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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영광보다 크리라(2)
학 2:1-9
1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1)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설 교 >
성전 건축은 거룩한 배짱으로 하는 것입니다
학 2장 1~5절 / 임현수목사
한국의 정주영씨는 그냥 재벌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초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지만 배짱이 두둑한 사람입니다. 설문 조사에 의하면 현대중공업 직원들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뚝심’과 ‘배짱’을 가장 닮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대 직원들은 500원 지폐로 선박을 수주한 일(52.3%)을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1천 마리 소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한 일(17.8%), 대형 유조선으로 바다를 메워 물막이 공사를 완수한 서산간척지의 신화(17.4%) 가장 큰 업적으로는 수출을 통한 경제발전(45.9%) 대북사업 통한 남북관계개선(26.6%), 88올림픽 유치(9.8%) 세계 최대 조선회사 건설(56.3%), 해외시장 개척(21.2%), 경부고속도로 건설(13.1%), 자동차 산업 발전(3.3%) 등을 말했습니다. 정 명예회장의 가장 닮고 싶은 점으로는 뚝심, 배짱, 열정, 도전정신 등 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징기스칸이라고도 부릅니다. 징기스칸은 초등학교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맹이었지만 동물들의 세계에서 지혜와 용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정 회장의 유머 가운데 빈대이야기도 유명합니다. 노동자 합숙소에서 자면서 하도 빈대가 많이 올라 오니까 침상의 네 다리를 물을 담은 대야에 넣어 빈대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잤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빈대도 머리를 썼는지 벽을 타고 천장으로 기어올라가 정주영 회장의 복부를 향해서 낙하공격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직원들이 게으르고 불성실할 때마다 “이 빈대보다 못한 사람아!” 라고 야단쳤다고 합니다.
일본의 총리를 지냈던 다나까 가꾸에이도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주경야독을 하며 자란 그는 사업에 큰 성공을 해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손에 쥐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능력이 인정을 받아 일본의 대장성의 장관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대장성은 수재들의 집합처입니다. (정책입안·재무·세정·금융 등 일본경제의 거의 모든 분야를 관할하는 경제부처인 대장성 관료들을 일본에선 관료 중의 관료라고 부릅니다)
동경대학을 비롯해서 명문대학의 출신들이 관료로 자리를 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돈 좀 벌었다고 해서 자기들의 수장으로 들어앉았으니 그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장성의 관료들을 앞에서 이렇게 취임 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알아주는 천하의 수재들입니다. 반면에 저는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대장성의 전문적인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대장성의 모든 일은 여러분이 도맡아서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의 뒤에서 여러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도 다나까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장성 장관의 일을 성공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그 뒤 그는 일본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일을 할 때도 이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좀 배짱이 두둑해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야 말로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악한 마귀가 가만히 내버려두겠습니까? 악한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서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고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담대히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두드러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입니다.
오늘 본문을 4절 말씀을 중심으로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1∼3절)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다가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둘째로, (4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말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다가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1절 "칠월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한재가 임했습니다. 그들 자신도 황무한 삶, 곤고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지자 학개가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 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1:15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로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이십사일(6월24일)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때로부터 약 4주가 지났을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월력으로 칠월 이십일일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칠월 이십일일은 이른바 초막절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 날은 성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입니다. 이러한 때를 이용해서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라."
성회로 모인 곳에는 이스라엘의 두 지도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도 있었습니다. 그 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여기에는 세 개의 질문이 등장합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들 가운데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히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제1성전, 곧 솔로몬 성전의 모습과 지금 자기들이 짓고 있는 제2성전, 이른바 스룹바벨 성전의 모습을 서로 비교해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 옛날의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자기들이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은 너무나도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 3:12에는 그 당시 노인들은 자기들이 짓고 있는 성전의 초라한 모습을 탄식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 3: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솔로몬 성전은 레바논의 백향목을 가져다가 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8의 말씀대로 주변에 있는 산에 올라가서 그곳에 있는 나무를 가져다가 짓고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내소와 외소를 정금으로 입혀 보기에도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있었던 하나님의 법궤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탈한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좀더 잘 지어드리고 싶었는데 그만한 여력이 되지 못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언제나 마음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다윗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 짓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는 시27:4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다윗의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윗은 군인으로서 그 손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전을 짓고자 했던 다윗의 마음을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없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등불이 영원토록 꺼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결과 다윗의 자손들이 대대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그토록 갈망했던 성전 건축을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가서 이루어지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아름답게 보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든든하고 평안히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솔로몬 성전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겉보기에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했습니까? 그러나 그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가봇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여지없이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마음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 크게 지을 수도 있고, 작게 지을 수도 있습니다. 또 형편에 따라서 화려하게 지을 수도 있고, 초라하게 지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입니다.
만일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물질 드리는 것이 아까워서 하나님의 성전을 초라하게 지었더라면, 하나님은 그 성전을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 잘 지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눈물과 땀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헌신을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을 기쁘게 받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했던 심정을 우리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아름답게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4절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자신들이 짓고 있는 성전이 과거의 솔로몬 성전보다 너무 초라한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보시고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이름을 친히 부르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을 친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면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4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9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한국 탁구계의 신화를 남긴 양영자 현정화 두 선수는 <탁구계의 여왕, 집념의 승부사>로 불리웁니다. 두 사람다 테니스 엘버, 간염으로 쓰러지고, 허리다쳐 은퇴하고.. 탁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랬지만 기도 중에 다시 힘을 얻고 세계 여자 탁구 사상 최초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습니다.
88올맄픽 때도 결국 중국과 또 다시 만난 복식 결승전에 대해서 양영자 선수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결승전 당일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아무도 넘을 수 없을 것이라던 중국 탁구의 벽을 우리는 기도로 넘어섰던 것입니다. 기도로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조국의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리함으로써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시련도 허용하시지만 기도하면서 나아갈 때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만 바라보십시다. 쉽게 낙심하지 말고, 쉽게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십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 합니다.
신 31:6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신 31:7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
신 31:8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수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스스로 건축하라는 격려의 명령입니다. 스스로 못한다는 패배의식을 버리고 너희가 건축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건축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겠지,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네가, 너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하겠지 하며 남에게 미루지 말고, 내가 안하면 할 사람 없다고 생각하고 자원하여 일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입니다.
5절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하나님은 낙심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화를 내리실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약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둘째,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1:14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누가 그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셨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한마음이 되어서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1:6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신은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을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와 같은 시대 인물이었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건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슥4:6의 말씀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성전 건축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는 본시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신 분들이 모여서 세운 교회입니다. 피난시절이라 모두가 어려웠습니다. 궁핍했습니다. 그들은 남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서 누더기 천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천막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렸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전 건축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주일 날 그러한 내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교회 건축이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선포한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현금이 없기 때문에 결혼반지를 하나님께 건축 헌금으로 드린다고 바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은 옷 이외에 덮고 자는 담요 한 장뿐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숟가락 한 개와 밥공기 하나뿐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내어놓았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것들은 보잘 것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신 분은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이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 최대 장로교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서울 영락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 건축은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입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 바로 성전 건축입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더이상 이러한 핑계를 대지 마십시다. 그러다가는 결국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되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겁먹지 마십시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힘껏 일하시기바랍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한히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들을 이끌고 가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제2성전, 곧 스룹바벨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었습니다. 똑같은 성전 건축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새 성전을 건축하는가? 우리는 왜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까?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셔서 주님의 큰 용사들로 쓰임 받으식를 바랍니다.
<성전 건축의 성서적 근거>
1. 주님의 기대이며 명령이기 때문 입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라 사 54:1-10)
사 54: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2. 장소가 좁으면 넓히라고 말씀 합니다
(장소가 너무 좁을 진대 수 17:14-18)
수 17: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대학교의 경우 2만명 학생/ 100만평의 교지(校地)확보> <우리교회의 경우 /50학급이 넘는 규모의 학교 규모/ 학교 시설에 비해 너무 적은 공간과 시설>
3. 성전 건축은 좀 무리하게 강권(强勸)해도 좋은 일 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 - 막 15:21
천사들이 롯의 가족을 억지로 끌어낸 사건 – 창 19:15-16
산으로 들로 나가 강권하여 잔치에 데려옴(눅 14:)
4. 지경을 넓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의 기도: 역대상 4:9-10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5. 성전건축은 교회 사랑의 표현입니다.(고후11:22-30)
6. 내 집보다 하나님의 집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학 1:1-15)
삼하 7:1-2, 삼하 7:1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청교도들이 제일 먼저 한 일 / 성전 건축> 하버드,예일,프린스톤 같은 일류 대학은 모두 목회자 양성 교육기관으로 출발한 대학임.
7.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엡 2:1-10)
영혼 구원 < 그리스도의 일군 된 것 < 성전 건축은 모두 특별한 은헤입니다.
8.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축복 받는 비결입니다
(눅 6:38, 행 20:35, 마 7:12, 마 10:42, 말 3:10, 창 22:12, 삼상 1:10-11..)
9.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에스라 1:1-11) 왕상 5:5, 학 1:8
10. 자손 만대에 복을 받기 위하여 /은혜에 대한 보답 / 미래의 시대를 대비 /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내 집보다 하나님의 집이 먼저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경우 소낙비처럼 주실 것입니다.
학 2:19을 다시 보십시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여기 '오늘부터' 라는 말을 기억하십시다. 이제부터 여러분 약해지지 마십시오. 두려워 마십시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약속 믿고 승리하시고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굳세게 하여 일하라
학 2장 1~9절 / 이삼규목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학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들었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16년이나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의 역사가 재개된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다리오 왕 2년 유월 이십 사일이었습니다(주전 520년 9월 중순).
