이블 위에 두개의 불을 피우고 찻잔에 차를 석잔 차례로 둔다. 세례(입도) 희망자의 이름을 쓰고, 늘어 놓은 참회문이 되풀이 읽혀진다....
이 참회 후에 그는 꿇어 앉아 맑은 물 한 컵이 각사람의 머리에 부어지고, 세정종전죄악 제구갱신(洗淨從前罪惡 諸舊更新)의 귀절을 읽는다....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은 조석과 식사전에 사용하는 여러가지 기도문을 받았다. 이 기도문의 대부분은 증감하거나 수정하였는데, ...규모가 큰 예식인 경우 가령 결혼식, 장례식, 신년(설날)에, 동물이 희생되어 바쳐지고 예식이 끝나면 참석자들이 이것을 먹어버린다.'
ㄱ)入道式 - 여기에 우리가 말로만 듣던 차례가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명절에 차례(茶禮)를 지낸다'고 한다. 조선천지에서는 차례를 지냈다. 반도에서는 주례(酒禮)를 지냈지만, 명절에 치르는 제사의식을 차례라는 말로만 들었던 사람들이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酒禮를 '茶禮'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촛불 두 자루와 차 석잔. 가슴이 설레지 않는가?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오로지 나의 지극한 성의가 차향기와 촛불에 일렁일렁 살아나, 천지신명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교감의 장이, 참으로 텅비어 신령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 느낌 속에서 읽혀지는 동경대전에 수록된 참회문을 인용해 보자. '...未曉歸眞之路 久沈苦海 心多忘失 今玆聖世 道覺先生 懺悔從前之過 願隨一體之善永侍不忘....
/아직 '참'으로 돌아가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오래도록 고해에 잠기어 마음에 잊고 잃음이 많더니, 지금 바로 이 성스러운 개벽세상에 도를 선생께 깨달아 받아 이전의 허물을 참회하고 일체의 선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영원히 모시고 잊지 않겠읍니다....' 세정종전죄악 제구갱신(洗淨從前罪惡 諸舊更新)은 데오도르 햄버그식으로 이해한 참회종전지과 원수일체지선(懺悔從前之過 願隨一體之善)의 번역이다.
햄버그는 선교사다. 자기가 아는 기독교 세례식 때의 목사가 세례기도를 해주는 '이 물로 이전 죄악을 씻고, 이로써 옛사람이 새사람이 되었읍니다.'를 한자로 도로 옮긴 것뿐이다. 유치하다. 내가 태어나서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삶과 생명은 천지신명의 은혜고 신령의 축복이다. 조선천지에서 누가 죄사함을 받는 세례를 받았다는 말인가? 아니다.
단지 그 은혜와 그 축복을 제대로 가르쳐 받지 못해서 그 은혜와 축복을 충분히 못 누리던 과오를 참회하고, 천지신명님의 맑은 지혜와 순정한 에너지를 영원히 모시고 잊지 않는 착한 사람이 되겠읍니다.'는 말일 뿐이다. 물 한컵을 머리에 붓고, '이 물로 이전 죄악을 씻고, 이로써 옛사람이 새사람이 되었읍니다.'의 귀절을 읽는 사람은 기독교 목사이지, 동학입도자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입도식의 묘사는 조작이 확실하다.
위의 참회문은 누가 읽어 주는 문장이 아니다. 입도하는 사람의 본인의 입으로 읽어야 하는 문장이다. 내가 참회하고 내가 따르기를 원하고 내가 모시고 내가 잊지 않겠다고 해야 말이 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도 통하는 문장이 아닌가? 이 대목에 목사가 등장해서 ‘네 죄를 씻어 주니 새사람이 되었다’는 기독교식의 세례로 바꿔치기 조작을 해 놓으니, 논리도 꼬이고 말도 안 되고 시점(視點)도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반도의 입도식에는 차가 없으니, 청수(淸水)로 대치했다. 차 석잔 대신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놓는다. 물론 그 물을 머리에 붓지도 않는다. 식을 마친 뒤에 기념으로 한두 모금 마실 뿐이다. 이쪽으로 오기 전에는 차를 마셨는데, 그 대신에 물을 한두 모금 마시는 것뿐이다. 햄버그의 이야기는 동학 태평천도를 중상모략하고 누명을 씌우는 조작일 뿐이다.
ㄴ)呪文 - '조석과 식사전의 기도문은 증감 혹은 수정했다.'고 표현했는데,
입도식 전의 초학주문은 '爲天主 顧我情 永世不忘 萬事宜/하날님(상제님, 불천님)을 지극히 위하면 내 사정을 돌보아 주시고, 평생 잊지 않으면 만사가 뜻대로 됩니다.(萬事如意)',
입도후에 받는 상제님을 받아 모시는 강령주문은 '至氣今至 願爲大降/(오로지 집중하여 지극정성으로) 하날님(至氣)께 지금 다다라 나아가니 "큰내림"의 大覺得道를 하기를 원합니다.',
본주문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하날님을 모시면, 하날님 조화가 확고하게 정해지고, 평생 잊지 않으면 만사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제자를 받게 되는 선생이 되면 받는 강령주문은 '至氣今至 四月來/하날님께 지금 다다르니 홍수전선생이 4월 초5일에 받은 大覺得道가 옵니다.',
선생주문의 본주문은 '侍天主 令我長生 無窮無窮 萬事知/하날님을 모시면 내가 오래 살고 무궁무궁하게 만사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이다.
이 주문을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식전에 세번씩 외우고 식사를 하는 것이다. 과연 기도문이 증감되고 수정되었다고 표현할 만하지 않는가? 동경대전 論學文의 '呪文之意 何也 曰至爲天主之字 故以呪言之 今文有 古文有/주문의 뜻이 무엇입니까? 답하기를 지극히 하날님을 위하는 글자인고로 그것을 주문이라고 했다.(지 극 정 성 으로 하날님을 위해야 감응하시는데, 대중들이 감응받기 위해 비는 행위를 呪라고 하기 때문에, 주문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 것이다.) 지금 주문이 있고 옛날 주문이 있다.' 증감 수정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ㄷ)희생제 - 일반적인 의례의 방식이지만, 특이한 예를 동방견문록에서 하나 인용해 보자. P172 탕구트지방(돈황)조에서 '아이들이 있는 사람은 우상(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양을 한마리 기르는데, 1년의 시작이나 우상들의 제삿날이 되면, 그렇게 기른 양을 아이들과 함께 데리고 가서 우상에게 공손하게 경배한다. 이것을 마친 뒤에는 양을 전부 요리해서 우상 앞에 매우 경건하게 갖다 놓고는, 그들의 아이들을 살게 해달라는 축문과 기도를 올린다.
