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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가 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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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펌 절대 금지)
"쳇, 마을이 너무 후진 것 같아!"
찬우는 차창 밖을 한참 바라보다 버럭 신경질을 냈다. 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엄마가 휙 돌아보며 물었다.
"찬우야! 너 벌써부터 불만인 거니?"
찬우는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아이 정말- 게임기가 왜 안 보이는 거야."
그렇게 볼멘소리를 하며 가방을 뒤지는 찬우의 머리 위로 아빠의 나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양찬우."
아빠가 그렇게 성까지 붙여서 자신을 부를 때는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찬우는 안 봐도 뻔했다. 일장 연설이 이어질 참이었다.
"너 아빠하고 약속한 거 벌써 잊었니? 이제부터는 말썽 안 부리기로 약속했잖아. 너도 이제 육 개월만 지나면 중학생이야, 중학생."
찬우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아무래도 아빠의 잔소리는 백 정도 셀 때까지 계속 될 것 같았다. 그때까지 잠자코 들어주는 척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찬우는 숫자 세기를 삼십에서 그만 두어야했다. 아빠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성필이랑 싸운 것에 대한 벌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예? 하지만 그건 성필이가 먼저 잘못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찬우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성필이가 고양이를 나무에 매달아놓고 돌로 맞추고 있었다고요. 그것도 아직 어린 새끼를요."
"그런다고 친구와 싸워? 애를 코피가 나게 때려?"
아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맞아. 그 고양이는 우리집 고양이도 아니잖아."
엄마가 맞장구를 쳤다.
"그 고양이는 그저 흔한 도둑고양이에 불과했다고."
아빠가 다시 말을 받아 이었다. 찬우에게는 좀처럼 말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찬우는 '하지만'만 연방 내뱉었다.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그 일은 전적으로 네 잘못이다. 아빠는 너의 그 앞 뒤 안 가리는 급한 성미가 걱정이란다."
"하지만-."
"무슨 말대꾸가 그리 많니? 아빠가 말씀하시면, 네 이제부터 안 그럴 게요, 해야지."
찬우는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아빠 엄마가 야속했다. '저도 말 좀 하자고요'라는 팻말이라도 들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찬우는 어른 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찬우가 입을 다물자 아빠와 엄마는 찬우가 자신들의 말을 이해한 것으로 여기고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찬우의 입이 앞좌석 등받이에 닿을 만큼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엄마가 덧붙였다.
"너 할머니 댁에 가서도 그렇게 화난 표정 짓고 있을 거니?"
찬우는 엄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가방에서 게임기를 꺼내 들었다. 게임기에서 요란스런 음악이 흘러나오자 엄마도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사실 찬우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빠와 엄마는 툭하면 찬우더러 성미가 급하다느니 문제를 일으킨다느니 하지만 찬우에게는 다 그때그때 이유가 있는 행동들이었다. 성필이 사건만 해도 먼저 성필이가 불쌍한 고양이를 괴롭히지만 않았다면 싸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빠 엄마는 찬우 말은 듣지도 않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벌로 한 달치 용돈을 반으로 줄인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할머니 댁에 억지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지내다 보면 너의 마음도 자연처럼 너그러워 질 거야."
아버지가 그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어찌나 진부했던지 찬우는 하마터면 '아빠 전 이제 육 개월만 있으면 중학생이라고요'라고 대꾸할 뻔했다.
찬우는 게임기를 두드리며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를 떠올려보았다. 삼 년 전 추석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았다.
할머니는 올해로 예순 아홉이었고 큰아버지와 함께 살고 계셨다. 찬우는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우선 할머니와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그것은 큰아버지 댁 식구들과도 마찬가지였다. 찬우는 친척들과의 그런 서먹서먹한 관계가 부담되었다. 또 할머니가 계신 곳이 그렇게 시골은 아니지만 도시에서는 많이 떨어진 작은 동네라 답답하고 불편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 이제 다 왔구나."
아버지의 말에 찬우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확인했다. 삼 년 전 보았던 거리의 모습들이 새록새록 나타났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따분한 풍경은 하나도 변한 것 없이 여전했다. 찬우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때 찬우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길가의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파란색 물체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찬우도 그것이 들개나 멧돼지 같은 산짐승인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 그런 낯익은 형태가 아니었다. 우선 몸 전체가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크기는 일 미터 정도였으며 두 발로 걷고 있었다.
"저게 뭐지?"
찬우가 그 물체를 자세히 관찰하려 할 때 차는 이미 그 물체를 훨씬 지나간 후였다. 찬우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엄마 아빠에게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내 말은 믿지 않을 게 뻔해."
찬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뭘 중얼거리고 있어. 다 왔으니 내려."