이와 같이 공사가 재개 된지 한 달여 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다시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학 2:1 칠월 곧 그 달 이십일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이 일 개월 동안 성전 건축의 준비도 아마 상당히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설교가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초막절은 모든 사람들이 추수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모여 와서 절기를 지키며 크게 즐거워하는 때였습니다. 특별히 절기 끝 날은 그 절정을 이루는 큰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날을 택하여 선지자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설교는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까?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남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설교 때마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이름을 꼭 거론할까요? 그것은 그들의 위치가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이 누구였습니까? 여호야긴 왕의 장남 스알디엘의 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윗의 왕통을 이은 사람입니다. 일찍이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예언을 하였습니다.
호 1: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호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그러므로 스룹바벨은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제사장 사독의 후손으로 해방된 이스라엘의 새로운 대제사장의 위를 이었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정통성을 지닌 완전한 나라로 회복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번째 설교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백성들에게 선지자는 "굳세게 하여 일하라!"는 권면의 설교를 한 것입니다.
1. 남아 있는 자-이전 영광을 본 자(3절)
학 2: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재건하는 성전은 분명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와 같이 석공이나 목공들을 멀리 해외에서 들여오지도 못했고 또한 성전의 내소와 외소를 정금으로 입혔던 그 때의 성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성전의 크기의 규모에 있어서 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화려함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재건된 성전의 크기는 아마도 옛 성전의 규모와 같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로는 그 성전은 옛날의 기초를 찾아 그 위에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능성이 높은 것은 포로들이 돌아와서 처음 번제를 드릴 때 그들은 그 단을 "그 터 위에"세웠기 때문입니다(에스라 3:3).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라는 말의 원 뜻은 "허무한 것 같지 아니하냐?"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것을 넘어서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성전에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당연히 법궤가 있어야 합니다. 성전을 재건하기는 하지만 법궤도 없는 성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허무를 느꼈을 것이 당연합니다. 법궤뿐 아닙니다. 성전에는 진설병 상도 있어야 하고 등대도 있어야 하며 분향단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재건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텅빈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좀 하는 줄 알았는데 했다는 게 이것뿐인가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것은 초대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를 비교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을 연구해 보면 초대교회는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을 한 교회였습니다. 성도들끼리 유무 상통이 이루어졌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며 성도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증가하였고 연합하는 일과 기쁨과 찬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과거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물론 건물은 더욱 화려하여졌는지 모르지만 내실을 놓고 따져보면 빈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주의 사역자들이 자괴감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을 보았던 노인들은 자신들이 재건하는 성전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과거의 향수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허탈감은 성전 재건과 동시에 더욱 커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옛것을 기억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과거의 법궤는 허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렘 3: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법궤는 실체가 아닙니다.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일 법궤가 남아 있었다면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맞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법궤가 사라진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히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 9: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히 9: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히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히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여러분! 우리는 허상에 매달려 있으면 안 됩니다. 실체를 붙들어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얽매여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에 얽매여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율법시대가 아닙니다. 율법은 몽학 선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실체가 오셨는데 율법에 얽매여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것입니까?
2.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4-5절)
성전의 화려하지 못함과 또는 허무함에 낙심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권고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학 2:4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총독이었던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그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스스로 굳세게 일할지어다"라고 세 번 거듭하여 권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일이 이름을 불러 권고하시는 것은 저들로 힘을 다하고 용기를 다해 굳은 결심으로 성전 건축에 다 같이 참여해야 할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요즘 졸업 시즌이지요. 보통 졸업장에 가보면 졸업증서를 대표 한 사람에게만 수여합니다. 그런데 좀 특이하게 졸업식을 하는 고등학교를 보았습니다. 전주기전여고 졸업식에 가보니 교장선생님이 몇 백명 되는 졸업생들에 일일이 졸업장을 수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도 받고 악수고 하고 다른 선생님들과도 악수를 나누는데 아마도 처음으로 악수를 해본 학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학교에서는 혹 그렇게 하지만 일반 중, 고등학교에서 그렇게 하는 학교는 전국적으로 드물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이 학교의 졸업생이라는 자부심을 더욱 심어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같은 말을 세 번씩 반복하여 이름을 불러 말씀하신 것은 그들을 더욱 격려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굳세게"하라는 구호는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땅에 들어오기 전후에 벌써 여호수아에게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번 거듭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신 31:6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신 31:7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
신 31:8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수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수 1: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0:25 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언약의 백성들이 그 어떠한 환경에도 스스로 굳세게 해야 하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는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이 너희 중에 머물러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신이 너희 중에 머물러 있으니"라는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머물러 있다'는 원 뜻은 하나님의 신이 끊임없이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 머물러 있으리라는 강한 뜻을 지니는 말입니다. "나의 신이 너희 중에"머물러 있나니"라고 할 때, "너희 중에"란 말도 특별히 강조하여 힘주어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 굳세게 일하는 백성 중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니 결코 낙심도 말고 또 두려워하지도 말고 더욱 분발하라는 말씀입니다. 성전 완성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이런 예언을 하였습니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실 까요?
스스로 굳게 하여 일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성령님의 도움이 없다면 인간의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3.진동시킬 하나님의 역사(6-7절)
학 2: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학 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조금 있으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는 대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학개 선지의 예언이 있은 후에도 517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천 날이 하루 같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경천동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멸망 받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다시 재림하실 때는 그 진동되었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국의 보배이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도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보배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들이 재건하는 성전에 임하신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법궤가 있음으로 영광스러웠다면 보배이신 예수님이 임하신 스룹바벨의 성전은 더욱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솔로몬의 성전이 영광스럽다고 해도 하나님이 친히 임하신 스룹바벨의 성전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학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의 모든 금은 보화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이런 것들을 동원하여 성전을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금은 보화가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전에 영광을 충만케 하실 분은 다름 아닌 '만국의 보배'가 되신 그리스도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성전은 그 어떤 보물로 채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헛된 것뿐입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백성들이 손수 자기들의 힘으로 성전을 은과 금으로 장식하지 못함을 슬퍼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일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다 할지라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더 이상 성전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학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솔로몬의 성전과 스룹바벨의 성전을 비교하여 말씀합니다. 물론 두 성전의 화려하거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을 비교한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법궤가 있었고 영광의 빛과 구름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영광이 과연 스룹바벨의 성전에 충만했던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둘째 성전이 첫 성전보다 그 영광이 크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은 말라기 3:1절과 잘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인 그리스도가 그 성전에 임하게 될 때 비로소 아버지의 영광이 그 독생자를 통하여 충만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9절의 말씀은 곧 성전의 주인이요(마12:6), 실체가 되시는 주님께서(요2:19) 그 성전에 임재 하실 것을 예고하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성전은 평강의 근원이 될 것이고 모든 축복이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와 온 세계에 뻗치게 될 것입니다.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러기 때문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백성들이 자신들이 재건하는 성전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깨달아 더욱 분발하여 굳게 서서 일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는 성전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을 성전 삼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령 하나님을 모신 우리는 참으로 큰 영광을 소유한 성전입니다. 누구든지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모신 성전 된 우리는 더욱 굳세게 서서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격려
학 2장 1~9절 / 송기성목사(나성한인감리교회 담임)
열 번의 책망보다는 한 번의 격려가 더 낫습니다. 책망은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격려는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책망을 많이 받으면 자신감을 잃고 매사에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격려를 많이 받은 사람은 자신감을 갖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곤 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책망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죄악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죄인을 향해서는 관대하게 격려하시는 하나님신 줄 믿습니다.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저는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격려를 절감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4)
본문에 세 번씩이나 강조된 말씀이 있습니다.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이 말씀은 "힘을 내라"(be strong), "용기를 내라"(take courage)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격려는 우리들에게 힘을 내게 하며, 용기를 갖게 해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힘과 용기를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격려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재건코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가서 방해에 부딪치고(스4:1, 23), 힘을 잃어서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공사를 중단한 채 15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중단한 15년의 세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침체와 함께 생활의 곤경을 초래한 기간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재건할 만한 힘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하시면서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얻고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영적자원인 줄 믿습니다.
1981년 7월 유학 비자를 받아놓고 책과 옷을 정리할 때 가벼운 흥분과 무거운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크게 세 가지 걱정을 했습니다. 서툰 영어로 과연 공부를 해낼 수 있겠는지? 학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처자식의 거처와 생활은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지? 이런 고민과 문제를 안고 천안 근교 운봉산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며칠 째 되던 날 새벽 텅빈 예배당 마루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유학을 목회의 연장으로 다짐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구했습니다. 그때 창세기 28:15 말씀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성경을 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저는 그 말씀을 기도의 응답으로 확신하였습니다. 그 순간 불안과 염려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신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여년 동안 저는 기도할 때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며 고난과 난관에 굴하지 않고 사명을 따라 전진해 왔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약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가 여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세상을 사노라면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불안과 좌절, 무력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I am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 of the age. mt 28:20). 믿음의 사람은 역경 중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고 외치며 복음 전도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존 웨슬리 목사님은 임종시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맞습니다.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을 힘입어 고난과 난관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시를 축원합니다.
2. 내가 영광으로 충만케 하리라.
