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LG의 박종훈 감독 5년 계약을 보는 시선은 정확히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기대하는 쪽에서는 두산 2군에서 검증된 박 감독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높이 샀다. 두산 화수분 야구의 주축인 그가 LG의 정체된 팀 분위기를 일신하고 성공적인 리빌딩을 해낼 것으로 믿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박종훈의 행선지가 ‘감독들의 무덤’인 LG라는 점을 우려했다. 코치진에 자기 사람 하나 없는 그의 처지를 들어, ‘힘없는 감독’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택근, 이병규 등의 영입으로 임기 첫 해부터 성적에 대한 부담을 안게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박종훈 감독에 대한 결론은 하나였다. 기대하는 이들도, 우려하는 이도 박 감독에 대한 평가에선 목소리를 함께 했다. “박종훈 감독은 잘 해낼 것”이라고,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거”라고, 임기 초만 무사히 잘 넘기면 박종훈식 야구가 LG에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말이다.
개막 두 달 여가 지난 지금. 박종훈 감독에 대한 우려는 ‘기우’로, 기대는 ‘확신’으로 바뀐지 오래다. 30일 현재 LG의 성적은 22승 1무 26패로 5위. 4위 KIA와의 승차가 2.5게임차, 2위 그룹과의 차이도 5.5게임으로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는 사정권에 있다. 아직 치고 올라가는 힘이 좀 모자란 탓에 상위권 진입은 뒤로 미룬 상태지만, 예상 밖의 선전인 것은 분명하다.
성적보다 더 주목할 건 내용이다. 일단 초보 감독으로서 가장 쉽지 않은 부분인 ‘선수단 장악’에 성공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시즌 초반 봉중근-이형종 사태를 거친 것이 오히려 약이 됐다는 평가다. 문제가 된 선수들과도 대화를 통해 오히려 이전보다 신뢰가 더 돈독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구단에서도 전과는 달리 감독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5년 동안 전권을 쥐고 자신의 팀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당장의 성적보다는 팀의 미래를 생각하는 운영을 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박종훈 감독의 투수진 운영이 대표적인 예다. 프로야구에서 시즌 초반 불펜투수들의 혹사가 심각한 수준이지만, LG에는 특별히 ‘노예라 할 만한 투수가 없다(불펜 1인당 평균 11.2이닝 소화. 팀내 불펜 최다이닝을 투구한 김광수(28.2이닝)가 전체 11위에 불과할 정도(1위 SK 정우람 43.1이닝). 이는 LG 선발진의 빈약한 이닝 소화 능력(선발 241.1이닝/전체 6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또 투수진에 어려움을 겪는 팀 중 상당수가 2군의 선발 유망주를 올려 1군에서 불펜으로 써먹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지만, 박종훈 감독은 그조차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덕분에 LG의 차세대 선발 요원들은 잠실-구리를 오가고 선발-불펜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일 없이, 또는 데뷔하자마자 노예생활을 하다 수술대로 직행하는 비극을 겪지 않은 채, 미래 LG 마운드에 설 날을 준비하고 있다. 이 또한 당장의 성적이 아닌 앞으로의 5년을 내다보는 박종훈 감독의 미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주목해야 할 변화는, LG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경쟁’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는 데 있다. 포지션마다 철밥그릇 공무원 천지였던 LG 선수들 사이에 언제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죽을 힘을 다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치열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도, LG의 올 시즌은 성공이다.
실력 우선, 무한 경쟁
사실 시즌 전만 해도 전문가들 중에는 “이택근과 이병규의 영입으로 기존의 박병호나 최동수, 작은 이병규 등을 1군에서 보기 힘들어지게 됐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이전의 LG라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LG에서 한번 주전 선수는 특별히 부상이나 지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슬럼프가 아닌 이상 계속 주전이었다. 반면 한번 2군 선수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도 않았고, 기회가 와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코칭스태프가 ‘검증된 선수’만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30일 현재, LG 타선에서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 2위에 올라있는 선수는 이택근이나 큰 이병규가 아닌 ‘작뱅’, 작은 이병규다. 작뱅은 현재까지 .275/.378/.450(타/출/장)에 5홈런 19타점의 맹활약으로 주전 좌익수 자리를 꿰찬 상태다. 게다가 수비력으로 말하자면, 작년까지 좌익수 자리 주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공헌도가 높다. 29, 30일의 넥센전 9회말은 그 압축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외야수 중 하나가 차지할 것처럼 보였던 1루 역시 박병호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랫동안 권용관의 독무대였던 유격수 자리도 개막전부터 쭉 신예 오지환이 기용되는 중이다. 그 외 서동욱, 김태완 등 ‘도저히 자리가 있을성싶지 않은’ 선수들도 두루 1군에서 출전 기회를 얻었고,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주전 선수들의 부상과 슬럼프도 한 원인이지만, 그에 앞서 박종훈식 ‘무한경쟁’이 낳은 결과라고 봐야 한다. 박종훈 감독은 이미 시즌 초반 봉중근의 2군행을 통해 팀내 즐비한 ‘스타플레이어’들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아무리 연봉을 많이 받거나 인기가 높은 선수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투지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최근에는 지난해 타격왕 박용택이 구리로 떠났다.
