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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학 2:10-16
10 다리오 왕 제이년 아홉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13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15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
16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학 2:10-16 / [부정하게 되는 것들] ㄷ) 다리오왕 2년 9월 24일에 여호와께서 예언자 학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ㄷ. 같은 해 12월 18일) 11)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물어 보아라! 12) `어떤 사람이 거룩한 고기를 자기의 옷자락에 싸서 들고 돌아다니다 떡이나 국, 포도주나 올리브 기름, 또는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지 먹는 것에 그 옷자락을 스친다면, 그 닿은 음식도 거룩해지느냐?' 학개가 그대로 묻자 제사장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거룩해지지 않는다!' 13) 학개가 주님에게서 받은 대로 또 질문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체와 접촉하여 부정하게 되고서 어떤 음식을 만졌을 때, 그 닿은 음식이 부정하게 되느냐?' 그 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부정하게 된다!' 14) 그러자 학개가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백성이 그렇고, 이 민족이 그렇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또 그들이 손으로 한 모든 일들이 그렇고, 그들이 제단에 바치는 모든 제물들이 부정하게 된다!' 15) [풍년의 약속]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제 오늘부터 지난날을 되돌아보아라! 너희가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돌을 쌓기 전에 16)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너희는 스무 말이 나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 보아야 겨우 열 말밖에 거두지 못하였고, 쉰 말이 나던 포도원에서 포도주를 짜 보아야 스무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본문은 학개 선지자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방치할 때, 어떤 결과를 맺게 되었는지 상기시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10-13)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율법의 규정에 관한 두 가지 질문을 하게 하십니다(12, 13). 두 질문을 통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은 없었던 지난 날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의 형식적 예배 의식과 성전 재건에 대한 태만 등으로 인해 재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물 자체가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예배 의식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할 때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더러워진 손으로 아무리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열납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죄를 대속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합니다.
이제 원하건대 기억하라(14-16) 부정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다 부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 대신 저주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언약의 저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은 대로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부정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수고한대로 거두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기 원하며,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평강 주시기 원하십니다(민 6:24-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복을 누리지 못하고 평강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내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생이 아무리 수고하여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시 127:1).
적용: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는데 손에 남는 것은 없고, 삶은 점점 지쳐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예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북돋우기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거룩’과 ‘부정’의 주제를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를 통해 율법에 대해 제사장들에게 질문하시고 대답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총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 불결한 상태임을 지적한 것입니다(14).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곤핍한 삶의 근원적 문제였던 ‘부정함’ 즉 죄와 불신앙으로 오염된 근본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 설 교 >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라
학 2장 10~23절 / 피영민목사
서론
오늘 본문은 학개서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네 개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메시지입니다. 학개 2장 9절에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이라고 나와 있고 2장 20절에 ‘그 달 24일’이라고 했으니 두 메시지는 같은 날에 시간 간격을 두고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유다 백성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성전 지대를 놓고 왜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건축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새로 짓는 성전이 너무나 초라하다고 낙망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초라해 보여도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이라고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메시지는 성전건축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주신다는 축복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네 개의 메시지는 책망과 격려와 축복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유다 백성을 격려하여 본격적으로 성전건축을 시작한지 3달이 지난 후 축복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6월 24일(학개 1장 15절)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는데 9월 24일(학개 2장 10절)에 세 번째와 네 번째 메시지가 선포된 것입니다.
Ⅰ. 유다 백성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진단
먼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에게 명하시기를 제사장들에게 율법의 성결과 부정의 문제를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네 성중에서 송사로 다투는 일이 있으되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것을 네게 가르치리니” (신 17:8~9). 그리하여 학개 선지자가 제사장에게 두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첫째, 어떤 제물이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려지면 그 제물은 거룩한 것입니다. 고기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거룩한 고기, 그릇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거룩한 그릇, 사람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거룩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고기가 하나님께 드려져서 거룩한 고기가 되었는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옷자락으로 싸면 그 옷자락도 거룩해집니다.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레 6:27). 그런데 지금 학개가 질문하는 것은 고기로 인해서 거룩해진 옷자락이 다른 물건이나 음식에 닿으면 그것도 거룩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제사장들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거룩한 물건이 1차적으로 접촉한 것은 거룩하게 하지만 2, 3차적으로 접촉한 것은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둘째, 어떤 사람이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집니다. 율법에 동물의 시체를 만지면 하루 동안 부정하고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 동안 부정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시체가 부정한 것이니까 만진 사람도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개가 질문하는 것은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사람이 다른 물건이나 음식을 만지게 되면 그것도 부정해지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제사장들의 대답은 부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1차적으로만 거룩을 전달하지만 부정한 것은 2차, 3차, 4차 계속해서 부정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이 전염력이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학개 선지자는 이런 율법의 원리를 유다 백성에게 적용하였습니다.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학 2:14).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다 백성과 거리를 두고 야단치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가 사랑스러울 때는 ‘내 아내’라고 부르고 마음에 들지 않고 화가 났을 때는 ‘이 여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이 여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벌써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은 하나님 앞에 부정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좋은 제물을 드려도 그것 또한 부정하여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성전건축을 하지 않았지만 제사는 부지런히 드렸습니다.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스 3:3~4).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새벽기도도 했지만 유다 백성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의 마음이 부정한 상태에서 제사를 드리니 그 제물도 부정하여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일주일 뒤에 올 것이니 제사를 드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을 알고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기뻐하시겠냐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불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축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지으라고 분명히 유다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불순종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아무리 날마다 드렸어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 전체가 부정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전염력이 강해서 결국 온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구약을 살펴보면 부정한 것의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부정이 결국 전체에 큰 손해를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승승장구하며 나아가다 아이 성이라는 조그만 곳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아간이라는 한 사람의 부정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간과 그의 가족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아골 골짜기에서 죽이고 불사르자 하나님께서 다시 축복해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밀가루에 누룩을 조금만 넣어도 결국 다 퍼져서 밀가루가 부풀어 오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밀가루를 순수하게 유지하려면 누룩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5:6). 우리가 새벽기도, 저녁기도,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 철야기도회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를 많이 해도 복을 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20번씩 예배해도 복을 받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지 않고 부패하면 예배를 아무리 드려도 복이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응답받고 축복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지식이 많거나 권력이 많다고 위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지식이 없고 가난하고 권력이 없어도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Ⅱ. 영적인 문제를 그대로 지니고 있을 때의 결과