성전의 터를 닦고 기초를 놓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었으며, 레위인들도 제금을 들고 서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성전 건축의 기초 공사를 보면서 너무 감격해서 환성을 울리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돌아서서 목을 놓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 짓는 성전이 옛날 솔로몬 성전의 영광에 비하여 볼 때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울며 탄식하는데 그치지 않고 성전의 터를 닦고 기초를 놓은 사람들을 비웃으며 성전 건축을 업신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솔직히 사람들은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눈에 보잘것이 없어 보이는(학 2:3) 성전 건축에 대하여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불평과 불만, 탄식과 통곡을 한창 헌신하며 일하던 사람들에게 실망과 좌절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7, 9) 하시면서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얻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건물의 크기를 보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의 크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건물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서울의 영락교회는 1946년에 북한 피난민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서울의 어느 산 위에서 만났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누더기 텐트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주일 날 눈이 녹아 내리는 바람에 그 천막이 무너졌습니다. 모든 교인이 궁핍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경직 목사님은 교회 건물을 지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비현실적이고도 불가능한 계획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경직 목사님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여자 성도가 자기는 돈은 없지만 결혼 반지를 바치겠다고 드렸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자기가 입고 있는 옷 이외의 유일한 소유는 담요 한 장인데, 그것을 바치겠다고 내놓았습니다. 세 번째 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숟가락 한 개와 밥 공기 하나 뿐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인 영락교회의 처음 성전은 이렇게 해서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피난민 시절에 영락교회 교인들이 드린 것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것이 없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믿음을 크게 보셨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와 사역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충만케 해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믿고 기도하며 헌신하는 비전 2천 세계 선교 센터와 성전건축 역사 위에도 그 영광을 충만케 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과 항상 함께 해주실 뿐만 아니라 영광을 충만케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충만케 해주실 것을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그래서 용기 있게 비판과 불평에 굴하지 않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해주심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내가 평강을 주리라.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안정과 번영과 평화를 절실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타버린 성전(왕상 6:9)을 재건하는 일보다 자기 집에만 발이 빨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고 변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학개 1:6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집보다 자기 집에 발이 빨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에 손이 빨랐습니다. 그들은 물론 많은 소득과 만족한 생활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을 했지만 소득이 적었습니다. 아무리 먹고 마셔도 만족이 없었습니다. 재물을 모으려고 애를 써도 구멍 뚫어진 전대처럼 다 새어나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연속되는 실패와 곤경 속에서 그들은 불안해 하며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하시면서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얻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건축을 우선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인하여 그동안 그쳤던 하늘의 이슬과 땅의 산물을 다시 내려 주신 줄 믿습니다.
지난 7월 29일에 백수 감사예배를 드린 남정관 장로님(100, 스태튼 아일랜드 한인감리교회, 남학희 목사 부친)의 이야기입니다. 가문의 5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너무나 허약한 병투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 아이가 과연 사람 구실을 할까?'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제멋대로 자란 그는 그만 방탕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인을 따라 38세에 크리스찬이 된 그는 12살 때부터 피웠던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당시 43세)에 감리교 초대장로가 되었습니다. 82년에 이민 온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충남 공주시 탄천면에 있는 집을 팔아 교회를 건축하고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으로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것은 '노방피켓전도사역'을 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86세에 시작해서 99세가 될 때까지 무려 13년간 계속해서 노방전도로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그의 간증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더라구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피켓을 들고 있으니까 어느날부터인가 차차 반응을 보이는데 자동차를 타고가던 외국인들이 차창문을 열고 손을 흔드는가 하면, 고개를 내밀고 격려하고, 1달러짜리, 5달러짜리, 심지어는 10달러도 헌금을 해, 그럴 때면 더 보태 교회에 드리곤 했지요. 병약했던 내가 백년을 살 줄은 몰랐어요. 모든 것이 감사하지만 무병하게 백년을 넘어섰다는 것이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지요. 하나님께 감사가 넘칠 뿐입니다. 앞으로도 남은 생을 주를 위해 열심히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여러분, 길가에서 무거운 피켓을 들고 서서 전도하는 100세 노인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몇 해 전 부흥회를 간 그 교회에서 그 장로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니 피켓을 들고라도 전도함이 마땅하다"고 고백하는 백세 장로님에게는 아직도 힘이 있고 용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사명을 땅에 묻어 놓은 사람에게는 감격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격려 속에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영육간에 평강과 감사가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평강케 해주심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번 나성산 기도원에서 비전센터의 융자화 허가 등을 생각할 때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 끝이 안 보이네요." "하나님, 방법이 없네요" 그때 주님께서 제게 이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내가 오메가 아니냐?" "내가 길이 잖느냐" 아멘! 아멘!
"아! 그렇지요. 하나님, 알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제게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격려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내가 영광으로 충만케 하리라. 내가 평강을 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격려를 힘입어 역경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의 헌신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만국의 보배
학 2장 1~9절 / 김상복목사
지난 1991년에, 제가 할렐루야교회에 담임목사로 온지 1년이 되었을 때, 할렐루야 교회 홍보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지난주에 그것을 여럿이 같이 보다가 재미난 것들을 발견했어요. 제일 재미난 것은 그때는 우리가 다 젊었었다는 거죠. 그 때 김인민 장로님과 KBS 여자아나운서 성도가 나레이터로 교회소개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해요. “우리 교회는 ACTS에 유학 온 네팔 학생, 방글라데시 학생들을 공부시켜 돌려보내서 그곳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 다음 말이 “우리가 지금 현재 2명의 선교사를 보내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몇 명이요? 2명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할렐루야교회 선교사가 몇 명인지 아십니까? 이번에 자원하신 분 빼고 159명이에요. 2명의 선교사를 원했던 우리 교회가 15년 후에 159명의 선교사로 전 세계를 섬기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그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평신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목사 선교사는 몇 명 안 되요. 무슨 말입니까? 선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 선교학교와 선교 비전스쿨(MP)이 있어요. 성경 대학에 ‘선교반’이, 젊은이들에게 ‘DTS'라는 선교훈련이 있습니다. 선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분들이 이런 과정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교 마인드를 품고 계신 선교사이십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이 비천한 땅에 우리를 위해 선교사로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다 빛을 보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 파송 받으신 이홍주 선교사님은 연세가 제법 되셨어요. 머리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단기 선교로 가보니까 어른들의 자리와 역할이 있다는 겁니다. 젊은이 선교사들의 부모, 삼촌, 형이 되어 그들을 돌봐주며 선교할 수 있는 역할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선교사로 가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선교사로 다 가셔도 괜찮아요. 교회가 비면 어떻게 하냐고요? 다른 사람들을 또 불러오면 되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교 마인드를 품고 어느 하나님의 마음인 선교의 어느 파트에서든지 모두 참여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데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130년 전의 한국은 참 보잘것없는 나라였습니다. 보잘 것 있던 때가 딱 한 번이었는데, 그것이 고구려 시대입니다. 그 기상이 대단했습니다. 한반도의 복판에서 북쪽으로 저 넓은 만주 땅을 다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이제 서쪽의 중국 대륙을 향해 가려고 한 기상이 그 때는 있었어요. 그런데 한반도 저 남쪽 구석에 바다 말로는 나갈 데 없던 신라가, 압록강까지 가보지도 못한 나라가, 그나마 자기 실력으로 고구려를 정복했다면 그 힘으로 다시 만주와 중국을 행해갈 수 있었으면 대단한 것이겠지만, 저 중국의 당나라를 데려다가 자기 형 같은 고구려를 때려 엎어놓고, 압록강, 두만강 남쪽에서만 오물조물 하다가 그것도 제대로 유지 못하고 고려한테 정권을 넘기고 말았지요. 그렇게 신라의 천년이 끝났습니다. 고려가 다시 일어나려고 고구려의 큰 꿈을 이루어 보려고 시도를 해보았지만 고구려 같은 기상은 다시 나타나지 못했고, 결국 만주를 다 뺏기고 밀려서 압록강과 두만강 안쪽에 막혀 어디로 움직일 데가 없는 작은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다시는 세계적인 기상과 사명을 갖고 살지 못했고, 겨우 그저 중국에서 관리제도나 교육이나 문자를 좀 배워서 ‘어떻게 하면 중국처럼 돼볼까?’ 이러면서 100년 전까지 고생하면서 살아왔다지요. 그런데 그나마 우리끼리 사분오열되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그것도 제대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살아왔던 별로 보잘것없는 그런 우리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도 보잘것없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중 북쪽이 먼저 망했습니다. 앗시리아가 쳐들어와서 다 파괴하고 열 부족을 다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저 몇 명이 도망을 쳐서 남았어요. 얼마 후에 이번에는 바벨론이 남쪽에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성전과 성벽을 다 무너뜨리고 남은 두 부족마저 잡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보잘것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민족, 보잘것없는 나라, 보잘것없는 무너진 성전... 결국 포로생활 하다가 몇 백 년 지나서 겨우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스룹바벨’이라는 총독과 ‘여호수아’라는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이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가 포로생활하던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와 보니까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됐어요. 다 무너졌고 불타 버렸어요. 하나님의 성전에 가 보니까 형편없어요. 다 파괴되었어요. 그것을 보고 기가 막혀서 “아, 우리 민족이 어쩌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민족이 됐나?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됐나?” 이렇게 염려하고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학개라는 선지자가 이 때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라! 너는 가서 스룹바벨 총리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온 백성에게 말해라. 지금은 보잘것없는 시대지만 지금만 보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즉 옛날 솔로몬의 성전을 본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직접 성전을 짓지 못하고, 그 아들 솔로몬에게 많은 재목과 재료를 충분히 주어 영광스런 성전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럽던 성전이 이제 완전히 훼파돼서 보잘것없는 성전이 된 겁니다. 그래서 3절에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학개 때의 성전입니다.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사실 현재는 보잘것없습니다.