그들은 우상들이 그 고기를 먹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끝나면 그들은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자기 집이나 희망하는 다른 곳으로 가져간 뒤 친척들을 불러 모아 큰 잔치를 열고 아주 경건한 태도로 먹는다. 고기를 다 먹은 뒤에는 그 뼈를 모아 상자 안에 안전하게 보관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제사 지역이 광서에서부터 돈황까지 거리가 2만리가 넘을텐데, 거의 같은 양식으로 치르진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물론 돈황에서 서쪽 혹은 남쪽으로 2만리를 가더라도 거의 차이 없이 같은 제사를 지낼 거라는 사실이다. 특히 서쪽이나 남쪽이나 기자가 동쪽으로 옮겼을 때, 같은 시기에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쪽으로 남쪽으로 옮겼기 때문에 더 확실할 거란 이야기다. 마르코 폴로 시대로부터 동학의 시대까지는 거의 600년의 차이가 나는 데도 이렇게 제사양식이 같다면, 마르코폴로 이전의 2000년쯤 전이라도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우상에게 공손하게 경배한다’ ‘우상 앞에 매우 경건하게 갖다 놓고는, 그들의 아이들을 살게 해달라는 축문과 기도를 올린다’ - 여기서 우상은 무엇일까? 마르코 폴로가 목격한 이 모습과 데오도르 햄버그가 묘사하는 희생제의 공통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00년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같은 하날님에게 같은 신앙과 제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같은 상제님, 천주님, 하날님, 불천님께 경배하고 축문과 기도를 올린 것이다. 이 기본적인 모습이 사실이고, 변화되고 분화된 현대의 종교적 모습은 조작인 것이다. 물론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고대의 종교의 모습도 조작이다. 생각하고 생각할 일이다.
-만일 반도의 최제우가 '홍수전 태평천국혁명의 기원'이 홍콩에서 출판된 지 6년 뒤에 1830년대에 대각득도한 홍수전보다 30년 뒤에 대각득도를 해서 입도식과 주문의 방식을 그와 같이 시행했다면, 대각득도가 아니고, '베끼기' 득도일 것이다. 사실은 현 중국의 태평천국의 모든 관련 문서는 전부 변형 조작을 하고, 동경대전 용담유사와 기본적인 종교의식은, 한국으로 옮겨온 동학도들의 입장도 생각해서 거의 그대로(그러나 엄청난 축소 조작을 하여) 들고 왔을 것이다.
특히 초기 상제회 시절의 문서를 중심으로 종교로 성립할 수 있는 만큼만 들고 와서 남겼을 것이다. 물론 조금의 반도식 조작은 했겠지만. 그래서 그 모든 조작 속에서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그 조작을 거의 피했던 유일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최고의 國寶다. 불탄 조작배기 남대문보다 100배 1000배 10000배는 더 귀하고 소중한 國寶다. 世界寶다, 내 마음에는 항상 宇宙寶로 새기고 있지만. 참말로 천하를 번쩍 들어 올렸던, 그래서 아더 맥아더류들의 戰意를 그렇게도 불태우게 했던 天下寶다.
지금 세상은 변해서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 정보화 창조화 세계화가 전세계를 휩쓸면서 현대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물론 폭력적 저항이 통하는 시대도 아니다. 동양학, 동학은 쓸모가 없어져서 폐기처분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격변의 세상일수록 둘러보면 온 주변이 꽉꽉 막힌 세상일수록 반만년 역사의 실상을 실상적으로 알고 근본적인 대안과 방향과 우리의 본성과 가능성과 잠재력과 그것을 실현하는 관점과 자세를 알려고 한다면, 이 모든 것을 열어 제낄 수 있는 열쇠는 동학천도이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야말로 그 핵심키(KEY)라고 할 수 있다.
반만년 웅혼한 대륙혼과 연결할 수 있는 그 중심고리다. 어찌 國寶가 아니겠는가? 어찌 世界寶가 아니겠는가? 내 자신과 자식과 후손의 삶의 온갖 웅숭한 비밀과, 이 세계를 헤쳐나갈 온갖 지혜와, 현재 인류에게 제시할 대안적 인류문명의 관점과 자세와, 우리 모두가 조상과 이어지고 신령한 천지신명과 이어지고 우리 서로가 이어지고 연결되어서 상생 공경의 대동세상으로 나아갈 에너지와, 촛불이 눈부신 동방의 등불로 활활 타오를 온갖 꿈과 비젼과 상상력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와 동학가사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충만하게 들어 있다.
우리 반도 조선이 일약 이 세계의 희망과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온갖 새 생명의 씨앗이 동학천도 안에 풍성하게 넘실거리고 있다. 어찌 人類寶 宇宙寶가 아니겠는가? 현대세계는 문명의 풍요를 구가하지만, 이 세계 모두가 그리고 특히 우리는 그 풍요의 그늘에서 목말라 애타게 그 대안을 찾고 있다. 그 풍요의 그늘이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이다. 쇠고기문제가 바로 우리 생명과 직결되고, 태안 유조선의 기름유출로 인한 서해바다 전체의 오염이 바로 우리 생명과 연결되고, 멜라민이 우리 생명에 치명상을 입히고
- 지구 기상이변이 인류전체의 생명을 위협하고, 아슬아슬한 중국과 미국의 경제의 폭발이 언제 세계경제의 폭발로 연결될지 온 인류가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누가 이 생명의 바른 대안적 관점을 가지고 애타는 목마름으로 그 답을 찾고 있는 인류에게 그 원인과 관점과 방향을 가리켜 보여 줄 수 있겠는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와 동학가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아니면, 촛불의 상상력과 붉은 악마의 에너지와 한류의 매력과 지혜로 빛나는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인류에게 꿈과 상상력과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와 같이 무자각적으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룬 조금의 성공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각적으로 원대한 꿈과 비젼과 상상력을 좀더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대담하게 예감하고 대비 준비하고 꿈꾸고, 그런 애들을 그렇게 낳고 기르고 키우고 교육하고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여 엄청나게 큰 성공을 해내야 할 것 아닌가?
대륙사는 위대하고도 중요하다. 그래서 더 원대하게 방향을 잡고 더 큰 꿈을 가지고 그래서 후손들 중에 많은 신동들이 나와서 크게 세계적 연구와 보급을 해내어 대륙사가 세계사라는 것을 전세계가 배우게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해야 한다. 永侍不忘.
(10)근세 중앙아시아의 혁명군(1864~1877)은 동학천도의 태평천국군이다. 이들이 이슬람군으로 조작된 것이다. 신강지역의 혁명의 전 과정을 추적해서 분석할 수는 없고, 몇가지 요소만 지적해 보자. ㄱ) 혁명주체다. ㄴ)혁명의 시기다. ㄷ)혁명의 진압세력이다.
ㄱ)혁명주체의 내용은 한헌석칼럼 40호의 ‘카스에서 - 4 - 근대중앙아시아의 혁명(신강에서 벌어진 1864~1877의 소위 이슬람 혁명)은 동학혁명이다. 그 혁명 정부의 수도가 카스다. - 1’에서 발표된 내용이지만, 문맥상 다시 싣는다.