유다 백성이 아무리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려도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15~19).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20석의 곡식을 뿌렸지만 10석의 곡식 밖에 거둘 수 없었고 그나마 10석의 곡식도 폭풍우와 우박으로 젖어서 곰팡이가 생겨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복을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학 2:17).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고 겉으로만 제사를 지내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날 대한민국은 예배당을 많이 지었습니다. 50년 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지금 경제 대국이 된 것은 모두 예배당을 많이 지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마음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예배당을 짓는데 힘을 썼기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유럽에 가보면 예배당을 어마어마하게 지어놓고 성도가 없어 외국에서 관광하러 오는 이들의 수입으로 유지해나갑니다. 그리고 시골 교회들은 망하여 술집이나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부흥하지 못합니다. 영국과 미국은 18, 19세기에 대각성 운동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쾌락을 좇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금요일만 되면 놀러가서 예배당이 텅 비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부흥하지도 못하고 축복도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거룩이라는 것은 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으로는 우리가 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100% 완벽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십시오. 윤리적으로는 흠이 있어도 내 마음이 주께 향하였으니 내 마음은 주님 것이라는 고백이 있으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Ⅲ. 영적인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결과
유다 백성이 불순종하는 마음을 순종으로 바꾸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복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려도 복을 받지 못했던 유다 백성이 학개가 선포하는 말씀대로 순종하여 16년 만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 변하여 순종하게 되었고, 변명이 변하여 사명을 수행하게 되었고, 부정함을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된 거룩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첫째, 성전건축을 방해하던 장애물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성전에 돌을 놓기 시작하자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무슨 권리로 여기서 성전을 짓느냐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고레스 왕이 우리에게 성전을 짓도록 칙령을 주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고레스 왕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고레스 칙령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 페르시아 왕이었던 다리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유다 백성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거해서 성전을 짓는다는데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다리오 왕이 조사하여 메대 지방의 악메다 궁에서 고레스 칙령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조서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 역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로 하나님의 이 전을 본처에 건축하게 하라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게 하노니 왕의 재산 곧 강 서편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 (스 6:7~8).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리자 성전건축의 장애물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둘째, 순종하는 백성은 물질의 복을 받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19).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데 누가 막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정말 어렵고 우환이 많았더라도 앞으로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9월 24일은 이스라엘에 이른 비가 오는 계절입니다. 비와 햇빛을 주셔서 수확을 풍성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받고 싶으신 분들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 사람들이 예배당을 지으면서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예배당을 짓는데 마음껏 헌신한 사람들은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마음을 헌신해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지도자인 스룹바벨도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의미는 ‘바벨에서 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 12절을 보면 바벨론에 끌려갈 때에 여호야긴 왕의 아들이 스알디엘이고 스알디엘의 아들이 스룹바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여호야긴 왕의 손자였던 것입니다. 여호야긴 왕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자인 스룹바벨은 자신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았고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악해도 자식은 훌륭할 수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유다의 총독이 되어 유다 백성의 귀환을 주도하는 지도자가 되었고 성전건축을 지휘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 스룹바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학 2:21~22).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시는 분이고 열국의 보좌를 엎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시고 스룹바벨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23). 첫째, 너는 내 종이다. 둘째, 너는 내가 택한 자다. 셋째, 너는 나의 인장반지다. 인장반지에는 도장이 달려 있습니다. 이 반지는 보통 왕이 사용하였는데 명령을 할 때 이 반지로 도장을 찍으면 그것은 변경할 수 없는 왕의 명령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도록 반지로 만들어 끼고 다녔던 것입니다. 인장반지는 주인이 24시간 끼고 다니면서 절대 다른 곳에 따로 두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스룹바벨과 가까이하고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 론
유다 백성은 외형적인 것에만 신경을 썼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면 그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장애물도 다 없애주시고 물질의 복도 내려주시며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인장반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성전건축이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까? 그 이유는 스룹바벨이 짓는 성전에 스룹바벨의 11번째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국의 보배가 되어 서실 것이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고 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성전건축이라는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복 받으려면 헌신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헌신된 마음을 가지면 이생에서 복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내세에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는 존재가 되고 위대한 인물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반항과 불순종과 부정함과 불신앙을 다 버리시고 헌신된 마음으로 바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학개 2장 10-14절 / 이한규목사
< 학개가 전하는 2가지 질문 >
<학개>는 학개로부터 전해진 네 번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진 책이다. 첫째 말씀은 다리오 왕 2년 6월 1일에 전해진 ‘성전 건축을 촉구한 말씀’이다(1:1-11). 둘째 말씀은 다리오 왕 2년 7월 21일에 전해진 ‘성전 건축에 나섰다가 낙심한 심령을 격려하는 말씀’이다(2:1-9). 셋째 말씀은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에 전해진 ‘성전 건축에 나선 사람들의 성결을 강조한 말씀’이다(2:10-19). 넷째 말씀은 셋째 말씀이 전해진 날에 또 전해진 ‘성전 건축을 주도한 스룹 바벨 총독을 축복한 말씀’이다(2:20-23).
본문은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에 임해 전해진 셋째 말씀의 일부다(10절).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성전 건축에 본격적으로 나섰는가? 다리오 왕 2년 6월 24일이었다(1:15). 그렇다면 학개가 전한 3번째 말씀은 성전 건축에 나선지 꼭 3개월 만에 주어진 말씀이었다. 셋째 말씀에서는 성전 건축과 더불어 사람들의 내면의 성전 건축도 중요함을 역설하려고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제사장에게 율법에 관한 의미심장한 2가지 질문을 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의식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고기는 거룩한 것이기에 그 고기를 싼 옷자락도 거룩하게 된다(레 6:27). 그런데 그 거룩한 옷자락이 떡이나 국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음식물에 닿으면 그 음식물이 거룩하게 되겠느냐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제사장들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12절). 즉 아무리 거룩한 옷자락이 음식물에 닿아도 그 닿은 음식물이 무조건 성물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이스라엘 의식 율법에 의하면 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하게 된다. 그처럼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된 사람이 어떤 음식을 만지면 그 음식이 부정하겠느냐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해 제사장들은 부정하다고 대답했다(13절). 이 두 가지 질문을 비교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거룩한 것은 접촉만으로 거룩함이 전달되지 않지만 부정한 것은 접촉만으로도 부정이 전달된다는 뜻이다.
2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고 학개는 선포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14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러운 손으로 제사를 드리기에 그들이 드리는 제사도 부정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부정한 것은 정결한 것보다 더 쉽게 전파된다. 정결함이 있기를 힘쓰는 더 부정함이 없기를 힘쓰라. 의식적인 정결도 중요하지만 실생활의 정결은 더욱 중요하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질문이 내포한 뜻은 무엇인가? 제사 및 예배는 거룩한 것이지만 제사 및 예배를 드렸다고 그 참여자가 무조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반대로 부정한 사람이 드리는 제사 및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기뻐하시기에 거룩한 삶이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도 없다. 반면에 거룩한 삶을 살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이 하나님만 향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거룩함은 도덕적인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여기면 아무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성경적인 거룩함이란 나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보다 더 복을 향해 있으면 참된 복은 임하지 않고 반대로 복보다 더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참된 복이 임한다. 봉사와 헌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해야 그 봉사와 헌신이 거룩한 것이 되고 그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성전 건축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해서 몸과 마음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바쳐 성전을 건축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성전 건축을 통해 축복 받았다는 간증을 듣고 축복 받기 위해서 성전 건축에 참여하는 것은 헌신에 오물이 묻은 것이다. 그런 오물이 묻는 것이 오늘날 많은 축복 간증집회의 폐해다. 축복 간증집회가 사람들의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은 되지만 때로 기복주의의 오물을 묻히는 단점도 있다. 하나님은 오물이 묻지 않은 순수한 헌신을 기뻐하신다.