우리도 보잘것없을 때가 있었어요. 보잘 것 없는 나라, 보잘 것 없는 민족, 우리끼리 싸워서 만신창이가 됐고 남의 나라들에게 짓눌려서 고생고생을 했습니다. 하도 굶주려 죽은 사람의 고기를 다투어 가며 뜯어먹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처참한 역사를 가진 보잘것없는 우리 민족을 130년 전에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보잘것없는 것이 영광스러운 민족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살아요. 설령 당장은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을 만나고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의 큰 영광이, 영광스런 미래가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그 때부터 우리가 변했습니다. 생각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태도가 변하고, 사람이 변했습니다. 이 조그만 나라에서 우리끼리 아옹다옹하며 살다가 전능하신 우주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을 세워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우리 백성이 눈을 떴습니다. 귀가 열렸습니다.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정신적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현실이라도 그것을 뒤집어 영광스럽게 바꿀 수 있었습니다.
파괴된 성전을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온다는 메시지를 학개가 받고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가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 앞에 지금은 보잘것없는 현실이지만 이 현실만 보지 말고 밝은 하나님의 미래를 보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현재만 보고 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믿습니다. 왜?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셨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를 주실 것이며, 세계적 사명을 감당하는 민족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6.25때의 사진들을 종종 볼 필요가 있어요. 어느 사진을 보니 코흘리개 아이들이 모여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제가 없어서 다행이더라고요. “아, 우리에게 저런 시대가 있었지! 아, 우리가 저렇게 가난하게 살았었는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요,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이 민족에게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이 땅에 주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학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힘내라! 현실만 바라보고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지 말고 고개를 들어 힘내라! 총독도 힘내라! 제사장도 힘내라! 모든 백성들아, 다 힘을 내라!” 여러분은 보잘것없는 현실에다 하나님이 플러스되면 영광스러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요, 성경의 복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웃음으로 거둘 것입니다. 고난과 괴로움과 한숨과 눈물이 있어도, 그 과정을 거쳐서 정금과 같이 빛을 발하며 나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신,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속사람, 여러분의 생각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에게 이 변화가 필요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학개는 세 번 같은 말로 격려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일을 할지어다” 라고 합니다. 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4절 끝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중에 어려운 현실 때문에 낙심하고 주저앉아 두려워하는 분이 있다면 일어나십시오! 낙심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를 특권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흔들릴 때 방황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힘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하시는 음성을 모두 들으십시요.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5절에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이 있지 않으냐?”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너희들이 지금은 보잘것없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으나 이제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가면 내가 너희를 축복해서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보배와 같이 세워 주리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고생하였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고생하다가 끝나는 민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통해서 내가 이 땅에 와서 너희를 변화시켜서 너희를 만백성들 가운데 보화처럼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의 이 음성을 여러분과 저도 듣고 믿기를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나를 향한 축복의 약속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다.” 이 약속을 믿고 우리가 전진하여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려니까 힘들더라고요. 무엇이 힘든가하면 옷이 잘 안 맞아요. 어른들 매장에 가면 옷이 너무 크고, 아이들 매장에 가면 옷이 작아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한동안 옷을 제대로 못 입고 살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백화점에 가니까 딱 맞는 옷이 나와요. “와,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고 하나 사가지고 집에 와서 보니까 “Made in Korea.” 그 다음부터 가게마다 백화점마다 마음에 드는 걸 찾았다 하면 한국 거예요. 얼마나 신나든지! “야, 한국 사람들이 이제는 이렇게 잘 만드는구나!”
여러분, 미국에 왜 그렇게 한국 물건이 많은지 압니까? 미국인들이 한 때 보잘것 없는 한국을 무역최혜국가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이에요. 미국이 가난한 우리나라를 도와주려고 세금도 안 받고 그냥 문을 확 열어주면서 “너희 제품들을 얼마든지 가져다 마음대로 우리 나라에서 팔아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우리가 미국과 경쟁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FTA 협상을 하며 “이건 된다, 저건 안 된다” 하며 밀고 당기고 있지만, 옛날 한국이 정말 보잘것없던 시기에는 미국이 문을 확 열어줬습니다. 중국에게도 처음에 문을 열어 주니까 중국 물건이 미국을 확 쓸었지요. 이제 중국도 강해지니까 줄다리기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지요. 요새는 베트남한테 문을 열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게도 미국 사람들은 얼마든지 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북한이 물건 팔아봤자 얼마치나 팔겠습니까? 그러니까 또 열어줄 수 있어요. 북한도 그렇게 해서 일어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저러고 있으니... 아! 기도해야 돼요. 열심히 기도해야 됩니다. 북쪽은 아직도 보잘 것 없는 국가로 남아 있단 말이에요. 남쪽은 이만큼 발전했는데. 이제는 한국처럼 되고 싶은 나라들이 많아서 관광도 오고 산업시찰도 오고 유학도 옵니다. 심지어 다른 나라 정부들이 우리나라의 행정체제를 배워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한 약속이 있다.”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5절에 “너희와 약속한 말과 나의 신(성령)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겁내지 말라. 걱정하지 말고 내 약속을 믿고 성령을 믿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전진하라.” 이런 겁니다.
넷째로,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갖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민족에게 쏟아부어주시려면 얼마든지 주실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를 얼마든지 강한 나라로 만들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내 말을 듣고 힘과 용기를 얻어 겁내지 말고 일어서서 일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물론 자연재해와 인위적인 재해 등 어려움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겁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것들도 하나님의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시련들을 통해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께 더 다가간다는 겁니다. 그런 것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고 역사와 세계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힘을 내라!” 하시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만국의 보배가...’는 번역이 잘못됐어요. 원 뜻은 “많은 사람들이(만국이) 하나님의 보배에게로 온다”는 뜻입니다. ‘만국의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만국의 소원”입니다. 전 세계의 인류가 어려움을 당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께 오고 싶어 하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 날이 오면 보잘것없는 성전이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변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그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손자손녀 50명을 둔 57세 모슬렘 할머니가 기관총을 어께에 메고 폭탄을 끌어안고 자폭하러 이스라엘 군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이 어떻게 합니까? 쐈지요. 쏘자마자 폭발을 해서 할머니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 장례식에 자녀들과 손주들과 주민들이 모여서 “우리도 할머니처럼 자살하겠다!” 하니 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신앙입니까? 50명의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 후손들에게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며, 그것이 최고의 명예라고 하는데, 죽음의 문화가 무슨 최고의 명예입니까? 죽음의 종교를 퍼트리고 자손들에게 할머니처럼 자살하고 싶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종교가 무슨 종교입니까? 여러분, 인간은 비천합니다. 인간은 정신이 없어요. 인간은 몰라요. 인간은 보잘것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면, 하나님이 나의 미래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나에게 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두려움 없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설령 어려움이 있어도 오히려 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나라, 백성, 가족, 교회,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나타나니 우리에게 한국 역사에 처음으로 세계적인 사명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좋아졌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저 아프리카의 돈을 우리가 가져왔다는 겁니다. 남미의 돈을 가져왔다는 겁니다. 미국 돈을 가져왔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남의 돈을 우리나라로 가져왔다는 것이 아니고 한국교회가 15,000명의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보내서 세계를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노력과 건강과 사랑을 바치고, 성도들은 선교비를 보내고 160여개 나라에 흩어져서 과거 우리와 같은 보잘것없는 민족들을 일으켜 줍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세워줍니다. 보잘것없는 아이들을 보잘 것 있는 아이들로 변화시켜 줍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선교입니다.
여러분, 선교학교, 선교비전스쿨, 선교반에 들어가셔서 강의를 들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할렐루야 교회는 한국교회에서 많은 선교를 담당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주신 이 엄청난 세계적 사명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완수하는 할렐루야 교회와 한국교회와 여러분과 제가 되길 바랍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학 2장 1~9절 / 피종진목사
본문에 보면 성전 재건 공사가 약 한 달 정도가 지날 즈음에 백성들 사이에서 과거 솔로몬 성전에 비해 너무 초라한 새 성전의 외형에 대해 낙담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2,3절).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지금 재건하고 있는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외형적인 면에서나 규모적인 면에서는 솔로몬 성전에 비해 지극히 왜소해 보이지만,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신 곧 성령으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실 것과 새 성전의 영광이 과거 솔로몬의 성전보다 크고 찬란할 것임을 밝혀 성전 재건을 격려하고 계십니다. 성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첫째, 성소는 하나님의 신이 머물러 계시는 곳입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4,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주시며, 그들이 그곳에서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식을 마치고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대하 6:2)라고 감사 기도를 드리고,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대하 6:20)라고 기도했습니다. 성전은 주님께서 영원히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주일은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기도회와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 머물러 계시는 곳인 성소를 귀하게 여기고 항상 가까이해야 합니다.
둘째,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는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학 2:6) 교회 건물이 어떻게 보면 세상 건물보다 더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머물러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케 하는 능력이 함께 하는 곳입니다. 성소 즉 오늘날의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이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 병든 자가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9:17에 보면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항상 성막을 중심하여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중요시하는 나라와 백성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는 능력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소는 만국의 보배가 이르는 곳입니다.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7,8) 모든 만물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만국의 보배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만국의 보배’는 모든 사람의 소망과 기쁨이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역대하 7:15~16에 보면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한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두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성전에서 기도할 때 응답해주시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때 구하는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넷째, 영광과 평강이 충만케 하여주십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9)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주시면 인간들의 눈에 비치는 성전의 외형적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곳은 지극히 영광스럽고 거룩한 처소가 됩니다. 그리고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성도들을 모든 위험과 각종 재해로부터 보호하여 평강이 충만케 하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14:27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외롭고 슬픈 자, 병든 자, 고통을 당한 자, 실패하여 좌절한 자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면 참 평안을 얻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신이 머물러 계시고, 모든 사람의 소망과 기쁨이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즉 만국의 보배가 이르는 곳인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케 하는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의 영광과 평강으로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낙심했을 때 필요한 3가지
학개 2:4-5 / 이한규목사
1. 자기를 향한 믿음의 격려
본문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 무엇인가? “스스로 굳세게 하라.”라는 말씀이다. 먼저 스룹바벨을 향해 “스스로 굳세게 하라.”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라.”라고 하고, 마지막으로는 모든 백성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하라.”라고 했다. 특히 백성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고 일하라.”라고 한 것을 보면 많은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하다가 그 초라함에 다시 실의에 빠져 낙심한 것 같다.
