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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 대한 비난은 3가지로써 독재자, 친일파, 빨갱이이다. 박대통령이 516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장면 정권을 전복하고 70년대에 유신독재를 한 건 사실이다. 따라서 독재자라는 말은 맞다. 그러나 516후 그는 정당한 자유민주선거를 통해 당시 윤보선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70년대 유신독재라고 해서 기본적 자유 그 자체가 억압된 건 없다. 거주이전, 출판,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는 그대로였다. 단지 유신통치에 반대하는 정치적활동과 집회결사, 언론출판활동에만 탄압이 가해졌다. 실례로, 70년대 그의 통치에 있어서 골머리를 썩히던 것 중 하나가 고물가였다. 80년대 중반이후 한국관료들은 물가잡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지만, 박대통령은 채 알지 못했다. 치솟는 서민물가를 잡기 위해 그가 한 것은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가격통제였다. 당시 주된 난방에너지원이었던 연탄가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한 것이 한 예이다. 70년대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고 혈기왕성한 경제학자들이 속속 귀국했다. 자유시장경제이론을 배운 그들은 박대통령 정부의 경제개입을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당시 2-3개에 불과하던 경제전문지, 월간중앙, 신동아에는 매월 빠지지 않고 박대통령 경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글이 장문에 걸쳐 실렸다. 아직 그렇게 혹독하다 못해 잔인하게 집권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박대통령 사후 보지를 못했다. 그러나 아무 제한이 없었다. 박대통령 왈 그게 그사람들의 직업이 아니냐? 박정희는 알다시피 만주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정책에 따라 일본육사에서 2년 더 수학하고 만주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다. 그는 졸업식때 만주국황제 부의 앞에서 졸업생 대표로써 일본천황에 대한 충성의 맹세문을 낭독한 사람이다. 누군들 그 자리에서 그걸 피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조선인 동기생들 모임에서 그는 곧잘 독립군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가 유학했던 일본육사의 조선출신 생도들의 비밀모임인 계림회에서는 조선독립과 임관후 처신문제가 생도들간에 자주 토론되었다는 것이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기록으로 남아있다. 조선출신의 마음속과 겉은 달랐던 것이다. 구한말부터 시작된 조선출신의 일본육사 입학은 끽해야 매년 수 명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고종황제 붕어와 31운동후에는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이후 중일전쟁으로 조선인들도 징병대상이 되자 하는 수 없이 회유차원에서 다시 입학이 허락되었다. 역시 보통 매년 수 명에 불과했다.(참고로 1945년 일본육사 1기 생도는 2,500명이나 되었다.). 대부분 조선출신들은 만주군관학교로의 입학을 허용했다. 만약 조선의 젊은이들이 외골수를 고집한체 그나마 군인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해방후 국군은 도대체 누가 창설한단 말인가? 광복군? 김구주석아래 약 600명이 있었는데 현대식 정규군 작전에 거의 문외한들이었다. 만주의 유격대 출신이 어떻게 현대식 군대를 이끈단 말인가? 그러나 국군 예비역 병장이라면 소정의 교육후 신생국 군대의 중대장, 대대장을 시킬수 가 있다. 군대갔다온 사람들은 다 동의할 것이다. 그들은 대대, 연대, 사단의 정보, 작전, 군수, 통신, 인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장에서 체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해서 일제 36년간 조선인으로써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 출신 장교가 생도포함 통털어 약 200명이었다. 그 중 100여명은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 이후 입학이 허락된 자들이다. 1개사단에서 필요한 장교숫자가 도대체 얼마인가? 해방직후 국군에 합류한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 장교출신이 생도 포함해서 불과 약 100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인을 군인으로 키우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야박했는지 이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실이 없다. 대좌출신 2명, 중좌출신 3-4명, 소좌출신 3명, 나머지는 전부 생도포함 초급장교출신이었다. 이 중 대좌, 중좌출신은 1920년 전후해서 일본육사에 입학한 자들로써 중일전쟁후 입학한 젊은 장교출신들과 팀웍이 안 맞아 625전쟁중 모두 예편되었다. 소좌출신으로는 625초기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전사한 채병덕, 동란중 참모총장으로 이승만의 군정치개입에 항거하고 숙청당한 이종찬, 그리고 동란중 사망한 이용문장군이다. 이 일본군 초급장교출신들이 국군창설에 이바지하고 625때 북괴남침에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을 지킨 건 알지만, 이들이 이후 일본천황에 충성했다는 말은 도대체 들어본 적이 없다. 박정희 포함 대한민국의 간성들이 어째서 친일파란 말이냐? 설령 일본놈들이 그들은 일본군이다라고 말해도 우리가 나서서 그들은 대한민국 국군이라고 감싸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들도 마음 한 구석이 괴로울지도 모른다.박정희가 516직후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당시 일본 요시다 수상이 우습게 보고 당신은 일본육사를 졸업한 일본군인이오 하고 말했을때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맹세한 대한민국 육군 대장이오. 그러니 그대의 지금 그 말은 적절치 않소라고 단호하게 꾾었다고 한다. 