이전과 이후를 기억하라
학 2장 10~23절 / 이상웅목사(마중물교회)
우리 인생에 획기적인 축복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까? 그런 날은 몇 년 몇 월 몇 일인지 기억하고 기념일로 삼습니다. 학개서에는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말씀하신 날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6월 1일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16년간이나 중단하고 자기 집짓고, 자기 생활에만 집중하는 너희 행실이 옳은지 돌아보라는 책망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마음에 감동을 받은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재개한 날이 6월 24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은 7월 21일에 주셨습니다. 7월 21일은 성전 건축 재개한 지 한달 정도 지났을 때이고, 초막절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 지쳐갈 때, 초막절을 지키며 과거와 비교해 자신들이 건축하는 성전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마음이 우울해지고 힘이 빠질 때, 하나님이 스스로 굳세게 하라며, 너희가 짓는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고 격려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말씀인데 모두 9월 24일에 주셨습니다. 같은 날 세 번째는 제사장에게, 네 번째는 총독 스룹바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날은 성전건축 재개 후 3개월이 지난날입니다. 3개월간 성전의 기초정리를 마무리하고 이제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1. 거룩과 부정의 전염
하나님은 먼저 학개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테스트라도 하듯이 질문을 던집니다. 첫 번째 문제는 12절입니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거룩한 고기라고 했는데, 고기도 거룩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쓰였습니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죄로부터 구별되었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의미였습니다. 거룩한 고기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말합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바쳐졌던 고기를 제사의 종류에 따라 전부 또는 일부는 제단에서 태우기도 하고, 일부는 제사장들이 먹기도 하고, 화목제의 경우는 제사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백성들이 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옮겨야 했고, 이때 옷에 싸서 옮겼습니다. 오늘날처럼 한근 두근 이런 고기가 아니라 소 뒷다리, 양 가슴 이렇게 덩어리기에 무거웠는데 당시 그릇은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이었기에 무거워서 옷에 싸서 옮겼던 것입니다. 질문은 거룩한 고기를 쌌던 옷자락에 닿은 것들이 거룩해지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두 번째 문제를 물었습니다. 13절입니다.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여기서 부정하다, 더럽다는 것은 위생상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제의상 더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그것이 부정하냐는 질문입니다. 제사장들은 ‘예 부정합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거룩은 전염이 되지 않지만 부정은 전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제사장에게 있어서는 가장 기본입니다. 아니 백성들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14절입니다.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부릅니까? ‘내 백성’이 아니라 ‘이 백성’입니다. 관계가 좋을 때는 ‘내(우리) 아내가’라고 하지만 관계가 안좋을 때는 ‘이 여자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들이 부정하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다’고 한 것은 백성이 부정하면 어디에서 드리던 그것은 부정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같은 시기의 역사적 기록은 에스라서에 있습니다. 3:3입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성전건축이 중단된 16년간 당시 백성들이 어떻게 제사를 드렸습니까? 무너진 성전 터 위에 번제단만 세워놓고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주변 나라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나라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성전을 짓지도 못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제사를 안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폐허위에 제단만 덩그라니 세워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다, 무효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다리입니다.
거룩은 잘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땅에 돌아왔다고, 그들이 성전건축 재개를 했다고 그것으로 너희가 자동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반면, 부정함은 강한 전염성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에는 죄성이 있어서 조금만 자극을 주어도 죄성이 힘을 얻어 발동하기에 죄는 금방 전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시점에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까? ‘너희들이 성전건축을 재개하여 기초를 놓고 이제 성전을 쌓아가는 것, 참 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삶을 정결케 하는 회개와 순종의 삶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이렇게 주일예배 오신 것 잘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배에 와서 앉아있는 것만으로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 성전되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내 삶에 세우기 위해 드려지는 순종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은 3개월간 성전건축에 최선을 다해서 해온 백성들을 격려하시면서도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약속의 말씀은 주셨습니다. 18절입니다.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9월 24일 이전과 이후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비교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전은 어떠했습니까? 추수를 하면서 타작을 하면 20고르 정도 나오겠구나 했는데 10고르, 반타작 밖에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1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 불게 해서 곡식을 마르게 했고, 병이 돌아서 쭉정이가 절반이고, 우박까지 내려 성한 것이 없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정도 되면 알아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데 그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후로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우선한다면 다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성전 지대를 쌓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축복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9절입니다.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뭘까요? 이 날이 9월 24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립니다. 9월 24일은 이른 비가 내리는 시기로 농사 일로 한참 분주할 시기입니다. 이 때 부지런히 밀과 보리를 심고 돌봐야 이듬해 유월절과 오순절에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한참 농사 일로 일손이 바쁠 때, 성전 공사도 본격적인 돌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염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성전건축을 하지 않고 농사일만 전적으로 했을 때와 이제부터 성전건축을 하면서 농사일을 했을 때와 한번 비교해보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할 때의 삶과 순종할 때의 삶을 한번 비교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염려하지 말고 성전건축에 더욱 매진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하고 열심을 다하면 나머지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간섭이고, 신비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선했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축복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했기에 사업은 대충해도, 집안 일 대충해도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알아서 축복하신다고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내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괜히 나섰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가린다며 자신의 일을 다해놓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태도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입니다. 내가 내 일에 나의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내 일에 관여하시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알기에 나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내가 내일에 우선순위를 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3. 인장으로 삼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이번에는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말씀하셨는데 21-22절입니다.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들이 있습니다. 진동시키겠다, 엎겠다, 멸하겠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심판을 다양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내가 너에게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2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그 날에 스룹바벨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한 동사는 어떤 것입니까? ‘세우다’, ‘삼다’, ‘택하다’입니다. 흔들어 엎어 멸하겠다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너를 인장으로 삼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장은 도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 주로 한 가문이나 나라의 권한을 상징하는 도장을 반지로 만들어 끼었습니다. 반지에 가문이나 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겨 꽝 찍으면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레미야 22:24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여호야긴 왕이고, 스룹바벨의 할아버지입니다. 그 할아버지 여호야긴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빼어버릴 인장 반지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자 스룹바벨에게 내가 너를 하나님의 인장으로 삼겠다고 한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패망한 나라의 왕손으로 포로되었던 자들을 이끌고 돌아온 총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떠났던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와 너를 통해 다스리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12입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알을 낳고 스알디알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의 11대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패망한 나라의 왕손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페르샤에서 임명된 총독이었기에 페르샤 왕의 눈치도 보면서 주변 민족들의 방해도 견디면서 이 일을 한다는 것이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스룹바벨에게는 오실 메시아의 보증이라고 하셨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이미 오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보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오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보증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그 일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부담이지만 영광입니다. 우리를 택하여 그렇게 세우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이 세상 가운데 이미 오신 예수님을 드러내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보증으로 우리를 삼으셨습니다. 이 영광된 일을 위해 나의 삶의 자리에서 성전건축, 주님의 주되심을 세워가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학 2장 10~19절 / 이삼규목사
사람들마다 복 받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중국인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중국인들은 춘절(구정)이 되면 집집마다 대문 앞에 '복(福)'이라는 글자를 새긴 종이를 붙여놓습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바르게 부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글씨를 부치는 것이 특색입니다. 저도 처음에 가서 글씨가 거꾸로 부쳐진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이라는 글자를 거꾸로 부치는 이유는 복이 하늘로부터 임한다고 믿기 때문에 거꾸로 부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은 위로부터 임합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막연하게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복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속 깊이 그것을 생각하십니까? 이번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맞으면서 우리는 더욱 그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고 죽는 것, 화를 당하고 복을 받는 것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성전 재건이 시작 된지 삼 개월이 지났습니다. 두 번째 설교가 선포 된지 이 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세 번째 설교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다리오왕 이년 9월 24일이었습니다. 주전 520년 12월 18일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학개 선지자에게 율법에 대하여 제사장에게 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a.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b.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의 직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무는 세 가지입니다.