그때 학개가 한 “굳세게 하라.”라는 말씀은 성경적인 용어로는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새로운 축복의 세계를 펼쳐주시려고 할 때 늘 주시는 말씀이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말씀이다. 그 말씀이 가장 많이 나오는 성경 중 하나가 <여호수아>이다.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말씀은 쉬운 우리말로는 “힘을 내라.”라는 말씀이다. 서로 “힘내세요.”라고 격려도 해야 하지만 스스로도 “힘을 내자.”라고 끊임없이 자기 격려를 하라.
하나님의 사명과 비전을 이루는 과정은 쉽지 않다. 어려움이 생기고 시간이 걸릴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힘을 내라.”라고 격려하라. 비전을 앞두고 포기하지 말라. 지금 포기하면 지금까지의 인생이 허무해진다. 포기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한발 더 나아간 사람이 결국 열매를 얻는다.
2. 하나님의 동행에 대한 확신
왜 스스로 굳세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동행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힘을 내어 사명과 비전을 향해 일어서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돈이나 어떤 인간적인 방법보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명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의 동행하심도 결코 잃지 않는다. 만약 사명을 잃으면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축복도 잃는다.
하나님은 사명을 가질 때 항상 동행하시겠다는 축복을 약속하셨다. 다윗이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의 유지를 남길 때 말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게 이 일을 행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여호와의 성전 공사의 모든 일을 마치기까지 여호와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사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대상 28:20.”
다윗은 성전 건축의 유지를 남겼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기에 아들 솔로몬에게 “강하고 담대하게 이 일을 행하고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라고 했다. 그리고 약속하기를 하나님은 성건 건축을 하는 동안에 동행하시고 솔로몬을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처럼 내가 사명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3. 두려움이 없는 불굴의 용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은 전설적인 사건이었다. 그때 수많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수많은 사건에서 함께 하셨다. 그때 이상으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5절). 사명을 이행할 때 어떤 난관을 만나도 약한 소리를 하거나 우는 소리를 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찾아오지만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탄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간다.
내 옆에서 사탄이 틈탈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탄 앞에서 믿음 없는 소리나 우는 소리를 하지 말라. 사람의 우는 소리는 사탄의 우는 소리를 불러온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약한 생각을 하거나 약한 마음을 가지거나 약한 말을 하지 말라.
힘을 내고 용기와 굳은 마음을 가지고 비전을 향해 달려가라. 때로 어려운 난관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 사람은 무능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은 무능하지 않다. 사람은 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를 앞세우며 나아가는 사람은 약하지 않다. 사람은 본인이 무능하다고 생각하기까지 결코 무능하지 않다. 나를 미리 제한하지 말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말라.
성전건축을 위하여 굳세게 일하는 사람들의 축복!
학 2장 4~9절 / 지태일목사
지난 주에 교회는 무엇과도 같다고 비유를 들었습니까? 잘 담근 후 몇 일 발효가 된 다음 아주 맛있는 김치와 같다고 비유를 해드렸습니다. 배추맛도 아니고 매운 고추맛도 아니고 톡 쏘는 마늘이나 생강 맛도 무 맛도 아니고 잘 익어서 발효된 바로 그 맛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나는 온데 간데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 내는 그런 곳이 교회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교회와 성도는 무엇과도 같은가 하면 악기와 같습니다. 악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값도 아니고 무슨 재료냐도 아니고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자체적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악기를 누가 연주하는가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집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누구에게 붙잡힌바 되어 역사하느냐에 따라 그 쓰임과 용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생활을 하나님이 붙잡고 연주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연주하도록 내 자리를 내어 드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하늘의 감격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와 믿음의 소문이 널리 널리 축복으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이번 성전 건축을 통하여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연주하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위대한 전환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4절 말씀처럼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하시기” 바람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 말고 걱정말고 의심하지 말고 그 약속을 철저하게 믿고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하나님과 함께 굳세게 일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들의 앞 길에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 험한 강과 높은 산들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가는가 아닌가에 달려있습니다.
히11:6절 말씀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교회가 믿음으로 모든 것을 견인지구하여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화) 일본의 총리를 지냈던 다나까 수상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진학을 포기하고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낮에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밤에는 책을 펴놓고 열심히 독학을 했습니다. 그 뒤 그는 사업을 해서 큰 성공을 해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손에 쥐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능력이 인정을 받아 일본의 대장성의 장관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대장성은 수재들의 집합처입니다. 동경대학을 비롯해서 명문대학의 출신들이 관료로 자리를 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돈 좀 벌었다고 해서 자기들의 수장, 장관으로로 들어 앉았으니 그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여론까지 곱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얼마가지 않아서 다나까가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나까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장성의 관료들을 앞에서 이렇게 취임 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알아주는 천하의 수재들입니다. 반면에 저는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대장성의 전문적인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대장성의 모든 일은 여러분이 도맡아서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의 뒤에서 여러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도 다나까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장성 장관의 일을 성공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그 뒤 그는 일본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나까 수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일을 할 때도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야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악한 마귀가 가만히 내버려두겠습니까? 악한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서 방해할 것입니다. 이런 현실, 저런 현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동원해서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고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담대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4절 하반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할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방패와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그 일을 능히 감당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절에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 말씀인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자신들이 짓고 있는 성전이 과거의 솔로몬 성전보다 너무 초라한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 영광스러운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때 백성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이 정도로 밖에는 지을 수 없단 말인가?' 그들은 낙심한 나머지 일할 의욕조차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이름을 친히 부르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을 친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각자 모두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면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총독은 총독으로서, 제사장은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은 백성으로서, 모두 각기 스스로, 그래서 세 번씩이나 굳세게 하여 일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스스로 건축하라는 격려의 명령입니다. 스스로 못한다는 패배의식을 버리고 너희가 건축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을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건축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겠지,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네가, 너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하겠지 하며 남에게 미루지 말고, 내가 안하면 할 사람 없다고 생각하고 자원하여 일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은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이미 너희 집을 짓는 것을 보니, 사업을 하는 것을 보니,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보니 성전도 능히 건축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미루거나 하지 말고 너희 스스로, 자원하는 힘을 내어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십니다.
2) 그리고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의 말씀은 너희가 스스로 용기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정치 지도자, 교회 지도자, 온 백성들에게 성전건축이 될까 하고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서 자발적으로 건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큰 일을 할 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담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용기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성공에 대한 확신이나 자신감을 갖기 보다는 쓸데없이 염려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의식에 빠져들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한다는 것, 이룰 때 그 과정의 어려움은 말로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고 의욕조차 상실하고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심을, 기를 꺽는 모습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은혜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님니다.
우리가 참으로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스스로 강해지지 못하고 자기는 힘을 내지도 않으면서 자꾸 상대방의 힘을 빼는 사람입니다. 말로 힘을 빼는 사람입니다. 얼굴, 표정으로 힘을 빼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화가난 사람처럼, 무슨 떠날 사람처럼 마음을 주지 않고 그저 건성으로 대하고 말도 안하고 비협조적인 사람, 참으로 어렵습니다. 협조하지 아니하는 냉담한 모습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에 도움이 안됩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참 모습이 아님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부터 하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그런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것을 된다고 허황된 꿈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매사에 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도, 사업도, 신앙생활도 성공합니다.
잠 24:16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7번 넘어졌다가 8번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안된다. 못한다는 사람은 그의 말이 씨가 되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업도 안 되고, 진급도 안 되고, 축복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은 입에서 내어 버리시기 바람니다. 내 마음속에서 지워버리시기 바람니다. 나는 할 수 없다라든가, 우리 가정은 안된다라든가, 내 자식은 안된다고 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못한다라든가 이런 말을 버려야, 잘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바울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언어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앞에 잘 된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잘 됩니다. 우리 교회 일도 된다고 믿고 기도하고 말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육신 또한 건강할 줄 믿습니다.
이러한 격려의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 그대로 스스로,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굳세게 힘을 다하여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4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굳세게 하여 일하라 말씀하심니다. 이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스스로 굳세게 하여 용기 내어 성전건축하는 사람들의 축복입니다.(5-9절)
1) 두려움이 사라집니다.(5절)
5절,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하나님은 낙심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두려워 말하고 말씀하십니까?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화를 내리실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스스로 굳세게 하여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약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는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찬 455장, ♬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하시니 그 나라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두 번째 두려워 아니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2:5)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을 때, 하나님은 앞서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의 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심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전을 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영원토록 머물러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스쳐가지 않으시고 머물러 계십니다. 영원토록 눈을 그곳에 두고 귀를 그곳에 기울여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끝까지 함께 역사해 주시는 것을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승리하려면 항상 성령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모든 생활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움직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머물러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열심을 주시고 기쁨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 1:6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하도록 하신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을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와 같은 시대 인물이었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건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슥 4:6의 말씀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성전 건축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한히 복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이끌고 가심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제2성전, 곧 스룹바벨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 건축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교회에도 있을 줄 믿습니다.