요시다 수상은 우리가 호랑이를 키웠구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해방직후 군내에서 남로당 조직책이었던 것이 서실이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김창룡은 매우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군부내 죄익들을 처단했다. 김창룡이 직접 취조한 결과는 박정희가 공산당으로 행동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무자비한 좌익척결에 따라 조직책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사형이 언도될 운명이었다. 그가 만약 남로당 조직책으로 활동을 했다면, 백선엽 장군 등 군 고위자들이 그를 구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훗날 백선엽 장군의 회고를 보면 박정희를 구명해 준 첫번째 이유로 그가 공산당으로 활동한 바가 사실상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통치의 암흑기를 지나 해방을 맞았을 때 우리 지성인들은 세계정세에 대해 매우 무지하였다. 민주주의고 공산주의고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모든 인민들이 평등하게 잘 살자는 공산주의 사상은 그들의 심금은 울렸다. 수많은 지성인들이 공산주의에 눈을 돌렸고, 공산주의의 물결이 한반도를 넘실거렸다. 그러나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 일파의 무자비한 만행에 이내 실망하고 현실공산주의에 등을 돌리고 자유민주주의로 돌아섰다. 형의 억울한 죽음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반석위에 올려놓는 당시에도 똑똑하다는 평을 받던 박정희라는 인재도 잠시마나 공산주의에 정신을 놓는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다른 대부분의 지성인들처럼 공산주의에 심취하지도, 활동하지도 않았다. 그의 집안전력과 똑똑함에 공산주의자들이 명목상 그를 군부내 조직책으로 임명했을 뿐이다. 따라서 체포되고 취조가 시작되자 순순히 아는대로 자백했다. 젊은시절 일시적인 시행착오때문에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몰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해방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일부 정치거물들, 특히 서울대 교수 상당수가 다 뻘갱이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박정희보다도 훨씬 심하게 일시나마 공산주의에 심취하고 발을 들여놨었기 때문이다. 훗날 누군가가 왜 공산당에 가담햇느냐고 그에게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군부내 일부 친일파들이 자신이 동조하지 않자,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려 들었으나 죽지 않았다고. 만약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면,625전쟁중 아무리 인재가 귀하기로서니 박정희를 시시콜콜히 아는 국군수뇌들이 그를 다시 복직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하고 싸우는 중인데... 그는 대한민국 역사를 통해 가장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냉전시대인 6,70년대를 통해 가장 강력한 반공정책을 실시했다. 공산주의에 가담하는 자들은 모두 처단되었다. 승공, 멸공이 그의 국시였다. 재임중 그가 한 수많은 대국민연설, 기자회견에서 북한공산집단의 모순과 죄악을 그처럼 용기있게 지적한 국가원수는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516쿠데타, 유신독재를 비판하여 다시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독재는 나름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었으며 1948년 건국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체제에 의해 제한되고 그 연장선상에 있던 인물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김일성, 김정일 독재와는 판이 틀리다. 그러나 그가 친일파, 빨갱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가 않다. 이는 자신들의 좁아지는 입지에 초조한 나머지 강력한 반공지도자를 자신들과 같은 빨갱이로 몰아댐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공격을 희석시키려는 이간질이거나, 이미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고 나아가 제3세계 나라들에게까지 귀감이 되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절하하려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박정희 시절에도 일본은 툭하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식민지시절을 미화하려 들었다. 그때마다 박대통령은 강력 반발했고, 지금의 여의도 광장(공원)에서는 일본을 규탄하는 대규모 관제데모가 열렸다. 박정희의 만주군 중위시절 일본이름은 다까끼 마사오였다. 도대체 그게 어쨌다는거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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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이지만 "당시 장면 정권을 전복하고"라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 당시 장면 정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는가요? 아닙니다. 윤보선 대통령 정권이었고, 장면 정부였습니다. 실제로는 장면 내각이었지만 사람들이 내각과 정부를 혼동하여 장면 정부라고 불렀었지요. 장면 정권이란 것은 원래 없었으며, 윤보선 대통령 시대였는데, 5.16산업혁명으로 윤보선 대통령 정권이 바뀌었던 것이 아니라, 윤보선 대통령의 대통령 지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쿠데타가 아닙니다. 5.16산업혁명으로 정권이 바뀐바 없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지식이 미천하기에 많은 오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류 있는 글을 퍼올 지 모릅니다. 많은 지적부탁드립니다.