①율법을 가르치는 일 ②중보의 제사와 기도 ③축복.
이중에서도 율법 교육은 제사장들의 직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단과 밀착되어 있는 것만큼 이상으로 율법과 밀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제사장들에게 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율법이었습니다.
말 2: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제사장들이 율법을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처럼 제사장의 중요한 사명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학개의 질문에 제사장들은 어떻게 답변을 하였습니까? 이에 대한 답변은 율법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물을 싼 옷자락은 거룩하나 그 옷자락에 닿은 것들은 거룩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레 6:27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제사 의식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식이 사람을 거룩하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 줄곧 그들은 제사를 드려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제사는 내용은 없고 빈 껍데기만 남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형식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순수하지 못함, 순전하지 못함을 하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그들의 부족함을 밝히기 전에 다시금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학 2:13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시체를 만져서 더러워진 자는 그 손으로 무엇을 만지든지 만지는 그것이 더러워집니다.
레 11:28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민 19: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민 19:12 그는 제 삼 일과 제 칠 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 일과 제 칠 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민 19:13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범죄한 사람이 그 더러워진 손으로 무엇을 하든지 더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학개 선지자의 설교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1.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다(14절).
1)백성이 그러하다.
2)이 나라가 그러하다.
3)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다.
4)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방금 질문한 두 가지의 내용을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후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성전 건축에 참여시키려는 시도와 또한 성전건축에 참여하려는 그들의 열망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스 4:1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 4: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예언자의 질문은 분명한 공식적인 해명과 결정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것'에는 '부정한 것'의 경우처럼 침투력과 전염성이 없습니다. 곧 유다 사람들이 같이 일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거룩하게 할 수는 없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우상과 계속 접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마치 시체를 만진 사람들처럼 유다인들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부정한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 그들이 하는 일이 정결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을 성전 재건 사업에서 제외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꿩 잡는 것이 메다" 그렇습니까? 인간적인 논리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 형식 자체를 중요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창기들이 바치는 예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느냐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제사 의식이 크게 부흥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어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느냐 라는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내용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의 참 모습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알맹이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내용은 없고 형식화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2.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라(15-17절)
학개 선지자는 그들에게 과거를 추억하여 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부터' 시작하여 과거를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절, 18절, 19절에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늘'은 아주 중요한 '오늘'입니다. 이 오늘은 축복이냐? 저주냐? 를 판가름하는 분수령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여러분!
"오늘"이 중요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서 있습니까? 복 받는 위치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저주받는 위치에 서 있습니까? 선지자는 "오늘"로부터 시작하여 지난날을 추억하여 보라고 말씀합니다.
1)그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a.이십 석 곡식더미에 십 석 뿐이었습니다.
b.포도즙 틀에 50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20그릇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 재건을 위하여 기초를 놓고 공사를 중단하고 있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절반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었습니다.
2)하나님이 모든 일을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그들을 치셨습니까? 폭풍, 곰팡이, 우박으로 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까?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자식이 잘못되었는데 징계하지 않는 부모가 있습니까? 잘못된 자식을 보고 가슴이 아프지만 피가 나게 종아리를 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우리는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씀처럼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3.오늘부터 복을 주리라(18-19절)
오늘부터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던 때를 다시금 돌아보라고 선지자는 권면합니다.
1)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었느냐?
2)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농사를 지으려면 무엇보다 '종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흉년이 들었던지 종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가장 밀접한 열매들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했던 그때에는 기본 생필품 마저 하나님의 징계로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은 오늘날의 달력으로는 12월 18일 경에 해당합니다. 성전 재건을 시작한지 꼭 3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 때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밭갈이와 파종을 위하여 이른 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른 비는 9월말에서 10월에 걸쳐서 내립니다. 늦은 비는 4-5월초에 내립니다. 그들의 파종과 추수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당히 내림으로 파종을 할 수 있고 추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 파종을 위하여 이른 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비가 온다면 절반의 풍년은 약속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버려 두었던 과거에 있어서는 해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얻지 못하여 큰 한재를 면치 못하였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뿌렸을지라도 수입은 적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1:6,10,11).
그러나 이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전 재건에 힘을 쏟으려는 그들에게 크신 축복으로 격려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그날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풍성한 이른 비를 내려 주셔서 오늘부터 복을 주신다는 증표를 삼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축복의 증표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이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릇만 준비되면 하나님은 넘치는 복을 부어 주시기를 소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부터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것을 뒤로 미루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뒤로 미룰 때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며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언제부터 주십니까? 오늘부터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의 복을 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백성이 다 그러(부정)하고!
학 2장 10~14절 / 지태일목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한 예화로서 이야기를 드리려 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20대의 꿈 많은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심장마비에 걸려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그는 좀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저처럼 꿈이 많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를 이와 같이 급하게 부르셨습니까? 게다가 하나님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부르시면 제가 어떻게 준비를 하고 올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항변을 들으시고 그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저를 부르실 때는 제가 두말하지 않고 즉시 달려오겠습니다. 다만 저를 부르시기 전에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예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잘 준비하고 달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은 다시금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름다운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도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손주도 여러 명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잠을 자는 가운데 다시금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난번에 분명히 저를 부르시기 전에는 미리 예고를 해달라고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또다시 예고 없이 부르시면 제가 어떻게 준비를 합니까?"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이미 너에게 여러 차례 예고를 주었다. 단지 네가 듣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자 그는 의아스러운 듯이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언제 저에게 예고를 하셨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래, 너 한번 잘 생각을 해보아라. 너 나이 40세가 되면서 너의 몸이 예전과는 같지 않다고 느끼지 않았느냐? 네가 50줄에 접어들면서 눈이 침침해지고 어깨가 결리지 않았느냐? 그리고 네가 60줄에 접어들면서는 거울을 보면서 네 스스로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나도 이제는 많이 늙었구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70줄에 접어들면서 네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네 스스로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나도 이제는 갈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네 입으로 갈 때가 가까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이만큼 너에게 예고를 해주었으면 되었지 무엇을 어떻게 더하란 말이냐?"
이 말씀에 그는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마 16: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지금도 주님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3월의 봄이 오는 길목에 꽃샘 추위는 지난 주 눈보라가 치는가 하면 어제는 비바람이 세게 몰아치고 오늘도 차가운 날씨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춥고 어둡고 지루하던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을 얼마나 시샘하는지 눈보라와 맹추위를 몰고 옵니다. 그러나 찬양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 어둔 밤 지나면 새날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이 세상 슬픔이 지나고 나면 광명한 새날이 다가오네....
영적으로 보아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신앙의 봄을 시샘하고 차가운 냉기를 불어 넣는다 해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하심, 이때를 선용하심은 변함없습니다. 신앙의 봄이 시작되는 것을, 이제 은혜의 꽃들이 피려는 것을, 무엇인가 하나님앞에, 교회에 귀한 일을 하고자 하는데 시험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부 소수의 사람이지만 이기지 못하고 부자 청년처럼 재물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염려로 근심하며 떠나가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한쪽에서성전 건축의 작은 불들을 말없이 기도하며 지피는 성도들을 보면 한없는 감사와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 생각하면서 영광스러운 성전을 바라보면서 작지만 마음과 물질까지라도 서로 맞잡으면서 끝까지 왜 못가나,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자신이나 교회 전체의 신앙을 저울질 되기도 하고 또 신앙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더러운지 깨끗한지,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기도 하십니다.