엄마가 안전벨트를 풀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물론이고 큰아버지 내 식구들도 찬우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러나 찬우는 그들이 반갑게 대하면 대할수록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할머니는 밭에서 직접 재배한 수박 두 개를 내왔고 온 가족이 둘러앉은 가운데 시원한 수박 파티가 이어졌다.
어른들이 수박을 먹으며 시끌벅적한 얘기꽃을 피울 무렵 찬우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어른들이 하는 얘기는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알아듣는다고 해도 재미가 없었다. 큰아버지 댁에는 찬우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없어 얘기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찬우를 더욱 심심하게 했다.
찬우는 하릴없이 마당을 몇 바퀴 돌다 대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갔다. 거리는 오후의 태양으로 가득했고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은 새파란 초록의 옷을 펄럭이고 있었다.
"너 누구니?"
빨간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양쪽으로 길게 땋은 여자애가 찬우에게 다가오면 물었다. 찬우는 놀이기구라고는 미끄럼틀과 시소가 전부인 마을 놀이터에서 막 혼자 시소를 타려던 참이었다.
"그러는 넌 누구니?"
찬우가 되물었다.
"내 이름은 한지애야. 송운 초등학교 육 학년 이 반이야. 넌?"
"난 양찬우. 강림 초등학교 육 학년 일 반."
"강림 초등학교? 거기가 어디야?"
지애는 황소처럼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저기- 멀리 있어."
찬우는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얀 지애가 마음에 들었지만 워낙 무더운 날씨 때문에 상세하게 말할 기운이 없었다.
지애는 가만히 다가와 맞은편 시소에 앉았다. 이제서야 시소가 제 균형을 찾으며 아래위로 움직였다.
"이 동네 사는 게 아니구나?"
"응. 여름 방학이라 할머니 댁에 놀러온 거야."
찬우와 지애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말을 주고받으며 시소를 탔다.
"그럼,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는 거니?"
"응-."
"좋겠다."
찬우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애의 그 '좋겠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여기 놀이터에는 왜 그네도 없니?"
찬우는 마치 그 잘못이 지애에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불만을 표했다.
"우리 학교에 갈까? 거기에는 그네가 있어."
지애의 말을 듣고 찬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애가 다니는 학교는 찬우가 다니는 학교보다 전체적으로 작았지만 그래도 그네, 정글짐, 늑목 등의 기구들은 갖추고 있었다. 찬우는 그네에 올라 신나게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뺨을 적시고 지나가는 바람이 할머니 댁에서 먹은 수박 조각보다 훨씬 달콤했다. 지애도 찬우의 옆 그네에 올라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한참동안 말없이 그네 타기에 몰두했다. 운동장에는 씨름장에서 씨름을 하는 남자아이들 세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너 덥지? 아이스크림 사올 테니 여기 있어."
잠시 후 찬우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지애에게 말했다. 지애는 알았다는 듯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찬우는 그네를 뛰어서인지 새로운 여자 친구를 알게 되어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신나는 여름 방학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학교 앞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들고 그네 앞으로 돌아왔을 때 지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 없는 빈 그네는 홀로 삐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지애야. 한지애, 어디 있니?"
한참만에 지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찬우야, 여기야."
돌아보니 지애는 그네에서 조금 떨어진 수돗가 뒤편에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해?"
찬우가 다가가며 묻자 지애는 손가락을 입게 가져갔다.
"쉿! 조용히! 어서 이리로 와서 숨어."
지애는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찬우가 가까이 가자 지애는 얼른 찬우의 팔을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야? 왜 이상하게 구는 거야?"
그러나 지애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조금 내밀어 뭔가를 살피기라도 하듯 두리번댔다. 찬우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수돗가 아래에는 눅눅한 흙과 새파란 이끼가 들어 차 있었다.
"저길 봐."
지애가 은밀하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찬우는 지애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목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씨름장이 있는 부근에 재빠르게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찬우가 아까 보았던 바로 그 푸른빛이 나는 물체였다.
"뭐지 저게?"
"저건 도깨비야."
지애는 마치 '저건 고양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태연스레 대답했다. 도깨비라니!
"이 마을의 골칫거리야. 아무 때고 나타나서 아이들을 괴롭히지."
바람이 먼지를 쓸며 불어왔다. 더위가 순식간에 한풀 꺾이는 듯했다.