2) 성전 건축을 통하여 진동시킬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7절)
2:6-7절에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에 대한 약속의 축복은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임하실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씀입니까?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는 대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학개 선지의 예언이 있은 후에도 517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경천동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멸망 받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다시 재림하실 때는 그 진동되었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만국의 보배가 이를 것을 약속하심니다. 여기서 보배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국의 보배이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도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보배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들이 재건하는 성전에 임하신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법궤가 있음으로 영광스러웠다면 보배이신 예수님이 임하신 스룹바벨의 성전은 더욱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솔로몬의 성전이 영광스럽다고 해도 하나님이 친히 임하신 스룹바벨의 성전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모든 물질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8절)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의 모든 금은 보화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이런 것들을 동원하여 성전을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금은 보화가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전에 영광을 충만케 하실 분은 다름 “닌 '만국의 보배”가 되신 그리스도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성전은 그 어떤 보물로 채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헛된 것뿐입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백성들이 손수 자기들의 힘으로 성전을 은과 금으로 장식하지 못함을 슬퍼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일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다 할지라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더 이상 성전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4) 이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성전을 약속하십니다.(7절)
2:7절을 보면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의 전을 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해주십니다. 역대하 5:14에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마음에 사모하고 위해서 기도할 때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이 늘 함께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또 9절에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솔로몬의 성전과 스룹바벨의 성전을 비교하여 말씀합니다. 물론 두 성전의 화려하거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을 비교한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법궤가 있었고 영광의 빛과 구름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영광이 과연 스룹바벨의 성전에 충만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곧 성전의 주인이요(마 12:6), 실체가 되시는 주님께서(요 2:19) 그 성전에 임재 하실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성전은 평강의 근원이 될 것이고 모든 축복이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와 온 세계에 뻗치게 될 것입니다.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러기 때문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백성들이 자신들이 재건하는 성전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깨달아 더욱 분발하여 굳게 서서 일해야 했던 것입니다. 새로이 건축되는 스룹바벨 성전이 솔로몬 성전에 비해 이전보다 영광이 더 클 것임을 확신시키며 성전 재건을 촉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지금까지 10년여 동안의 영광보다, 귀한 역사보다 앞으로 그 곳에서 이루어들릴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가 분명 크고 클 줄 믿습니다.
4) 마지막으로 평강의 사람이 되게 해주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9절)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9)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이 성전에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자시 백성에게 평강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언약의 핵심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평강의 사람이 됩니다. 시편 122:6에도 보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가 평안하게 하는 평강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평안할 때 든든히 서 가고 부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이러한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구원의 결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형제자매들 간에 사랑과 평화를 나누시기를 바람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의 피흘려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하여 누구보다 나 자신부터 스스로 굳세게 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하고 충성함으로 성령의 충만함과 물질의 축복을 받고, 이전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시고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평강의 축복이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과 주님의 몸된 교회위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
학 2장 6~9절 / 윤삼중목사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바로 만국의 보배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주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는 자, 즉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는데 이 성전의 가치를 무엇에 두어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직위, 또한 돈과 지식에 둡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업적과 성공에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는 만국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에 두어야 합니다.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 보배롭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거룩한 자이며, 왕같은 제사장이 되며, 천사가 부러워하는 존재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1차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드디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인해 성전 재건축은 시작한지 약 2년 만에 중단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16년 동안 유다 백성들은 성전건축은 제쳐두고 먹고 사는 일과 자기들의 살 집을 짓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1:4절에 보면,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여기서 “판벽하다”는 말은 아주 멋있고 아름답다는 뜻인데,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어찌 자기들의 살 집만 멋있고 아름답게 지을 수 있느냐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1:8절에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고 실제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했으며, 마침내 4년 만에 성전건축을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제1성전이라고 한다면, 이제 새로 지어진 이 성전을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을 시작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유다 백성들은 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무엇을 불평했습니까? 성전의 초라함 때문에 불평했습니다. 즉, 지금 다시 짓기 시작한 제2성전의 크기나 모양이 옛날 솔로몬이 지은 제1성전에 비해 너무 초라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과거 솔로몬 시대는 나라가 아주 부강했지만, 나라가 망한 지금은 먹고 살기도 힘든 때이기 때문에 성전을 화려하게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다 백성들은 과거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여 현재의 성전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솔로몬의 성전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두 번째로 말씀을 주셨는데 그 내용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2장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초라함 때문에 불평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9절에 보면 “이 전의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즉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지금 새로 짓고 있는 이 제2성전이 제1성전보다 훨씬 작고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장차 이 성전을 통하여 유다 백성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지금 이 성전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영광은 건물의 크기나 금과 은으로 지은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가?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을 짓고 난 후에 낙심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또한 만국의 보배가 너희에게 임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1.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만국의 보배를 너희에게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6-7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여기서 만국의 보배가 누구입니까? 그 당시에 만국의 보배는 일차적으로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은 성전건축을 완수했으니 그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만국의 보배였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에게는 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유다 왕국이 한때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할지라도 결코 왕국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그 왕국의 왕 역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스룹바벨은 남 유다 왕국의 왕이었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여호야긴 왕의 손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만국의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장차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전에 임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새 성전에 임재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며 그 성전의 영광을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이 스룹바벨이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합니다. 마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여호야긴)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왕국의 왕으로 태어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왕이 결국 무엇입니까? 만국의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학개 선지자가 말하는 스룹바벨은 장차 만국의 보배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진짜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학개서를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 만국의 보배,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신 자가 진짜 성전이며,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무엇을 가장 소중히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가? 외적인 것 보이는 것 환경적이고 물질적인 것 보다 내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이고 신령한 것을 더 소중히 여기며 가치있게 여겨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며 신령한 나라를 생각하며 그 나라의 도래와 임재를 위해 더욱 힘쓰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외적인 성전보다 마음의 성전을 더욱 정결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성전건축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 자신이 바로 성전임을 믿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 진짜 성전건축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국의 보배이시며,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학개 선지자가 말한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이 바로 성전 자체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가 날마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만국의 보배를 모시고 사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만국의 보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후4:7-9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즉, 만국의 보배를 소유한 자는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건강하든지 연약하든지, 혹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결코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패하지 않는 한 우리 성도에게 실패란 없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실패한 것 같지만 우리 안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입니다.
정말로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마음 속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과거와 비교하고, 남과 비교함으로써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는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내적 성숙은 어떤 비교나 원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만국의 보배를 소유하신 성전답게 남은 인생을 자신의 성전을 멋지고 아름답게 잘 건축하시기를 바랍니다. 만국의 보배되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셔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와 만국을 진동시키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 그 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거룩한 성전을 짓고 이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왜 솔로몬의 성전보다 스룹바벨성전이라 불리는 이 성전을 보잘 것 없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조금씩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세워져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적잖게 실망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성전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3절) 힘겹게 일어나서 한손에 복음을 들고 한손에 망치를 들고 뚝딱뚝딱 정말 열심히 믿고 행동하며 걸어가는데, 아무리 해 보아도 이전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학개 선지자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9절)' 여기서 이 내용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성전이 너희들이 보기에는 솔로몬 성전에 임했던 그 영광보다는 작아 보이고 초라해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며, 그 영광이 선포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눈과는 전혀 다른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해 보이는 마굿간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 전혀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리가 보기에 초라해 보이는 그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7절 하반절에 보면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개 선지자는 성전의 외모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성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들어 있는 내용에 따라 이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와 존엄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세상이 성공과 출세, 돈과 지식, 인기와 명예의 화려함에서 찾으려고 하면 불행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 인생은 절대로 만족함을 얻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런 외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국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자녀가 된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만국의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천사보다 존귀하며,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복된 자입니다. 우리가 왜 가치가 있고, 복된 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만국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성전 안에 들어가야 할 진짜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7-8절에 보면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성전은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지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을 건축할 때 은과 금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느냐에 있지 않고 오직 그 곳에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에 영광스러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성전을 옛날의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지도 말고, 초라하다고 실망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의 크기나 모양이 아니라 그 성전이 정말 만국의 보배로 채워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실망하고 낙심하는 경우 세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보이는 것에 너무 치중하며 살아갈 때입니다. 이처럼 너무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여 살아가면 실망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사실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데 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둘째는 겉모습과 외모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실망하게 됩니다. 겉모습과 외모에는 너무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 가짐 즉 속사람입니다. 셋째는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너무 신뢰하면 실망하게 될 것입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건축하는 성전의 보이는 외양이나 규모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 모습에 너무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양이나 겉모습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냐? 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게 지어진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면 그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스룹바벨 성전이 너희들 보기에 외적으로 이전 성전보다 못하다고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내가 그 성전에 거하며 장차 이 성전을 아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스룹바벨 성전이 이전의 솔로몬 성전보다 영광이 더 크게 될 것이며, 이 성전에 하나님이 친히 평강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까? 9절에 보면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이 전의 나중 영광은 이전 영광보다 다른 영광” 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확장시켜 지은 성전도 실제 건물이나 장식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웠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헤롯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건물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성전이신 예수님이 그 성전에 들어가심으로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는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평강의 왕(사9:6)으로 오실 그의 사역과 섬김에 부합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내 영광의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사60:7)
여기서 성전의 나중 영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궁극적으로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21:10-11절에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모든 교회가 궁국적으로 사모하는 성전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성령께서 강림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도 성전의 나중 영광에 포함됩니다. 이처럼 이 땅의 교회들은 마지막 때가 다가갈수록 점점 더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말씀은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자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와 사건, 고통을 해결해 주시기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마11:28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리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이 말씀속에는 죄짐을 포함해서 우리 인생속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무거운 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삶 가운데 겪고 있는 모든 문제, 우리의 고민, 우리의 모든 어려움, 우리의 슬픔, 우리의 병,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 우리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하는 저주, 이 땅에 존재하는 어두움, 모든 악한 것들, 약한 것들, 율법의 굴레 등을 소멸하시고, 창세기 3장의 저주속에 파묻혀 사는 인생들에게 참 자유와 완전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요, 우리의 구원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며, 만유의 통치자이십니다.