여러분!이번 성전건축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귀한 축복의 기회와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 개인으로서도 얼마나 크고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때로는 왜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런 귀하고 크고 어려운 일을 시작하게 하시는지, 하나님 앞에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면 아 하나님께서는 저를, 우리 교회를 이만큼 사랑하시는구나. 어렵고 큰 만큼 하나님은 나를 붙들고 일하려 하시는구나. 크게 쓰시는구나. 감사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누구나 크고 아름답게 우리를 쓰시는구나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일도 아무에게나 주인이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할만한 사람, 된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어떤 일도 맡기십니다. 이번 성전 건축은 우리를 크고 아름답게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계획이 분명 있으신줄 믿고 믿음으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학개선지나 스룹바벨 총독이나 남아 그루터기와 같이 남아있는 유다백성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은혜와 은사대로, 내 모습 이대로 주님앞에 드려지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시험을 받는가? 자기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은사들을 따라 분량만큼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면 눈치볼 것도 없고 스스로 낙심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감사와 찬송만이 넘칠 것입니다. 오늘도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본문에서 다리오왕 이년 9월 24일은 학개선지를 통하여 세 번째 설교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학1:15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성전건축의 역사를 시작했던 날이 바로 "다리오 왕 이년 6월 24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한 날로부터 3개월째 되는 날에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시고 계심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제사장들의 직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무는 세 가지입니다.
① 율법을 가르치는 일 ② 중보의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것 ③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중에서도 율법을 가르치는 일은 제사장들의 직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율법에 정통했습니다.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하나님은 학개선지에게 제사장들에게 물으라는 것입니다.
1. 두 가지 질문입니다(12-13절).
1) 첫째 질문은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거룩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학개 선지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제사장들의 답변은, 성물을 싼 옷자락은 거룩하나 그 옷자락에 닿은 그 무엇들은 거룩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레 6:27에 의하면 “거룩한 고기에 접촉된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구약시대의 제사가운데 번제의 경우는 하나님께 드리는 고기를 전부 불사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의 경우는 드린 고기의 일부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백성이나 또는 제사의 업무에 종사하는 제사장들이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합니다. 하나님께 바친 고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고기는 반드시 성전 안에서만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기록된 당시에는 성전이 황무할 때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거룩한 고기를 자기들의 옷자락과 같은 천에 싸서 집으로 가지고 가서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은 당연히 거룩한 옷자락입니다. 문제는 그 거룩한 고기가 아닌, 고기를 쌌던 옷자락이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들도 역시 거룩해지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제사장들은 즉시 대답했습니다. "가로되 아니니라."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에 싸거나 다른 음식들에 닿았다고 거룩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거룩함은 단순한 접촉으로는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쉽게 전염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도 역시 거룩합니다. 그렇다고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은 천천이나 만만의 양수의 제사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즐겨 청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번제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지팡이를 들고 네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할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단순한 형식적인 제사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의적으로 성전 재건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여러 가지 이유로 미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집을 건축하고, 자기들의 집을 꾸미는 일에는 빨랐습니다. 그들이 이런 부정한 마음, 그릇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린다 한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셨습니다. 하늘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 둔 것처럼 그들의 삶도 역시 황무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의식을 잘지키고 제사를 드린다할지라도 그 의식이나 제사 자체가 인간을 거룩하게 못함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에서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아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순수하지 못함, 순전하지 못함을 하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뭔가 사람의 뜻이나 생각이 가미되고 하나님중심이 아닌 사람중심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역시 거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시간 이 자리에 한 시간 나와 앉아만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의식 자체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님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십시다. 하나님께 우리의 정성을 드리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즐겨 청종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십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부정에 대한 질문을 제사장에게 합니다.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13절 말씀입니다.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시체를 만져서 더러워진 자는 그 손으로 무엇을 만지든지 만지는 그것이 더러워진다는 말씀입니다. 레 11:28을 보면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민 19:11에는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그랬습니다. 시체는 부정합니다. 죽음은 죄값으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체를 만진 자도 역시 부정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이 거룩하여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떡이나 국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식물을 만졌으면 그것들도 역시 부정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제사장들은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민 19:22에 의하면 “부정한 자가 손에 대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부정해진 것을 만지는 자들도 역시 부정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서 보는 진리는 부정은 쉽게 전염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쉽게 전염이 되지 않지만, 부정은 너무나도 쉽게 전염이 됩니다.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내려가기는 쉬운 법입니다. 건강한 사람 옆에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감에 걸린 사람 곁에 있으면 쉽게 감기에 전염됩니다. 이와 같이 거룩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옮겨지지 않지만 부정은 너무나도 쉽게 전염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정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하면서 우리의 거룩함을 지켜나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가나안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 12명중 10명의 불평불만, 불신앙의 말은 광야에 있는 20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백성들은 밤샛것 웁니다. 하나님을, 모세를 원망합니다. 여기서 죽느니 차라리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옛날로 돌아가자 선동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완전히 망쳐 놓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엿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다 잊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분위기를 온전히 썰렁하게 만듭니다. 숫자로 우긴다면 10명이 여호수아와 갈렙보다 우세합니다. 투표를 한다면 10명의 말을 따라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다수의 부정적인 말이 오염을 크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전염이 너무 빠름니다. 그래서 긍정보다 부정이 전염이 쉽습니다. 부정의 도구가 아닌 믿음의, 긍정의 도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까이 할만한 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의지하여 자신을, 가정을, 교회 공동체를 지켜 나갑시다. 부정적인 말, 불평하는 말을 우리는 쉽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그것이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에 불이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부정한 마음을 품은 사람을 가까이하고 사귀지 맙시다. 부정은 쉽게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함을 지켜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이 두 가지 질문의 의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의 대답의 말씀들의 의미는 범죄한 사람이 그 더러워진 손으로 무엇을 하든지 더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학개 선지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다(14절)고 합니다.
백성이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부정하니 이 나라가부정하고 그 손이 하는 모든 일도 부정하고 그러니 그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도 제물도 부정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서 "이 백성," "이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부정한 것을 보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조국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바벨론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바벨론에서는 시집가고 장가들고 집을 짓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라 1장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서 황무한 성전을 다시금 재건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한 마음을 품어야 했겠습니까?
“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물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다 써서 하나님의 성전을 힘써 건축하자.”