"난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찬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애를 보았다. 지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푸른빛의 물체, 도깨비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찬우도 고개를 돌려 그 도깨비인가 뭔가 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것은 책이나 만화에서 본 도깨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온몸이 멍이라도 든 것처럼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뾰족한 뿔이 하나 달려 있었다. 검은 털실 뭉치처럼 지저분한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도깨비는 너덜너덜한 검은 셔츠에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엉덩이 부근에는 뱀처럼 기다란 꼬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찬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도깨비인지 아니면 지애가 친구들과 짜고 장난을 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지애를 보니 그 애 역시 잔뜩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찬우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버린 후 자세를 웅크렸다. 도깨비를 좀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도깨비가 손에 든 가시 방망이로 아이 한 명을 때리고 있었다. 씨름을 하고 있던 세 아이 중 가장 덩치가 작은아이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덩치가 작은아이는 도깨비가 휘두르는 방망이에 머리와 등을 맞으며 울고 있었다. 도깨비는 우는 아이의 엉덩이를 계속 발로 차며 낄낄거렸다.
"저건- 너무 심하잖아."
찬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찬우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작은아이가 도깨비에게 당하고 있는 데도 다른 덩치 큰 두 친구는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덩치 큰 두 친구는 도깨비의 행동에 억지로 웃음을 보이며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도깨비는 박수소리에 신이 나서 더욱 악랄하게 작은아이를 괴롭혔다.
"이런 나쁜 녀석들. 친구가 도깨비에게 맞고 있는데 구경만 해!"
찬우는 당장 씨름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안돼!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지애가 황급히 찬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저 작은아이가 너무 불쌍하잖아."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 도깨비가 너를 괴롭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지!"
"뭐야? 그래서 넌 저런 모습을 보고도 얼른 여기 숨은 거니?"
찬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애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지애의 비겁한 행동보다 악독한 도깨비의 행동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잔뜩 겁에 질려 울상이 되어 있는 지애에게 뭐라고 쏘아붙이기는 싫었다.
"좋아.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가서 저 도깨비를 말릴 테니."
"안돼. 큰일나! 찬우야, 어서 돌아와!"
등뒤에서 지애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찬우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찬우는 저 파란색 도깨비가 정말 도깨비일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짓궂은 녀석이 저런 분장을 하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야- 그만 두지 못해!"
찬우는 싸움을 말리는 선생님같이 불호령을 쳤다.
그 소리에 도깨비는 물론이고 구경하던 덩치 큰 두 아이도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야, 너! 그래 너!"
찬우는 도깨비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가 그렇게 도깨비처럼 분장하고 있으면 누가 겁먹을 줄 알아? 그 조그만 애를 그만 괴롭히고 나하고 한번 붙어보자!"
찬우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바닥에 넘어져 있는 작은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찬우는 아이의 몸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며 빨리 집으로 가라고 말했다. 아이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슬금슬금 도망쳤다. 도깨비는 정말로 도깨비처럼 나타난 찬우의 그런 행동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나머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덩치 큰 두 아이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찬우에게 말했다.
"야, 너 뭐야? 누군데 함부로 끼어 들고 그래?"
"너 임마, 이제 큰일났어. 쟨 진짜 도깨비라고. 분장한 게 아냐!"
그들은 찬우에게 말을 하면서도 도깨비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모두 수돗가 뒤에 숨은 지애 만큼이나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한 모습이 찬우로선 한심스러웠다.
"비겁한 놈들! 친구가 맞고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맞장구나 치고 있어? 저런 가짜 도깨비가 그렇게 무서워서 쩔쩔매는 거야?"
찬우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덩치 큰 두 아이는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난 몰라. 넌 이제 죽었어."
그들은 몸을 덜덜 떨며 물러나더니 이내 앞다투어 도망쳤다. 이제 씨름장에는 도깨비와 찬우만 남게 되었다. 하늘은 어느새 시커먼 구름으로 물들어 있었고 비를 예고하는 바람이 모래가루를 흩날렸다.
별안간 도깨비가 씨익 웃었다. 이빨이 호랑이처럼 길고 뾰족뾰족했다. 도깨비는 찬우에게 한 걸음 다가와 찬우를 빤치 쳐다보았다. 움푹 들어간 두 눈동자가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찬우는 어쩌면 이 괴물이 정말로 도깨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넌 누구냐?"
도깨비의 가늘고 붉은 입술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말했다.
"난, 양찬우다. 넌 뭐야?"
"양찬우?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 동네 아이가 아니군. 그래서 그렇게 겁이 없었던 거군."
"쳇- 난 너 같은 거 겁 안나. 도대체 넌 뭐야? 정말 도깨비야?"
찬우는 당당하게 소리쳤지만 사실 속으로는 떨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 파란색 피부와 괴상한 몰골은 분장한 솜씨가 아닌 것 같았기에.
"내가 정말 도깨비냐고? 킬킬킬-."
도깨비는 웃겨 죽겠다는 듯 펄쩍펄쩍 뛰면서 배꼽을 잡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찬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좋아- 못 믿겠나 본데 믿게 해주지!"