高麗菜와 西土藍에서 알 수 있는 것 같이, 왜의 서쪽에 있던 구려가 어쩌다가 왜(청국, 뙤놈, 땐놈)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동서가 뒤바뀌게 되었는가? 그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현 중국어를 사용하는 청국인들이 서쪽의 구려를 장악해 들어가서 동학 태평천국을 진압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대륙의 中原인 新疆에서 벌어졌던 東學天道 太平天國 革命을 먼저 일별해 보고 그 全 진행과정을 살펴보자.
근대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사계절,김호동 P24~25 '바로 이곳(쿠차)에서 1864년 무슬림들의 대봉기가 처음 시작되었고 소수의 청군(중앙으로부터 파견되어 있는 주둔군)으로서는 노도처럼 밀려드는 무슬림들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1864년 6월4일 밤에 쿠차에서 일어난 상황에 대하여 사이라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갑자기 하늘의 재앙이나 신의 징벌이 내리듯, 어느날 밤 몇몇 퉁간들이 술렁거리다가 쿠차성 바깥에 있는 바자르에 불을 지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이교도들을 죽였다. 이때 양기히사르의 하킴(省長)의 아들인 알라야르 한벡이 심통해하던 몇몇 무슬림들을 이끌고 퉁간들과 연합하여, 퉁간과 무슬림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여 관리와 암반(대신)의 아문들에 불을 질렀다. 동이 틀 때까지 많은 이교도들을 죽였다...."
여기서 퉁간이란 당시 신강에 살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믿는 漢人을 일컬어 부르던 호칭으로, 청나라측 자료에는 東干이라고 옮겨졌으며 한회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김호동은 노도처럼 밀려드는 무슬림의 혁명으로 묘사하는데, 자신이 인용한 사이라미는 동간의 혁명에 몇몇 무슬림들이 동간들과 연합, 협력하였다고 했다.
P26 '당시 쿠차에 주둔하던 청조의 판사대신 薩靈阿가 "5월 초하루 이곳의 한인과 회민역비들이 모여서 난리를 일으키니 속히 파병하여 구원해주기를 청합니다."'
-당시 그곳의 통치자인 살령아는 한인과 회민역비라 하여 김호동과 사이라미와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세 사람(살령아, 김호동, 사이라미)의 얘기를 종합하건대, 漢人逆匪 즉 東干들의 起義에 소수 끼어 살던 몇몇의 무슬림들도 가담했던 것을 전체주민이 무슬림인 것으로 조작했음이 틀림없다.
漢人이란 동쪽 변방 해안 지방의 현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이 서쪽 끝에까지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거의 예술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여기서는 사실은 조선인(韓人을 漢人으로 변조)을 얘기하고 있다. 東干 즉 漢人逆匪의 앞자와 끝자를 조합하면 東匪가 된다. 눈에 익은 용어인데, 반도조선의 동학사에 등장하는 동학군 혹은 동학도를 가리키는 용어다.
P27 '또한 <戡定新疆記>라는 자료에도 "쿠차의 토착 회민인 馬隆등이 외지의 비적인 田滿拉 蘇滿拉과 몰래 결탁하여 반란을 음모했고,..." <新疆圖志> 역시 "하사월에 쿠차의 토착회민 마륭이 반란을 모의했다. 玉門(돈황의 서쪽관문) 출신의 楊春 역시 회민 역도 가운데 하나였는데, 몰래 쿠차로 와서 회민의 두목인 黃和卓 田滿拉 蘇滿拉등과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탁했다."'
- 이 글을 보면 살령아가 한인역비와 회민역비라고 한 말이 토착 동비(마륭)와 외지 동비(田滿拉 蘇滿拉 楊春)를 이렇게 조작한 것이라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 주체가 토착 동학천도군(東干 혹은 漢人)과 동쪽에서 패주하거나 혹은 조직 밀명을 가지고 서쪽으로 온 동학천도군(造作名으로 漢回 혹은 回民)이 결탁이 되어서 기의를 했다는 말인 것이다.
이 문맥에서는 소수 끼어 살던 몇몇의 무슬림들은 언급할 필요나 가치도 없는 것이다.
P30 '쿠차 봉기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특징은 쿠차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카쉬가르와 양기히사르에서는 퉁간 수비대장들이 한회들과 암통하여 봉기가 일어났고, 야르칸드에서도 한회들의 변란으로 시작되었으며, 우룸치에서도 퉁간 군관인 索煥章과 감숙 지방의 한회인 妥明의 모의로 발생했고, 일리에서도 퉁간들이 투르크계 무슬림의 협조를 얻어 봉기를 성공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 이 문장에서의 한회의 용법은 '외지에서 온 동비'란 말로 정확하게 쓰이고 있고. 그 맥락과 의미로 볼 때 東干은 토착동비를 정확하게 지칭한다는 것을 세살박이 애도 알 수 있다. - 이 문장의 실내용을 분석, 간파할 수 있도록 엄밀 정확한 번역을 해 주신 김호동교수님께 한없는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신강 즉 중앙아시아의 혁명의 주체는 東干 즉 東匪들이 外地 東匪(造作名으로 漢回)와 협력하여 혁명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중앙아시아의 혁명은 동학천도의 태평천국혁명이었다.
- 지금부터 긴 아주 긴 동학이야기를 시작할 터인데, 그 도입부라 조금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 카스 조에서 카스의 사정을 잠깐 언급하고 넘어 가자.
위 김호동의 책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99~101 ‘카쉬가르(카스)에서 남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이곳(양기히사르 - 新城이란 말)에서 “6월 26일 양기히사르의 중영수비(中營守備)였던 남발춘(藍發春)등이 漢回와 暗約하여 시장이 서는 날에 맞추어 일제히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카쉬가르의 把總 王得春 등이 한회와 암통하여 6월 27일에 요란스럽게 변란을 일으켰다.”(같은 페이지의 주53에서 陝甘新方略 권 77, 19r).... (이들이) 한회와 공모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 역시 퉁간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P101 "카쉬가르의 回民頭目 金相印 역시 무리를 규합하여 키르키즈의 叛回 思的克(시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같은 페이지의 주61에는 堪定新疆記 권1, 2v라고 나와 있다.)
- 여기서도 혁명의 주체는 東干 즉 東匪들이 外地 東匪(造作名으로 漢回)와 협력하여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기나긴 동학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이 사정들이 명확해질 텐데, 물론 마르코 폴로의 여정이 끝나면 아주 환하게 그 사정을 알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궁금증을 일으키는 정도만 하고 넘어가자.