“로또가 당신의 인생을 이렇게 바꾼다” 는 문구가 있습니다. '1등 복권에 당첨되면 정말 행복할까요?' 아마 십중팔구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복권에 당첨돼서 벼락부자가 되면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실제 몇 년 전 누리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새해 소원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로또 당첨'이 1위로 꼽혔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지금까지 사례를 보면 불행하게도 '복권 당첨=불행의 시작'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갑자기 떨어진 돈벼락을 주체하지 못하고 흥청대다가 수년 안에 알거지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끝에 이혼을 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인생 역전에는 로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 역전에 되며, 진정한 승리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또한 우리를 향하신 엄청난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 좋은 일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
학 2장 6~9절 / 윤삼중목사
우리 주변에 보면 “로또가 당신의 인생을 이렇게 바꾼다” 는 문구가 많이 있습니다. '1등 복권에 당첨되면 정말 행복할까요?' 아마 십중팔구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복권에 당첨돼서 벼락부자가 되면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실제 몇 년 전 누리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새해 소원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로또 당첨'이 1위로 꼽혔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지금까지 사례를 보면 불행하게도 '복권 당첨=불행의 시작'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갑자기 떨어진 돈벼락을 주체하지 못하고 흥청대다가 수년 안에 알거지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끝에 이혼을 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인생 역전에는 로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 역전에 되며, 진정한 승리가 됩니다.
기독교는 왜 꼭 예수님만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다른 종교도 인정해 주고, 좀 더 폭넓게 종교생활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일반 사람들은 말합니다. 지성인들은 타종교와의 대화도 하며, 서로 종교간의 협력과 친교를 하였으면 좋겠다고 충고도 합니다. 심지어는 종교적인 교리를 너무 강조하지 말고 좀더 위로와 소망을 주는 설교, 편한 설교를 하였으면 좋겠다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가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원주이시며, 만국의 보배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은 오직 예수 이름 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영원한 메시야이며,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1차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드디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인해 성전 재건축은 시작한지 약 2년 만에 중단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16년 동안 유다 백성들은 성전건축은 제쳐두고 먹고 사는 일과 자기들의 살 집을 짓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1:4절에 보면,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여기서 “판벽하다”는 말은 아주 멋있고 아름답다는 뜻인데,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어찌 자기들의 살 집만 멋있고 아름답게 지을 수 있느냐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1:8절에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고 실제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했으며, 마침내 4년 만에 성전건축을 완수했습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을 완성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유다 백성들은 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한 후에 그들이 무엇 때문에 불평했습니까? 성전의 초라함 때문에 불평했습니다. 즉, 지금 다시 짓기 시작한 제2성전의 크기나 모양이 옛날 솔로몬이 지은 제1성전에 비해 너무 초라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과거 솔로몬 시대는 나라가 아주 부강했지만, 나라가 망한 지금은 먹고 살기도 힘든 때이기 때문에 성전을 화려하게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다 백성들은 과거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여 현재의 성전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솔로몬의 성전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두 번째로 말씀을 주셨는데 그 내용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2장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초라함 때문에 불평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9절에 보면 “이 전의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학개 선지자가 예언한 만국의 보배이십니까? 우리가 그 분을 믿으면 어떤 복이 받게 됩니까?
1.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만국의 보배가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에게 무슨 놀라운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까? 6-7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사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만국의 보배가 누구입니까? 온 세상을 죄와 저주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국의 보배이십니다. 여기서 보배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배라는 것은 황금, 보석, 진주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주보석보다 더 가치가 있고, 존귀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국의 보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돈으로, 황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존귀한 분이시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며,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기쁜소식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성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 자신이 바로 성전임을 믿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 진짜 성전건축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학개 선지자가 말한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이 바로 성전 자체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가 날마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만국의 보배를 모시고 사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후4:7-9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즉 만국의 보배를 소유한 자는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건강하든지 연약하든지, 혹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결코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패하지 않는 한 우리 성도에게 실패란 없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실패한 것 같지만 우리 안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솔로몬의 성전보다 스룹바벨 성전이라 불리는 이 성전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는가요? 조금씩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세워져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적잖게 실망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성전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3절) 힘겹게 일어나서 한손에 복음을 들고 한손에 망치를 들고 뚝딱뚝딱 정말 열심히 믿고 행동하며 걸어가는데, 아무리 해 보아도 이전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학개 선지자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9절)' 여기서 이 내용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성전이 너희들이 보기에는 솔로몬 성전에 임했던 그 영광보다는 작아 보이고 초라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며, 그 영광이 선포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눈과는 전혀 다른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해 보이는 마굿간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 전혀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이 보기에 초라해 보이는 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작은 것, 초라하게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7절 하반절에 보면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전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보여주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학개 선지자는 성전의 외모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성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들어 있는 내용에 따라 이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와 존엄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세상이 성공과 출세, 돈과 지식, 인기와 명예의 화려함에서 찾으려고 하면 불행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 인생은 절대로 만족함을 얻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런 외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국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자녀가 된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만국의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천사보다 존귀하며,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복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왜 가치가 있고, 복된 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만국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성전은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지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을 건축할 때 은과 금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느냐에 있지 않고 오직 그 곳에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에 영광스러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성전을 옛날의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지도 말고, 초라하다고 실망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의 크기나 모양이 아니라 그 성전이 정말 만국의 보배로 채워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양이나 겉모습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냐? 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게 지어진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면 그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스룹바벨 성전이 너희들 보기에 외적으로 이전 성전보다 못하다고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성전에 거하며 장차 이 성전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영광스런 곳이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충만하게 합니까?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영원토록 성전의 모퉁이돌,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내면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한 것입니다.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이 성전이 된 우리에게 들어오신 것은 정말로 최고의 영광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이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이 전에 내주하여 계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이 전의 나중 영광은 이전 영광과는 다른 영광”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확장시켜 지은 성전도 실제 건물이나 장식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웠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건물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성전이신 예수님이 그 성전에 들어가심으로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는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평강의 왕(사9:6)으로 오실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내 영광의 집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사60:7절에 보면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그 영광이 가득찬 성전이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여기서 성전의 나중 영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궁극적으로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21:10-11절에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모든 교회가 궁국적으로 사모하는 성전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성령께서 강림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도 성전의 나중 영광에 포함됩니다. 이처럼 이 땅의 교회들은 마지막 때가 다가갈수록 점점 더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자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와 사건, 고통을 해결해 주시기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마11:28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리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 땅에 재림하여 오심으로 우리의 슬픔, 우리의 병,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 우리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하는 저주, 이 땅에 존재하는 어두움, 모든 악한 것들, 약한 것들, 율법의 굴레 등을 소멸하시고, 고통과 두려움 속에 파묻혀 사는 인생들에게 참 자유와 완전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에 넘치는 평강을 주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무엇이 흘러 넘쳐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평강입니다. 9절 하반절에 보면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평강이 강물처럼 흘러 넘칠 때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성전은 건물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성전이신 예수님이 그 성전에 들어가심으로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는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평강의 왕(사9:6)으로 오실 그의 사역과 섬김에 부합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내 영광의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사60:7) 하나님의 성전은 궁극적으로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21:10-11절에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모든 교회가 궁국적으로 사모하는 성전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성령께서 강림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도 성전의 나중 영광에 포함됩니다. 이처럼 이 땅의 교회들은 마지막 때가 다가갈수록 점점 더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말씀은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강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평강”은 사람이나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성공하였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은 나의 구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모신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임하게 되면 큰 기쁨과 의와 안식을 누리게 되며, 근심이나 걱정,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평강이란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맺어짐으로 오는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소극적으로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가 해소되어야 하고, 두번째는 적극적으로 그 마음을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죄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며, 다음에 하나님이 왕이 되어 각자의 마음을 다스려야 마음의 평강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실 때 마음에 맺히는 열매가 바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서 은혜를 ‘평강’ 앞에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와야 그 다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은혜가 언제나 먼저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서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만국의 보배를 모시고 사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후4:7-9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즉, 만국의 보배를 소유한 자는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건강하든지 연약하든지, 혹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결코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패하지 않는 한 우리 성도에게 실패란 없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실패한 것 같지만 우리 안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의 크기나 모양이 아니라 그 성전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 만국의 보배로 채워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로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마음 속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과거와 비교하고, 남과 비교함으로써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는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제부터는 만국의 보배를 소유하신 성전답게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성전을 멋지고 아름답게 잘 건축하시기를 바랍니다. 만국의 보배되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만국의 보배이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셔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와 만국을 진동시키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전을 위하는 사람
학 2장 6~9절 / 피종진목사
‘여호와의 전’을 다윗시대에는 ‘천막’, 모세시대에는 ‘성막’, 솔로몬시대에는 ‘성전’이라고 호칭했고, 오늘날에는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교회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항상 주님이 사랑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주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는 곳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히브리어로 ‘카할’이고,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세상으로부터 구별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처소를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데 레위기 26:2에 보면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고 말씀했고, 에베소서 1:23에 보면 ‘주님의 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여호와의 전을 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복을 주시는가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해주십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5) 하나님은 여호와의 전을 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영원토록 머물러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스쳐가지 않으시고 머물러 계십니다. 영원토록 눈을 그곳에 두고 귀를 그곳에 기울여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주의 신으로 머물러 주시는 것을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양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이리떼들이 있듯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곳에는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령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모든 생활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움직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머물러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열심을 주시고 기쁨도 주십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봉헌했을 때 역대하 7:1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했다고 말씀했고, 또 그곳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고, 성령이 임하게 해주십니다.