사실 이런 경우 기존 주전급들의 반발과 불만 누적으로 팀워크가 와해되는 예도 적지 않다. 하지만 LG는 시즌 초의 일시적인 내홍 이후로는 감독의 선수기용에 의문이 제기되는 일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는 감독이 이름값보다는 철저하게 선수의 노력과 실력에 따라 공정하게 기용한다는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박종훈 감독은 이형종이 ‘싸울 준비’가 되자 1군으로 불러 선발 기회를 부여했다. 만약 ‘그분’이라면, 과연 이형종을 1군에 기용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어림없는 이야기다.
박종훈식 무한경쟁은 새로운 선수들의 발굴 외에, 기존 ‘철밥통’들에게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유격수 권용관은 지난 2001년 이후 거의 매년 LG의 주전 유격수였다. 기량이 빼어나서라기보다는 마땅한 대체 요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감독들 입장에서는 안정된 수비력을 자랑하는 그를 쓰는 편이 검증되지 않은 신예 기용보다 안전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올 시즌 개막전부터 박종훈 감독은 2년차 오지환을 계속 주전 유격수로 기용했다. 종신 1군 유격수를 꿈꾸던 권용관은 오랜만에 워커힐과 구리 구경을 하게 됐다.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나고, 5월 20일 1군에 복귀한 권용관. 복귀 이후 10경기에서 그의 성적은 35타수 15안타 1홈런 10타점. 타율-출루율-장타율이 4-5-6을 찍고 있다. 프로 데뷔 이래 처음으로 ‘타자’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셈. 새로운 포지션인 2루에서도 넓은 수비범위와 빠른 판단력으로 연일 호수비를 선보이는 중이다.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올해도 LG의 키스톤 콤비는 2할대 초반의 ‘위플볼 배트’를 자랑했을 것이다.
• 중견수 이대형은 2007년 이후 쭉 LG의 주전 중견수 겸 1번타자였다. 타격이라기보다는 배트에 맞히고 냅다 1루로 달리는 그의 타격 스타일은 언제나 전문가들에게는 ‘배팅의 나쁜 예’로 통했다. 내야안타는 많이 나왔지만 출루율은 톱타자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었고, 대부분의 타구가 내야를 넘지 못하다 보니 찬스에서 타점을 올리는 경우도 드물었다.
이에 한 해설위원은 “나중에 나이들어 주력이 떨어지면 1군에서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을 정도. 물론 이대형과 코칭스태프도 타격폼을 수정하기 위해 매년 겨울마다 노력을 거듭했다. 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2009 시즌을 앞두고도 “많이 교정됐다”고 했지만 막상 시즌 때는 ‘잘생긴 펑고 기계’로 원상복귀했다.
그런데 2009 시즌 뒤, 외야에 새롭게 이택근과 이병규가 가세하며 이대형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전 중견수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들렸다. 1번타자 자리를 내줄 수 있단 예상도 나왔다. ‘대주자 도루왕’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경쟁자의 출현과 절박한 위기의식은 아무리 바꾸려 해도 안 되던 이대형의 타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올 시즌 현재까지 이대형은 .330/.416/.377을 치고 있다. 4할대 출루율은 기적처럼 보이고, 1:1에 가까운 볼넷:삼진 비율은 감동적이다. 타점(23점)은 벌써 2007년 수준(31점)에 육박한다. 외야로 간 타구 비율(43.5%)도 데뷔 이래 최고 수준. ‘최고 주자’였던 선수가 경쟁을 통해 ‘최고 톱타자’로 진화한 셈이다.