- 여기 이 문맥에서 전혀 웃기지도 않는 포인트만 하나 짚어 보자. 위에서 나온 퉁간 회민 지도자의 이름을 나열해 보자. 金相印 王得春 藍發春 索煥章 妥明(妥得隣) 馬隆 田滿拉 蘇滿拉 楊春 黃和卓 - 이 주체들이 이슬람화된 위구르족들의 투르크어의 이름들과 성이란 말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 혁명의 주체들의 성과 이름이 조선인들인데, 어찌 신강의 위구르인들의 이슬람혁명이라고 한다는 말인가?
이 이름들에 대한 인용을 해보자. P26 ‘사이라미는 그날 밤(6월 4일 쿠차) 봉기를 주도한 퉁간 지도자로 쿠차에 거주하는 마슈드 아훈드, 마룽 아훈드, 샴스 웃 딘 할리파라는 세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앞의 두 사람은 ‘馬’姓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퉁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마지막 사람 역시 퉁간인데 다만 이름을 이슬람식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위의 퉁간 지도자 馬隆을 마룽 아훈드라고 부르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滿拉은 물라(MULLA - 이슬람교의 종무자) 和卓은 호자(KHWAJA - 이슬람의 지도자)의 한자표기다. 단지 이슬람식 이름으로 조작한 것뿐이다.
단지, 단지 조선인들의 동학혁명을 위구르인들의 이슬람혁명이라고 조작해 놓은 것일 뿐이다. 아니면 이 주체들을 전멸시킨 좌종당의 청나라 정복군과 같은 중국어를 사용하는 淸人들이었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같은 청인이었다면, 그 지역에서 그 종족 자체를 멸종시키고 아예 완전 사막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인가? 그럴 필요가 있었겠는가? 아니다. 아니다. 이 주체들이 누구였는지? 그 역사가 어찌 되었는지 한번 살펴 보자.
ㄴ)혁명의 시기 - 쿠차(1864년6월4일) 야르칸드(6.23) 카쉬가르(6.26) 우쉬 투르판(7.23) 우룸치(7.26) 악수(7.27) 하미(9.29 )바르쿨(10.19) 일리(1864년11월 10일).(괄호 안의 수치는 봉기 일자) 단순 시기로만 볼 때에도 1864년 7월 19일의 천경(현 남경)의 함락소식이 신강지역에 전해졌을 때는 하미 바르쿨 일리등 극외각 지역을 제외하고는 이미 혁명이 완수된 다음이었다.
섬서 감숙 청해 지방은 말할 것도 없고, 사천 귀주 운남 지방까지 1864년에는 이미 태평천국군이 현 중국의 거의 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태평천국이 양쯔강 중하류의 일부지방에만 섰다가 망했다고만 배우고 이해하고 만다. 이 서세동점의 시대에 중국 전 대륙과 인도와 중앙아시아까지 번져 나갔던 동학의 장엄한 투쟁을 양쯔강 중하류 지방에 국한시키거나 반도의 '호서호남' 지방으로 참으로 용두사미격으로 용꼬리(양쯔강 중하류)에서 급기야는 뱀꼬리(반도)로 조작해 놓은 것을 알 수 있겠다.
1856년 운남성과 귀주성과 사천성에서 杜文秀가 한족 백족 묘족 이족의 동학도들을 규합하여 평남국을 세워서 1874년에 증국번의 상군에 멸망한 것은 태평천국의 일부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회족이 조금 끼어 있어서 남아 있는 몇몇 회족자료(실제로 한 조각이라도 있었을까? 믿을 수 없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만 가지고 두문수를 술탄 술라이만이라고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이슬람혁명이라고 조작해 놓았다.
1862년에 섬서 감숙 청해지방의 봉기는 얼마나 광범위하고 끈질겼는지, P299 '만주족 출신의 장군인 多隆阿는 적어도 1864년 5월 그가 사망할 때까지 회민 지도층의 내부분열을 이용하여 섬서성 지역 안에서 상당한 정도의 거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와 같이 섬서 감숙 청해지역 중에 겨우 섬서지역 안에 거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하는 정도이다.
여기 태평천국군은 18대영으로 불리다가, 1870년대에 들어가면, P301 '회군의 대오는 이렇게 해서 모두 50개 영을 상회할 정도가 되었다.' '태평군 진압에 귀신같은 능력을 발휘했던' 좌종당이 청국군과 전 세계의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1867년부터 1874년까지 섬서 청해 감숙성까지 진압한다. - 물론 이 모두를 회군으로 조작했지만.
P299 '좌종당이 1867년 중반경 섬서에 도착하였을 때, 섬서, 감숙 회민 봉기는 전혀 수그러들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청군이 주둔하고 있던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농촌지역은 回民들이나 패주하던 태평군 혹은 捻軍(황하와 양쯔강사이의 태평군 - 전형적인 ‘분리 통치’의 수법으로 태평군이 아닌 념군으로 분리 조작되었다.)의 수중에 있었다.'에서 보이는 것같이
토착 동학군을 회민이라 조작해서 부르고, 마치 이들은 태평군이 아닌 것처럼 꾸며 놓았다. -여기서도 조작 수법이 신강지역의 명칭과 같은 공식으로 되어있다. 토착 동비를 회민이라 하고 외지에서 온 동비를 태평군 혹은 념군으로 이름붙여 놓았다. 동남방의 만청을 제외하면 다 무슬림이란 말인가?
여기야말로 서안에 조선의 수도를 옮길 만큼(혹은 서안에 조선의 수도를 옮겼다고 조작할 만큼) 조선인들의 가장 중요한 센타인데 웬 회군의 대오가 50개 영이나 설치고 다닌다는 말인가? 태평천국과 같은 시기에 같은 조선말을 쓰던 주체들이 왜(뙤)놈들을 앞세워 밀려오는 거대한 서세동점에 항거하는 태평천국을 운남, 신강, 양쯔강 북 남, 사천, 섬서 감숙 청해 쪼각쪼각 갈라놓고 이슬람혁명으로 변조 분리 축소 조작하는 조작극일 뿐이다.
1894~1895년의 운남 사천 섬서 감숙 청해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진압작전(청일전쟁)을 불러 일으킨 동학천도의 2차 봉기는 동학천도의 태평천국운동이 아닌가? 1898년부터 일어나는 의화단의 난은 태평천국운동이 아닌가? 1905년부터 본격화된 의병투쟁은 태평천국운동이 아닌가? 1911년에 전대륙에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소위 신해혁명은 태평천국운동이 아닌가?
(1910년 소위 한일합방으로 조선 황제국을 폐하고, 전 대륙에 걸쳐 왜지배의 압박이 죄여오자 이에 저항해 일어난 조선의 저항운동을 '근대 시민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신해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조작해 놓은 것을 믿으란 말인가?)