그들은 이러한 거룩한 마음을 품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시기가 아직은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집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집을 짓고, 자기들의 집을 꾸미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이런 부정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때문에 나라 전체가 부정해졌습니다. 부정은 쉽게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백성들의 부정한 생각이 나라 전체로 퍼져나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부정해진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부정해졌습니다. 그들은 땅에 많은 것을 뿌렸습니다. 그렇지만 거두어들이는 것은 적었습니다. 땅이 산물을 그쳐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이니 성전에서 드리던 제사도 부정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흠향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하늘은 이슬을 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한재가 임했습니다. 더러운 마음으로, 더러운 손으로 일을 하니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황무해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으로, 마음으로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우리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번에 귀한 성전 건축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기 전에 무엇이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합니까? 거룩한 신앙입니다. 구별된 신앙, 이것이 없는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맹이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내용은 없고, 형식화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은혜 주시고 거룩한 일에 동참시키십니까?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님 앞에 구별되지 아니한 사람, 구별되지 아니한 물질, 구별되지 아니한 은사는 받지 아니하십니다.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배제하십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 마음에 괴로움을 주든, 냉냉함을 주시든 멀리하게 하심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멀리하기를 쉬지 아니합니다. 피합니다.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은 오히려 하나님앞에 시간과 은사와 물질과 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여 섬기며 동참하려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앞에 내 자신이 서 있음을 아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는 본시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신 분들이 모여서 세운 교회입니다. 피난시절이라 모두가 어려웠습니다. 궁핍했습니다. 그들은 남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서 누더기 천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천막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렸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전 건축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주일 날 그러한 내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교회 건축이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선포한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현금이 없기 때문에 결혼반지를 하나님께 건축 헌금으로 드린다고 바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은 옷 이외에 덮고 자는 담요 한 장뿐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숟가락 한 개와 밥공기 하나뿐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내어 놓았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것들은 보잘 것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 최대 장로교회 가운데 하나인 서울의 영락교회가 그렇게 해서 시작된 교회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하신 이 거룩과 부정의 두 가지의 질문의 말씀을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했습니다. 자기들의 소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과 뜻을 같이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19절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19절에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늘 축복의 문을 다시금 활짝 열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되어집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한 마음이 바뀌어서 거룩한 마음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기쁨으로 다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다시금 하늘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 욕심, 거짓, 이기적인 마음, 불신앙을 떨쳐버리기 바랍니다. 거룩한 마음으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기적인 생각, 우리 중심의 삶을 살아왔던 것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거룩한 마음을 품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으로 뜨거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거룩과 부정에 대한 질문
학 2장 10~14절 / 임현수목사
중국 사람과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 하는 단어가 있다면 복이라는 단어 일 것 입니다. 구정을 지키는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춘절(구정)이 되면 온 천지에 복자를 써 놓습니다. 그리고 복자를 대개 거꾸로 붙여 놓습니다. 그런데 복(福)자를 연구해 보면 시(示)가 들어 있는데 이 시자는 대부분 제사, 숭배, 기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示는 제단 혹은 신주를 본뜬 모양이며 갑골문시대에 는 신이나 왕을 지칭하던 글자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복자를 거꾸로 붙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있습니다. 그들은 복이 하늘로부터 임한다고 믿기 때문에 거꾸로 부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은 위로부터 임합니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막연하게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개서에 보면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라,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복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늘로부터 복을 받기 바로 직전의 상황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학개 선지자에게 율법에 대하여 제사장에게 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의 직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무는 세 가지입니다.
① 율법을 가르치는 일 ② 중보의 제사와 기도 ③ 축복.
이중에서도 율법 교육은 제사장들의 직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단과 밀착되어 있는 것만큼 이상으로 율법과 밀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제사장들에게 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율법이었습니다.
말 2: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말 2: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제사장들이 율법을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처럼 제사장의 중요한 사명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11절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제사장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입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제사장들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하게 하셨습니다. 첫째 질문은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거룩에 대한 질문입니다. 둘째 질문은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부정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난 뒤 결론을 내립니다. 세가지로 본문을 나누어 묵상하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거룩에 대한 질문입니다.
12절입니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여러 종류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가운데서 번제의 경우는 하나님께 드리는 고기를 전부 불사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의 경우는 드린 고기의 일부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백성이나 또는 제사의 업무에 종사하는 제사장들이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합니다. 하나님께 바친 고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고기는 반드시 성전 안에서만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기록된 당시에는 성전이 황무할 때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거룩한 고기를 자기들의 옷자락과 같은 천에 싸서 집으로 가지고 가서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레 6:27에 의하면 거룩한 고기에 접촉된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은 당연히 거룩합니다. 문제는 그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이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들도 역시 거룩해지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제사장들은 즉시 대답했습니다. "가로되 아니니라." 거룩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Holiness is not contagious." 거룩함은 단순한 접촉으로는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콘테이어스)거룩한 것은 쉽게 전염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도 역시 거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절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즐겨 청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번제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이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지팡이를 들고 네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할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단순한 형식적인 제사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의적으로 성전 재건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집을 건축하고 자기들의 집을 꾸미는 일에는 빨랐습니다. 그들이 이런 부정한 마음, 그릇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린다 한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셨습니다. 하늘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 둔 것처럼 그들의 삶도 역시 황무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그 옷자락이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그것들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거룩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역시 거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시간 이 자리에 한 시간 나와 앉아만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십시다. 하나님께 우리의 정성을 드리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즐겨 청종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십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부정에 대한 질문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시체는 부정합니다. 죽음은 죄값으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체를 만진 자도 역시 부정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이 거룩하여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떡이나 국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식물을 만졌으면 그것들도 역시 부정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제사장들은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시체를 만져서 더러워진 자는 그 손으로 무엇을 만지든지 만지는 그것이 더러워집니다.
레 11:28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민 19: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12 그는 제 삼 일과 제 칠 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13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또 민19:22에 의하면 부정한 자가 손에 대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부정해진 것을 만지는 자들도 역시 부정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Uncleanness is contagious!" 부정은 쉽게 전염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쉽게 전염이 되지 않지만 부정은 너무나도 쉽게 전염이 됩니다.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내려가기는 쉬운 법입니다. 건강한 사람 옆에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감에 걸린 사람 곁에 있으면 쉽게 감기에 전염됩니다. 이와 같이 거룩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옮겨지지 않지만 부정은 너무나도 쉽게 전염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정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하면서 우리의 거룩함을 지켜나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고지식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읍내에 있는 어떤 음식점을 찾아갔습니다. 그 음식점은 개구리 요리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음식점 주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실례합니다. 제가 개구리 수천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좀 사주시겠습니까?"
음식점 주인은 의아스러운 듯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주는 것은 별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 많은 개구리를 잡아올 수 있습니까?"
농부는 대답을 했습니다.
"예, 우리 집 밭에 딸린 작은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 속에는 개구리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마도 개구리들이 수만 마리가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 녀석들이 밤낮 없이 울어대는 통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기회에 다 잡아버리려고 합니다."
음식점 주인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농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연못 속에 있는 개구리들을 몽땅 다 잡아버리기 위해서 양수기를 동원했습니다. 그는 양수기로 연못 속의 물을 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에 농부는 다시금 읍내의 음식점 주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멋쩍은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우리 밭의 연못 속에는 겨우 개구리 두 마리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두 마리가 그렇게 시끄럽게 울어대리라고는 미처 상상을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마리의 개구리가 문제입니다. 어느 모임이든지 두 사람만 불평을 해 대보십시오. 정신이 없어집니다. 그 모임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부정은 너무나도 쉽게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말, 불평하는 말을 우리는 쉽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그것이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에 불이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백설공주와 우거지의 비교! 백설공주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고 순진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문제가 많습니다. "백"방으로 "설"쳐대는 "공"포의 "주"둥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도무지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까이해서는 안됩니다. 부정은 쉽게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거지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겉보기에는 수수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미가 넘칩니다. 이런 사람은 조용합니다. 겸손합니다. 조용히 지기의 일에 충실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늘 가까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평하고 원망하는 부정한 마음을 품은 사람을 가까이하고 사귀지 맙시다. 부정은 쉽게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함을 지켜나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셋째로, 질문을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서 "이 백성," "이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부정한 것을 보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조국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바벨론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바벨론에서는 시집가고 장가들고 집을 짓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라1장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서 황무한 성전을 다시금 재건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한 마음을 품어야 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물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다 써서 하나님의 성전을 힘써 건축하자.'
