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계단 아래에서 제정신을 찾는 시간 / 이상헌
살다 보면 말이 제때 오지 않을 때가 있다. 상황이 끝나고 나서야 이마를 치며 한탄한다. 그때는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는 돌아서 가는 발걸음 뒤를 졸졸 따라붙는다. 지적 위대함을 자랑하던 사람들조차 이 ‘때늦은 지혜’의 그림자를 피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정점을 찍은 철학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수십 년 동안 온갖 분야의 거장들을 규합해 백과사전(Encyclopédie)을 편찬했고, 종교의 맹목성과 교회의 횡포에 맞서 계몽주의의 깃발을 든 사람이다. 그의 두툼하고 비싼 책을 인류 최초의 ‘지식의 대서사시’라고 부르는 데엔 이유가 있다.
‘듣보잡’ 칭송에 싸늘해진 스타급 문인들
그런 인물이 어느 살롱에서 저명 인사들과 논쟁을 벌였다. 평소라면 특유의 언변으로 세상의 이치를 말끔히 정리했을 텐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상대가 쏟아내는 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보태지 못했다. 평소의 유려함이 무색해졌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끌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제서야 각성의 번개가 스쳤다. ‘아,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기록하는 일을 삶의 의무처럼 여겼던 그는 이 순간을 담담하게 적었다.
“나처럼 슬기로운 사람조차도 상대의 말에 휩쓸려 정신을 잃고, 계단 맨 아래에 가서야 제정신을 찾는다.”
프랑스인은 이런 자잘한 순간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데 천재적이다. 그래서 이 장면에 “계단의 정신(l’esprit de l’escalier)”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논쟁의 주제는 무엇이었나. 얼핏 보면 하찮았다. 디드로가 아끼던 한 ‘평범한’ 극작가는 재능과 달리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내 그의 작품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디드로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감격해 파리 전역을 뒤져 그를 찾아내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냉철한 지성이 한순간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축하받는 자리에서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그 장면을 관찰해 짧지만 아름다운 문장으로 남겼다. 비범한 자가 평범해지고, 평범한 자가 비범해지는 기묘한 역전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디드로는 이 예기치 않은 경험을 살롱에 몰린 스타급 문인들에게 들려주었다. ‘듣보잡’을 칭송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 중 가장 비범하다고 평가받던 한 인물이 일격을 가했다. “자네 얘기대로라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고도 금세 울먹이는 볼테르는 평범한 사람이고, 친구가 눈앞에서 펑펑 우는데도 침착한 극작가는 천재라는 거냐?” 비웃음이 훅 들어왔고, 디드로는 말문이 막혔다. 속된 말로 ‘털린’ 것이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서야 말이 떠올랐다. “그 보잘것없는 친구도 우리가 그랬듯 오랜 세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타키투스를 읽으며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면 우리처럼 ‘말하는 법’을 익혔겠지. 그러나 그는 무대 위에서 삶의 미세한 결을 관찰하며 ‘보는 법’을 배웠네. 그가 배운 그 보는 법은, 우리가 평생을 바쳐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네.” 디드로의 말은 늦었지만, 그의 눈물만큼 진실했다.
논쟁의 미덕은 ‘확신에서 조금 멀어지는 일’
이런 늦음의 지혜를 숙명으로만 여기지 않고, 아예 전략으로 끌어올린 사람도 있다. 경제학자 알버트 허시먼(Albert O. Hirschman). 그는 논쟁에서 이기기보다 논쟁을 오래 붙들어두는 능력을 중시했다. 즉각 판단하거나 단칼에 베어 넘기는 방식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의 주장에 잠시 휘말려 길을 잃고, ‘계단 아래에서 제정신을 되찾는 시간’이야말로 사고의 필수 과정이라고 믿었다.
제목부터 살벌한 <반동의 수사학(The Rhetoric of Reaction)>이 대표적이다. 허시먼은 1980년대 이후 복지국가를 비판하는 보수 진영의 언어가, 사실은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온 ‘반동적 서사’의 변주라는 점을 포착했다. 개혁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위험성(perversity),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무용성(futility), 설령 무엇을 이루더라도 다른 귀중한 가치를 잃는다는 위협성(jeopardy). 그는 이 세 가지 수사학이 어떻게 반복되며 정치적 상상력을 질식시키는지를 예리하게 해부했다.
그런데 허시먼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보수의 논리구조를 까발리고 나니, 계단 끝에서 다시 떠오른 말이 그를 흔들었다. 진보 진영 역시 동일한 수사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보수의 ‘위험성’ 주장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재앙적 결과를 낳는다”고, ‘위협성’ 주장에 대해서는 “상충하는 것은 없고, 새 질서와 기존 질서는 충돌하지 않고 서로 강화한다”고 반박한다. ‘무용성’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는 결국 우리 편이기 때문에 반대해 봐야 소용없다”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서로를 향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은 문법의 거울 이미지였다.
허시먼은 이 ‘불온한 발견’을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장을 덧붙였고, 제목도 “완고함의 수사학”으로 바꾸려 했다. 출판사가 말려서 관뒀을 뿐이다. 책을 낸 지 2년 뒤에도 그는 다시 생각을 고쳐 썼다. 정책 논쟁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걱정하듯, 생각에도 의도치 않은 결과가 있다는 점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방법론에 ‘자기전복(self-subvers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과 불편한 통찰을 기꺼이 자신에게 적용해 주장을 더 넓고 단단한 것으로 빚어내는 것. 확신에서 조금 멀어지는 일, 생각이 자신을 배신하도록 허락하는 일, 그는 그것을 논쟁의 미덕으로 삼았다.
자연스럽게, 허시먼은 민주주의를 단순한 ‘의견의 경쟁’으로 보지 않았다. 민주주의란 자기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논리를 통과한 뒤 자기 생각이 변할 수 있는 체제였다.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이유를 그는 제도나 기술에서 찾지 않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전복을 감당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필요한 말들은 대부분 늦게 온다
민주주의란 서로를 꺾는 공간이 아니라, 각자 ‘계단 아래에서 제정신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조용히 보장하는 질서라는 것이다. 필요한 말들은 대부분 늦게 온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래서 나는 요즘 계단을 내려오는 그 잠깐을 기다리고 조금 더 존중해 보려 한다. 말도 밀알처럼 깊어지고 익어가는데 고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기다리는 말은 늘 느리게 오지만, 대체로 가장 정확한 순간에 도착한다.
이상헌 작가 ·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저자
수정 2025-11-18 07:06 등록 2025-11-18 07:00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29774.html
첫댓글 말도 밀알처럼 깊어지고 익어가는데 고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말도 밀알처럼 깊어지고 익어가는 데 고유의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