1919년에 일어난 삼일운동(대표 33인 중에 19인이 동학지도자인데, 그것을 전 대륙으로 전파하고 옮겨낸 사람이 기독교 조직이란 말을 믿을 수 있는가? 천만에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이야기다. 혹여 기독교도가 있었다면, 그들은 8개국연합군대의 스파이거나 왜나 일본의 앞잡이일 수밖에 없다. 끈질기게 끈-질기게도 살아남아 있는 지하 혹은 공개 합법 비합법 의 동학천도의 조직과 사람이었다.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실상을 예리하게 째고 들어가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이 태평천국운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1864년에 신강지역에서 일어난 혁명은 동학천도의 태평천국혁명이었다.
ㄷ)혁명진압세력
- A)신강정벌군을 지휘한 장군은 좌종당인데 태평천국 초기에 왜 지역 자치의 자위군(단련-중국어를 사용하는 왜인들의 민간폭력조직, 조선인 동학도를 견제하고 잡기 위해서 좌종당이 기획하여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전 대륙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인종투쟁으로 전개 발전시키는 전위 대중조직, 뒤에 일부는 군벌로 일부는 남홍사 등 파시스트 조직으로 발전해 갔음. 참으로 악마적이다. 인류 최후 최악의 마성을 이끌어 내어 인종대결로 승화(악마화)시켜낸 기획이었다.
정말로 악마조직이다. 진실로 진실로 참말로 참말로 인간말종이다. 이러고도 좌종당이 출세하지 못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용담유사 안심가 중에 '개같은 왜적놈아 너희신명 돌아보라 너희역시 *하륙해서 무슨은덕 있었던고...개같은 왜적놈이 전세임진 왔다가서 **술싼일 못했다고 쇠술로 안먹는줄 세상사람 뉘가알꼬...내가또한 신선되어 #비상천 한다해도 개같은 왜적놈을 하날님께 조화받아 일야에 멸하고서 전지무궁 하여놓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한의 원수 갚아보세' *이 땅에 내려와서 **숟가락을 들고 먹을 수 있을 만큼 가치있는 일 #하늘로 날아 오름 ##천지신명의 큰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기념하여 쌓는 단
-안심가는 가장 초기에 나온 가사이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1840년대 중반을 넘길 수 없으니 금전기의의 태평천국 건국 5~10년 전의 작품이다. 그때 벌써 단련이 체계적인 조직은 안 되었다 하더라도 그 맹아적 조직이 동학천도의 상제회에 악마 짓을 많이도 한 모양이다. 재미있는 표현 '쇠술로 안먹는'놈을 왜놈이라고 했다. 물론 지금도 대륙 동쪽의 일본과 중국 동쪽지방은 쇠숟가락을 쓰지 않는다.
대륙사 공부하는 사람은 심각하게 체크해야 할 포인트다.)을 조직하여 증국번 휘하의 상군(상용)의 최고지휘관이 되어 태평천국군의 진압과 천경(남경)함락에 끊임없이 공을 세워 드디어 증국번과 리홍장을 능가하는 일본과 왜 양쪽에서 최고의 지도자가 된다. 1863년 드디어 민절(복건과 절강)총독이 되고, 1866년~74년 복주선정국(조선소-일본해군의 모태가 됨) 창설, 1867~1874 섬감(섬서 감숙)총독이 되어 섬서 감숙 청해의 태평군을 진압한다.
1874~1875 리홍장을 필두로 하는 海防論(동중국해의 해안방위를 위한 해군증강론)자들을 압도하여 자신의 塞防論(신강지역 수복과 방어론)을 서안(? - 좌종당 관련 자료에서 서안에 있는 조정이라는 문구에서 서안천도의 아이디어를 얻었음. 북경?)에 있는 조선의 조정을, 특히 조정의 실력자인 *대원군(대륙사에서는 광서제의 親父인 恭親王)을 설득하여 재가를 얻어내어 신강원정을 착수한다.
이와 관련해서 신강 원정에 반대하는 한 논의를 소개하면, 승정원일기 고종 2년(1865년)6월8일자에 등장하는 李雲麟의 상주문(공교롭게도 1865년이다. 승정원일기 1865년조의 李雲麟과 동일인일 확률을 아주 아주 높여 주는 연대의 일치다)을 인용해보자. P305 '오늘날 신강에 대한 대책은 그것을 포기해야 할지 혹은 취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我朝는 乾隆 중엽이전에 신강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국가의 원기가 회복되지 않았고 兵帑(병탕)이 모두 고갈되었는데, 養民과 息民을 생각지 않고 마구 전쟁을 일으켜 멀고 먼 땅에서 승리만을 좇는다는 것은 經國의 良策이 아니니, 신강을 포기함만 못합니다. 만약 신강이 祖宗의 基業이라 하여 포기해서는 안 된다면, 마땅히 어찌 취할지의 대책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陝甘新方略 권137, 18r-20v - 신강이 조종의 기업이라면, 건륭 전에는 소유하지 않았다는 말은 건륭조에 신강을 '새강역'으로 정복했다는 조작설과 일치시키기 위한 조작의 끼워넣기다.
신강지역은 그 이름만 눈속임을 위한 新疆이지 사실은 祖宗의 基業이다. 新疆은 바로 조선의 황제직할지, 중국, 중원, 신주, 천조의 자리를 은폐하기위한 교묘한 이름의 조작인 것이다. 그 도성이 투르판의 고창고성이었다. 1850년대까지는.)
그리고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무슨 요술 마술인지 좌종당군대는 거의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1875~1878 신강혁명군을 완전정복한다. 파미르를 넘어 와서 이 신강지역의 혁명군을 다 장악했던 진짜(?, 가짜!) 이슬람 야쿱 벡이 적에 대한 발포 금지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멸망사에 대한 의구심이 중앙아시아를 염두에 떠 올릴 때 마다 내내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이 무슬림 야쿱 벡이 뙤놈(청국)편인지 러시아편인지 내내 헷갈린다. 허~허~ 푸락치인가? 청국의? 일본의? 러시아의? 영국의? 아니면 ? ? ? ? ? ? ? 신강지역의 이슬람화라는 조작극을 위한 꼭두각시 괴뢰인가????? 아마도 야쿱 벡이 반도사 같은 완전한 허구의 환타지소설의 가짜 주인공이라야, 이 모든 의문이 제대로 풀릴 듯도 하다.
이제 조작세력은 중앙아시아까지 다 진압하고, 사천 호북 호남 광서 광동 강서 강소 절강 복건의 동학천도 태평천국군은 서학의 아들로 조작을 하고, 홍수전은 예수(天兄)의 동생으로 天道 天國을 기독교식의 천당 가는 길, 그리고 천당 혹은 하늘나라로 변모시켜 놓았다. 그리고 8개국 연합군과 만청(蠻淸)의 왜군을 상대로 싸운 홍수전과 태평천국을 마치 우상과 싸우는 기독교 졸개로 만들어 놓았다. 물론 홍수전을 앞머리를 밀어버린 만주인 혹은 남방 한족으로 만들어 놓았다.