그들은 이러한 거룩한 마음을 품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시기가 아직은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집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집을 짓고 자기들의 집을 꾸미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이런 부정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때문에 나라 전체가 부정해졌습니다. 부정은 쉽게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백성들의 부정한 생각이 나라 전체로 퍼져나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부정해진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부정해졌습니다. 그들은 땅에 많은 것을 뿌렸습니다. 그렇지만 거두어들이는 것은 적었습니다. 땅이 산물을 그쳐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이니 그것들도 부정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흠향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하늘은 이슬을 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한재가 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황무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하신 말씀을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했습니다. 자기들의 소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과 뜻을 같이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19절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늘 축복의 문을 다시금 활짝 열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약속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한 마음이 바뀌어서 거룩한 마음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다시금 하늘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대구에 가면 서현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잘 지었습니다. 그 교회가 지어질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교회 건물이었습니다. 그 교회에 지금은 작고를 하셨지만, 정규만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심한 병에 걸리셨습니다.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죽을병이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하나님께 이러한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 목숨을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성전을 한번 멋지게 짓고서 죽고 싶습니다."
그 후 정 장로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한 후에,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원했던 것을 지켰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설득하고, 교인들을 설득해서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는 그 당시로서는 그다지 큰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쳐서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 무렵 대구에 이상한 병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병을 고칠 약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정 장로님의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서 먹기만 하면 깜쪽 같이 그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한약방은 날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자기의 순번을 기다려야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 장로님은 엄청나게 큰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서원했던 대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멋진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서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세계 제일의 갑부였던 존 록펠러의 이야기를 다시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록펠러씨, 당신은 지금까지 세계 제일의 갑부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 비결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때 록펠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세계 제일의 갑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님이 내게 물려주신 신앙유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제게 이런 말을 유언으로 남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정녕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제일 멋진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바쳐드려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계속해서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했습니다. 40명의 십일조 계산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생토록 그가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한 교회의 수가 자그만치 5,000개에서 불과 18개가 모자라는 4,982개입니다. 기자가 또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기업가들은 번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재투자를 해도 성공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나 많은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하는데도 어떻게 세계 제일의 부자 자리를 계속해서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때 록펠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제학을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은 반드시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가 제게 물려주신 위대한 신앙유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이 백성이 그러하고." 제는 그저 그런애지 뭐… 저 친구는 원래 그런 친구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보시면서 탄식하지는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물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을 열심히 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떨쳐버리기 바랍니다. 거룩한 마음으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기적인 생각, 우리 중심의 삶을 살아왔던 것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거룩한 마음을 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이 시작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긍정적이고 착한 마음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생겨나서 하늘 축복의 문이 우리교회에 활짝 열리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부터는 복을 주리라!
학 2:15-19 / 박신진목사
왜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려움이 반복되며, 나 혼자만 인생의 맞바람을 맞고 서있는 듯이 어려우냐, 이런 사람이 있다. 경제문제가 제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문제이며, 건강 문제도 정말 우리 인생을 뒤흔드는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부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자녀들 문제가 생겨서 골치 아프게 하면 견디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각각 해결해 나가려면 어렵지만,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이다. 인생은 하나님이 내셨다. 우리 생명도 시간도 건강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유지될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 살면 모든 게 막히고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면 모든 게 잘 풀리고 해결된다.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 학개서이다. 우리는 학개서를 성전건축을 위하여 예언활동을 한 책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삶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먼저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믿음의 문제, 하나님 뜻대로 사는 일을 먼저 해결하는 믿음을 그들이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9-11) 성전 짓기 전에, 믿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모든 게 한재가 들었다, 한마디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성전건축을 하니까, 즉 믿음의 문제를 우선하여 바로 잡으니까 오늘부터 하나님의 복이 임하였다.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오늘부터는, 성전건축을 제대로 하면서부터는 복을 주리라는 말씀이다!!
학개서는 두 장, 38절로 되어 있는 작은 예언서이다. 구약성경 중 오바댜서(21절)에 이어 두 번째로 짧은 책이다. 짧은데도 정경으로 살아남았다. 당시로는 중요한 책이었나 보다. 그 중에 익숙한 구절은 1장 8절이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학개서의 중심인 이 구절은 목회자들은 애용하지만 성도들은 부담스러워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예언은 성전건축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성전건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 어떤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접근하느냐를 다루는 책이다.
유다 백성이 자기들은 좋은 집에 살면서 성전이 낡아서 형편없이 되었는데도 손을 보지 않았음을 꾸짖고 성전을 짓도록 격려하는 말씀이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정복한 직후 바벨론에 포로로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에 백성이 힘을 얻고 귀환하기를 시작했는데, 42,360명이나 되는 백성이 결단을 하고 나름대로 수십 년 정들었던 바벨론을 버리고 귀향했다.
귀향직후 그들은 무엇을 했겠는가? 성전부터 짓기 시작하여 우선 지대를 완성했다. 그러나 성전을 짓고 유다 민족이 실질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허락했던 고레스와는 달리 후임 다리오 왕은 소극적으로만 성전건축을 허락했다. 그러다보니 성전건축이 지지부진했고, 결국 관리들에 의해 성전건축이 중단되었다. 중단된 성전건축은 시간이 흘러서 다리오 왕 2년까지 계속되었다. 아마 10년 넘게 성전건축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이 성전건축이 중단된 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학개 1장을 보면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집을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부지런히 살았다. 자기 고향 유다 땅에서 정착해 간 것이다. 그런데 노력에 비해 결실은 적었다. 씨는 뿌렸지만 수확이 적고, 먹고 마셔도 배부르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했다(6절). 심지어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었다! 수확한 농산물마저 어디론가 없어지고(9절), 가뭄이 들어 온 땅이 말라 갔다(11절). 성전건축,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미루고 자신의 일들을 하기에 바빴지만 소득은 적고 재앙만 반복되고 있었다.
성전건축이 중단된 기간 동안 유다는 내적으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다백성들과 그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 사이에 대립이다. 귀환한 이들은 과거에 상류층이었고 바벨론에서도 나름대로 연구와 노력을 해오던 사람들이다. 또 발달한 바벨론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세련되었다. 그러나 옛날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남아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외국에서 살던 사람들이 50년이나 지나서 돌아와 주인행세를 하려하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만약 유다백성들이 어렵더라도 성전을 빨리 건축하고 온 민족이 신앙으로 새롭게 뭉쳐 새출발했다면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전 건축은 당시 믿음의 과제요,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영적 숙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부터 해결해 놓아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이스라엘, 갈등하고 영적인 문제 앞에 놓인 유다를 하나 되게 하는 중요한 사역이었다. 성전건축을 하고 유다 나라를 새로 세우라고 허락했던 페르시아 왕이 그것을 철회해 버렸으니, 약소국 유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은 믿음과 대의를 쫓던 데에서 이제 자기 생계를 위해 일하는 생활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 본문 학개 2장도 같은 상황을 보여준다. ‘오늘까지 최근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보면, 주의 성전을 아직 짓지 않았을 때, 스무 가마 나는 밭에서는 겨우 10가마 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포도주 50말은 나와야 할 틀에서 20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밭의 곡식들을 깜부기와 곡식을 마르게 하는 녹병으로 치셨고, 포도넝쿨이나 농사를 우박으로 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이 없었었다. 그런데 다시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구월 스무 나흘째 날부터는 복을 내리신다. 만약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 종자가 창고에 있다면, 오늘부터 놀라운 수확과 풍성한 결과가 있을 것이다!’(2:15-19) 이런 말씀이다!