도깨비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방망이를 천천히 올렸다. 방망이에서 붉고 푸른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마법을 부리려는 것 같았다.
"네 녀석 코를 코끼리처럼 길게 늘어뜨려 주지. 그럼 넌 창피해서 돌아다닐 수가 없을 거야. 킬킬킬."
찬우는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내 눈앞의 파란 괴물이 정말 도깨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코가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코가 길어지면 어쩌지?
찬우는 코가 땅에 닿을 만큼 길어진 해괴망측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깨비는 날렵한 고양이 모양 저만치로 달려가 담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졌다. 찬우는 자신도 모르게 덜덜덜 떨고 있는 손을 들어 코가 길어졌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코는 그대로였다.
"찬우야, 괜찮니?"
돌아보니 저쪽에서 지애가 어떤 아저씨 한 명과 같이 오고 있었다.
"내가 일직 선생님을 모셔 왔어."
일직 선생님은 조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냐? 싸움이 일어난 곳이? 너냐? 싸움한 녀석이?"
일직 선생님은 찬우에게 쏘아붙이듯이 물었다.
"아니에요. 찬우는 싸움을 말리려 했어요."
지애가 옆에서 설명해주었다.
찬우는 도깨비가 사라진 담 쪽을 가리키며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지애가 황급히 찬우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어머, 다들 돌아갔나 봐요. 이젠 됐어요, 선생님."
"뭐야, 이 녀석들! 앞으로 그런 사소한 싸움질에는 날 부르지 마라!"
일직 선생님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돌아서서 교무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었다. 이어서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찬우야, 너 괜찮아?"
지애는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는 찬우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 그래- 괜찮아."
그렇게 말했지만 찬우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기운조차 없었다. 찬우는 지애의 부축을 받으며 학교를 나오는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했다. 골목 뒤에서, 나무 뒤에서, 지붕 위에서 그 파란색 도깨비가 풀쩍 나타날 것만 같았기에.
삼거리 앞에서 헤어지려는 지애의 팔목을 잡으며 찬우가 물었다.
"그 도깨비는 대체 뭐야?"
"말했잖아. 도깨비라고."
"도깨비는- 책이나 만화에서나 있는 거잖아. 어떻게 진짜로 그런 게 있을 수가 있어?"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냥, 이 마을에 언제부턴가 있었어."
지애는 정말로 도깨비가 어떻게 해서 처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지애는 하늘을 한 번 보고는 찬우를 보았다.
"이제부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도깨비가 너에게 복수를 할거야."
"복수?"
"네가 덤빈 것에 대한 복수. 저번에도 한 아이가 겁도 없이 덤볐다가 혼이 난 후 이사를 갔어."
지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혼을 냈냐 하면, 그 아이의 손바닥과 발바닥을 바꾸어 놓았어."
지애의 그 마지막 말이 찬우의 머리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할머니 댁으로 돌아온 찬우는 저녁도 거르고 일찌감치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 이불을 덮어썼지만 가슴에 얼음덩이 하나를 안고 있는 것처럼 몸이 덜덜 떨렸다. 할머니는 찬우의 이마를 만져보며 열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폈다.
"저 녀석, 비 맞고 돌아다녀서 감기 걸린 거예요."
엄마는 걱정하는 할머니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이 녀석 할머니 댁에 왔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비 맞고 어딜 쏘아 다닌 거야?"
아버지는 찬우의 속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사실 찬우에게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도깨비가 언제 또 자신을 찾아오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찬우는 엄마 아빠와 한방에서 잠을 잤지만 무서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 아빠의 이부자리는 안쪽이었고 자신의 이부자리는 문 앞이었다. 금방이라도 문이 확 열리고 파란 도깨비 손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벽시계가 밤 열 두 시를 알렸다.
창문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찬우는 놀라서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마당에서 자박자박 하는 발자국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찬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에 귀를 가져갔다. 틀림없이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누굴까! 설마……!
찬우는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처럼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찬- 우-, 양- 찬- 우-."
분명히 찬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찬우는 놀라서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혹시 엄마 아빠가 이 소리를 듣고 일어나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엄마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빠는 코까지 골고 있었다.
"양- 찬- 우- 어서 나와- 킬킬킬-."
의심의 여지가 없는 도깨비의 목소리였다.
찬우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문을 조금만 열어 마당을 살폈다. 도깨비는 바로 문 앞에 있었다. 그것도 허공에 거꾸로 둥둥 떠 있었다.
그 모습에 찬우가 비명을 지르려 하자 도깨비가 하얀 털이 숭숭 난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가족들 모두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으면 조용히 너만 나와!"
