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언제부턴가 책상 모서리에 두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목민심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한장 한장 넘기면서 `허! 참' 하는 이상한 비명이 자꾸 내 입에서 새어 나오니 나도 이상할 지경이다. 다산! 그는 진정한 목민관이었다. `민(民)'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신뢰를 바탕으로 `민'과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던, 요즘으로 말하자면 진보적 사상을 가진 행정가요, 교육자이며 해박한 사학자였다.다산이 말한 18세기의 조선은 이랬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을 모른다. 이 때문에 백성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그는 말세적 부패와 횡포, 과중한 수취로 생존이 위기에 내몰린 백성의 질고를 치유하기 위한 뼈저린 고뇌의 구민(救民) 지침서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민심서'가 아니겠는가. `부임하는 길에는 오직 엄하고 온화하며 과묵하기를 마치 말 못 하는 사람처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랫사람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미리 아무 다짐도 하지 않고 일찍 일어나 밥을 재촉하고 곧장 말에 오르니, 하인이 밥상을 받아 놓고도 먹지 못하고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걱정했다. 부임 후 업무를 시작함에는 `새벽에 출근하여 정사에 임함은 물론 사족(士族)과 백성에게 영을 내려 고질적인 폐단이 무엇인지 묻고 의견을 구할 것'을 말하며 `묵은 폐단이나 새로운 병폐로 백성의 고통이 되는 것이 있으면 각 면(面)에서 일 잘하는 사람 5, 6명이 한자리에 모여 조목을 들어 의논하고 문서로 갖추어 가져오라'고 하면서 아전이나 군교, 토호들이 들으면 후환이 두려워 말 못 하게 될 것을 걱정하며 `엷은 종이에 풀칠하여 봉하고 관아의 뜰에 와서 본관에게 직접 바치라'고 하였다. 그는 또 `공사(公事)에 여가가 있거든 반드시 정신을 모으고 생각을 안정시켜 백성을 편안히 할 방책을 헤아려 내어 지성으로 잘되기를 강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을 처리할 때 언제나 선례만을 좇지 말고 반드시 백성을 편안히 하고 이롭게 하기 위해서 법도의 범위 내에서 변통을 도모해야 한다. 만약 그 법도가 나라의 기본 법전이 아니면 현저히 불합리한 것은 고쳐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일깨웠다. `부역을 공평하게 하는 것은 수령이 해야 할 일곱 가지 일(守令七事) 가운데 긴요한 일이다. 무릇 공평하지 못한 부역은 징수해서는 안 되니 저울 한 눈금만큼이라도 공평하지 않으면 정치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교육을 진흥함에 있어서는 `옛날의 학교는 예(禮)와 음악을 익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도 무너지고 음악도 무너져서 학교의 교육이 독서에 그칠 뿐'이라고 걱정하기도 했다.그런데 다산이 고민했던 18세기의 조선과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고민은 무엇이 다른가. 최근 어느 모임에서 귀한 말을 들었다. “한 인간이 국가를 위해 태어나는가, 아니면 국가가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분명히 하고서야 교육이 성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는. “한 학생이 학교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학교가 한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도 아이들을 위해 있고 학교도 학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교육에서 학생 스스로 진정한 주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와야 할 터인데….득당이취(得當移取). 다산은 `좋은 것은 가리지 말고 취해 와서 배우라'고 했는데, 다산에게서 취할 것은 무엇인지 고민스러운 가을이다. |