학개 예언자 시대에 성전 건축은 신앙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유다 백성을 하나 되게 하고 믿음을 새롭게 하는 구심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 왕의 지원까지 받아 성전재건이 활발히 이뤄지다가 지원이 그치고 반대를 받으니 중단되어 버렸다. 믿음의 지표라고 할 수 있었던 성전재건이 중단되니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자들과 남아 있던 잔류자들 사이의 갈등도 불거지고, 무슨 일을 시도해도 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살고 있는데 사는 느낌이 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이 말씀이 정확히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었다. 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역사에 기록될 만큼 큰 성장을 이루었다. 교회마다 부흥되었고, 지역마다 성도들이 늘어났다. 거기에는 교인들의 기도와 전도와 헌신이 바탕을 이루었지만, 해방 이후 시대적인 배경에도 큰 이유가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교회의 발전과 성장에는 ‘개방과 자본주의적 성장이라는 고레스’의 도움이 있었다. 여기에는 우리교회도 해당된다. 70년대 중반부터 우리교회는 꾸준히 성장해왔다. 복음에 집중했다. 예수 사랑이 간절했다. 교회와 믿음의 문제에 제일 관심을 두었다. 믿음의 문제를 이와 같이 우선하며,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경배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고 축복하셨다. 몰론 그때가 산업화 이후 나라경제가 발전하던 때이니까 개인의 경제로 발전했다지만, 특히 신실하게 믿는 기독교인들이 훨씬 잘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고레스는 더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다리오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리오 왕 때 성전건축을 방해하던 관리들이 있었던 것처럼, 사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고 성도들은 그런 사회 속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요즘 우리 믿음과 생활을 놓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준비할 때, 학개서를 읽으며 무릎을 쳤다! 요즘 사회 분위기가 신앙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청장년 세대에 들어가는 30-40대 젊은이들과 20대 청년들에게 지금의 사회분위기는 교회를 떠나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준비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 있다. 코로나 이후에 교회마다 자신의 사명과 역할을 새롭게 생각하는 때에 우리교회는 삼척시 노인복지관을 위탁운영하게 되었다. 이 노인복지관은 단순히 하나의 기관이라기보다,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상징이요 기준이라는 것을 느낀다. 학개 시대에 하나님은 산에 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지으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라, 믿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열매 맺으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요구하시는 일들을 감당하지 못할 때, 먼저 우리 마음이 불편하다. 교회에 와서도 영적으로 쉼을 얻지 못하고 불안하고 괴롭다. 그러니 세상 일이 잘 풀리질 않는다. 사업도 잘 안 되고, 입맛도 없다. 인간관계도 자꾸 얽힌다. 한마디로 삶이 자꾸 꼬이는 것이다. 나는 지난 3-4년의 교회와 교인들 형편을 깊이 묵상해 볼 때 이 말씀이 두려울 정도로 진실된 말씀으로 다가왔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영적 시대적 과제에 집중할 때이다!!
학개 시대, 성전 건축의 명령이 물리적 건물을 짓는 데만 있지 않다는 것은, 2장 3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그러니까 성전의 물리적 건물로는 당시 건축할 성전이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나 크냐, 화려하냐, 값비싸냐 하는 것보다 성전을 건축하는 자세와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할 것이다! 9절,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학개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재건하기 시작한 성전건축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임하였던 저주를 풀어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사실 나그네 나라로 흩어져 버릴 운명이었던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짓고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말씀대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지난 코로나 3년은 우리 모두에게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다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하던 사업을 그만 두어야 하는 사람도 많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편을 참아내야 하는 시절이었다. 코로나 관련 중병으로 아직까지 질병의 후유증을 앓는 가족들도 적지 않다. 이런 저런 경제적인 침체와 손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교회는 정상적인 예배와 사역을 진행하기가 힘들었다. 코로나 첫 시기에는 예산이 얼마간 줄어드는 것을 보아야만 하였다. 이런 사정들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아야 할 과제를 던져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뒤로 하고 나 자신의 생업과 먹고 사는 돈 문제에만 너무 빠져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었다. 하나님의 교회와 거룩한 사명을 생각하라!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욱 행복하다!
먹고 사는 문제, 더 많이 쌓고 더 높게 짓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혼은 세상에서 불쌍한 인생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에서 거룩한 일, 영원한 사명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무슨 의미 있는 인생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먹고 입고 쓰는 데에만 치중하니 점점 영적으로 타락하여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도 낫지 않게, 똑같이 죄를 짓고 죄의 떡을 먹으며 죄의 향기에 취하여 살게 된다! 기도하라고 해도 귓등으로 듣고, 전도하라고 하면 남의 일로 생각한다. 도대체 왜 사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하나님의 교회와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는 일에 관심을 가지라!
내 사업 성공보다 하나님의 교회 부흥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평안을 찾고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복을 주셔서 우리 인생이 잘 되게 하신다. 교회가 부흥되면 개인 심령과 생활도 부흥된다. 그러니 교회부흥에 더욱 관심을 가지라! 성경 말씀은 이렇게 경고한다. ‘너희가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너희가 집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내가 그것을 흩어 버렸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을 소출을 그쳤다.’(학1:9-10, 새번역)
오늘 오후에는 남선교회 주관 전교인걷기대회를 한다. 나는 이것을 코로나 종식의 신호탄이라 부르고 싶다. 코로나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더욱 하나님께로 돌리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물리적인 성전 건축보다는 우리 마음에 믿음의 전을 바로 세우라는 말씀으로 오늘 주님은 가르쳐 주신다! <그 믿음의 전을 짓고 지대를 놓는 오늘부터는 복을 주리라! 영적으로 충만한 생활을 결단하는 오늘부터 잘 되게 하리라! 주님만 바라보고 사랑하는 오늘부터 건강과 평안을 주리라! 믿음에 더욱 올인하는 오늘부터 너희 자녀들이 잘 되게 하리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묵상하며 마음 속에 믿음의 성전 짓기를 결단하는 오늘부터 사업과 경제가 잘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자세와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교회의 영적 상태와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맨 마지막에 나오는 교회가 라오디게아이다. 그 교회는 불행하게도 그리스도로부터 단 한마디의 칭찬도 듣지 못했다. 그 교회는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들은 교회였다. 라오디게아는 잘 사는 교회였다,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풍요로왔고, 많이 배웠으며, 은행에는 돈이 쌓여있었다. 주후 60년에 라오디게아에 지진이 엄습했을 때에도 그들은 로마의 복구비를 거절할 만큼 재정이 넉넉했다. 양털모직의 집산지로 의류무역이 활발했고, 안약을 만들어 온 천하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자랑거리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난하며 벌거벗었으면서도, 수치를 알지 못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지금 믿음의 집을 지으라는 것이다! 지금 예수만을 더욱 사랑하라는 것이다! 지금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라는 것이다! 지금 오늘, 여러분이 살아있는 믿음의 성전을 하나님께 지어올리라는 것이다. 내일이면 늦다! 오늘이다! 지금 믿음의 집을 지으라! 그러면 “오늘부터 복을 주리라!” 학개를 통하여 지금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