찬우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가려 비명이 나오지 않게 했다. 엄마 아빠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마 아빠까지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깨비에게 대항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도 스스로 져야 옳을 것 같았다. 찬우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도깨비는 순순히 따라나오는 찬우의 모습에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마당은 추웠다. 비는 그쳐 있었으나 바람이 엄청 강했다. 도깨비는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귀신같은 모습으로 찬우 앞에 섰다.
"자- 아까는 잘도 까불었겠다. 어린 녀석이 겁도 없이!"
도깨비는 가시 방망이를 찬우의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제부터 네놈을 실컷 두들겨 팬 후 얼굴에서 눈, 코, 귀, 입, 머리카락을 다 지워버릴 거야. 넌 달걀같이 매끈매끈한 얼굴이 되는 거야. 가족들은 아마 네가 괴물인줄 알고 내쫓아버리겠지. 킬킬킬."
도깨비는 즐거워하며 웃었다.
그러나 찬우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웠다.
도깨비에게 대들었다는 것에 대한 후회가 아련하게 밀려왔다. 그러나 그때 작은아이가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는 다는 것은 너무나 비겁한 일이었다. 찬우는 생각했다. 그때 자신의 행동은 분명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그 정의로운 행동의 결과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이 될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자- 각오는 되었겠지."
도깨비는 그렇게 소리치며 방망이를 휘둘렀다.
찬우는 도깨비의 방망이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 바람에 도깨비는 중심을 잃고 두 어 바퀴 돌며 바닥에 넘어졌다.
"요것 봐라- 네가 감히 피해?"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찬우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그렇게 소리쳤다.
"네가 도깨비든 뭐든- 아무튼 작은아이를 괴롭히는 건 나쁜 짓이잖아. 난 단지 그걸 말렸을 뿐이야! 잘못은 네가 해놓고 왜 내가 당해야 하지?"
"이 녀석 잘도 주절대는 군. 그 입부터 바느질 해주마!"
도깨비는 폴짝 뛰어오르며 찬우를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찬우는 이번에도 허리를 숙이며 그 공격을 피했다. 그 바람에 도깨비는 다시 균형을 잃고 저쪽 담 아래로 떨어졌다. 그곳은 선인장 화분이 가득한 곳이었다. 도깨비는 선인장 가시에 찔려 팔짝팔짝 뛰며 아파했다.
그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보니 찬우는 도깨비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가시는 것 같았다. 어쩌면 충분히 상대해 볼만할 것도 같았다. 찬우는 태권도나 합기도 같은 것을 배운 적은 없으나 어릴 적부터 운동 감각이 뛰어나서 이제껏 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내친 김에 찬우는 달려가서 팔짝팔짝 뛰는 도깨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도깨비는 담에 머리를 부딪고 넘어졌다. 자신감이 생긴 찬우는 다시 달려가서 도깨비를 멀리 날려버리려 했다.
그러나 도깨비 방망이에서 파란 불꽃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찬우의 몸은 강한 힘에 떠밀려 순식간에 뒤로 나자빠졌다. 찬우는 나무 둥치에 어깨를 부딪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요놈- 각오해라- 아주 죽여버릴 테다!"
도깨비의 노란 눈이 더욱 노랗게 빛이 났다. 매우 화가 난 모습이었다. 도깨비는 방망이를 힘있게 들어올려 찬우에게 빠르게 달려왔다. 찬우는 허겁지겁 손을 흔들며 나뭇가지를 꺾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도깨비의 기운에 눌려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진 상태였다. 이젠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눈을 감는 순간 찬우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다.
눈을 떠보니 도깨비가 무언가에 크게 놀란 얼굴을 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담 위로 풀쩍 뛰었다.
"이 녀석 오늘은 그냥 가지만 조만간 다시 오겠다! 각오해 둬라!"
도깨비는 그렇게 말하며 담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찬우는 도깨비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겁에 질려 도망친 것일까. 찬바람이 마당을 쓸고 찬우의 얼굴을 두드렸다. 찬우는 문득 자신의 손에 쥐어진 나뭇가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이 이 나뭇가지 때문인가!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찬우는 어젯밤의 나뭇가지를 할머니에게 가져갔다.
"할머니 이 나뭇가지가 무슨 나뭇가지예요?"
할머니는 나뭇가지에 달린 파란 잎사귀들을 보며 말했다.
"이건 복숭아나무 가지란다."
"복숭아나무요?"
할머니는 눈빛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보이는 손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찬우는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혹시 이 복숭아나무를 도깨비가 싫어하나요?"
"도깨비?"
"예- 도깨비요."
"복숭아나무는 모든 귀신들이 다 싫어한단다."