둘째, 만국의 보배가 이르게 해주십니다.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학 2:7) 여호와의 전을 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귀중한 것을 드릴 수 있도록 복을 주십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불신자보다 물질의 축복을 더 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물질은 한계가 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은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위해 물질을 드리기를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록펠러와 카네기, 찰스 피니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전을 위해 물질을 드리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해주십니다.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7) 여호와의 전을 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해주십니다. 역대하 5:14에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마음에 사모하고 위해서 기도할 때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이 늘 함께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보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넷째, 평강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니다.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9)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평강의 사람이 됩니다. 시편 122:6에도 보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가 평안하게 하는 평강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평안할 때 든든히 서 가고 부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하고 충성함으로 성령의 충만함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고 평강의 사람이 되는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금 있으면
학 2장 6~9절 / 박상훈목사
20세기 초 미국에 드윗 월레이스(Dewitt Wallace)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세계 제1차 대전에 참전을 했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병원에 갇혀서 4개월 동안을 지내야 되었습니다. 병원에 갇혀서 지내자니 여간 갑갑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깥 세상의 일들이 궁금해서 그는 틈만 나면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상당한 몸으로 큰 신문과 잡지를 보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잡지나 책은 없을까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머니에 집어넣을 만한 자그마한 사이즈의 책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건강을 되찾고 고향에 돌아가면 그런 책을 만들어서 보급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이름을 "리더스 다이제스트"라고 짓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을 한 후 고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계획했던 일을 즉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는 신문과 잡지 가운데서 흥미롭고 유익한 기사들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digest, 곧 요약을 하고, 삽화를 집어넣어서 자그마한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 책의 견본을 여러 권 만들어서 여러 출판사에 발송을 했습니다.
그는 출판사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어느 출판사에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 주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낙심한 채 자기의 아이디어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친구가 자기의 여동생을 그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라일라(Lila)라는 이름의 여성이었습니다. 라일라는 변변한 직업도 없는 그를 믿어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생각해 낸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반드시 큰 빛을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1921년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그 이듬해 1922년 2월 두 사람은 힘을 합쳐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창간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자기들 손으로 그 책을 각 가정에 발송을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구독자를 조금씩 늘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은 얼마가지 않아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 책이 전 세계에서 여러 나라 말로 번역이 되어 매 달 수천 만 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요, 스테디셀러로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내가 이 일에 성공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아내 라일라가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인정
해주고 격려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남들이 우리를 인정해 주면 우리는 쉽게 극복하고 그 일을 잘해 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행해나갈 때 악한 마귀는 집요하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마귀의 손길에서 우리를 막아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친히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일을 잘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장애로 인해서 계속 힘들어 하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역사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친히 정리해주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힘들어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으면." 오늘 본문 6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제목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 살펴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목적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어려운 처지였지만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악한 마귀는 안팎에서 그들을 방해했습니다. 밖으로는 못된 무리를 시켜서 그들을 대적하며 성전 건축을 막고자 했습니다. 안으로는 그들의 마음속에 실망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옛날의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지금 자기들이 짓고 있는 성전은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낙심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셨습니다.
"낙심하지 말아라. 스스로 굳세게 해서 힘껏 일하여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내가 언약한대로 반드시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나의 신이 너희와 함께 하면서 성전 건축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게 하리라."
그러고 난 뒤에 하나님은 또다시 오늘 본문에서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을 위해서 언제라도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바다를 진동시키셨습니다. 그러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강을 진동시키셨습니다.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진동시키셨습니다. 그러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족속과 싸울 때 하나님은 하늘을 진동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이 기브온에 머물게 하시고, 달은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원하시면 언제라도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어윈(James Irwin)은 아폴로 15호를 타고서 인류역사상 네 번째로 달에 착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사람들은 달에 착륙했더라도 그저 걸어서 달 표면을 탐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임스 어윈은 최초로 "라버(Rover)"라고 불리는 월면차를 타고서 반경 10km의 넓은 지역을 두루 탐사를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폴로 15호가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구로 귀환할 때였습니다. 지구에 가까워질수록 우주선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집니다. 지구의 중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선을 지구에 안전하게 착륙시키기 위해서는 대형 낙하산 세 개가 펼쳐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정해진 지점에서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세 개의 낙하산 가운데 두 개만 펴지고 하나는 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스위치를 작동해도 펴지지 않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나사 본부에 급히 연락을 했습니다. 나사 본부에서도 나름대로 비상 조치를 취했지만 웬일인지 마지막 한 개가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이제는 아폴로 15호가 곧 박살이 날 것이라고 공포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우주선 안에서 알게 된 제임스 어윈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하나님 손에 맡깁니다. 아멘."
기도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땅에서 회오리바람이 올라왔습니다. 그 효과가 대형 낙하산 한 개를 편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아폴로 15호는 무사히 지구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일을 계기로 제임스 어윈은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1972년 그는 우리나라에도 방문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저는 그때 그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셔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고난가운데 있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곧 우리를 위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실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의 두 눈으로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목적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만국을 진동시키십니까? 만국의 보배를 끌어다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짓고 있는 초라해 보이는 성전을 영광으로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금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금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또 우리에게서 은금을 취하여 가시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 옛날 솔로몬 성전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 성전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했습니까? 성전의 내소와 외소, 온 전을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기명들도 금으로 만든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때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서 하늘과 땅과 육지를 진동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멸하시기 위해서 만국을 진동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때 그토록이나 웅장하고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성전에 있는 모든 보배들을 빼앗아서 바벨론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어려운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은 만국을 진동시키실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보배들을 다시금 되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심할 만큼 초라해 보이는 성전을 다시금 영화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은금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은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물질이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건축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슥4:6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는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의 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역사 하실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는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시는 하나님, 만국을 진동시키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도 천하만국을 진동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진동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청년이 처음으로 주일학교 교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주일 날 그는 자기 반 아이들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좀 당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약간 이상하게 서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루는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니고데모라고 하는 키가 작은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몹시도 예수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수군거리면서 킥킥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청년은 자기가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즉시 이렇게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니고데모보다도 더 키가 작은 삭개오가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니고데모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고데모야! 그 자리는 내가 올라가야 할 자리인데 왜 네가 올라가 있니? 빨리 내려와라.' 그날 삭개오는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삭개오는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자기 재산의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그럴 듯한 이야기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은 니고데모가 아니라 삭개오입니다.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의 진동을 받아 감격 가운데 자신의 재산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 놓았던 삭개오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삭개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도 감동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은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움켜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면 소용이 없습니다. 다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심정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실 것입니다. 천하 만국을 진동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축복의 문을 여시고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쌓아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와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를 두 가지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대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짓고 있는 성전을 위해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함으로써 그 옛날 이스라엘이 빼앗겼던 모든 보배가 다시금 이스라엘로 되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문자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학개서의 배경이 되는 에스라서의 몇 구절을 읽어봅니다.
스6:8∼10절입니다. 이때는 바사왕 다리오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사왕 다리오의 마음을 진동시키셨습니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풍성하게 주도록 했습니다.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게 하노니 왕의 재산 곧 강 서편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 또 그 수용물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소청대로 영락없이 날마다 주어 저희로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스7:15의 말씀입니다. 바사왕 다리오의 마음을 진동시키신 하나님께서 그 뒤를 이은 바사왕 아닥사스다의 마음도 진동시키셨습니다. 그리해서 성전 건축을 위한 은금을 이스라엘로 보내게 햇습니다.
"왕과 모사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신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 그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즐거이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그 돈으로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전 단 위에 드리고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선히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쓸지며 네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기명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왕의 내탕고에서 취하여 드릴지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만국의 보배가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고 그 뒤에 헤롯 왕조 때 이르러서 제2의 성전, 곧 스룹바벨 성전은 엄청난 규모로 확대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예루살렘 성 전체의 1/4 크기를 차지 했습니다. 성전 입구에는 대리석으로 큰 기둥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지붕은 황금색으로 칠했습니다. 그래서 태양 빛으로 성전 전체가 황금처럼 휘황찬란하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짓는 데만도 80년이 걸렸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보고서 너무나도 감탄한 나머지 "무한대의 풍부함으로 건축한 집"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보기 전에는 화려한 건축물을 논하지 말라."
막13:1에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 당시의 성전을 보면서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시옵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시요, 성전보다 더 크시며, 만국의 보배가운데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성전을 찾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영광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 전의 나중 영광은 이전보다 더 크게 된 것입니다.
둘째,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평강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문은 닫아 두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도 하늘의 문을 닫았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한재가 임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도 황무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성전의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도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한 때, 적절한 양으로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히 여기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평강의 근원이요, 샘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구 소련이 몰락을 당했습니까? 러시아의 대문호 솔제니친이 내린 결론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나라도 경제도 몰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들이 다시 성전의 문을 여니까 서서히 나라의 사정도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왜 북한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중의 하나가 되었습니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기 바랍니다. 해답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성전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해야 나라와 경제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윤택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십시다.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히 여기십시다. 하나님의 성전을 윤택하게 해 드립시다.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같은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천하만국을 진동시키시며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욱더 사랑하십시다. 소중히 여기십시다.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이 은금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