1894년 이후의 2차 봉기의 기본 시발점이 당연히 교조신원운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도 동학사의 교조신원운동은 무슨 원통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신원하기 위해 일어 났는지 분명치 못하다. 연구해 볼 만한 테마다. 그리고 이 태평천국의 이외의 지역은 회민봉기로 조작을 다 해놓았다. 도대체 언제 동남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 중원이 이슬람화되었다는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조작인 것이다. 태평천국과 회민봉기는 동학천도의 동학혁명이다.
서세에 붙어 있는 그 앞잡이 만청세력과 그 뒷잡이 일본세력과 완강하게 투쟁했던 조선의 혁명 저항군이었다. 이 저항을 조선 중앙조정의 재가를 얻은 좌종당과 증국번 이홍장세력이 진압했던 것이다. 어떻게 조작해 놓았든 간에 우리는 그런 엄청난 투쟁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 두자.
*대원군(1820~1898) 1882 임오군란시 집권 후 원세개에 의해 텐진 유폐(조작) 1894 청일전쟁기간 집권. 아들 고종의 이름이 載晃
공친왕(1832~1898) 1884년 사직 1894년 청일전쟁기간 정국지도. 아들 광서제의 이름이 載첨(?)
대원군과 공친왕은 동일인물인데, 반도에서는 대원군, 대륙사에서는 공친왕이다. 서안(혹은 북경)의 조선조정을 북경의 청국조정으로 뒤바꾸는 절묘한 통일고리가 바로 이 대원군-공친왕 쪼개기(서안 북경 쪼개기) 작품이다. 반도사의 민비와 대원군의 갈등과 대립을 중국사에는 공친왕과 서태후의 대결로 만들어 놓았다. 서안의 민비는 1895년에 시해되지만, 북경의 서태후는 1908년에 죽고 그 아들 광서제도 그 전날 죽었다고 발표.
푸이가 선통제로 1908년 뒤를 잇고 1912년 폐위된다. 순종은 1907년 끌려나온 고종 대신 즉위했다가 1910년 폐위되었다. 어떤가? 깔끔하게 실제 조선사가 조작 청국사로 접합 봉합되어지고 반도사로 보완되는 절묘한 과정이 보이는가? 너무 같은 시기의 동일인이면 간파되니까, 살짝 살짝 시간차를 내어주는 이 ‘거의 예술 작품’을 감상해 보라.
B)외국세력에 관해서는 1850년대부터의 연표로 대체하자.(한국사연표/동방미디어,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50, 태평군이 광서의 서남부에서 기의(무장봉기)
1853, 태평군이 남경 함락, 천경건설, 미국 페리제독 군함 7척으로 복건에 내항(강제 개항시킴, 열도가 아닌 복건성의 일본 개항이 태평군 진압을 위한 기지 건설이 그 목적.- 이후 복건 절강이 태평천국전쟁의 최대의 격전지가 됨.)
1855, 청 관군 상해를 회복(태평군으로부터)
1856, 일본에 미국 총영사 해리스가 옴, 청의 애로우호 사건 발생(2차 아편전쟁) 영국군 광동을 포격
1857, 청, 복건의 여러 성이 태평군에 함락. 인도 세포이항쟁 일어남(~1858) 영국 프랑스 연합군 광동을 함락하고 순무 백귀를 생포.
1858, 영국군, 인도의 럭나우를 점령하고 대학살(세포이 반란 진압) 청, 영국과 프랑스와 천진조약 체결(영국 프랑스 상선의 內地河川航行權 인정-내지의 태평군 진압의 해군 투입 준비) 인도 동인도회사 폐지, 영국의 인도 직접통치 시작.
1860, 청 북경조약 체결(공친왕 대원군이 청조선의 책임자, 개항장을 추가, 내지여행권 인정, 외교사절 북경 상주권 인정, 기독교 표교권 인정, 영국에 구룡반도(홍콩) 할양, (실질적인 아편 무역의 합법화) 청, 러시아에 우수리강 동안의 땅 양도.
1862, 베트남, 프랑스 스페인과 사이공조약 맺음
1864, 청 증국번의 상군 천경 점령
1865, 러시아 코칸트한국의 수도 타시켄트 점령
1866, 청(공친왕 대원군), 좌종당에게 복주선정국 설립 허가. 인도, 뱅갈지방에 대기근 (150만명 굶어 죽음)
1867, 말레이지아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됨
1868, 청, 좌종당의 복주선정국에서 造船 개시, 일본, 천황즉위와 명치유신 개원.(복건 절강에 확실한 대륙전진 기지를 건설 완료-소위 청이란 이름의 조선조정으로부터 완전 독립국 선언한 것)
1871, 청-일본 (드디어 대등한 자격으로) 수호조약, 통상조약, 해관세칙을 천진에서 조인.(국제법의 조약으로 확인)
1873, 러시아, 히바칸국(코라산[호라산, 보라산]지역)을 보호국으로 함, 청, 운남 이슬람교도의 반란 진압.(허~, 무슨 이슬람이 그 산중에 기어들어 오나?)
휴~, 아쉽다. 운남지방은 신강의 그리고 그 이후의 서안(혹은 북경)의 중앙조정에 굉장히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동남부 즉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베트남 태국 버마 인도와의 교역과 군사적 거점이었다. 다산과 초의와 홍수전은 그 동남부의 조선천하가 서구열강에 의해서 한점 한점 베어 먹히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통한의 세월을 살았던 것이다.
운남 지방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중화의 문화와 교역과 군사 정치적인 중심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동학과 태평천국에 대해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운남의 당대 조선최고의 시인 草衣의 시나 한 수 감상하자.
'고향에 돌아와서'
遠別鄕關四十秋 歸來不覺雪盈頭 멀리 고향 떠난 지 40년, 돌아 올 때는 머리가 하얗게 센 줄도 몰랐네.
新基草沒家安在 古墓苔荒履跡愁 새터에는 풀이 덮여 집은 어디 있으며, 옛무덤 이끼 끼여 발자국마다 수심일세.
心死恨從何處起 血乾淚亦不能流 마음 이미 죽었으니 恨은 어디를 따라 일어나겠으며, 피눈물 다 말랐으니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네.
孤筇更欲隨雲去 已矣人生愧首邱 외로운 지팡이로 다시 구름 따라 가고자 하네, 이미 끝장난 인간살이에 고향 찾은 게 부끄러울 따름이네.(공은 지팡이 공)
- 초의집/동국역경원,이종찬등 옮김
-150년 전의 수만리 相距의 불가의 시인이 남긴 상심의 한 구절이 이리도 온 몸을 떨리게 하네. 눈물, 피눈물, 恨, 마음이 다 말라 죽은 이 내 마음과 恨을 떠르르 울리어 살려 내네. 한동안 말라버린 눈물을 피눈물로 쏟아내게 하네. 통곡을 멈출 수 없네. 150년 전에 '끝장났던 인간살이'를 어찌 끝장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오? 그러나 또한 어찌 끝장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으리오?