찬우는 그때까지 깜깜했던 머릿속에 확 하고 전등불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찬우는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거리로 나왔다.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고 바람도 어젯밤에 비해 많이 잠잠했다. 찬우는 혹시나 싶어 놀이터에 가 보았으나 지애는 없었다. 학교에도 가 보았으나 그곳에도 지애는 보이지 않았다. 도깨비도 보이지 않았다. 찬우는 골목골목을 샅샅이 뛰어다녔으나 지애도 도깨비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마을을 거의 다 뒤지다시피 한 찬우는 마을 어귀의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아 쉬었다. 태양은 엷은 구름 뒤에 숨어 있었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등뒤에선 매미가 맴맴 울었다.
오후가 되자 찬우는 바위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하천이 있는 곳에서 찬우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 중 한 명은 어제의 덩치 큰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찬우는 그냥 가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애들아. 너희들 혹시 한지애라고 아니?"
아이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네 명은 한지애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고 한 명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덩치 큰 그 아이였다. 찬우는 그 아이에게서 한지애의 집을 알아냈다.
"그런데 너, 다른 동네 녀석이면서 우리 동네 일에 함부로 간섭하고 그러지 마!"
돌아서서 가려는 찬우에게 덩치 큰 아이가 말했다.
"그러다 다치는 수가 있어."
"누구에게? 그 도깨비에게?"
찬우가 돌아서서 덩치에게 물었다. 덩치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너 내말 똑똑히 들어. 그렇게 함부로 말하고 다니다간 큰일나는 수가 있어!"
"너야말로 내말 똑똑히 들어. 너 방관이 뭔 줄 알아?"
찬우는 학교 선생님에게 들은 적이 있는 그 단어를 제법 폼 나게 설명했다.
"방관이란 어떤 일에 대해 상관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걸 말하는 거야. 예를 들면 어제, 네 행동 같은 거지.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는 데도 도와줄 생각은 않고 그저 구경만 하는 거."
찬우의 어른스러운 말투에 덩치는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몰라 쩔쩔 매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구경하면 뭐 나 혼자 구경했나! 다들 그러는 데 뭐 어때!"
"바로 그거야. 너 왜 처음부터 그런 도깨비가 이 마을에 생겨난 줄 아니? 너희들 같은 방관자들 때문이야. 처음부터 누군가가 말렸더라면 도깨비 같은 것은 안 생겼을 지도 몰라!"
"쳇- 멋대로 지어내지마! 어쨌거나 이제 넌 그 도깨비 손에 죽었어 임마!"
덩치는 입을 삐죽이며 다시 물장난을 하러 저만치 가 버렸다. 성질 같아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찬우는 참기로 했다.
지애의 집은 붉은 대문의 이층 양옥이었다. 할머니 댁 보다 더 근사한 집이었다.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었으나 지애에게 꼭 해줄 말이 있었기 때문에 찬우는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을 통해 지애의 친구라고 말한 후, 찬우는 지애의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찬우가 지애의 엄마에게 어색한 인사를 하는 동안 지애가 이층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너 왜 오늘은 놀이터에 안 나왔어?"
지애의 방으로 간 찬우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지애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만 둘러보았다. 찬우도 지애를 따라 방안을 둘러보았다. 지애의 방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어 깔끔했다.
"그 도깨비가 나타날까봐 집에만 있는 거지?"
찬우가 다시 물었다.
지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찬우는 지애가 아직 그 도깨비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애야,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그 도깨비는 어른들을 무서워하지? 그런데 어째서 도깨비의 사실을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는 거지?"
찬우의 그 물음에 지애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른들이 그 말을 믿어 줄 것 같니? 우리도 처음에는 어른들에게 도깨비 얘기를 했어. 하지만 어른들 누구도 도깨비 얘기를 믿어주지 않았어. 더구나 도깨비는 어른들이 나타나면 숨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어."
지애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찬우는 자신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 엄마 아빠를 떠올리며 어른들이 도깨비 얘기를 믿어줄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우리가 어른들에게 이른 사실을 알게 되면 도깨비는 더욱 화가 나서 날뛰어. 그래서 우린 어쩔 수 없는 거야. 도깨비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행동하는 수밖에. 도깨비는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약한 아이들을 괴롭혀. 그게 싫어도 어쩔 수가 없어."
"그래서 만날 도망 다니고 피하고, 친구가 도깨비한테 당하고 있는데도 구경만 하는 거야?"
"방법이 없잖아. 우리 같은 어린애들이 도깨비를 무슨 수로 당해? 그저 내가 도깨비한테 걸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틀렸어! 방법이 꼭 없는 것은 아냐!"
찬우는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던 복숭아나무 가지를 꺼냈다.
"도깨비는 이 복숭아나무 가지를 싫어해. 이것만 있으면 녀석을 혼내줄 수 있어."