네, 지적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신독재"란 말 역시 논리적으로 잘못된 말입니다. 1971년 당선 이후 박정희 대통령 새 임기가 1972년에 시작되었는데, 바로 그 해에 국민의 손으로 유신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서구에서 200년 걸렸던 중화학공업 육성에 10년이 걸리니, 한번 더 출마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는지 국민에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국민이 10년 걸리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원하지 않으면 1972년에 즉시 퇴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0년 걸리는 사업을 시작하다가 중도에서 중단할 것이라면 시작안하는 것이 나으니깐 새 임기를 시작하지 않고 퇴임하실 것이요, 만약 국민이 10년 걸리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원한다면 재출마를 보장해 달라고 하시어 국민이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고, 가장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10년만에 세계5위의 중화학공업 선진국이 되어, 그 덕에 지금까지 국민이 먹고 살고 있으니 그 합리성이 분명한 것입니다. 경제 건국기에 국민이 경제건국에 동의하여 통과시켜 드린 유신헌법이었으니 유신독재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건국 후 150년이 지났는데도 미국 국민이 경제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종신집권을 보장해 드렸던 것도 여전히 미국이 경제 건국기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자원없는 땅에서의 신생국 한국은 그 시기가 경제 건국기였습니다.
4.19데모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불러서는 안되는 것이 4.19데모꾼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4.19데모의 출발점은 "직선제는 독재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데모 주동자들은 대통령 선거 직선제를 폐지하였는데, 아주 무식한 방법으로 폐지하였습니다. 따라서, 국민의 참정권을 되찾고, 직선제를 회복하려면 5.16혁명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5.16으로 박정희가 2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쿠데타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한 2공화국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회복한 3공화국 헌법을 국민의 손으로 통과시켜 그 3공화국 직선제 선거법에 의거한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어 1964년에 대통령 취임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민주주의의 기준을 직선제에 둔다면 직선제를 폐지한 4.19데모가 아니라, 직선제를 회복시킨 3공화국 선거가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마지먁 글이 백미 입니다.
네, 박정희 대통령 연구 자료 게시판 261번에 방금 1963년 10월 15일 대선 득표 현황 올려놓았습니다. 1963년 10월 15일의 대선이 대한민국 헌정 사상 가장 민주적인 선거였습니다. 훗날 양김씨가 몰고온 더러운 금권선거와 달리 순전히 정책 대결로 승부가 결정된 선거였습니다.
네 저도 동감^^ 알면알수록 훌륭한 지도자이셨구나라고 배우고 알게됩니다...
독재자 친일파 빨갱이라는 말은 북한 빨갱이들이 지어낸 얘기지요.
외국에서 공부한사람들 중에는 북한에 포섭된 간첩들도 있지요.
엔젤 of GOD님아~..으이구..왜이러십니까? 17년간을 통치한 대통령을 독재자라 부르지 뭐라 부릅니까?
헉, 1964년부터 1979년까지를 17년으로 계산하는 저런 우둔한 머리로도 광주에서 의사로서.
북한에서는 평생해먹어도 말한마디 못하면서, 나라가 잘된다면 평생이라도 해야지....
엔젤님동감~그죠? 북에서 세습해가면서리 악랄한 악마가튼독재하는데 거기에 대해선 한마디못하고...
그래 당신 산수실력 잘해서 잘났소이다.그럼 16년이오까.. 내참 이런 사람이 목회자라니..
실수를 인정하면 더 멋있어 보일텐데..보기가민망하군요. 작은실수든 큰실수든... ...아 그랬군요..하고 한마디로끝났다면...까칠한 모습이 좀그러네요.
17년간 독재를 해서 우리삶을 이만큼 올려놓았다면 나는 평생을 하도록 하겠읍니다. 지바고님 그분이 17년간 독재를 해서 피해본사람이 누가있나요? 우리국민이 피해를보았나요? 우리국민 잘살게 해준거 이게잘못됐나요. 김대중 5년에 노무현5년 이렇게 10년동안 북한은 우리에게 핵공격 공갈협박 받게하는 사람들인데 박정희 대통령 17년동안 우리국민들이 북한에게 협박당한적 있었나요? 그17년간 우리들의 생활수준이 어떻게 변했죠.17년독재라 표현하는것은 잘못된 표현임니다.하긴 지금정부도 독재라고하는 미친또라이들도있으니....
동감합니다~
어쩌면 그랬을 것이다라고 희미하게 믿었던 부분이 해결된것같아 너무 기쁨니다. 맹목적인 지지가 아니라 이런 이유를 찾고 싶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