오오! 천지신명님! 이렇게 끝장이라는 말입니까? 끝장난 줄은 알겠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갈 길을 몰라 불면의 밤을 지새는 서러운 내 혼이여! 그 서러운 현실 속에서 날로날로 새롭게 다가오는 님들의 맑고도 웅혼한 혼이여!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 나의 무기는 눈물! 그러나 이제는 그 눈물도 말라버렸네....
아마 제자 홍수전의 죽음과 천경함락의 소식을 듣고 이리도 처참한 상심을 노래했으리라. ‘오호 통재라! 하늘이 무너졌구나. 하늘이 무너졌구나. 모든 희망이 사라졌구나. 불국토 지상신선국 태평천국이 무너졌구나. 천하가 무너졌구나. 천하의 모든 인간살이가 끝장났구나.’ 연이어 들려오는 참혹한 살 륙 과 살 륙 과 살 륙 의 소식들.....(사 천 만 명 이나) ‘어이 할거나. 어이 할거나. 이 천하의 잔민(殘民)은 다 어이 할거나’
그 처절한 절망과 한숨과 눈물과 통 곡 이 통 곡 이 대 성 통 곡 이 이리도 가슴 미어지게 메아리쳐 온다. ‘아아! 어이 할거나.’ 초의의 눈물이 보인다. 그 통곡이 통곡이 대성통곡이 들린다. ‘어이 할거나. 어이 할거나. 이 캄캄한 절망을 어이 할거나. 죽음보다 더 참혹한 이 아픔을 어이 할거나. 이 언어도단의 삶과 그 살아 있다는 치욕을 어이 할거나.
천지신명님! 천지신명님! 신령님! 불천님! 저는 죽어도 좋사오니 제발 제발 이 잔민들은 좀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살 길 좀 열어 주세요. 제발 제발 이 약한 촛불을 꺼뜨리지 말아 주세요. 제발 제발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제발 제발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님이여! 님이여! 다산스승님이여! 至氣今至 願爲大降 至氣今至 願爲大降 至氣今至 願爲大降..........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초의여!
초의여!
초의여!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인이 아니다. 누가 우리 아버님, 할버님을 왜인이라고 한다는 말인가? 나는 고향 마을의 어르신들의 청국놈 만주놈 뙤놈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컸다. 그 일종이면서 더 독종이고 악종인 일본인을 왜놈이라고 부르는 분위기에서 철이 들었다. 우리 고향 어르신이나 이 반도의 사람들을 왜인이라고 혹은 왜인의 일종이라고 암시하는 글들을 볼 때 그 무지와 혹은 불온한 의도에 심한 분노가 일어난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 가계를 예로 들어서 이야기해 보자. 우리 고향에는 11대조 산소까지 있다. 이 중시조께서 귀양을 왔는데, 그 지역 토착 양반이 우리 중시조 할버님을 보니까 인물이 하도 좋아서 딸을 주어서 그 동네에 주저 앉혔단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우리 고조부 3형제의 후손들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고조부 윗대의 산소에 벌초를 오거나 모사에 참여하는 다른 지손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 고조부 이상의 윗대 어르신들의 산소는 다 가묘라는 이야기다.
조부님께서는 1967년에 84세 때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조부님은 1884년에 태어나셨다. 고조부님 삼형제가 손자인 조부님까지 낳아서 이 반도에 들어오셨다고 추정되지는 않는다. 아마 그 삼형제가 자식들인 증조부님들을 데리고 피난해 들어왔든지 혹은 피난해 들어오셔서 현지에서 우리 고향에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셨든지 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1864년 전후에 이주해 오신 것이라고 추정된다.
1964년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마을 앞까지 물이 가득 차서 학교에 안 간다고 너무나 신이 나서 좋아 했던 기억이 있다. 번번이 비가 조금 많이 오면, 마을 앞에서부터 시작하는 약 3~4백만평이나 되는 들판이 물에 잠겨서 파농(破農)이 되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 뒤 1980년대나 되어서 그 들판에 둑을 쌓아서 그 뒤로는 앗물(아랫물 - 아래에 있는 낙동강 본류의 큰 강물이 우리 고향 들판을 끼고 흘러가는 지류로 밀고 들어 올라 오는 물)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그 풍요한 대평원이 이제는 비닐하우스가 가득 차서 우리 고향은 전국에서도 풍요한 농촌의 대명사가 되어 있지만, 그 둑 공사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 고향은 정말 가난했다. 보릿고개가 심각했다. 마을의 제일 부자라는 우리 집도 거의 매일 무밥(쌀에 무채를 쌀 보리의 양만큼 섞어서 한 밥)을 먹어야 했다.
개간할 수 있는 모든 골짝은 다 개간해서 소를 먹이러 산으로 가서 둘러보면, 눈에 보이는 계곡은 모두가 계단식의 다랑논이 그 계단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아득 보이곤 했다. 정말 천수답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의 모습은 그때는 그랬다.
우리는 국민학교 시절 매일 미국 구호 식품인 강냉이 죽과 강냉이 빵을 얻어먹었다. 그 당시의 토지와 기후의 상황으로는 정말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었다. 내 고향의 정황을 볼 때 단지 우리 집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어려웠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다. 거의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피난 온 것이라고 추정된다. 186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는 한반도의 모든 상황이 비슷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야기할 것이다. 김해평야 호남평야 만경평야 상주평야와 경기평야가 있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생각해보자. 소수레(50호가 살던 고향 마을에 ‘구루마’-소수레를 그렇게 불렀다-가 있는 집은 서너 집밖에 없었다.)를 이용하든, 지게를 이용하든 땅을 고르게 할 수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낙동강 하구의 그 거대한 물을 다스려서 제방을 쌓아내는 일은 근대 증기기관의 힘과 고도의 집중적인 권력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
즉 1910년대 이전에는 평야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증기기관도 권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호남 만경평야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큰 강이 없었다 하더라도, 수로 건설이나 농수 공급 같은 일은 지게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960년의 어느 날 고향 저수지 공사하는 날, 어린 내가 아침 밥투정을 할 때, 아버님이 불도저를 구경시켜 줄 테니까 밥 먹고 같이 가자고 해서 장정 100명도 하지 못하는 일을 불도저가 밀어붙여서 해내는 구경을 하면서 어린 나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어떤 다른 세계를 넘겨다 본 기억이 있다.
일제 때까지 김해평야의 대부분은 그냥 지금도 유명한 을숙도의 갈대숲과 똑 같았던 것이다. 김해평야가 없다면, 김해는 그냥 사람 살 데가 없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식량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디서 금관가야가 성립할 수 있다는 말인가? 1900년대 초반까지 반도는 국가가 성립할 수 없는 땅이었다. 농사를 지어서 자신이 먹고 남는 게 있어야 국가기구도 만들고, 군사 문화 종교 교육 등의 활동을 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게 아닌가? 자신이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남을 먹여 살린다는 말인가?