"정말이야?"
지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복숭아나무 가지를 만지작거렸다.
"정말이야. 녀석은 어제 나에게 호되게 당했어.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 그 나뭇가지를 가지고 다녀. 그럼 놈이 못된 짓을 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어."
"그치만-."
지애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찬우가 지애의 말을 잘라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그 도깨비와 싸우러 갈 거야. 혹시 도깨비의 아지트가 어디인지 아니?"
"아지트?"
"응- 아지트만 말해 줘. 나 혼자 가서 녀석을 혼내줄 테니."
지애의 집에서 나온 찬우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준비물을 챙겨서 뒷산을 향했다. 찬우는 산길을 걸으며 아침에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도깨비가 싫어하는 것들을 알려 달라고? 음- 무엇 무엇이 있을까. 우선 도깨비는 방울 소리를 싫어한단다. 버드나무 회초리도 무서워하고 부싯돌에서 번쩍이는 불꽃도 싫어하고 팥죽도 싫어하고 바늘도 무서워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거울을 제일 무서워한단다. 거울을 보면 도깨비는 거울 속에 영영 갇혀버리거든.
지애가 일러준 길을 따라 삼십 분을 걸으니 과연 소나무와 전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이 보였다.
"저곳이다!"
찬우는 가방을 발 밑에 내려놓고 산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이 도깨비 녀석아! 어서 나와! 어제는 잘도 나를 찾아 왔겠다! 오늘은 내 차례다! 어서 나와서 혼날 준비를 해라!"
그러나 판잣집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찬우는 가방을 한 손에 들고 판잣집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안은 밤중처럼 깜깜했고 거미줄 투성이었다. 찬우는 머리 위로 엉겨붙는 거미줄을 툭툭 털며 방안을 살폈다. 조금씩 어둠에 눈이 익었으나 방안에는 거미줄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없었다. 이런 곳이라면 정말로, 딱 도깨비가 살만한 집 같았다.
"이 녀석 어딜 간 거지? 마을로 내려가서 또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건가?"
찬우는 혼잣말을 하며 판잣집에서 나왔다. 하늘은 어느새 맑고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고 태양은 뜨거웠다. 찬우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손부채를 붙였다.
"제길- 이 녀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타나니 안 보이는 군."
바로 그때였다.
찬우가 등을 기대고 있는 소나무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찬우가 놀라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소나무에서 기다란 가지가 내려와 찬우의 가슴과 어깨를 짓눌렀다. 덕분에 찬우는 꼼짝없이 나무에게 붙잡힌 꼴이 되었다.
"킬킬킬- 속았지-!"
등뒤에서 찬우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도깨비의 목소리였다.
"요놈- 어제는 잘도 나를 겁줬겠다! 어디 혼 좀 나봐라!"
소나무로 변신한 도깨비는 계속해서 찬우의 가슴과 어깨를 짓눌렀다. 찬우는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깨비를 상대할 무기가 든 가방은 찬우의 손과 발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찬우는 정신이 얼얼해지고 무릎이 덜덜 떨렸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우는 억지로 손을 움직이며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나뭇가지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나뭇가지는 안전벨트처럼 착 들러붙어서 떼어지지 않았다.
아- 이렇게 도깨비에게 당하는 구나-!
찬우는 눈앞이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그 순간 찬우의 가슴과 어깨를 조르고 있던 나뭇가지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찬우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끼며 소나무에게서 달아날 수 있었다. 찬우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돌아보니 그곳에는 복숭아나무 가지를 든 지애가 있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지애가 찬우를 구해준 것이었다.
"이 나쁜 도깨비! 죽어라!"
지애는 계속해서 손에 든 복숭아나무 가지를 소나무로 변해 있는 도깨비를 향해 휘둘렀다. 그때마다 소나무는 신음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마침내 도깨비는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도깨비의 검은 옷은 더욱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 꼬마 녀석들, 용서할 수 없다. 둘 다 메밀묵으로 만들어서 먹어버릴 테다."
도깨비는 방망이를 들어올려 지애에게로 향했다. 방망이 끝에서 파랗고 붉은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법을 부리려는 순간이었다.
"안돼!"
찬우는 소리를 지르며 가방에서 부싯돌과 방울을 꺼냈다. 찬우는 입으로 방울을 흔들며 양손으로는 부싯돌에 불꽃이 일게 했다.
"그아악!"
도깨비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이용해 찬우는 바늘과 팥죽이 든 비닐봉지를 꺼냈다.
"지애야 어서 이 바늘을 저 녀석에게 던져. 난 이 팥죽을 뿌릴 테니."
찬우는 지애에게 바늘을 넘겨주며 자신은 팥죽을 도깨비에게 뿌렸다.