• 포수 조인성에 대한 박종훈 감독의 처방은 다른 선수들에 대한 그것과는 방법을 달리 한다. 조인성은 지난 몇 년간 팬들로부터 팀 붕괴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태. 한 관계자는 “사실 비판받는 조인성의 볼배합은 대부분 벤치에서 나온 사인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투수진 붕괴의 책임이 어떻게 포수 하나에게 돌아갈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갓 고등학교 졸업한 포수의 볼배합을 갖고 찬사를 보내는 데는,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지난 시즌 말미에는 투수 심수창과 마운드에서 벌인 다툼으로 2군에 내려가야 했다. 당시 상황은 LG 선수단 내의 소통 부재와 조인성에 대한 투수진의 오해가 겹치면서 생긴 결과였지만, 역시 비난은 조인성 개인에게 쏟아졌다. 이에 박종훈 감독은 다른 포지션에서 경쟁을 부추긴 것과 달리, 포수 자리에서는 조인성에게 전적인 신뢰와 신임을 보냈다. 조인성도 자신을 믿어준 감독에게 실력으로 보답하기 위해 겨우내 피땀을 흘렸다.
그 결과 올 시즌 조인성은 ‘FA로이드’를 제대로 맞은 2007년 수준의 성적을 내고 있다. 5홈런 31타점에 .285의 고타율. 특히 중요한 순간마다 깨알같은 타점을 쏟아내며, 그의 저지를 입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을 뿌듯하게 하고 있다. 본업인 포수로도 이전보다 몸을 사리지 않는 수비와 강한 어깨로 투수들의 믿음을 사는 중이다. 물론 김태군이라는 좋은 경쟁자의 존재가 조인성의 분발을 자극한 것은 당연한 얘기.
주목할 점은 박종훈식 경쟁 시스템이 지금까지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성공 사례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각각 부상과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간 박경수-박용택이 돌아왔을 때 얼마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지는 매우 기대되는 대목. 투수진 역시 지금과 같은 운용이 계속 유지된다면, 시즌 후반에는 더 강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시즌 초반 불펜을 혹사시킨 팀은 대부분 후반기에 대가를 치르는 법. LG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적은 팀 중 하나다.
이전의 LG 감독들 대부분은 -마치 잔여 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임기 첫 해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의 남은 임기와 팀의 미래를 잃었다. 반면 박종훈 감독은 임기 첫 해가 아닌 남은 4년을 보고 팀을 이끌어 가고 있다. 지금 당장 4강에 드는 팀을 만드는 것보다, 앞으로 오랫동안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들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올 시즌의 4강은 최선을 다하면 주어질지도 모르는 ‘덤’이다.
아마 올 시즌 당장 LG가 4강에 들지 못하더라도, 실망하는 LG팬은 많지 않을 것이다. LG에 오랜만에 ‘미래’가, 그것도 환하게 빛나는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종훈식 무한경쟁이 만들어갈 앞으로의 LG가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몹시 기대가 된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박종훈 감독님의 선수기용은 합리적이라는게 장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 불만 없이 경쟁하는 것이겠죠...화이팅 !!
정말로 기대가 많이 되는건 사실이네요. 그리고 4강 못갈것도 없죠.
만약 ‘그분’이라면, 과연 이형종을 1군에 기용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어림없는 이야기다 . <-이부분 대박웃기네요 그분 ㅋㅋㅋㅋㅋㅋ
그분이라면?? 혹시 지금 kbo에서 일하시는분?? ㅋㅋ
금지어일 가능성도 높죠...
굉장히 좋은 글이네요. 올시즌 엘지행보의 압축판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이에 한 해설위원은 “나중에 나이들어 주력이 떨어지면 1군에서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을 정도]]->이거 금지어맞죠? 에휴ㅉㅉㅉ
동감입니다....황정민 닮으신 잘생긴 우리감독님 무한신뢰합니다...4강까지 올려 주시며 더할 나위 읍죠^^
박종훈 감독님을 국회로!!!!올레!!ㅋㅋㅋㅋㅋ 전 요번 우리 감독님 끝까지 믿슙니당^^ㅎㅎㅎ
미래가 보입니다. 구단의 전폭적인 감독 지지도 정말이지 처음인듯합니다.
엘지가 드디어 바뀌나요? ㅎㅎ 2-3년후에 괜찮은 용병뽑은해에는 우승권에 도전할수있을듯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