반도 땅에 국가 같은 게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내 상식으로는 머리가 조금 비었거나, 아니면 너무 꽉 차서 제 기능을 못하는 사람일 터이다. 내 추정으로는 1850년대까지 반도에는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나온 일본어를 사용하거나, 20세기에 와서 백화문 운동 이후 제대로 사용되거나 교육 보급되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왜인이나 만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냥 조선천지의 사람일 뿐이다.
물론 18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입해 들어오는 피난 조선인들로서 일본어나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우리를 왜인이라고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시의 대륙의 엄청난 파천황의 대재난을 전혀 모르고, 그 ‘잔민’들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그 바탕 위에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조직적인 이민과 식민을 하여 반도조선사를 조작해 심기 시작하고,
1945년 이후에 귀환동포라는 이름으로 대륙과 열도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유입하고, 1950년 1951년의 피난민 행렬이 줄을 이어 내려 왔던 것이다. 그 피난민들은 누구일까? 역시 대륙의 이주민들이다. 누가 우리를 왜인이라고 한다는 말인가? 왜인(뙤인, 만주인-남만인, 청국인)들은 박정권 시절에 대부분 쫒겨 나갔다. 일본인들(메이지 후의 일본어 사용자들)은 1945년에 살아남기 위해서 일본으로 다 돌아갔다. 도대체 누가 왜인이란 말인가?
어린 시절 들판에서 뛰어 놀다가 두루마기로 갈아 입으시고 활발한 걸음걸이로 읍내로 나가시거나 읍내에서 돌아오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던 것은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는 영상으로 선명히 내 뇌리에 남아 있다. 그 두루마기 옷자락이 그 활달한 걸음걸음에 펄렁펄렁 날리는 모습이라니, 마치 신선이 땅을 차고 나르는 것 같고, 고구려의 조의선인의 씩씩하고 날렵하고 늠름한 행진 같은 느낌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너무나 가난에 찌들었지만,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날에는 누구나 무명베로라도 두루마기를 지어 입으시고 펄렁펄렁 다니시던 마을 어르신들, 그 가난에 찌들은 중에도 다들 키는 175나 180센티미터 정도가 되는 뼈대 굵은 강골의 어르신들, 그 어르신들은 이 땅 반도에서 찌들어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사시던 분들이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체제의 주입과 세뇌와 경쟁과 번민에 차 있는 우리와는 그 류(類)가 다른 대인들이었던 것이다.
오늘 동학천도 태평천국과 그 때의 대륙의 잔민들의 아픔이 이 반도의 우리 할아버님들의 아픔과 연결이 되니, 참으로 애가 타도록 아버님이 그립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망극한 불효자로서 임종의 자리를 지키지도 못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드리거나 이해하지도 못하고, 평생 ‘나는 아부지 같이 안 살끼다.’고 되뇌었던 못난 자식의 모습이 회한의 깊은 한으로 남는다. 지난 25년을 아버님을 제명에 못 보내고 죄책감과 후회와 그리움과 사랑과 존경으로 오직 아버님 같이 살기 위해 매진해서, 드디어 오늘에야 아버님의 그 비밀을 깨치게 되었다. ‘아버님, 할아버님, 이제는 부디 편안히 쉬소서!’
첫댓글 동학과 태평천국에 대한 글은 상당히 관심이 많고, 최남석 선생님의 글과함께 항상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동학의 중심이 되는 위치를 중앙아시아로 비정하신다는 면에서 더욱 창조적 접근이십니다. 다음 글도 한번 기대해 봅니다..
추가적으로, 선생님의 가계처럼 저의 집안의 가계도 윗대로 10대정도 올라가면서 한반도에 조상들의 무덤들이 있으나, 그 윗대를 살펴보면, 분명히 족보에는 이름이 나오지만, 무덤을 더이상 찾을 수 없다고 종친들께서도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특정시기에 대륙의 많은 인물들이 한반도로 넘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고, 그 시기는 1800년대 이후가 될 것이라는 추측이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어린시절부터 저는, 저의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입학 때 부터 인지, 옆에 있는 친구들이 나와는 좀 다른 사람들 같다라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가져 왔습니다. 거의 50% 또는 그 이상이 나와는 다른 사람들인 것 같다라는 느낌이었지만, 그렇게 크게 개의치는 않았습니다. 어린시절 누구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낯선이에게 대한 두려움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또한, 전세계의 많은 책과 정보를 접해가면서, 나와 나의 조상이 확실히 많은 한반도인들과는 다른면이 있다라는 것에 확신을 해가고 있습니다. 현재도 그렇습니다..
아버님과 아버님의 친구분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역시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부친께서 뭔가 주위의 친구분들과 외모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무엇인가 친구분들과 다른 면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아버님도 인정하시더군요... 웃음으로서 말씀을 회피하시지만, 당신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이후 Media가 발달하면서, '실크로드', '대황하', 최근의 '차마고도'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저기에 몰려있구나.. 라는 것입니다. 아버님도 그것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작년으로 기억하니다만, "우리집안의 출신은 저쪽, '중앙아시아' 인것 같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요... " 이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그런가보다.. 이렇게 웃어 넘기시더군요... 구체적인 가계의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없이니 정확히는 알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언제부터 우리집안(종친)이 한반도에 살게되었는지...
저의 느낌으로는 종친의 많으신 분들이 '중앙아'느낌이 강하셨습니다. 특히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님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그만큼 최근에 옮겨 왔다는 반증이 아닐런지요?.. 족보와, 역사는 수정이 가능합니다. 조작가능합니다. 그러나, DNA는 조작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만약 우리 가계의 족보와 역사가 사실이라면, 그들이 활동했던 조선과 왕이 있던 곳은 대륙보다는 '중앙아시아'가 더 맞다는 것을, 과학적 접근이 아니더라도, 외모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출신들의 신체구조는 보통의 대륙과 한반도인들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동유럽인들, 특히, 헝가리의 집시들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아시아인들보다도 동유럽인들과 유사합니다. 대부분의 한반도 인들로부터 느껴지는 낯설음이, 그들에게는 덜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international business를 수년간 해오면서, 특히 서유럽 지역을 담당하면서, 출장도 꽤 다니었습니다. 그러면서 현지에서 보고 듣고, 이메일과 전화로 매일 그들과 이아기 하면서, 왠지 나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놀래곤 합니다.
그 이유의 해답을 '대륙조선사' 카페의 활동을 하면서, 서서히 풀어가고 있습니다. 자료를 찾고, 인과관계의 story를 만들어가면서 함께 공유되는 부분이 있었다라는 것에 제자신이 수긍하고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