"이놈 팥죽 맛 좀 봐라!"
"바늘 맛도 봐라!"
지애가 바늘을 휙휙 던지며 말했다.
"그아악! 그만!"
이제 도깨비는 거의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찬우는 가방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꺼내 힘을 잃은 도깨비를 공격했다. 지켜보고 있던 지애도 복숭아나무 가지로 도깨비를 공격했다.
"이 녀석 그 동안 잘도 아이들을 괴롭혔겠다!"
"에잇- 맛 좀 봐라!"
찬우와 지애는 그 동안 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쉬지 않고 도깨비를 공격했다.
이제 도깨비는 방망이도 놓치고 흐물흐물 바닥에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됐어! 지애야 이제 그만해!"
찬우는 가방에서 마지막으로 거울을 꺼냈다.
"거울은 뭐니?"
"이걸로 도깨비를 가둘 수 있대."
"정말?"
찬우는 쓰러져 있는 도깨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거울에 담았다. 그러자 도깨비는 하얗고 노란빛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그 가루들은 허공을 몇 번 맴돌더니 이내 거울 속으로 몽땅 빨려 들어갔다.
"됐어, 끝났어! 우리가 도깨비를 물리친 거야."
찬우는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지애도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해는 서산으로 지고 있었고 하늘 한 쪽에는 오색의 무지개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와- 무지개다!"
지애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정말-!"
찬우도 신기한 듯 하늘을 수놓은 무지개를 쳐다보았다. 지애가 다가와 찬우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보며 싱겁게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 산이 떠나가도록 이어졌다.
도깨비의 혼을 담은 거울을 땅에 묻고 찬우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은 시끌벅적했다. 집안에서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침에 해둔 팥죽이 어디로 사라진 거죠? 당신이 다 먹었어요?"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나저나 거실에 있던 거울은 누가 가져간 거지?"
"여보 바늘도 없어졌어요."
"아니- 내 핸드폰의 방울 액세서리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아무래도 이런 문제를 일으킬 애는-."
"찬우 그 녀석이야! 이런 말썽꾸러기, 대체 하루 종일 어딜 쏘다니는 거야. 들어오기만 해봐라!"
찬우는 마당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어른 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도깨비는 사라졌지만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일이 찬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는 아직 무지개가 엷은 빛을 띠고 있었다. 찬우는 혼날 때 혼나더라도 지금은 무지개를 좀더 오랫동안 보고싶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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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가 등장하는 아주 고풍스러운, 조금은 동화틱한, 공포소설입니다~!
아무쪼록 한 잔의 냉커피처럼 시원한 글이 되어주었기를 바랍니다~
현재 쓰고 있는 또 다른 공포소설은(중편에 가까운 글이 될 듯) 완성하는 즉시 올리겠습니다~!
모두들 붉은 벽돌 무당집과 함께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첫댓글 요즘 벽무집에 새로운 글들이 많이 올라와서.. 너무 행복해요^^ 제이슨 친구님의 글도 보고. 오늘은 좋은 하루시작하고 갑니다.
오늘 넘 행복할것같아요..제이슨님의 글로 시작을 하다니..ㅋㅋ
우후~ 제이슨님 짱^^b
아..정말 읽으면서 예쁜 동화한편 보는것같았어요-헤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_^
기분이 우울했었는데..제이슨친구님 글보고..기분이 업~!업~!업~!됐습니다..감사해요..^^
꺅.. ㅋㅋㅋ 귀엽다 도깨비라니>ㅁ<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우와~~~도깨비....너무 정겨버욧~!!!^^// 시골가그푸다 ㅡ,,ㅡ;; 암툰 감사함돠~!!
제이슨님 글이 있다니....심봐따~~~임니다~~~
잘봤어요.^^ 진실로 감사합니다~
푸아앗 /ㅁ/ 너무 재밋어요오 /ㅁ/
잘보고 가요 ㅎㅎ 대단하세요, 여러 장르를 가볍게 소화하실 수 있다니~
와 제이슨님 정말 존경 ㅠㅠ
이거 동화로 내도 되겠어요~어릴때 읽었던 동화보다 더 재밌는데요??ㅎㅎㅎ
동심이 있는 재미있는 글이네요.. 어린시절 생각이 나서 훈훈합니다..
아...넘 좋아요...정말 옛날 강철로봇같은 느낌이네요...먼가 메세지도 전달하면서...
오랜만에 와서 정말 재미있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이슨님 글 계속 부탁드려요~~^^
좋네요..
도깨비..귀엽다>//<*** 애들도 귀엽고..>//<** 짱 귀엽다...!!(<-핀트가 빗나갔다)
풉~ 너무 잼나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